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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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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남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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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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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24

LG 트윈스 등번호 3번
손지환
(1997~2003)
박기남
(2004~2006)
최만호
(2007~2007. 7. 28.)
LG 트윈스 등번호 5번
채종국
(2008)
박기남
(2009~2009. 4. 19.)
이학준
(2010~2011)
KIA 타이거즈 등번호 48번
김주철
(2008)
박기남
(2009. 4. 20.~2009)
이인행
(201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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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2008~2009)
박기남
(2010~2015)
최원준
(2016~2018)
KIA 타이거즈 등번호 76번
조계현
(2015~2017)
박기남
(2019~2024)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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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a0029><colcolor=#ffffff> KIA 타이거즈 프런트
박기남
朴基南|Park Ki-Nam
출생 1981년 8월 14일 ([age(1981-08-14)]세)
전라북도 정읍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 80kg[1]
학력 서울길동초 - 건대부중 - 배재고 - 단국대
포지션 내야수(3루수)[2]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2000년 2차 6라운드 (전체 43번, LG)[3]
소속팀 LG 트윈스 (2004~2009)
KIA 타이거즈 (2009~2015)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수비코치 (2019~2022)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23~2024)
프런트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2016~2018)
KIA 타이거즈 프런트 (2025~)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6년 11월 27일~2008년 11월 10일)
응원가 싸이 - 〈오늘 밤 새[4][5][6]
조용필 - 〈모나리자[7][8]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svg
1. 개요2. 선수 경력
2.1. LG 트윈스 시절2.2. KIA 타이거즈 시절
2.2.1. 2009 시즌2.2.2. 2010 시즌2.2.3. 2011 시즌2.2.4. 2012 시즌2.2.5. 2013 시즌2.2.6. 2014 시즌2.2.7. 2015 시즌
3. 프런트 경력4. 지도자 경력5. 연도별 주요 성적6. 여담
6.1. 포카리박
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이자 現 KIA 타이거즈 1군 수비 코치.

주 포지션은 3루수지만 내야 전 포지션 소화가 가능한 유틸리티였다. 다만 센터라인에서의 안정감은 다른 KIA 주전 내야수보다 확실히 떨어진다.[9]

KIA 이적 후 백업으로 쏠쏠한 활약을 보였는데, 어깨는 강했지만 수비가 안정적이지 못했던 김상현이나 2011년 시즌 중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후로 잦은 부상에 시달리는 이범호의 뒤를 받치며 3루에 자주 투입되었다. 2012년엔 부상으로 빠진 이범호 대신 사실상 주전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타격도 개선이 되어 좋은 선구안을 바탕으로 하위 타선에서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대타 또는 대수비 출장이 많았지만, 선발 출장도 적지 않았고 2012년부터 3년간 200타석 이상을 소화하며 백업 1순위로 활약했다. 1~2년 정도 충분한 활약이 가능했지만 빠른 은퇴 결정으로 모종의 아쉬움을 남긴 선수.

2. 선수 경력

2.1. LG 트윈스 시절

파일:LG박기남.jpg

2000년 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에 2라운드 6차 지명을 받고 단국대로 진학한 후, 2004년에 입단했다. LG 입단 후 기본기에 충실한 수비로 수비만큼은 제 몫을 했지만, 문제는 역시 방망이.

타격이 썩 좋지 못해 완벽하게 주전으로 발돋움 하진 못하고 대수비 요원 혹은 땜빵 주전으로 활약하게 된다.

2006 시즌 종료 후 상무에 입대했다가 2009 시즌 LG에 복귀했지만, FA로 정성훈을 영입했던 LG에서 기회는 없었고, 4월 19일 투수 강철민을 받아오는 대가로 LG에서 계속 밀어줬지만 기회를 살리지 못한 김상현과 함께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김상현, 박기남 ↔ 강철민 트레이드 참고.

