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공식 홈페이지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을 계승하고 한 평생을 친일반민족행위자, 친일문제 연구에 바친 재야사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임종국[1]의 유지를 따라 1991년 창립된 대한민국의 시민단체. 설립 당시의 명칭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으나 1995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로 바뀌었으며, 통용되는 약칭은 '민문연'이다. 연대기구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포럼 진실과 정의,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역사정의실천연대 등이 있으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의 사무국을 맡고 있다.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 군부독재 등 한국근현대사의 쟁점과 역사적 과제를 해명하는 활동에 진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술 성과로는 『친일인명사전』,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등의 전문서적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독립운동가 및 그 후손들에 대한 연구성과도 적지 않다. #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의 잔재들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거 청산'과 역사적 과오에 대한 진상규명을 주된 방향성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시민단체들과의 연대를 추진하기도 한다. 여러 한일 단체들이 매년 진행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 공동행동 행사를 매년 주관하고 있으며, 2011년 8월에는 강제병합100년을 맞아 “식민주의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시민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 그밖에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 추모 행사 사업 등의 활동도 하고 있다.
임종국의 장례식장에서 설립 발의가 이루어졌다. 초대 소장은 김봉우, 제2대 소장은 헌법학자 한상범[2]이 며 현재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제3대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첫 인터뷰, 다른 인터뷰.
2. 활동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와 해명,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친일인명사전 등 친일문제연구총서 편찬, 통일시대 역사문화운동 등을 주제로 한 연구조사를 하고 있다. 이에 일제의 식민지 정책, 대한민국 해방 후 과거 청산 문제 및 일본의 과거사 반성 문제를 다룬 다양한 학술 서적과 잡지들을 내고 있으며, 임종국의 저서들도 일부 재발간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간된 서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임종국의 친일파 연구자료를 기초로 하여서 후대의 현대사 연구자들이 보강해서 출판한 『친일인명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만큼 잘 알려져있지는 않으나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 총서』(전 98편)(2002), 『일제협력단체사전』(2004), 『재일조선인단체편람』(2011),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2017), 『재일조선인단체사전』(2021) 등의 학술서를 발간했다. 타연구기관 및 연구자와의 공동 연구로 발간한 학술서, 콘텐츠들로는 『항일음악 330곡집』(2017), 『군국가요 40선(CD)』등이 있으며 그중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 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자료』(2019)는 독립기념관과 공동 발간한 사료집이다. 자체적으로 학술지, 잡지를 발간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역사와 책임>: 포럼 '진실과 정의'와 공동으로 과거 청산 문제를 다룬 잡지다. 제12호까지 나왔다.
- <내일을 여는 역사>: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과 공동으로 발간하는 학술지다. 계간으로 발간된다. #
- <민족사랑>: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에게 보내주는 잡지로 월간지다. 홈페이지에서도 pdf로 열람이 가능하다. #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영상과 오디오 콘텐츠도 꽤 많은 편이다. 영상은 주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오며 오디오는 팟빵#을 통해 업로드 된다.
2.1. 연구/출판
주지했다시피 1991년 개소 이래 30여년 간 한국근현대사 관련 연구와 조사를 꾸준히 수행해오고 있다. 상당한 양의 사료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는데 관련 기사에 따르면 일제 당시 3000여 종의 문헌자료와 250만 건의 근현대 인물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 출판한 연구저작들 중 대표적인 것들만 정리한 것.-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 총서』: 식민지 당시 총독부의 지배정책을 포괄적으로 알 수 있는 사료집이라는 점에서 유용하다. 1차 사료들을 모아두었기 때문에 학술논문에서 인용되는 빈도도 잦은 편.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학술 DB서비스로 제공하기도 한다.(물론 재학생 한정#).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38년부터 1945년까지의 제국의회설명자료가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1941년 79회 자료는 총독부 각부처의 보고내용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제국의회 설명자료(1~24권), 총독관계 자료(25~29권), 황국신민화정책(30~48권), 총동원정책과 총동원 단체(49~54권), 징병지원병제도(55~59권), 일본군(60~63권), 경찰과 사상통제(64~70권), 산업정책통계자료(71~85권), 노무동원(86~98권)으로 구성된다.
- 『일제협력단체사전』: 350여 개의 일제강점기 관변단체·민간협력단체와 관련 자료(각 단체들의 연혁, 성격, 주요활동, 사업내용, 구성원 등) 수록되어 있으며 단체에 가담했던 1만여 명의 인명도 색인으로 정리되어 있다.
- 『식민지 조선과 전쟁미술』: 일제 '전시동원체제기(1937년-45년)'를 중심으로 일제의 '전시 파시즘 미술'을 개관하고 있다. 또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찬양한 '친일미술'의 실상과 징병, 징용, 정신대 등 각종 인력 수탈에 시달리던 전시체제하 조선 민중들의 삶을 시각 사료로서 분석했다.
