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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26:11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베우제츠에서 넘어옴
파일:SS-Totenkopfverbände.png 나치 독일의 주요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다네크
파일:belzec1.jpg
베우제츠의 물품 분류장(아래 수용소 구조를 나타낸 지도에서 17번 건물) 앞에서 촬영한 존더코만도들. 여타 절멸수용소들처럼 베우제츠도 내부 구조물을 찍은 사진 자료가 거의 없다.
파일:belzec memorial.jpg
베우제츠 추모지.

1. 개요2. 운영 역사3. 구조, 학살 과정4. 수용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5. 폐쇄6. 희생자 수, 생존자7.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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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우제츠 절멸수용소[1]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의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운 절멸수용소 중 한 곳으로 르부프(현 우크라이나 르비우) 근교 베우제츠에 위치했다.[2] 나치의 폴란드 유대인 절멸 계획인 라인하르트 계획에 따라 지어진 첫 번째 절멸수용소로서 1942년 3월부터 1942년 12월까지 단 9개월간 최소 43만 4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으며 1943년 6월 완전히 해체되어 사라졌다.

베우제츠는 트레블링카처럼 소련군이 당도하기 한참 전에 폐쇄되었기 때문에 증거가 거의 인멸되었고 남아있는 구조물이 없다. 그리고 베우제츠로 이송된 유대인 중 전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존더코만도로 일하던 7명뿐이었기 때문에 수용소에 대한 증언도 적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다른 절멸수용소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경향이 비슷한데, 증거가 철저히 인멸되었던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종종 '잊혀진 죽음의 수용소(Forgotten Camp)'라 불린다. 자세한 내용은 홀로코스트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문서를 참고.

절멸수용소는 산업화된 방식으로 학살을 시행했기 때문에, 이 수용소의 학살 과정을 서술할 땐 불가피하게 경영, 산업의 현장에서 쓰는 용어가 쓰여질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악행에 생산적인 활동에서 쓰이는 용어가 쓰이는 것이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이므로 이런 표현을 불가피하게 써야 할 땐 이탤릭체 혹은 볼드체로 표기한다.

2. 운영 역사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은 바르바로사 작전 전까지 그 운명이 정해지지 않았다. 1933년 나치 집권 직후부터 나치 독일 치하의 유대인들은 탄압 받아왔지만 일부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진 것을 제외하곤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경우는 적었다. 나치는 반유대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할 방법을 두고 고민했는데, 처음 나치는 점령지 내의 유대인들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따로 격리 시키거나[3] 마다가스카르 같은 오지에 대규모로 추방 시키는 안을 선택하려 했다. 하지만 여러 행정적인 이유로 실행이 어렵게 되자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부터 나치는 유대인을 절멸 시키기로 가닥을 모았고, 폴란드 이동의 지역에 아인자츠그루펜을 풀어 유대인 대량 학살을 지시했다. 그리고 기존 점령지에서도 학살이 계획되었다.

유대인을 직접 처형하던 아인자츠그루펜의 대원들이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고통 받자 기존 지역에서의 학살 방식은 가스 처형을 주된 방식으로 한 산업화된 학살이 되었다. 먼저 직할령이었던 바르테란트 제국 대관구의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1941년 10월부터 헤움노 절멸수용소를 세우기 시작했고, 10월 말엔 하인리히 힘러루블린의 총독부 SS 경찰 사령관 오딜로 글로보츠닉에게 절멸수용소 건설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루블린은 총독부 내의 약 2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을 절멸하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개시하고[4] 절멸수용소를 지을 자리를 물색했다.

파일:Holocaust Poland.png

폴란드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확대 가능. 베우제츠 위치를 확인 바란다. 총독부는 지도에 총독부라 표시된 지역(바르바로사 작전 이전 총독부 영역)과 커즌 선(붉은 선) 너머 갈리치엔 구역을 합친 영역이다.[5] 하얀 두개골은 대규모 총살이 일어난 곳 중 몇 곳을 표시한 것이다.