당시 LG팬들은 가뜩이나 내야 자원이 부족한데 투수 자원을 얻으려고 박기남까지 껴서 주는것에 불만을 토했다.[10] 사실 박기남은 KIA에서도 '못먹는 감 찔러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찔러본거였는데, LG쪽에서 정말로 줬다고 한다. 근데 또 어떤 카더라에서는 KIA쪽에서 키워야 할 내야수 많다고 박기남까지는 안받겠다고 했는데 LG쪽에서 억지로 퍼줬다는 말도 있다. 다만 당시 KIA가 내야수 유망주는 있어도 당장 쓸 내야수가 없어서, 이현곤을 유격수로 돌려 땜빵하고 그때문에 비워진 3루수를 김상현을 급하게 트레이드해와서 막았을 정도로 내야수 뎁스가 얇았던 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KIA가 먼저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2.2. KIA 타이거즈 시절

2.2.1. 2009 시즌

KIA로 트레이드 된 이후, 내야 자원이 부족한 팀 특성상 팀에 합류하자마자 1군에서 대수비 혹은 땜빵 주전으로 출장하며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기남은 다른 곳에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자세한 사항은 밑의 포카리박 항목 참조.

2009년 6월 26일 광주 히어로즈전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당할뻔한 팀을 구해내는 안타를 치기도 했다.

9월 19일 친정팀 LG와의 경기에선 당시 타격 1위를 질주하던 박용택의 기를 좀 받아보고자 배트를 구걸해서 몇 개 가져오는 넉살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11]

시즌 성적은 104게임에 출장, 68타수 12안타 .176 0홈런 3타점을 기록했다. 출장 게임에 비해 타석에 들어선 횟수는 적었는데, 주로 대수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단 경기를 이기고 있는 상태에서 김상현이 마지막 타석을 마치고 나면 곧바로 대수비로 들어가는 게 아예 일상이 되었다.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도 당연히 합류. 1차전에서는 김상현의 3루 대수비로 막판 출전했고, 2차전에서는 2루수 안치홍의 대타로 나온 장성호를 대신해 2루수 대수비로 출전했으며[12], 4차전에서는 나지완의 대주자로 출전했다. 3, 5~7차전은 미출전. 팀은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하면서 박기남도 우승반지를 얻었다.

2.2.2. 2010 시즌

2010 시즌을 앞두고는 외야 수비 훈련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본격 멀티플레이어.

2010년에는 김상현의 몸상태가 안 좋아서 선발로 뛰었는데, KIA에서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하위타선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때문인지 기아팬들 사이에서는 무릎이 안 좋은 김상현을 지명타자로 쓰고 박기남을 3루수로 쓰는 게 좋다는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2010년의 전반적인 평가는 높아진 타격감과 나쁘지 않은 수비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부상때문에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한 아쉬움이 짙게 남은 시즌이었다는 게 중론.

2010 시즌 최종 성적은 76경기 147타수 타율 .272 40안타 3홈런 24타점 26득점 3도루 21사사구를 기록하였다.

2.2.3. 2011 시즌

6월 19일에는 9회초 1루 수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승타를 친 현재윤이 너무 기쁜 나머지 박기남의 팔을 한대 치는 바람에 애꿎게 피폭당했다.

7월 29일 이범호의 부상으로 인하여 4번타자(!)로 기용되어서 1타점과 도루 그리고 전타석 출루 등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7월 30일에는 시즌 첫 쓰리런 홈런을 터뜨리는 등 당시 부상병동이었던 KIA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하였다.

시즌 최종 성적은 85경기 152타수 타율 .224 34안타 3홈런 16타점 23득점 4도루 24사사구를 기록하였다.

10월 8일 인천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와의 2011 준플레이오프에서 선발 9번타자로 출장했으나 3타수 무안타 1득점으로 말아먹는 바람에 2, 3차전은 대수비로만 나왔고 4차전은 아예 출장하지 못했다.

박기남은 201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3타수 무안타 1득점,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2.2.4. 2012 시즌

3루 대수비 요원으로 주로 출장하며 이범호가 없을 때 윤완주와 함께 구멍을 잘 메꿔주었다.

5월 24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8차전에서 2루수 대수비 요원으로 출장하여 컨디션이 안 좋았던 안치홍의 빈 자리를 무난하게 메꿔주었다. 또한 간만에 방망이에도 불이 붙으며 2타수 2안타를 쳐냈다.

6월 3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8회초 1사 상황에서 전유수의 공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다행히 헬멧 덕에 큰 부상은 없었다.

7월 8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1:1로 비기던 9회초에 희생플라이로 안치홍을 불러들이며 결승타점을 기록했다.