- 『친일인명사전』: 을사늑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4,389명의 친일인물과 관련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전 3권.
- 『재일조선인단체편람』: 460여 개의 재일조선인단체와 관련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1905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40년간에 걸쳐 존속했던 일제 통치기구들을 망라했다. 일제가 법령 공포를 통해 설치를 공식화 총 248개(통감부 26개, 조선총독부 222개)의 관서와 기구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 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자료』』: 3·1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운동가 자료발굴총서다. 독립기념관과 공동발간했다.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 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 자료를 번역, 해제하였으며 115개 사건, 총 950여 명의 기록이 등장한다.
-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 201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한 한일강제병합 100년 특별전의 전시도록이다. 도록이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사료(730여점)들이 컬러 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에 대한 해제, 해설, 캡션도 충실한 편. 내용은 개항부터 병합에 이르는 일제침략 전사(前史)부터 1930-40년대 전시총동원체제기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기 전체를 다루고 있으며 후미에는 한일시민사회의 연대활동 관련 내용들도 함께 수록하고 있다.
- 『재일조선인단체사전』: 민족문제연구소와 한일연구자 40여명이 참여하여 발간했다. 발간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1895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전국(일본 47개 도(道)부(府)현(縣), 오키나와(樺太)에 존재했던 551개 재일조선인 단체의 행적을 정리한 최초의 성과물이다. 단체의 성격은 친일·융화 단체부터 노동운동, 교육운동, 종교운동, 문화예술운동, 사상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이다. 색인으로 확인되는 인명만 5,400여명, 단체는 2,800여 개에 이른다.
2.2. 학술활동
아래는 연구소가 개최한 학술회의, 세미나, 심포지엄 등에 대한 현황이다.- 1992년 식민지배 청산문제의 민족사적 이해
- 1993년 한국현대사와 친일파 청산문제
- 1995년 친일협정, 30년 동안의 굴욕
- 1996년 보훈정책, 무엇이 문제인가
- 1997년 민족사적 관점에서 본 역대정권의 대일정책 비교
- 1999년 친일논리의 역사적 변천과 식민유제의 청산방향
- 1999년 한국군과 식민유산
- 2002년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문화예술계의 친일논리와 성격
- 2003년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친일세력의 구조와 논리Ⅰ
- 2003년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한국 기념사업의 현주소
- 2004년 21세기 한국사회와 '친일청산' 문제
- 2004년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친일세력의 구조와 논리Ⅱ
- 2005년 식민지시대 예술 다시 읽기-친일예술의 내적 논리
- 2006년 세계의 눈으로 야스쿠니를 본다-문명과 야만 사이
- 2007년 효창원 성역화 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 2007년 '강제성'이란 무엇인가-일본군 위안부 문제
- 2007년 인권·문명·평화의 눈으로 야스쿠니신사를 본다
- 2007년 식민지 경제사의 쟁점과 과제
- 2007년 기업재판에 대한 한국·일본 법원의 판단과 전후 보상
- 2009년 일제의 사법침탈과 안중근 의거
- 2009년 관동조선인학살-식민지범죄,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는다
- 2009년 식민지기 재일조선인사회의 형성과 단체활동의 전개
- 2009년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
- 2009년 한일 양국의 문서공개로 본 1965년의 한일협정과 청구권 문제
- 2010년 강제병합 100년, 한일과거사 극복의 과제와 전망
- 2010년 일제의 전쟁, 조선인의 삶
- 2011년 '전환기의 정의'와 한국 민주주의-'과거사청산' 재평가
- 2011년 8ㆍ15와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위기'와 갈등'을 넘어
- 2011년 한일회담 공개문서와 식민주의 청산 문제
- 2011년 과거에 대한 성찰, 미래를 위한 역사쓰기-친일인명사전의 성과와 과제
- 2012년 유신선포 40년 역사4단체 연합학술대회-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
- 2012년 민주연구단체협의회 추계학술대회-언론에 재갈을 물려라
- 2012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대로는 안된다
- 2013년 님이 침묵하는 시대의 문학
- 2013년 한국인 BC급 전범의 역사와 남은 과제
- 2014년 3‧1혁명 95주년 기념 학술회의-'제국'에서 '민국'으로
- 2015년 화성지역 독립운동 관련 역사콘텐츠개발의 현황과 과제
- 2016년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
- 2016년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 2017년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 2018년 근현대사기념관개관2주년기념 심포지엄,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 2018년 조선의용대 80주년 기념 학술회의
- 2018년 국제학술대회-학살, 피폭, 강제동원 피해를 말한다
-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도쿄에서 함흥으로 :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 2019년 의열단 결성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 2019년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 2019년 한일 공동학술회의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 : 경남 진영 무라이 농장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 2019년 한일 공동학술회의 '한일 뉴라이트의 역사부정을 검증한다'
- 2020년 독립전쟁 원년 선포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신흥무관학교와 독립전쟁
- 2020년 야스쿠니문제 온라인 국제회의-국제인권의 시점에서 야스쿠니를 보다
- 2021년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
- 2021년 야스쿠니문제 온라인 국제회의 '야스쿠니 반대 운동의 현황과 과제'
2.3. 전시 및 교육