베우제츠는 폴란드의 두 주요 도시인 루블린르부프 중간에 있었다. 이 두 도시 주변은 폴란드 남부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던 지역이었고 베우제츠 마을엔 두 도시를 잇는 철도가 지나고 있었다. 따라서 나치에게 있어 베우제츠는 절멸수용소를 짓기 최적의 장소 중 하나였고 루블린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부는 철도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절멸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는 1941년 11월 1일 착공되어 1942년 2월 말 세워졌다. SS 내에서도 사악하기로 악명 높던 크리스티안 비르트가 12월부터 건설 지휘를 이어받았는데, 수용소 건설이 완료된 뒤 수용소장이 되어 8월까지 재직했다. 한편, 1940년 초 베우제츠엔 이미 노동수용소가 세워졌었는데,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근처의 폴란드인도 있었다. 이들은 소련과의 국경에 '오토 라인'이라는 요새 건축에 투입되었고 1940년 10월 해산되었다. 이 수용소는 후에 지어질 절멸수용소와는 어떤 연관점도 없다.

가스 학살의 아이디어는 이미 T4 작전 때부터 시험적으로 제시되었는데, 가스 처형은 헤움노 절멸수용소가 지어질 당시 절멸수용소로서는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하지만 헤움노에서는 가스실을 짓지 않고 가스 밴만 이용했기 때문에 학살 효율이 좋지 않았다. 베우제츠 건설 담당자이던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헤움노의 사례를 개선하여 절멸수용소 처음으로 가스실을 지었고, 이 가스실을 샤워실로 위장하는 아이디어 역시 비르트에게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헤움노는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의 완결된 절멸수용소라 하긴 어려웠고 기존의 시설물 여럿을 절멸수용소로 '구성'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베우제츠는 처음으로 희생자 하차, 학살, 시체 처리가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완결된 절멸수용소로서 이후에 지어지는 절멸수용소의 표본이 되었다.

처음 지은 가스실은 나무 판자로 이루어진 오두막 같은 건물로 3개의 작은 가스실이 있었다. 학살 속도는 가스 밴만 이용하던 헤움노보단 확실히 빨라서 3개월 동안 8만 명을 학살했지만 밀려드는 유대인을 모두 학살하기엔 여전히 너무 작았고, 1942년 6월 구 가스실을 허물고 6개의 가스실을 가진 콘크리트로 된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하루 최대 15,000명을 학살하던 베우제츠는 1942년 말까지 맡은 구역의 유대인들을 거의 모두 살해했고, 12월 11일을 마지막으로 베우제츠에서의 학살은 끝났다.

3. 구조, 학살 과정

파일:bmap18.jpg

1942년 5월 학살 첫 페이스 때의 수용소 구조. 확대 가능

베우제츠의 학살은 두 페이스로 나누어지는데, 나무로 된 구 가스실을 이용했던 1942년 3월부터 6월까지, 그리고 신설 가스실과 함께 수용소 구조가 크게 변한 1942년 6월부터 12월까지로 나뉜다.