8월 들어 수비는 물론 타격까지 터지면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골골대는 이범호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활약을 펼치고 있다.

8월 5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0:1로 뒤지던 2회초 역전 쓰리런 마수걸이 홈런을 날리며 경기 MVP에 선정되었다.

8월 7일 무등 야구장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5회말 2사 1,2루 상황에서 좌중간으로 가는 2타점 결승 2루타를 날리며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6회초 서건창의 안타성 타구를 호수비로 잡아낸 건 덤. 팀은 0:2로 승리.

8월 14일 잠실 야구장 LG 트윈스전에서 4:0 3회초 2사 상황에서 데뷔 첫 3루타를 기록했다. 중견수 이대형이 공을 놓치며 내야로 공을 전달하는 타이밍이 늦어진 것. 하지만 이용규가 유격수 땅볼로 아웃되며 득점에는 실패. 게다가 이 3루타는 우천취소로 날아가고 말았다. 팀은 앞서던 경기 취소당하고 만다.

9월 15일 문학 야구장 SK 와이번스전에서 2:1로 달아나던 5회초 2사 2,3루 상황에서 좌익수 쪽 담장을 넘기는 달아나는 쓰리런 홈런을 터뜨렸다!

시즌 최종 성적은 99경기 225타수 타율 .253 57안타 2홈런 25타점 28득점 1도루 32사사구를 기록하였다.

3루수 이범호의 공백을 훌륭히 채워주면서 많은 수비이닝을 소화, NC 다이노스로 이적한 이현곤이나 신인 윤완주 등을 제치고 주전 내야 백업유틸로써 자리잡게 되었고, 연봉협상에서 기존 7천만원에서 3천만원 인상한 1억원에 계약, 억대 연봉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2.2.5. 2013 시즌

4월 4일 김주찬의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 올라와서 9회 안치홍의 대주자로 들어왔다.

이후 이범호의 마지막 타석이 끝나면 대주자 혹은 대수비로 올라오며 정말 가끔씩 선발 출장을 하기도 한다. 김상현에서 이범호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2009년과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4월 7일 이범호의 마지막 타격이 끝나고 대수비로 올라왔다.

4월 16일 이범호의 마지막 타석 2루타가 끝나고 대주자로 올라왔다.

4월 21일 이범호가 지명타자로 나오면서 3루수 선발출장을 하였다. 2회말 무사 1루에서 번트를 댔으나 높게 뜨면서 3루수에게 잡히는 바람에 아웃카운트만 날렸다. 하지만 7회말 1사에 타석에 올라와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치면서 속죄했다. 시즌 첫 안타가 홈런.

4월 25일 이범호의 마지막 타석 안타 끝나고 대주자로 올라왔다. 9회말 수비에서 알까기를 시전하였다.

5월 13일 안치홍이 컨디션 회복을 위해 2군으로 내려간 후 2루수로 선발 출장하기 시작했다가 안치홍이 1군으로 다시 올라오자 대타로 내려갔다.

5월 24일 NC 다이노스 전에 팀이 0:10으로 털리는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하여 2타수 2안타 3타점으로 0패를 면하는 좋은 활약을 보였다.

6월 들어서 꾸준히 백업 및 선발로 출전하여 연속 안타와 득점을 올리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10월 3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 정수빈의 안타 당시 9회초에서 충분히 홈승부가 가능했던 좌익수 송구를 3루수 자리에서 커트하는 실책으로 6:7 역전을 허용했다. 이에 기아팬들은 왜 만년백업인지 알겠다며 이날 역전패의 원흉 안치홍, 김진우와 함께 가루가 되도록 까는중.

다음 날, 무등 야구장의 마지막 경기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장식하면서, 무등구장의 마지막 타이거즈 타자가 되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91경기 174타수 타율 .287 50안타 4홈런 21타점 35득점 2도루 27사사구를 기록하였다.

2.2.6. 2014 시즌

개막 엔트리엔 들지 못했지만, 개막전 당일 김주형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1군에 콜업, 주로 우타자 대타(...)나 대수비 요원으로 들었다. 대수비로 가끔 들어올 때 실책으로 가끔 욕먹기도 했다.