근현대사 관련 강연과 문화행사, 전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아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 주관한 전시 및 교육 관련 행사들.- 전시
1996년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사
1998년 친일파·독립운동가 사진전
1999년 사진으로 보는 민족수난사
2001년 일제침략 역사왜곡전
2001년 일제침략 역사왜곡전, 평양 인민문화궁전 1개월간 전시 후 기증, 북한 전역 순회전시
2002년 친일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2003년 친일음악의 진상전
2003년 일제강제동원피해자 명부 전시
2004년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전
2004년 해남도에서 일본은 무엇을 했는가?-침략, 학살, 약탈, 성노예화
2006년 '징게맹갱 외에밋들'-조정래의 아리랑과 식민지 조선인의 삶
2007년 기氣와 예藝로 맞선 그들
2007년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
2007년 '한시대 다른삶-항일과 친일' 캐리커처 전시
200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사
2009년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자료전
2009년 침략신사, 야스쿠니
2010년 강제병합 100년 특별전-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
2011년 (해외전시)'한국병합100년' 특별전-거대한 감옥, 식민지조선에 살다(일본 리츠메이칸 국제평화박물관 초청전시)
2011년 (해외전시) 일제지배하 교과서전(일본 교토YMCA 초청전시)
2011년 (해외전시) 신흥무관학교설립100주년기획전-조국광복의 꿈, 항일무장투쟁의 산실 신흥무관학교
2012년 유신 40년 특별전-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2012년 (해외전시) '거대한 감옥, 식민지조선에 살다'(일본 도쿄 고려박물관 초청전시)
2013년 제4회 우리시대 리얼리즘展-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의 소녀들
2013년 전범이 된 조선청년들-한국인 포로감시원들의 기록
2014년 시사만화가 33인의 일제만행 고발전
2015년 한일협정 50주년 한일공동기획 특별전, '나는 싸우고 있다'-한일협정의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
2014년 (해외전시) 일본 메이지시대 산업유산군 세계유산 등재 반대 캠페인 특별전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2014년 광복 70주년 특별전-학교로 찾아가는 독립운동 이야기
2016년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특별전-시대의 선구자들 역사에 디딤돌을 놓다
2016년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초청전시-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2016년 백범 김구와 함께 하는 독립운동 이야기
2017년 몽양 서거 70주기 특별사진전-몽양 여운형, 독립과 통일, 민주주의를 외치다
2018년 근현대사기념관 특별기획전-한 시대 다른 삶
2018년 프랑스 내셔널아카이브 특별전-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 광주 초청전시
2018년 반민특위설립 70주년 특별전-348일 반민특위, 친일청산 좌절의 기록
2019년 3.1운동 100주년 특별전 “1919, 가만히 있으라?”-3·1혁명의 주역과 탄압자들
2019년 3.1운동 100주년 특별전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2019년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별전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백산무역과 경주 최부자의 독립운동>
2019년 기획전 “국치일을 아십니까”
2019년 기억을 둘러싼 투쟁 -친일인명사전 발간 그 후 10년
2019년 한반도 평화기원-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로저 셰퍼드)
2020년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별전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2020년 조선·동아 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 언론의 민낯'
2021년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2021년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 교육강좌, 문화행사
2013년 끝나지 않은 백년전쟁, 한국 근현대사를 말한다
2013년 '뉴라이트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2014년 독립투사들이 꿈꾼 나라-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지향과 실천
2014년 친일인명사전 발간5주년 특별강좌 '다시 보는 친일인명사전'
2015년 한일협정50년 특별강좌 '1965, 그 장벽을 허무는 사람들에게 듣는다'
2015년 국정교과서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참'역사 이야기, 시민 학생과 함께 하는 거리역사강좌
2017년 연구소·한겨레21 공동기획 인터뷰 특강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2017년 저항과 협력, 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
2017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역사의 길에서 민주주의를 묻다'
2017년 청소년역사체험 '풍자화로 보는 근현대사, 기막힌 한 컷'
2017년 청소년강좌 '영화로 배우는 근현대사'
2017년 시민역사 특강 '순례길의 독립운동가'
2017년 군함도에서 야스쿠니까지, 강제동원 100년의 진실
2018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영상으로 보는 강제 동원 이야기'
2018년 근현대사기념관 기획특별전 연계강좌 '한 시대 다른 삶'
2018년 여름방학 청소년 한국사특강 '제1차 세계대전과 식민지 조선의 운명'
2018년 반민특위 설립 70주년 기념 특별기획 '반민특위의 좌절과 부활'
2019년 3.1혁명 100주년 기념 특별강좌 '100년 전 촛불, 독립을 외치다'
2019년 3·1운동 참여프로그램 '함께하자 독립운동'
2019년 강제동원피해자 증언 캠페인 '내가 역사의 증인이다'
2019년 광복 74주년 8·15특별행사 '일제의 범죄, 증거를 찾아라'
2019년 서울자유시민대학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현장'
2019년 식민지역사박물관 역사 강좌 '사료를 읽다, 근대 역사와 만나다'
2019년 독립민주시민학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 '한국영화 100년 기념 특강 :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2020년 독립전쟁 100주년,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서
2020년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연계 강좌 '지금, 언론 개혁을 말한다'
2020년 차별과 혐오의 역사 넘어서기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 위대한 희생, 빛나는 투쟁
