바그람 전투 | ||
시기 | ||
1809년 7월 5일 ~ 7월 6일 | ||
장소 | ||
오스트리아 제국 빈 북동쪽 근교 도이치-바그람 | ||
교전국 | ||
오스트리아 제국 | 프랑스 제국 작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이탈리아 왕국 | |
지휘관 | 카를 루트비히 | 나폴레옹 1세 |
병력 | 130,000~170,000명 대포 약 400문 | 150,000~170,000명 대포 약 600문 |
피해 | 사상자 30,000~41,250명 | 사상자 25,000~40,000명 |
결과 | ||
프랑스군의 승리 | ||
영향 | ||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종결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와해 |
[clearfix]
1. 개요
독일어: Schlacht bei Wagram
영어: battle of wagram
1809년 7월 5~6일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가 이끄는 프랑스 제국군이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빈 근교의 바그람에서 격파한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는 1809년 10월 14일에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한다.
2. 배경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완패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굴복했고 황제 프란츠 2세는 라인 동맹의 결성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무의미해지자 1806년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였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복수하기 위해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지휘하에 적극적인 군사 개편을 수립, 프랑스군의 군제를 도입하고 기존의 용병에 더해 독일계 주민들로 구성된 국방군(Landwehr)을 창설했다. 하지만 국방력 강화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결과, 1809년 무렵 오스트리아 재정은 이대로 군대를 유지한다면 파탄 지경에 이를 위기에 몰렸다. 이에 오스트리아 내부에서 애써 키운 군대를 해체할 바에는 프랑스와 한판 붙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카를 대공은 아직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여론의 압박과 군대 감축 위협에 짓눌렸다. 때마침 프랑스군 20만 대군이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투입된 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스트리아는 복수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20만 명이 프랑스의 동맹국인 바이에른 공국을 침공했다. 이와 동시에,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끄는 병력은 바르샤바 공국으로, 요한 대공은 이탈리아로 진격했다.하지만 프랑스는 사전에 첩자들의 보고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군사 행동을 간파하고 있었다. 총참모장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오스트리아군을 막기 위해 라인 동맹에 주둔하고 있던 루이니콜라 다부,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앙드레 마세나 원수 지휘하의 군대를 총동원했다. 나폴레옹도 즉시 파리에서 출발해 4월 18일에 잉골슈타트에 도착했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프로이센과 연합하려 했지만 러시아는 프리틀란트 전투 패전 후 나폴레옹과 틸지트 조약을 체결한 지 얼마 안된 데다 스웨덴으로부터 핀란드를 빼앗고 오스만 제국과 맞붙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참상이 아직 가시지 않아 나폴레옹과 싸울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전쟁에 끼어들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수 있는 강대국은 오직 영국 뿐이었지만, 그나마도 자금만 지원했을 뿐 병력 지원은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프랑스와 맞서 싸워야 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특유의 기동전을 발휘해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각개격파했다. 하지만 카를 대공 역시 프랑스군의 공세를 상대로 분전하며 전력을 최대한 유지하며 안전한 후방으로 후퇴했다. 5월 13일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입성했지만, 카를 대공은 도나우강 건너편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결전을 준비했다. 나폴레옹은 도나우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기 위해 도나우강의 중간 지점인 로바우 섬을 점령하고 그곳을 기반으로 가교를 설치해 병력을 이동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2년 전 프리틀란트 전투 때 러시아의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 장군이 저질렀던 실책을 되풀이하는 짓이었다. 급하게 지은 가교는 너무 허술하여 만든 지 며칠 만에 거센 물살로 인해 허물어지고 말았고, 프랑스군은 졸지에 본진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맹공을 받았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아스페른 마을과 에슬링 근교에서 격렬한 혈전을 벌여 상대의 공세를 가까스로 제지하고 철수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최고의 전우 장 란 원수가 전사하고 말았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수는 2만 3천명으로 비슷했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의심할 여지 없이 프랑스군의 패배였다. 나폴레옹은 이를 감추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이 소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반프랑스 연합국들은 나폴레옹의 몰락이 임박했는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전투가 끝난 후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을 거대한 요새로 만들면서 보급품과 증원대를 들여오기 위한 견고한 다리들을 건설하는 한편, 군대를 강화할 보충 병력을 소집했다.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원수가 작센군을 이끌고 도착했고, 뒤이어 오귀스트 마르몽 원수가 달마티아 군단을 포함한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을 이끌고 나폴레옹과 합류하고자 진군했다. 나폴레옹은 다음 전투에서 병력을 총집결시킨 후 재공세를 개시해 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오스트리아군을 괴멸시키기로 결심했다.