5월 1일 경기에서는 갑작스런 김선빈의 종아리 근육통증으로 교체출전하여 2번타순 유격수로 나왔다. 이 날에는 무려 6타수 4안타를 몰아치면서 타격감을 많이 끌어올렸다. 특히 브렛 필의 1타점 2루타로 홈에 들어올 때 1루부터 홈까지 전속력으로 내달릴 때 박기남의 얼굴 표정이 주목받기도 했다.

5월 11일 기준으로, 이범호, 김선빈, 김민우 등을 비롯하여 줄부상인 기아 내야진들 속에서 시즌 타율 3할1푼4리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며, 타격감이 안좋은 김주형을 대신해 3루수로 꾸준히 선발출장을 하는 중이다. 안정적인 수비와 향상된 컨택능력을 바탕으로 최근 주로 2번타순에서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6월넘어서 김다원, 박준태, 김민우등의 백업선수들의 활약이 뛰어나 경기출장을 못하고있다. 주로 좌상바이대형을 대신하여 대타테이블 세터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7월 12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김다원의 외야 어시스트를 중간에서 가로채서 득점을 헌납하는 본헤드플레이와, 경기막판 2루주자상태에서 주루사를 당하는 본헤드플레이를 했으나 팀이 극적으로 승리했다

7월 13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평범한 3루땅볼을 처리하지못해 에러로 상대를 출루시키는 본헤드플레이를 펼쳤다.

시즌 최종 성적은 90경기 202타석 171타수 49안타 3홈런 21타점 21득점 2도루 타율 0.287 출루율 0.371 장타율 0.392 OPS 0.762로 마무리하였다.

2.2.7. 2015 시즌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

개막 엔트리에 들었지만, 점차 노쇠화된 모습을 보이면서 그나마 유일한 강점이었던 수비에서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1군과 2군을 오갔다. 방망이도 식으면서 1할 후반~2할 초반을 왔다갔다 했다. 그나마 박기남이 믿을 거라고는 매의 눈을 이용한 높은 출루율 뿐. 4월 23일 경기에서 10구까지가는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내 이홍구의 결승 HBP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2군에 있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는데, 그가 없는 동안 같은 성을 가진 팀의 후배가 끝내기 포카리샷을 책임지고 있다.

7월 22일 삼성전을 마지막으로 1군으로 콜업되지 못하고 있다. 이날까지의 1군 타율은 .203. 작년까지 2할 8푼을 쳐주던 타자가 1년만에 급작스러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사실 나이가 30대 중반임을 감안하면 이 나이대의 선수들에게 갑자기 노쇠화가 찾아오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1군 등록일수 미달로 인해 아쉽지만 FA는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

11월 30일 은퇴의사를 밝히면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미 시즌 후 구단과 면담했다고 하며, 프런트 제의를 받고 은퇴 이후 구단에 남아 스카우트로 일을 한다고 한다. 한편 박기남이 은퇴하면서 박기남보다도 그의 응원가를 아까워 하는 야구 팬들의 반응이 많다.[13]

3. 프런트 경력

은퇴한 뒤 곧바로 KIA 스카우트로 업무를 시작했다. 김지훈 스카우트 팀장과 함께 스카우트 팀에서 일을 하고 있다. 2017 신인드래프트에서는 원하던 선수를 뽑았다고 만족스러워 했다. 훗날 이 드래프트는 2021년부터 타이거즈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이정훈, 박정우, 김석환 등이 지명받은 드래프트로 나름 실패했다고 하기는 아닌 수준이다.

4. 지도자 경력

2018년까지 스카우트 업무를 하다가, 2019년부터 2군 수비코치로 선임되면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2023년부터는 1군 수비코치를 맡는다. 8월 17일 경기, 덕아웃에서 김도영을 백허그하면서 다독이는 모습이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일 김도영이 타석에서는 4타수 무안타(병살타 포함)에 수비에서도 실책성 플레이가 나오는 등 멘탈이 털려나가는 상태였는데, 박기남의 백허그 다독임 이후 2타점 적시타를 때려내는 모습을 보였기에 미디어와 야구팬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다.