2020년 청소년 한국사특상 '우리가 몰랐던 여성 독립운동가'
2020년 캠페인 '산업유산정보센터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2021년독립민주시민학교 '항일무장투쟁의 뿌리-신흥무관학교' /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기념 특강 : 다시 독립전쟁을 말한다'
2.4. 연혁
1989년 임종국 사망. 빈소에서 연구소 설립 발의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 설립(초대소장 김봉우)
1993년 제3회 윤상원상 학술연구부문 단체상 수상#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 사단법인 등록(초대이사장 이돈명)#
199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교수 1만인 선언 #
1999년 조문기 2대 이사장 취임
2000년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발족(247개 단체), 사무국 설치
2000년 일제강점기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 발족, 사무국 설치
2001년 한상범 2대 소장 취임
2001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출범, 주관 연구소 겸 사무국 설치
2003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 설치
2003년 임헌영 3대 소장 취임
2004년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의 힘으로" 모금운동 전개#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시민연대 발족, 사무국 설치#
2004년 제16회 심산상 수상#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회장 장병화), 임종국상 제정
2005년 제19회 단재상 수상#
2005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발표#
2005년 야스쿠니 관련 다큐 영화 <안녕, 사요나라-야스쿠니 신사를 말한다> 제작#. 부산국제영화제 운파펀드·서울독립영화제 대상 수상
2005년 제17회 안종필자유언론상 특별상 수상#
2006년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발족, 사무국 설치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발표#
2008년 김병상 3대 이사장 취임
2009년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제정 제5회 한림기록문화상 수상 #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 #
2010년 제21회 사월혁명상 수상#
2010년 강제병합100년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창립, 사무국 설치#
2011년 신흥무관학교100주년기념사업회 창립, 사무국 설치#
2011년 시민역사관(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발족
2011년 역사정의실천연대 발족, 사무국 설치#
2012년 제7회 임창순상 수상#
2012년 산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제5회 노근리평화상 인권상 수상#
2012년 역사다큐 <백년전쟁> 제작 및 상영#
2013년 함세웅 4대 이사장 취임
2014년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발족, 사무국 설치
2015년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결성, 사무국 설치
2017년 민족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작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2.5.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지원 및 연구 활동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재판 소송을 오랜 기간 지원해왔다. 2001년 광복55주년을 맞아 대일과거청산 문제해결을 위한 연대 사업을 본격화했다. 역사문제연구소, 민변 등 6개 단체와 함께 ‘일제하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 제정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관련 운동을 벌이는 한편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 채록 사업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생존 피해자 발굴과 증거자료 수집을 토대로 재판투쟁을 준비해 나갔다. # # 특히 민문연은 1990년대 강제동원, 원폭피해 등으로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한 피해자들(원고)의 국내 소송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20여년에 걸쳐 재판관련 사무국을 맡고 있다.강제동원 피해뿐만 아니라 ‘한국인’ BC급 전범, 시베리아 억류 징용 피해자, 한국인 피해자 야스쿠니신사 합사 반대,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반환,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 등 일본 정부가 외면하고 방치해온 문제에 종합적인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재한 군인군속재판(이른바 ‘군군재판)으로 원고가 414명으로 최대 규모였다. # 이 또한 10여 년간 이어졌지만 2011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청구권협정과 관련 조치법을 근거로 원고들의 권리가 소멸되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 소송을 통해 야스쿠니신사의 문제가 부각되면서 2007년 ‘야스쿠니신사 무단합사 취소소송’으로 이어진다. #
동시에 ‘한일협정 외교문서 전면 공개’ 운동을 추진한다. 과거사 관련 문제가 한창 이슈이던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관련 기자회견, 토론회 등 관련 활동들을 시작했다. # 이 과정에서 합일협정 당시 박정희 정권과 일본 정부·기업 간의 막후거래가 있었다는 미국 CIA 비밀문서를 발굴해 공개하기도 했다. #
2005년에는 강제동원피해자 여운택, 신천수 이춘식, 이종철, 김규수의 배상재판 사무국을 담당하여 소송을 시작했다. 이 재판이 2018년 강제징용피해자 대법원 판결로 이어진 재판이다. # 소송 1심과 항소심에서는 모두 패소했지만(한일협정 근거 피해자들의 청구권 소멸)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이를 뒤엎는 판결을 내렸고 2018년 10월 30일과 11월 29일 최종 승소 판결이 나온 것이다. 강제징용피해자 배상관련 대법원 판결은 ‘헌법에서 일제강점은 불법이며, 강제동원 또한 불법이기 때문에 일본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개인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2.6. 주요 인물
- 이돈명(전 이사장): 한국의 인권변호사. 1970~1980년대의 숱한 시국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불렸다. 조선대학교 총장, 한겨레신문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민변의 모태인 정법회를 조직하였다.