베우제츠에 화차에 실려 도착한 유대인들은 하차한 뒤 역 앞 광장에서 수용소장 비르트가 확성기를 들고 하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들었다. 여기에 희생자들을 속이기 위해 악단을 동원해 환영음악회를 열었다는 증언도 있다.[6]
"여긴 베우제츠입니다. 당신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 기술을 쓸 수 있는 작업장으로 가기 전에 여기 잠시 머무를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일거리가 주어집니다. 당신들 주부들도 당신네 가족들을 먹이고 집을 깨끗하게 하는데 필요할 겁니다. 먼저, 저는 여러분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을 빨리 보낼 수 있으니까요. 질서를 지키고 위생 검사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은 목욕을 하고 여러분들의 옷을 방역 처리해야 합니다. 여성들은 머리를 잘라야 합니다." #, #
희생자들이 탈의를 하고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면 탈의실에서 밀폐된 통로를 따라 거의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샤워실'로 향했다. 경비병들은 저항의 가능성이 보이는 희생자들을 따로 끌어냈고 수용소 외딴 곳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여기까진 첫 번째 페이스와 두 번째 페이스까지 거의 같았다. 다만 두 번째 페이스에선 희생자들은 나체로 탈의실에서 가스실까지 '튜브'를 따라 걸어야 했고 이 튜브는 길이 100m의 직선 통로였다.
베우제츠는 실험실 같은 곳이었습니다.
거기 수용소를 통솔한 사람도 비르트 소장이었죠.
거기서는 상상할 수 있는 방식이란 방식은
모조리 다 시도했어요. 처음에는 착오가 있기도 했죠.
구덩이가 넘쳐나기도 하고,
SS 식당 앞 하수구에서 오물이 새기도 했고요.
식당 바로 앞에서... 악취가 진동했거든요...
SS 사람들이 지내는 막사 앞도요.

선생께서도 베우제츠에 있었습니까?[7]

아니요.
거긴 비르트 소장과 그 아래 부하들 몇 명 뿐이었습니다...
거기서 프란츠,[8] 오베르하우저,[9] 하켄홀트와[10] 별의별 걸 다 실험했죠.
이 세 사람은 구덩이로 직접 시체들을 가져다 묻기도 했어요.
거기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소장이 궁금해했거든요.
실제로 프란츠가 못 하겠다고 하니까
비르트가 채찍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하켄홀트도 마찬가지였고요. 어떤 상황인지 그려집니까?

쿠르트 프란츠 말입니까?

네. 쿠르트 프란츠요. 비르트 소장 힘이 그 정도였어요.
그렇게 쌓은 경험으로 트레블링카에 온 거였죠.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간수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의 증언.[출처]
베우제츠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른 첫 절멸수용소였던 만큼 초기엔 학살 과정에 문제가 많았다.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첫 가스실은 나무로 이루어진 오두막이었는데, 이 시설은 희생자들에게 목욕 시설로 속이는 데엔 좋았지만 밀폐가 제대로 되지 않아 처형 때마다 건물 주위로 연기가 가득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매번 문을 닫은 뒤 문틈 앞에다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렸다고 한다. 또한 각 가스실로 들어가는 호스가 막혀 건물 내 3개의 가스실 중 한두 개를 못 쓰는 경우도 있어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을 한 번에 학살하지 못해 유대인을 실은 기차를 근처에 대기 시키기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도 빠짐 없이 가동되었기 때문에 이 완벽하지 못한 가스실로도 3개월만에 8만 명을 학살했다. 유대인들이 학살되면 존더코만도들은 가스실 반대편에서 시체를 꺼내 수레에 태웠고 좁은 철길을 따라 수레를 매장 구덩이로 가져간 뒤 시체들을 매장했다. 초기엔 적은 수의 구덩이에 지나치게 많은 시체를 넣었는데, 급속히 부패하는 시체에서 나온 액체로 인해 시체들이 떠올라 구덩이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극도로 끔찍한 일도 일어났다고 한다. #[12]

파일:belzec.jpg

1942년 12월 두 번째 페이스 때의 수용소 구조. 확대 가능.

파일:belzec gas chamber.jpg

수용소에서 가장 핵심적인 시설인 베우제츠 신설 가스실. 나치는 이 시설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만적인 위장을 쳐놓았다. 입구의 양 옆에는 제라늄 꽃을 꽃은 단지 2개를 놓아두었으며, 시나고그처럼 외부엔 다윗의 별을 달았고 내부는 샤워실로 위장하였다. 외벽에는 '하켄홀트[13] 자선 재단'이란 뜻의 'Stiftung Hackenholt(슈티프퉁 하켄홀트)'라는 문구를 적어놓아 희생자들을 안 심시켰다. 건물 북쪽엔 처형용 디젤 엔진이 있는 나무 오두막이 있었다.