다만 2024년에는 팀전체의 수비 실책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고 수비시프트 적중률도 낮아지면서 평가가 안좋아지고 있다.
결정적인 수비 실책을 계기로 패배하는 경기가 굉장히 많아졌으며, 7월 31일에는 투수 관리 문제와 잦은 수비 실책이 겹치면서 30점이라는 역대급 실점 경기를 만들어 내었다

8월 7일 kt전 또한 제임스 네일이 8실점을 하였는데 이중 자책점은 불과 2점이었다. 이말인 즉슨 수비에서의 실책이 많아진다는것이다. 결국 박기남도 점점 더 평이 안좋을 예정이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장타율 출루율
2004 LG 38 34 .235 8 0 0 0 3 4 0 4 0 11 .235 .316
2005 56 136 .272 37 2 0 4 16 20 0 19 2 36 .375 .369
2006 74 152 .243 37 2 0 4 15 19 0 14 0 29 .336 .305
2007 군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8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장타율 출루율
2009 KIA 104 68 .176 12 5 0 0 15 16 2 13 0 14 .250 .305
2010 76 147 .272 40 6 0 3 24 26 3 18 3 27 .374 .361
2011 85 152 .224 34 9 0 3 16 23 4 20 4 31 .342 .330
2012 99 225 .253 57 16 0 2 25 28 1 27 5 34 .351 .341
2013 91 174 .287 50 11 0 4 21 35 2 25 2 28 .420 .379
2014 90 171 .287 49 9 0 3 21 21 2 22 2 25 .392 .371
2015 51 69 .203 14 3 0 0 3 8 1 21 0 19 .246 .389
KBO 통산
(10시즌)
764 1328 .255 338 63 0 23 147 200 15 183 18 254 .354 .350

6. 여담

6.1. 포카리박

박기남이 유명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 KIA 타이거즈가 끝내기로 승리할 때마다 박기남은 포카리를 양 손에 들고 1루로 뛰쳐나간다.

2009년 6월 24일 광주 SK전 10회말 2사 1, 2루 상황, 김상훈이 안타를 쳤고 2루주자였던 최희섭은 홈으로 쇄도하게 된다. 김상훈의 안타를 본 박기남은 끝내기 승리라고 생각하여 포카리스웨트 병을 들고 1루로 뛰어갔지만...

그만 최희섭이 홈에서 태그아웃 당하고 말았다. 결국 박기남은 머쓱해하며 덕아웃으로 들어갔고, 다음 날에 또 연장 12회말에 주자가 3루까지 가자 양손에 포카리스웨트 병을 들고 기다렸지만 결과는 끝내기 포일. 결승타자에게 쏟아 부으려는 계획은 이틀 연속 좌절되었다. 이 장면으로 인해 박기남은 포카리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또 다른 별명으로는 볼넷을 잘 골라나간다고 하여 매의 눈[16]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나지완이 끝내기 홈런을 치며 우승을 확정짓자, 역시나 가장 먼저 뛰쳐나와 포카리 두 병을 들고 마구 뿌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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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포카리박 오오..

게다가 그것만으로 모자랐는지 홈에 들어온 후 펑펑 울어대는 나지완에게 샴페인까지 마구 뿌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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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이 짤방과 싱크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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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속도로 달려나가는 박기남 선생. 이 경기는 2010년 6월 8일 두산전. 끝내기 안타를 친 게 1번타자 이용규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2011년 8월 28일 SK전에서 2011시즌 최초로 117경기만에 안치홍의 끝내기 안타가 나와서 그토록 원하던 포카리를 뿌리게 되었다.[17]

2012년 김진우가 그의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다. 5월 3일 SK전과 4일 넥센전 모두 무승부로 끝나면서 아쉬워했으나, 5월 5일 송산의 병살성 타구가 넥센의 수비 미스로 타점을 만들어내면서 경기 승리, 원하던 포카리 세레모니를 수행.

2012년 8월 23일 김원섭의 끝내기 안타가 나오면서 오랜만에 원하던 포카리를 실컷 뿌리게 되었다.

2013년 6월 13일 최희섭의 끝내기 안타 때도 어김없이 포카리를 들고 나왔다.

여담으로 LCK포의 포가 박기남이라는 개그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4년 8월 23일, 한화 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 끝내기 안타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로써 기아의 3연패를 끊게 되었다.