한편, 카를 대공은 난감한 처지에 직면했다. 그의 당초 계획은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패를 안겨서 오스트리아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전투에서 비록 프랑스군의 거센 저항에 동요하던 병사들을 친히 독려해 승리로 이끌긴 했지만 적을 괴멸시키는 데 실패하고 적과 엇비슷한 사상자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오스트리아군을 괴멸시키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카를 대공은 영국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독일 지역에서 대규모의 습격을 가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영국은 안트베르펜 공략 작전을 구상하고 이를 집행하기 위해 막대한 물자와 함대를 항구에 집결시켜 놓고도 7월에 접어들 때까지 별다른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그 사이, 로바우 섬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군 숫자는 19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도나우강 북쪽 기슭의 교두보를 되찾았다. 이리하여 14만 가량의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한 나폴레옹은 7월 5일에 공세를 개시한다.
3. 전력
3.1. 프랑스군
1. 프랑스군 본대- 제2군단: 니콜라 우디노 장군[1] 지휘
- 제3군단: 루이니콜라 다부 원수 지휘
- 제4군단: 앙드레 마세나 원수 지휘
- 제7군단: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원수 지휘
- 제9군단[2]: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원수 지휘
- 제11군단: 오귀스트 마르몽 장군 지휘
- 예비 기병군단: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원수 지휘
- 제국 근위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 직할
2. 이탈리아 왕국군(외젠 드보아르네 휘하 병력)
- 이탈리아 황실 근위대 분견대: 아킬레 폰타넬리(Achille Fontanelli) 장군 지휘
- 제5군단: 자크 마크도날 장군 지휘
- 제6군단: 파울 그르니에(Paul Grenier) 장군 지휘
3.2. 오스트리아군
- 전위대: 아르망 드노르드만 장군 지휘
- 제1군단: 벨가르드 백작 하인리히 원수 지휘
- 제2군단: 호헨촐레른헤힝겐 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사버 장군 지휘
- 제3군단: 요한 콜브라트 장군 지휘
- 제4군단: 로젠베르크 대공 프란츠 장군 지휘
- 제6군단: 요한 폰 클레노 장군 지휘
- 예비 1군단: 리히텐슈타인 대공 요한 1세 지휘
- 로이스플라우엔 공 하인리히 15세가 지휘하는 제5군단은 보헤미아 방면의 프랑스군을 견제하기 위해 남겨졌기 때문에 바그람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4. 경과
4.1. 7월 5일
나폴레옹은 로바우 섬 동쪽에 다리를 놓은 후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에워싼 후 포위 섬멸전을 벌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먼저 일부 병력을 우회 기동시켜 도나우강 기슭의 오스트리아군을 축출한 뒤 나머지 병력으로 교두보에 진군시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붙이게 했다. 그는 계획의 실행 시점을 1809년 7월 5일로 정했다. 이윽고 7월 5일 아침, 프랑스군은 격렬한 뇌우를 틈타 다부와 마세나, 우디노의 군단을 건너보낼 가교들을 건설하고 오스트리아군의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고 도하를 이루었다. 그런데 총참모장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각 군단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과정에서 2개 군단에게 동일한 도하 지점을 배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발생한 교통 혼잡을 푸는 데 수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래도 일단 3개 군단 모두가 도하를 완료했고, 동서 축으로 전개한 프랑스군은 전면에서 적을 공격했다. 나폴레옹은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로바우 섬에 미리 마련된 포병 진지로부터 맹포격을 퍼부었다.나폴레옹의 작전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앞서 오스트리아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아스페른-에슬링 일대에 남아있는 적은 경계를 맡은 노르트만의 전위대가 전부였고 오스트리아군 본대는 그로부터 8km 떨어진 바그람 시가지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노르트만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전위대는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적과 맞서 싸우다가 패퇴했다. 