- 조문기(전 이사장): 항일 독립운동가.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어용대회가 열린 부민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결행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친일 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라는 신념으로 투신하였고, 1999년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에 전념하였다. 2006년 11월 골수종과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8년 2월 5일 사망하였다.
- 김병상(전 이사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민족문화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내며 반평생을 민주화·사회운동에 헌신한 천주교 신부로, 2020년 4월 25일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때인 2009년에는 임헌영 민문영 소장과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을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헌정했다. 정부는 사회적 약자 보호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4월 26일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 강만길(명예 이사장): 고려대 명예교수. 20세기 대표 지식인 중 한 명인 원로 사학자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각종 글을 쓰면서 현실 비판적 지식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김대중 대통령 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을 지냈고, 노무현 대통령 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았다. 일부 논란이 있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제자인 이주천 교수는 강만길이 과거 6.25 전쟁을 "전쟁통일의 방식으로 실패한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30년 동안의 통치는 정통성이 없으며 반 민주정권으로 남북의 평화통일운동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 다만 이주천 교수 또한 '위안부는 매춘부'#, '5.18북한군 개입설'# 등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가려 들어야 한다. 어쨌거나 상당한 고려대 명예교수에 오를만큼 인정받는 석학.
- 한상범(전 소장): 동국대 명예교수. 1961년부터 동국대에서 42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군사독재 시절 1964년 한일협정 반대, 1969년 3선 개헌 반대, 1972년 유신 반대운동에 참가하는 한편, 매년 30~40편에 달하는 인권 관련 논문을 발표하면서 글쓰기와 행동 양쪽에서 활발한 현실 참여를 해왔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불교인권위원회 대표, 한국법학교수회 회장을 역임하며 일제 잔재 청산과 인권 개선에 앞장서 왔으며, 2004년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 임헌영(소장):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문학평론가이다. 안동사범학교를 나온 이후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그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1974년 문학인 사건과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겪기도 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본명은 임준렬(任俊烈)이다. 이름 논란이 있는 인물인데 박헌영을 본 따 임헌영이라는 이름(혹은 필명)으로 바꿨다는 의혹이 있으나 사실무근이며 정작 본인은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이에 한겨레 신문의 최재봉 기자는 임헌영 등 문인들이 "필명을 둘러싼 고충"이 있다며 온갖 이름 논란이 횡행하는 세태를 지적하기도 했다. # 1974년 '문인 간첩단 조작사건', 1979년 '남민전 사건' 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2018년 검찰은 재심청구를 통해 임헌영 등 '문인간첩단' 피해자들의 무죄를 인정했으며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사실 또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으며(2006년) 누명을 벗었다. # #
- 강덕상(전 지도위원): 비판적인 역사의식으로 일본의 조선사 연구, 특히 근대사 연구의 초석을 쌓았다. 강덕상의 연구는 ‘조선사는 일본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거울이다’라는 말로 축약되며, ‘일본의 길모퉁이에는 반드시 조선이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재일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연구를 제시하였다. 강덕상이 말하는 ‘재일사학’의 본령은 ‘일본인이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역사, 가만히 두고 언급하지 않으려 한 숨겨진 역사’의 규명이다.
- 송기인(지도위원): 부산 민주화 세력의 정신적 지주로 불린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참여해 반독재 투쟁을 하였으며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투신했다. 1989년 8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이사장을 지냈다. 2005년, 400여 시민단체로 구성된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추천을 받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됐다.
- 리영희(전 지도위원): 한국의 대표적 진보학자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육군 소령 예편) 국군 간부들이 군수물자와 돈을 빼돌린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 고위층의 부패와 타락을 생생하게 목격, 이후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5ㆍ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는 글을 외국 언론에 기고하는 등 군부정권에 반대하는 기사를 쓰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2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각각 4년간 해직됐다. 1977년 저서 '8억인과의 대화'에서 중국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다시 복역했고,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 취재를 기획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됐다. 그는 사회비평가이자 사민주의를 토대로 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민주화에 투신하고 오랜기간 독재에 맞서 투쟁했다는 점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인정하고 있다. 2010년 그가 작고하자 한나라당은 "리 선생은 우리사회의 행동하는 지성의 표상으로 살아오신 분으로, 특히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 많은 지성인들에게 용기의 상징이었다. 평화, 민생, 민주를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 물론 일각에서는 리영희가 북한과 중국, 베트남에 대해 칭찬하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은 모른체하며 과만 비판한다며 비난한다.