4. 수용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

파일:Wirth,_Christian[1].jpg

Christian Wirth (1885. 11. 24 ~ 1944. 5. 26)

수용소장이었던 친위대 대위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대단히 잔혹하고 끔찍한 인물로 자체를 매우 즐긴 것으로 평가된다. 절멸수용소 간부들에 대한 재판 당시 그를 상관으로 두었던 전 간부들은 모두 이 인간의 끔찍함에 대해 증언했는데, 수천 명의 시체가 썩어가는 지옥도 앞에서도 농담을 지껄이고 웃음을 터트리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런 한편 부하들에게 대단히 가혹한 상관이기도 했다. 또한 학살 효율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 고심했던 인물로,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건설을 지휘할 때 이후에 지어질 모든 절멸수용소들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가스실을 샤워실로 위장하는 방법, 그리고 절멸수용소들을 더 멀리 떨어진 노동 작업장으로 가는 중간에 들르는 기착지로 속이는 아이디어가 비르트에게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 인간은 T4 작전 때도 작전 전체의 검사관을 맡았는데, 이 괴물의 능력에 감탄한 나치는 이 인간을 1942년 8월까지 딱 5개월간만 수용소장으로 재직 시킨 후 라인하르트 수용소들 전체의 검사관으로 영전 시켰다. 그리고 그는 라인하르트 수용소들이 폐쇄될 때까지 각 수용소를 돌아다니며 학살 시퀀스를 개선하고 조언을 해주고 다녔다. 즉, 이 인간은 베우제츠의 학살 시퀀스, 더 나아가 모든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의 학살 과정을 완성해 준 괴물로, 비르트의 뒤를 이은 책임자도 그가 만든 시스템을 따르기만 했다. 루돌프 회스가 아우슈비츠의 유일한 수용소장이 아니었지만 학살 과정을 완성했다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의 소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크리스티안 비르트도 이런 악명 때문에 베우제츠의 소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끔찍한 성품에 대한 증언이 대단히 많은데, 그는 항상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경비병, 부하 간부, 존더코만도들을 언제나 때리고 다녔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인 경비병이 처형용 엔진을 다루는 데 애를 먹자 그의 얼굴을 채찍으로 후려치기도 했고, 간부 회의 때면 휘하 간부 누군가는 비르트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수용소 간부들은 비르트를 '끔찍한 비르트' 또는 '야만인 비르트'라 불렀고 경비병들은 그를 '슈투카(독일어로 급강하폭격기(Sturz Kampf flugzeug)의 약자)'라 불렀다고 한다. 증언이 여기서 그친다면 비르트는 그냥 쓰레기 상관 정도에 불과했겠지만 그는 수천 명의 유대인이 눈 앞에서 처형되는 와중에도, 불어터진 수천 구의 시체가 쌓인 그 자체로 지옥이 되어있는 상황에서도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진정한 악마로서 같은 학살자였던 다른 수용소 간부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공포감을 주는 사악한 인간으로 악명 높았다.

트레블링카의 소장이었던 프란츠 슈탕글의 증언에 따르면, 나치는 T4 작전을 저지르면서도 되도록 고상한 표현을 써 가며 이 계획을 위선적으로 포장했는데 슈탕글 역시도 그렇게 '교육' 받았다. 그러나 비르트만은 그런 '교육'을 비웃으면서 T4 작전을 언제나 '필요 없는 입을 없애는 일'이라고 칭했다고 했으며 대단히 역겨운 인간이었다고 했다. 1942년 9월 슈탕글이 트레블링카 수용소장으로 부임할 때 트레블링카는 전임 수용소장 에베를의 무능으로 시체 처리가 되지 않아 도처에 수천 구의 시체가 쌓인 상황이었다. 라인하르트 작전의 검사관인 비르트는 이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슈탕글에게 '이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물었다고 회상했다. 같은 학살자였음에도 학살 행위를 자신의 '일'로서 인식하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처리하려 했던 다른 괴물들에게도 비르트는 정상이 아닌 존재로 보인 듯 하다.[14]