이후 베르나도트의 작센 군단이 앞선 세 군단에 합류해 오스트리아군 주력이 진을 친 마르히펠트로 진격했고, 더 많은 프랑스 및 연합국 군대가 로바우 섬의 가교들을 건너 평원으로 밀려들었다. 카를 대공은 동생 요한 대공에게 프레스부르크 인근의 진영을 정리하고 서둘러 전장으로 달려오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요한 대공은 당시 도나우강을 따라 병력을 분산시켜둬서 수습이 오래 걸린 데다 형의 요청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야 병력을 이끌고 행군에 나섰다. 카를 대공은 동생이 허송세월하는 동안 프랑스군이 진격해오는 광경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프랑스군 선봉 4개 군단이 마르히펠트에 부채꼴로 늘어설 때, 오스트리아군 우익의 중장기병대가 출격해 작센 기병대의 전열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작센 기병대는 이를 거뜬히 격퇴했고, 프랑스군은 배치를 완료했다. 7월 5일 저녁, 나폴레옹은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에 고무되었지만 오스트리아군이 야음을 틈타 달아날 것을 염려해 도박을 걸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 전선의 군단들에게 야간 공세를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군단 간의 호흡을 맞추는 데 이렇다할 조치를 내리지 않아 군단들이 길을 잃고 헤메게 만드는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다. 나폴레옹이 왜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스트리아군을 어떻게든 섬멸해야 한다는 조급감과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오만이 그의 군사적 시야를 흐리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오후 7시경, 베르나도트의 군단에서 파견된 뒤파 휘하 소규모 사단의 지원하에 우디노의 군단이 적 전선의 중앙을 공격했다. 돌격의 선봉은 육군 최정예 부대인 그랑장 사단이 맡아 작은 하천인 루스바흐강을 건너 내처 시가지의 북쪽으로 돌입했다. 이에 내처 시가지 북쪽에 마련되어 있던 참호에서 하르데크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이 반격했고, 양군은 시가지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한편, 프랑스군 제10 경보병 연대가 습지의 개울을 건너 배후의 경사면을 기어올랐다. 이에 카를 대공은 1개 기병연대의 투입을 명령했고, 곧바로 빈센트 경기병대가 돌격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군 최정예 기병연대와 프랑스군 최정예 보병연대가 격돌했는데, 결과는 제10경보병 연대가 적의 돌격을 2번이나 저지함으로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10경보병연대의 진격은 중단되었고, 그들은 우디노 군단에서 증원될 2개 사단이 자신들의 측면에 당도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이 2개 사단은 적의 무자비한 포격에 기가 질리는 바람에 후퇴해버렸다.
우디노가 보낸 2개 사단이 맥없이 물러나버리자, 그랑장 사단은 고립 상태에 빠졌다. 바로 이때, 카를 대공은 두 번씩이나 후퇴를 거듭한 빈센트 경기병대를 향해 호되게 질책했다.
"제군은 더 이상 라투르의 용기병이 아니다!"
이에 빈센트 경기병대는 투지를 되새기며 군단장 호헨촐레른의 지휘하에 재차 돌격했다. 결국 제10경보병연대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했지만 그 와중에도 사격을 멈추지 않아 과연 정예병다운 면모를 보였다. 제10경보병연대가 퇴각하자, 측면이 노출된 제57전열 연대 역시 후퇴의 물결에 휩쓸렸다. 이로써 오스트리아군의 중앙을 노린 프랑스군의 돌격은 이렇다 할 전과 없이 막을 내렸다.
한편, 좌측 전선에서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일부 부대가 루스바흐 고지를 향해 돌격했다. 마크도날 장군 휘하의 3개 사단은 개울을 건너 공격했다가 오스트리아군 예비대의 반격에 밀려 패주했다. 마크도날은 일단 군대를 언덕 아래로 재집결한 뒤 다시 공격을 하려다가 제10 경보병연대를 격퇴한 뒤 전열을 추스린 빈센트 경기병대에게 우측 측면을 공격당했다. 이 공격으로 마크도날이 이끄는 군대의 우익이 붕괴되었다. 또한 뒤파 장군이 이끄는 좌익 사단 마저 습지대에 발목이 잡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공세를 가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화력에 밀려 패퇴했다. 그런데 후방에 있던 예비대가 뒤파 장군의 사단에 속한 작센군이 화얀 제복을 입은 것을 보고 오스트리아군이라고 착각하여 사격을 가했다. 작센군 역시 이 예비대가 하얀 제복을 입은 이탈리아군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이라고 오해하고 응사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군은 대혼란에 휩싸였고 작센군은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결국 이탈리아 왕국군은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후방으로 패주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탈리아 부왕 외젠 드 보아르네가 절망하자 마크도날은 위로했다.