- 이이화(전 지도위원): 역사학자. 민족사·민중사·생활사 중심의 한국사 기술에 열정을 쏟았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 인물을 재평가하는 작업 등을 통해 역사를 대중화하는 일에 힘써왔다. 아이들이 보기 쉬운 역사서적을 다수 집필하여 '역사 할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인물.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계간 〈역사비평〉 편집인, 서원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20년 타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후광학술상 수상했다.
3. 비판 및 논란
연구소면서 시민운동을 병행하는, 여타 시민단체에 비해 독특한 위치를 가졌다. 이에 연구소라고는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정치적인 색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또한 이름 특성상 정부(공공기관)나 대학이 설립·운영하는 연구시설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기도 하다. 여러 매체에서 자주 인용되는 『친일인명사전』 또한 국가에서 내놓은 저작은 아니다.[3] 따라서 판정 기준 등을 두고 논란도 벌어진다. 편향된 성향으로 역사를 다루는 단체라는 비판도 받는다. 후술된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 부정. 백년전쟁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 보수진영의 비판(자세한 내용 후술)이 잇따랐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의 멤버가 진보(좌쪽으로) 편향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곳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라는 비판도 있다. 이름대로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뚜렷하기 때문에 북한에 관련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3.1. 정치적 편향 논란
2010년 5월, 천안함이 북한의 공격에 의한 폭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천안함 진실규명을 위한 범시민사회협의체 준비위원회' 발족에 참여했다.2010년 5월 19일에는 "천안함 '어뢰 공격' 규정으로 남북관계 파탄내고 북미대화·6자회담 발목 잡는 이명박 정부 규탄한다!"라는 공동성명문을 냈다. #
그리고 2010년 7월 29일에는 "러시아도 이명박 정부의 '북한 어뢰 공격' 주장 부정한다. 천안함 사건 국정조사와 4개국 공동조사 실시하라!"라는 공동성명문을 내며 민군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또다시 부정했다. #
같은해 8월 "천안함 진실규명!" "한반도 평화실현!"을 내건 광복 65주년 8.15 대회에 연구소 대표가 준비위원회 공동대회장을 맡는 등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한 왜곡에 앞장섰다.
2024년 3월 3일에는 임헌영 소장이 더불어민주연합 창당대회에서 '민주당은 민주주의자들이 뿌리이고, 오늘날의 보수정당은 친일파, 매국노가 뿌리'라고 주장하였다.[4]
3.2. 백년전쟁 다큐멘터리 논란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 중 2012년 12월에 이승만 ·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에 관한 '백년전쟁' 시리즈가 나왔는데 이 영상의 두 대통령에 관한 내용을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진보 사학자들 및 언론은 내용이 사실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적인 역사 해석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견지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기자회견을 열어 백년전쟁 비판의 9가지 쟁점에 대해 반박했다. # # 또한 5개 역사단체가 공동성명을 내어 “이승만 전 대통령 유족의 주장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추구할 가치와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영상물 <백년전쟁>의 인터뷰에 응한 역사학자들의 학문적 판단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 #
그러나 2013년 7월, 위 영상을 TV에 방영했던 RTV 측에 방송통신위원회는 백년전쟁이 객관성, 공정성, 명예훼손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며 ‘관계자 징계 및 경고’의 중징계를 내렸다. # 이 과정에서 여당(박근혜 정부)측 추천인사들 6인은 <백년전쟁>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 편파·왜곡 영상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야당 측 추천 인사들은 고증, 사실 기술에 있어 크게 어긋남이 없으며 서로 상반된 시각에서 한 인물을 평가할 수 있다며 ‘문제없음’ 의견을 냈다. # 아울러 방심위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의견진술 요청을 일방적으로 거부하였는데 이에 비판이 일기도 했다. # # RTV는 방송 내용이 각종 사료에 근거하고 있고, 징계가 시청자 제작 프로그램의 내용 보호를 명시하는 법률의 취지에 반한다며 재심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방심위는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지만 편향된 내용을 방송한 사실이 있다"라며 재심 요청을 기각하였다.
