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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3년 2월 2일 |
함경북도 온성군 영와면 송북리 | |
사망 | 1960년 8월 18일 (향년 66세) |
부산광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본관 | 여주 박씨 |
이명 | 박덕수(朴德洙)·박재근(朴才根) |
호 | 철마(鐵馬)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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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893년 2월 2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와면 송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온성에서 부산으로 이주하였고, 1919년 2월 고종의 인산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가 3.1 운동이 발발한 것을 보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해 중국 지린성 왕청현으로 가서 3월 12일 용정, 20일 왕청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12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의 왕청현 지부 결성에 참가하여 부단장을 지냈고, 대한신민단 왕청현지부 소속 석현지부의 사령관 및 참모장을 지냈다.이후 그는 감리회 신자 10여 명과 함께 무장군 500명을 양성했으며,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여 간도 및 함경북도 지방에서 모금한 군자금 3,500원으로 노령에서 권총 20정, 소총 30정, 탄환 등을 구입해 무장을 강화했다. 또한 연해주에서 소련군 린쉬비크파 군사령관 셉첸코 및 김규만(金奎晩)과 밀약하여 노령에서 소총 500정, 탄환 10만발을 무상으로 공급받아 신민단군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1920년 3월, 박승길은 부하 20명을 인솔하여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의 독립군에게 가담해 일본 나남 제19사단의 야스카와 부대와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명월구 이청림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특파원 안정근, 왕삼덕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단체를 통합하는 데 참여하여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를 설립했다. 이때 그는 김창순(金昌順)과 함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일제가 간도 참변을 단행하며 독립군을 핍박하자, 그는 1922년 연해주 고로시카로 망명한 뒤 교민들의 교육에 진력했다. 이후 그는 오하묵(吳夏默) 등과 함께 한인보병자유대대의 일원이 되었고, 러시아 귀화 한인 단체인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러다 다시 만주로 이동한 그는 둥녕현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 1928년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농부로 위장하여 농사를 짓던 그는 1935년 일본 자작농 토벌대의 선두에 섰다가 붙들려 모진 고문으로 고막을 잃었지만, 탈옥한 후 지하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했다.
8.15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뒤 부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60년 8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승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박승길은 광복 후 부산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간도 독립군 약사'를 저술했지만 출간하지 못했다. 그는 이 책에 자신의 기억으로 그린 봉오동전투도를 부록으로 첨부했다. 이 서적은 독립운동사를 집필하던 김승학이 보관했고, 2015년 8월 10일 김승학의 증손인 김병기 대한독립운동 총사 편찬위원장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하면서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