"애초에 공격 계획부터 문제였습니다. 폐하께서도 이 점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탈리아군이 패주하고 있을 때 사흘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그람 전투 현장에 달려오고 있던 베르나도트의 3개 작센 보병여단이 도착했다. 그중 2개의 작센 보병연대가 곧 아군 포병대의 압도적인 포화 세례에 힘입어 바그람 시내를 장악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수적 우세를 이용해 반격하자, 작센군은 점차 뒤로 되밀렸다. 그런데 그들은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3번째 작센 보병여단을 오스트리아군으로 오해하고 사격을 가했다. 그 결과 작센군은 서로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기가 떨어져 줄행랑을 쳤고, 작센군에서 시작된 공포가 확산되면서 프랑스군은 바그람 시가지에서 패주해 아더클라로 물러났다. 한편 프랑스군 최우익의 공세를 맡은 다부는 루스바흐강 건너편에서 오스트리아군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자 더 이상의 야간 공세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공격을 중지시킨 뒤 출격진지로 철수했다. 이날 야간 공세를 나선 프랑스군 중 전력을 제대로 유지한 군단은 다부 휘하 3군단 뿐이었다.
4.2. 7월 6일
나폴레옹은 7월 5일 야간 공세가 어이없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당연히 크게 실망했지만 자신이 실책을 범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부하들이 제대로 군대를 지휘하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났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나폴레옹은 다음날인 7월 6일에 유일하게 전력을 유지한 다부의 군단을 주공으로 내세우고 나머지 군단이 이에 맞춰 순차적으로 투입하기로 했다. 한편, 카를 대공은 역으로 프랑스군을 양 측면에서 포위하기로 하고 7월 6일 아침에 선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7월 6일 아침, 카를 대공의 명령을 받은 오스트리아군은 무더운 날씨를 무릅쓰고 적을 향해 진군했다. 카를 대공이 세운 공격 계획의 핵심은 프랑스군의 양 측면으로 파고들어 적이 설치한 가교를 노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를 성사시켜 프랑스군의 퇴로를 끊는다면, 적은 필시 공황 상태에 빠질 터였다. 클레나우 장군의 제6군단이 콜로브라트 휘하 제3군단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군의 좌익을 공격하기로 했고, 로젠베르크의 제4군단이 프랑스군 우익을 맡은 다부의 제3군단을 공격하고 요한 대공이 전장에 도착하는 즉시 다부의 측면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오전 4시, 클레나우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아스페른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수적 열세에 밀려 패주했다. 이에 기세가 솟아난 오스트리아군은 이참에 적의 교두보 마저 탈취하고자 공세를 개시했지만 로다우 섬에 설치되었던 프랑스군 포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게다가 콜로브라트 장군은 진군 도중에 적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자 군사행동을 중지해버렸고, 결국 클레나우는 그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한편, 다부의 군단을 향한 공세를 개시한 로젠베르크의 제4군단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밀어붙였지만 다부가 거세게 반격하자 소강 상태에 빠졌다. 나폴레옹은 다부가 적의 공격에 고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에비대를 그쪽으로 파견해 그를 지원하게 했다.
카를 대공은 일단 작전이 어느정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했고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더클라 시가지를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나폴레옹은 어제 아더클라로 후퇴했던 베르나도트의 작센군이 거기에 있으리라고 여기고 마세나의 군단을 지원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는 그곳에 없었다. 그는 애당초 사흘 내내 밤잠을 설쳐가며 전장으로 달려온 자신과 작센군을 중앙에 배치해놓고 적의 엄청난 포화에 휩쓸리게 만든 것에 강한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작센군이 여러모로 보나 프랑스 대육군의 보조군일 뿐이지 주력은 결코 아니었는데도 전선의 핵심 지역인 중앙에 배치된 것은 나폴레옹이 자신을 적의 손에 죽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리 한 것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전날 나폴레옹의 무리한 야간 공세 명령으로 인해 작센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아주 많았던 그는 태업을 결심하고 병력을 아더클라에서 철수시켰다. 그 덕분에 카를 대공이 아더클라 시가지 점거를 위해 파견한 벨레가르데의 제1 군단은 경미한 희생만 치르고 아더클라 시가지를 점령한 후 참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 상황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격노했다. 그는 베르나도트의 부대에게 당장 아더클라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작센군이 진격에 나섰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포대가 포화를 퍼붓자 곧 패주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약간의 기병과 마세나의 제4군단 소속 2개 사단을 동원해 아더클라를 탈환하게 했다. 마세나가 "저 후레자식들을 몰아내자!"고 외치자,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공세를 개시했다. 탄막을 헤치고 나아간 병사들은 총검을 앞세워 시가지 곳곳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다. 그들은 시가지 밖가지 진격해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붙였다. 카를 대공은 이걸 보고 급히 후퇴하는 부하들을 추슬러 아더클라 탈환에 앞장섰다가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마세나는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으로 사단이 격퇴당하자 수중의 마지막 예비대인 몰리토의 사단을 투입했다. 그들은 지난 5월에 아스페른 공방전에서 마세나의 지휘 아래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인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낸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그들이 돌격을 가하자 오스트리아군은 분투했으나 결국 전투력에서 밀려 패주했다. 오전 9시, 몰리토 사단은 아더클라 시가지를 탈환했다. 그러자 카를 대공은 휘하의 제1예비군단 소속 정예 척탄병들에게 각각 아더클라의 남쪽과 북쪽에서 콜로브라트와 벨레가르데의 공격을 지원하게 했다. 이 공격은 100문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야포가 2시간에 걸쳐 포격을 퍼부은 뒤 개시되었다. 몰리토 사단은 적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몰리자 사격을 늦추지 않으면서 시가지를 탈출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작센군과 달리 대오를 유지했다.