이 시기, 방심위 중징계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RTV의 소송도 패소를 거듭했다. 서울행정법원은 방송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전직 대통령들을 폄하했다”고 판시했으나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5.16 쿠데타를 “5ㆍ16 혁명”이라고 기술함으로써 판결의 공정성이 도마에 올랐다. # 민족문제연구소는 재판부의 판단을 반박하며 항소를 제기했으며, 법원의 용어 사용 등에 대한 각계의 비판 또한 이어졌다. # # 법조, 언론 등 각계 인사들이 배석한 참여연대 주최 좌담회에서는 법원의 판결이 뉴데일리 등의 우익 언론의 기사를 그대로 쓰거나 사료의 오역이 있었으며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지지 않은 판결이라 비판했다. #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국정원이 <백년전쟁> 반박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포스코에 4,500만원의 자금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를 통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이버 심리전 활동을 벌였으며 나아가 뉴데일리 박성현 주필 등이 주도한 <백년전쟁> 저격영상 ‘생명의 길’을 제작하는데 자금을 지원했다. # #
이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2018년 8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무죄, 2심(서울고등법원)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검찰은 유족들이 제기한 문제 대부분을 ‘혐의없음’ 처분했다. # 그리고 2019년 11월, 대법원이 방송통신위원회의 징계가 위법하다고 결론지으며 6년에 걸친 소송전은 끝을 맺게 됐다. 관련하여 대법원은 "표현이 다소 거칠고 과장된 면이 있지만 외국 정부 공식문서와 신문기사 등 객관적 사료에 근거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들이 대부분 객관적 사실과 합치된다"면서 "주류적 통념에 대한 의문, 의혹을 제기하고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만들었다“고 판시했다. 백년전쟁을 방영했다는 이유로 제재하면 앞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 어려워지고 표현의 자유는 침해될 것"이라고 지적한 뒤 "다큐멘터리는 선거방송이나 보도방송처럼 각각 동등한 기계적 균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
3.3. 이갑성 친일몰이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독립운동가 이갑성을 친일몰이했다. 아래는 의혹의 주된 내용과 그에 대한 반박이다.첫째로 이갑성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 촉탁(비서)이었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국내에 남아있는 조선총독부 자료를 검토한 결과 마루야마의 촉탁 명단에는 없었다. 비공식적인 촉탁이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으나 일본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아도 마루야마와 이갑성의 접점은 없다.
둘째로 1930년대 상하이에서 활동할 당시 창씨명(岩本正一, 이와모토 쇼이치)으로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했으며, 그 근거로 명함이 발견되었으나 호적 자료를 확인한 결과 이갑성은 1940년 7월 23일에 창씨개명을 하였다. 또한 명함에 적혀있던 이름으로 볼 때 만주에 있었던 기업으로 추정되는 '일만 산업공사'는 존재한 적이 없는 기업으로 밝혀졌다.
셋째로 미쯔미시 주식회사의 신경 출장소장을 역임했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미쯔비시 본사의 사료를 검토한 결과 신경 출장소는 물론 어느 출장소에서도 이갑성을 비롯한 조선인의 근무기록은 없었다.
오히려 193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국외에 거주하는 조선인 중 독립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등의 이유로 주시해야 할 인물들을 기록 발행한 <국외 용의 조선인 명부>에 이갑성의 이름이 적혀있다. 명부의 기록을 보면, 1930년대 이갑성이 상해에 거주할 당시 30년대 중반부터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40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한 기록도 있음을 볼 때, 이갑성의 일부 관련자의 증언만을 토대로 한 친일 의혹은 근거가 없다. 위 내용은 2005년 3월 1일에 삼일절 특집으로 방송한 SBS 뉴스 추적을 토대로 서술되었다. #
결국, 민족문제연구소 등 여러 방면에서 오랫동안 친일파라는 공격을 받아온 이갑성은 SBS의 심층 취재와 2006년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대회'를 통해 논박되면서 뒤늦게 친일파 누명에서 벗어났다. # # 1940년대의 이갑성의 활동에 대해서는 불투명한 부분이 있어서 일부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 시기에 그가 친일파 활동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현재까지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없는 상태나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이갑성의 이름이 빠진 것으로 보아 민족문제연구소 측에서는 이갑성의 친일 의혹 제기를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식적인 견해 표명 없이 은근슬쩍 뺀 것은 비판의 여지가 충분하다.
3.4. 강용석 등의 민족문제연구소 명예훼손에 대한 소송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만주국의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일본 제국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혈서를 쓴 사실이 있음을 주장하였다.[5] 그런데 강용석, 정미홍 등등의 인물들이 박정희가 혈서를 쓴 사실을 부정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혈서를 조작했다며 비난하였고, 이에 대해 이후 민족문제연구소가 강용석 전 의원, 정미홍 정의 실현 국민연대 상임대표 등 11명을 상대로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결과 형사소송에서는 패소[6], 민사소송에서는 승소했다.형사소송의 경우 피고들 중에서서 "사과문을 쓰며 형사조정에 응한 포레OO의 명예훼손 혐의는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북두000의 경우 합의가 안된 상황이지만 법리적으로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무혐의 처분되었고 이후 강용석도 무혐의 처분되었다.