게르슈타인 보고서에도 그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
하켄홀트 하사[15]는 엔진을 움직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르트 대위(Hauptmann)가 다가왔다. (중략) 나는 스탑워치를 보았는데 50분, 70분이 지나도 엔진은 가동되지 않았다. (중략) 분노한 비르트 대위가 하켄홀트 하사를 돕던 우크라이나인 경비병 얼굴에다 12, 13회 채찍질했다. 2시간 49분 후 디젤 엔진이 가동되었다. (중략) 28분 뒤 소수만이 살아 있었고 32분 뒤 모두 사망했다. 치의사들이 들어와 금니와 치관을 빼냈다. 그 시체들 한가운데에 비르트 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가 되어 희생자들의 금니와 귀금속으로 가득한 통을 들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 황금의 무게를 느껴보시오! 이게 어제랑 그제 얻은 것들이오. 당신은 우리가 매일 얼마나 얻는지 모를 거요. 돈, 다이아몬드, 황금들 말이오. 직접 와서 보시오!" 게르슈타인 보고서[16]

이 모든 설명을 종합할 때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라인하르트 작전의 수행에 너무나도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가 라인하르트 작전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트레블링카에서 근무했던 전 SS 하급분대지도자[17] 프란츠 수호멜(Franz Suchomel)[18]1964년의 트레블링카 재판 당시 했던 증언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크리스티안 비르트를 죽일 용기가 있었다면 라인하르트 작전은 진작에 엎어졌을 것이다. 베를린은 그토록 역겹고 사악한 에너지를 가진 인간을 더 이상 찾지 못했을 것이다.''
''If only someone had had the courage to kill Christian Wirth, then Aktion Reinhard would have collapsed. Berlin would not have found another man with such energy for evil and nastiness.''
라인하르트 계획이 종료된 후 1944년 그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서 트리에스테로 발령 받았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휴가를 가던 중 슬로베니아에서 파르티잔의 습격을 받고 제거되었다.[19]

5. 폐쇄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던 나치 입장에서 증거물인 절멸수용소는 되도록 빨리 없애야 했다.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은 엄청난 속도로 폴란드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3년 중순이 되면 폴란드에서의 절멸이 어느 정도 완료되어 있었고 나치는 라인하르트 계획을 점진적으로 종료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1943년 봄부터 가장 먼저 지어졌던 베우제츠를 먼저 폐쇄하기로 했고 약 4~5개월에 걸쳐 수용소 각 건물들을 완전히 해체했다. 그리고 나치가 카틴 학살의 현장을 발견한 직후였기 때문에, 그동안 땅에 매장했던 시신을 모두 꺼내어 소각했다. 매장으로는 학살을 은폐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시체를 소각했기 때문에 일대는 연기로 가득했으며 주변 민가의 창문에는 인간의 지방질이 들러붙었다고 한다.

SS는 수용소 해체를 마친 300명의 존더코만도들을 독일의 노동수용소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속인 뒤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보내 처형했다.[20] 수용소가 해체된 자리에는 농가가 세워졌고 이곳에 우크라이나인 SS 한 명을 가족과 함께 상주하게 했다. 이 방식은 트레블링카와 소비보르 수용소가 해체된 뒤에도 사용되었다.

6. 희생자 수, 생존자

폴란드의 대표적인 광역권이던 크라쿠프, 르부프 인근의 유대인들이 거의 대부분 베우제츠로 이송되었다.[21] 따라서 베우제츠는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에 이어 희생자 수가 3번째로 큰 절멸수용소로 알려져 있다. 전쟁 직후부터 2000년대까지 베우제츠에서의 희생자 수는 50만~60만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2000년 회플러 전보(Höfle Telegram)[22]가 공개되면서 최소 수치는 더 낮아졌다. 회플러 전보에 의하면 1942년 12월 31일까지 베우제츠로 보내진 희생자 수는 434,508명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1942년 12월 11일에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들어왔다고 하니 이 숫자는 베우제츠의 희생자 수로 가장 낮게 언급되는 수치이다. 하지만 이 수치에는 비 폴란드 유대인, 비유대인 숫자가 누락되어 있기에 보통 43만 4천 명보다 좀 더 높은 수치를 인용한다. 현재 폴란드의 베우제츠 추모 박물관에서는 45만 명을 인용하고 이스라엘 야드 바셈 박물관은 60만을 인용한다.