한편, 나폴레옹은 적이 아더클라에 온 정신을 집중한 틈을 타 개시된 다부의 공격에 맞춰 전선의 정면을 지탱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먼저 배후에서 위협하고 있는 클레나우를 상대하기 위해 마세나 군단의 잔여 병력을 남쪽으로 투입했다. 뒤이어, 그는 전선 중앙의 병력 대부분을 서쪽으로 재배치해 콜로브라트와 리히텐슈타인의 지휘하에 진격중인 에비 척탄병 부대에 맞서도록 했다. 나폴레옹은 이 부대들이 이동할 시간을 벌기 위해 낭수티가 이끄는 4천 명의 중장기병대로 하여금 적을 향해 돌격하게 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군의 포화 세례에도 굴하지 않고 질주해 적 1개 대대를 괴멸시켰으나, 곧 오스트리아 보병대의 방진을 뚫지 못하고 방진 주위를 맴돌다가 오스트리아군 포대의 측면으로 쇄도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달려와 이들의 측면을 공격했다. 결국 프랑스 기병대는 패주했지만 군대가 이동할 소중할 시간을 버는 데 기여했다.
기병대가 적진을 한바탕 휘젓는 사이, 로젠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을 겨냥한 대규모 포대가 형성되었다. 무려 112문에 달하는 포를 앞세운 이들은 곧바로 포격을 퍼부었다. 이 가공할 포격 세례로 인해 마른 풀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수많은 양측 부상병들이 산 채로 불길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군은 몇 번이고 포대를 분쇄하려 했지만 얼마 안가 궤주했다.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군은 더이상 공세를 가할 여력을 상실했다. 이때 다부는 오스트리아군 좌익의 거점인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으며 자신의 공격을 준비했다. 그는 상당수 건물을 불길에 휩싸이게 해 시가지 대부분을 페허로 만든 뒤 휘하 4개사단을 전진시켰다. 모랑과 프리앙의 사단이 시가지의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사이, 퓌토와 귀댕의 나머지 2개 사단이 정면 공격을 펼쳤다. 노르트만 장군은 휘하 전위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나 도중에 전사하고 말았고, 그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죽자 패주했다. 그후 다부는 필사적인 맹공 끝에 로젠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함락시켰다.
나폴레옹은 다부가 마르크그라프노이지들을 함락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오스트리아군이 에비대 전부를 동원해 다부를 저지하려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적의 전선이 한계까지 늘어났다고 여기고 마크도날 장군의 소규모 3개 사단을 오스트리아군 전선의 중앙으로 출격시켰다. 마크도날은 자신의 병력을 거대한 방진으로 배열한 채 진격했다. 이 거대한 밀집대형은 브레데의 바이에른 사단에게 우익을 엄호받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남아있던 오스트리아군 포대의 모든 화력이 이들에게 집중되었고, 마크도날의 밀집대형이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빗나가는 포탄이 없어서 수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오스트리아군의 허술한 전선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근위기병대 지휘관 베시에르 원수가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부상당한 바람에 전과를 확대하지 못했고, 결국 마크도날의 병사들은 온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남쪽에서는 마세나가 에슬링과 아스페른에서 클레나우의 병력을 몰아냈고, 클레나우는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 것에 분노하며 퇴각했다. 한편 다부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한 뒤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으로 진격했다. 여기에 우디노의 제2군단과 마르몽의 군단이 오스트리아군의 정면으로 공격해오자, 카를 대공은 두 곳에서 가해진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군은 오후 2시에 이르러 전장을 장악했지만, 워낙 피해가 극심해서 더이상 추격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난 오후 4시, 요한 대공이 이끄는 군대가 이제서야 바그람 전장에 들어섰다. 그들은 작센군을 도주하게 만들긴 했지만 형이 이미 전장을 떠났다는 걸 눈치채고 형이 후퇴한 보헤미아로 쫓아갔다. 이렇게 바그람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양측 모두에게 참혹한 전투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육군 회보에서 프랑스군 피해는 전사 1,500명에 부상자 3천에서 4천 사이로 경미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약 3만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스트리아군 역시 약 3만이 넘는 피해가 발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양측 모두에게 약 20%에 가까인 사상율이었다. 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군이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에 복무하던 장교 라콩브(Lacombe)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전투가 끝난 뒤 전과를 보고받은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전쟁이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노획한 대포도 포로도 거의 없구나. 아무 결과가 없군."