강용석이 공개한 소장의 경우를 보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고소인 나름대로 사료를 수집하여 분석한 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였다고 하더라도, 위 서적 중 고 박정희에 대한 부분이 일체의 의문 없이 역사적 진실로 밝혀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울뿐 아니라, 고소인의 연구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는 견해도 있고, 어떠한 연구 결과에 대해 반대 의견을 다소 거칠게 표명(강용석)하였다고 하여 그 자체를 허위사실로 그 연구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업무를 방해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피의자의 위와 같은 발언은 고소인의 연구 결과에 동의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서 그(강용석의) 발언 내용도 '날조스토리가 등장한다'라는 것에 그쳐 그 내용이 사실에 관하여 구체화 되어 있지 않았고, 더구나 피의자가 자신의 발언이 사실과 다른 허위임을 인식하면서 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근거 자료가 없으므로 허위사실 적시에 관한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고, 달리 피의사실을 인정할 만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 증거불충분하여 혐의없다
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형사소송과는 다르게 민사소송은 10월 27일 강용석, 정미홍, 일베 회원 강 모 씨에게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각각 500만 원, 300만 원, 3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 해당 판결은 "재판의 쟁점은 연구소가 박정희 혈서의 실체를 조작했는지, 연구소가 근거를 갖고 썼는데 강 변호사 등 피고가 조작이라 주장해 연구단체로서 명예가 훼손됐는지 여부”[7] 라면서도 연구소가 1939년 <만주신문> 기사, 전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씨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을 근거로 혈서를 썼다고 한 만큼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강용석 등이“이를 날조라고 한 것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이탈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
3.5. 일제강점기 유적 및 분묘 훼손
전국에 산재한 일제강점기 시대 물건들을 철거 혹은 훼손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사례 1) 윤치호 영세불망비 2기 철거: 전북 진안군 부귀면에 위치한 영세불망비를 소유주인 부귀초등학교(공립이므로 국유재산)에 연구하겠다며 기증을 요구, 교장이 받아들여 철거를 시행했다. 이 철거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기초석을 망치로 부수고 철거 작업을 한 부분이다. 이후 윤치호의 후손들에 의해 반환 요구가 일자 비석을 공개된 곳에 다시 전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에서는 원래 장소에 다시 공개했다고 말했으나 원 소재지가 아닌 곳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
4. 여담
- 2013년 5월 12일 해킹을 당하여 일부 회원들의 개인 정보가 유출되었다. #
- 서울시의회의 여명 의원이 친일인명사전은 자의적인 책이라고 비판하자 여명 의원을 고소 했으나 패소했다. #
- 교육청의 승인을 받은 정식 정관과 별도로 미승인 정관을 몰래 운영하다 적발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자신들의 '회원'이 1만 3천명인것처럼 해왔으나 실제로 이들 절대 다수는 '후원자'일 뿐 '회원'은 10명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후원자'들을 대상으로 개최했던 '정기총회'도 법적으론 아무런 의미 없는 총회였으며 '실제 회원'이 참가하는 정기총회는 따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런 사실을 '후원자'들에게 알리지 않아서 그 후원자들은 자신들이 회원이라 생각해왔고 자신들이 참가한 '정기총회'도 실제론 아무 의미없는 총회이며 실제 법적 총회는 자신들 몰래 따로 열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
-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었던 2009년에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후에도 2013년 교학사 교과서 사태나 2015 개정 교육과정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 논란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나, 최근에는 예전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하는 듯 하다. 여전히 역사학적으로는 중요한 문제겠지만, 아무래도 일제강점기가 끝난지 시간이 오래 지나서 현실에서 친일 청산 문제에 대한 관심은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친일 관련 연구도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2018년에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 운영 쪽에 집중하고 있는 듯.
5. 관련 문서
[1] 임종국은 일제강점기 문인들을 연구하다가 문인들의 친일 행태를 정리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파 연구의 길로 접어들었다.[2] 동국대학교 명예교수.[3] 국가가 발간한 친일 관련 연구물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진상규명 보고서』[4] 애초에 민주당도 보수정당도 원래 뿌리는 한민당이다.[5] 당시 일본 신문의 기사가 명확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음을 명백한 사실로 취급한다. 보수우파의 경우도 비교적 상식적인 인물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시대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감싸지 이 사건 자체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극우적 인물들에 한정된다.[6] 검찰이 불기소 처리, 법원이 이에 대한 재정신청 기각[7]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판단을 떠나 민사적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로 명예훼손이 인정된다는 것. 형사판결과 상충될 수 있는 부분을 민사법원에서 일부러 비껴간 것으로 볼 수 있다.[8] 물론 박정희는 해당 동상 외에도 동상이 많았으며 이후로도 계속 동상이 설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