박기남의 은퇴 이후로 끝내기 때마다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았다. 타팀팬들에게까지 유명했던 포카리 세레머니의 임팩트도 있거니와 주전 야수들의 노쇠화와 함께 파이팅 넘치는 끝내기 세레머니 자체도 보기가 더더욱 어려워졌기 때문. 그런데 2018년 들어 젊은 야수들이 1군에 속속 등장하고, 2차 드래프트로 KIA로 이적한 황윤호가 박기남과 똑 닮은 활약(?)을 보이며 포카리박의 정신적 후계자로 여기는 팬들이 많아졌다. 다만 황윤호는 대수비 요원이고 타격은 김주형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라 2군을 왔다갔다 한다는 게 아쉬운 점.

7. 관련 문서


[1] 네이버 프로필 기준[2]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 통산 3루수 564경기(260선발) 2,766이닝, 2루수 148경기(69선발) 665이닝, 유격수 41경기(18선발) 176이닝 출전. 유틸리티 플레이어이긴 하나 보통 3루수로 출전하는 일이 많았고, 2006년부터는 2루수로도 80~100이닝 정도는 소화했다(2010, 2012년 제외). 유격수는 2013년을 제외하면 많아야 1년에 5경기 정도 출전에 그쳤으며 수비 이닝도 2013, 2014년을 빼면 10이닝을 넘긴 적도 없다.[3] 실제 입단은 단국대 졸업 후.[4] 박기남 오에오에오~ 박~기남 오에오에오~ ×4[5] 2011시즌부터 사용했다. 김주일 응원단장의 역작 중 하나이다. 다른 팀 팬들도 중독성 있다고 좋아하는 역대급 응원가중 하나. 이후 노수광이 SK로 이적할 때까지 쓰였다가 이적 후에는 저작권 문제도 겹쳤는지 재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한 V-리그에서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미차 가스파리니도 2016-17시즌에 사용했었는데, 이 때도 응원단장이 김주일 단장이었다.[6] 하지만 2018시즌부터는 저작인격권으로 인해 사용이 금지된 응원가다.[7] 허슬 박기남~ 허슬 박기남~ 그대는 뜨거운 남자~ 안타를 쳐주세요 홈런을 쳐주세요~ 그대는 뜨거운 남자~ ×2[8] 2010 시즌에만 썼다.[9] 이현곤이 박기남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에게 농담삼아 "쟤 좀 맞아야 해요. 가끔 어이없는 수비를 하거든요" 라는 말을 할 정도로 2루수나 유격수 대수비로 들어왔을 땐 가끔 어이없는 실책을 하기도 한다. 좌우 수비폭이 넓지는 않다보니 3루를 볼 때 보단 안정감 약하다.[10] 김상현이야 군 제대 후 기회를 많이 줬지만 터지지 못했으니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 이후.[11] 하지만 그 배트는 나지완이 다시 뺏어갔다. 게다가 그 경기에서 박기남은 호수비로 박용택의 안타성 타구를 땅볼 처리하는 등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12] 이후 타석 때 대타 이재주로 교체되었다.[13] 응원가는 노수광이 물려받았다가, SK로 트레이드 된 이후로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내야 백업+또라이 기질(...)로 현역시절 박기남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를 받는 황윤호에게 다시 물려주자는 의견도 존재하나 저작인격권 사태로 인해 싸이의 노래를 응원가로 사용하려면 많은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하여 아쉽게도 어떤 형태로든 응원가로 부활할 가능성은 적다.[14] 참고로 나중에 KIA로 온 동갑내기 이범호 역시 김상현과 친구 사이이다.[15] 다만 노수광에게 간 뒤엔 응원가의 평가가 많이 떨어졌다. 뭔가 입에 감기는 맛도 없는데다가 팬들의 요청처럼 '노수광~ 노수광광광!'으로 가지 않아 팬들이 불만이 좀 많았던 듯.[16] 매의 눈을 한자로 바꾼 응안(鷹眼)이 박기남의 호(?) 오오 응안 박기남 선생!! 그리고 2014년 5월 4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9회말 1사 1-2루 타석에 브렛 필이 박기남의 '손승락의 직구가 커터성으로 휜다'라는 조언을 듣고 기적같은 동점 쓰리런을 쳐 냈다. 역시 응안선생![17] KIA의 2011시즌 끝내기 안타는 딱 2개. 나머지 하나는 9월 18일 차일목그랜드슬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