베우제츠에서는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에서와 달리 대규모 봉기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3] 살아남은 사람들은 간헐적으로 탈출한 사람들뿐이었다. 1942년 3월 여성들이 가스실에 들어가는 걸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혼란이 일어난 틈을 타 2명의 존더코만도가 탈출한 것을 시작으로 희생자들의 물품을 실은 화차에 숨어 탈출하거나 하수구에 숨었다가 탈출하는 등 약 50여 명이 베우제츠에서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추적 당해 살해 당하면서 전쟁 끝날 때까지 7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 중 폴란드 인민정부의 나치 전쟁범죄 수사 위원회에 자신들의 경험을 증언한 사람은 단 2명, 루돌프 레더와 하임 히르슈만이었다. 하지만 히르슈만은 전후 인민정부의 안보부서에서 일하다 반 공산주의 레지스탕스에 의해 암살되면서 베우제츠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은 레더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트레블링카에서는 67명의 존더코만도가 살아남아 그나마 증인이 많았지만 베우제츠의 경우엔 증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아우슈비츠가 중간에 해방되어 증언자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극단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7. 전후

첫 번째 수용소장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상술했듯 전쟁 중에 제거되었고 2번째 수용소장 고틀리프 헤링(Gottlieb Hering)은 전후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슈테틴 성[24]에 마련된 임시 병원에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병사했다. 나머지 간부들에 대한 재판이 뒤따라야 했겠지만 이 재판은 다른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 간부들의 경우처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 베우제츠의 경우 증거가 거의 완벽히 인멸된 데다 당시의 경험을 증언해 줄 생존자가 절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화장된 재를 묻은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를 발굴했음에도 한동안 잊혀졌다. 현장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없어서 화장 구덩이가 파헤쳐진 채로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베우제츠 마을의 선생님과 학생들이 이곳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보존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동서독 정부가 나치 전범에 대한 본격적인 추적을 개시하면서 마침내 베우제츠는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1963년 8월 서독 뮌헨 1구역 재판소에서 처음으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간부들을 대상으로 베우제츠 재판이 열렸다. 재판은 1965년 1월까지 진행되었는데 놀랍게도 기소된 8명 중 7명이 상부의 압박에 의해 악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무죄 훈방되었고 SS와 경찰 간 중재자였던 요제프 오베르하우저(Josef Oberhauser)만이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훈방된 7명 중 5명은 1965년 9월 시작된 소비보르 재판에도 기소되었는데, 5명 중 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60년대에 베우제츠의 터는 울타리로 둘러졌고 처음으로 추모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여전히 자료가 부족해서 울타리는 베우제츠의 영역을 제대로 두르진 못했다. 게다가 베우제츠가 있던 자리에 상업 개발이 시작되기도 하는 등 터 일부가 훼손되었고 사람도 거의 찾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제대로 관리되기 시작한 트레블링카 추모 박물관과 달리 베우제츠의 터는 공산정권 시절 내내 잊혀지고 방치되었다.