나폴레옹은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를 쓰러뜨렸지만,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시점 즈음에 이르면 이제 나폴레옹의 적국(또는 잠재적 적국)들이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여전히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보다 한수 위이긴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은 불과 4년 전의 울름 전투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던 것에 비하면 훨씬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힘든 전투를 치른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장성들의 충성심을 끌어올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는 7월 7일 아침 보고를 위해 막사를 찾아온 마크도날을 와락 껴안으며 그를 "프랑스 제국의 원수"라고 불러줬다. 여기에 우디노와 마르몽에게도 원수 계급을 내렸다. 이에 대해 병사들은 마크도날과 우디노는 이번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으니 그렇다 치지만 마르몽은 별 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했는데 원수로 승진된 것에 의아해했다. 프라퀑(Parquin)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병사들은 "마크도날은 프랑스가 지명했고, 우디노는 군이 지명했는데, 마르몽은 우정이 지명한 거라네."라는 노래를 지어 까댔다고 한다. 나폴레옹 역시 마르몽에게 원수 임명장과 함께 별도의 개인 편지를 함께 보내 "넌 이 계급에 어울리는 전공을 올린 일이 없다는 걸 잊지 말라."고 질책한 후 보헤미아로 후퇴한 카를 대공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마르몽이 이끄는 달마티아 군단은 7월 10일 츠나임[3]에서 카를 대공의 잔존 병력 5만 명을 포착했다. 마르몽은 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쌍방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음날 저녁에 나폴레옹의 본대가 도착했다. 이에 카를 대공은 휴전을 요청했고 나폴레옹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인 7월 말, 영국 함대가 마침내 출항하여 안트베르펜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일단 안트베르펜 앞에 있는 발헤렌 섬을 성공적으로 공략했지만, 그 사이에 베르나도트가 휘하 군단을 이끌고 달려와서 영국군의 안트베르펜 상륙 시도를 좌절시켰다. 그 사이에 영국 함대 내에서 심각한 열병이 창궐했다. 발헤렌 섬의 습지대에 서식하고 있던 모기떼가 병사들을 습격했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하루에만 1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결국 영국 함대는 한달이 넘도록 시달린 끝에 본국으로 귀항했다.[4]
이렇게 해서 영국의 상륙 작전이 허무하게 끝나자, 오스트리아는 더이상 저항할 의욕을 상실하고 빈의 쉰브룬 공에서 평화 협상을 논의하자고 제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받아들였다. 나폴레옹은 쉰브룬 궁에서 몇달 동안 협상을 벌이면서 오스트리아에게 가할 징벌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프리드리히 슈타프스라는 이름의 젊은 작센인이 열병식에 참석한 나폴레옹을 죽이려고 칼 한자루를 숨기고 접근했다가 발각당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이 나폴레옹을 암살하려 했음을 순순히 인정하면서 자신의 동기는 조국의 해방이라고 밝혔다. 나폴레옹이 사과를 조건으로 선처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슈타프스는 이를 거절하고 사형 집행을 받았다. 이후 이 젊은이는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809년 10월 14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나폴레옹은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공국, 그리고 아드리아 해 연안의 항구들을 챙겼고,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일부를 바르샤바 공국에게 넘겼다. 또한 티롤은 바이에른 왕국에게 넘어갔고, 타르노폴의 작은 영토는 러시아 제국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등 오스트리아 제국의 핵심 영역은 그대로 프란츠 2세의 지배 하에 남았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여 독일로 밀려나기 전까지 프랑스에 대항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