공산정권이 붕괴된 뒤 상황이 바뀌었는데 많은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에 점차 관심을 가지면서 베우제츠의 위치도 알아내 개인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 정부에 수용소 터가 방치된 것에 대해 항의했고 1990년대 말에야 절멸수용소의 터를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과 더불어 베우제츠의 상세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가 시작되었다. 전후 수용소 터에 세워진 건물들은 보상을 해준 뒤 철거했다. 2004년 이곳은 마이다네크 추모 박물관의 분관으로 지정되었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관이 세워졌다. 홀로코스트 당시 베우제츠에서 가족을 잃은 미국의 유대인 생존자 마일즈 러맨(Miles Lerman)[25]은 추모관 건립 당시 무려 5백만 달러를 기부해 폴란드 정부에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 어린 아이로서 르부프 게토에 살다 베우제츠에 끌려갈 뻔 했으나 '정의로운 폴란드인들(Polish Righteous)'이 숨겨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캐나다의 유대인 생존자 아니타 엑스타인(Anita Ekstein)[26] 역시 거금을 기부해 주는 등 수많은 유대인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추모관이 완공되었다. 현재 추모관의 입구에는 히브리어, 폴란드어, 영어로 이렇게 적혀있다.[27]
THIS IS THE SITE OF THE MURDER
OF ABOUT 500 000 VICTIMS
OF THE BELZEC DEATH CAMP
ESTABLISHED POR THE PURPOSE OF KILLING
THE JEWS OF EUROPE, WHOSE LIVE WERE BRUTALLY TAKEN
BETWEEN FEBRUARY AND DECEMBER 1942
BY NAZI GERMANY

EARTH DO NOT COVER MY BLOOD,
LET THERE BE NO RESTING
PLACE FOR MY OUTCRY!
JOB 16:18

MIEJSCE MĘCZEŃSKIEJ ŚMIERCI
OKOŁO 500 000 OFIAR
OBOZU ZAGŁADY ŻYDÓW W BEŁŻCU
ZAMORDOWANY W OKRESIE
OD LUTEGO DO GRUDNIA 1942 ROKU
PRZEZ HITLEROWSKIE NIEMCY

ZIEMIO, NIE KRYJ MOJEJ KRWI,
IŻBY MÓJ KRZYK NIE USTAWAŁ!
KSIĘGA HIOBA 16,18

이곳은 50만 명이 살해된 학살의 현장 베우제츠 절멸수용소이다.
학살을 목적으로 세워져 나치 독일에 의해 1942년 2월부터 12월까지
유럽의 유대인들이 야만적으로 살해되었다.

땅이여, 내 피를 숨기지 말고,
그 피가 나를 위해 계속 부르짖게 해 다오!
욥기 16:18

[1] 국내에서는 '베우제츠'를 영어식 혹은 독일어식으로 읽은 '벨제크/벨체크' 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2] 현재 베우제츠 수용소의 터는 우크라이나폴란드 국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폴란드 영토에 남아있다.[3] 베우제츠 근처의 대도시 루블린서는 위 문단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근교 지역에 추방된 유대인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는 '니스코 보호 구역(Nisko 'reservation')'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나치는 여기서 약 95,000명의 유대인을 살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바르바로사 작전과 함께 폐기되었고 건설 작업도 중지되었다.[4] 대상이 총독부 내의 유대인만은 아니었고 총독부 경계 바로 밖의 비아위스토크 같은 대도시도 포함되었다. 그런 한편 총독부 내의 유대인이 직할령에 있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가기도 하는 등 절멸 구역이 칼 같이 구분된 건 아니었다.[5]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총독부 영역에 추가되었다.[6] 출처-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9장 6편 학살.[7] 이텔릭체 부분은 인터뷰어 클로드 란츠만의 질문이다.[8] 친위대 소위 쿠르트 프란츠를 의미한다. 트레블링카의 부소장으로 오기 전 베우제츠에서 일했다.[9] 베우제츠 경비대장이었던 친위대 상사 요제프 오베르하우저(Josef Oberhauser)를 의미한다.[10] 친위대 하사 로렌츠 하켄홀트(Lorenz Hackenholt)를 의미한다. 하술하겠지만 베우제츠의 가스실을 설계한 장본인이다.[출처] 클로드 란츠만, "쇼아", 필로소픽, 95 ~ 96p.[12] 1차 출처는 기타 세레니가 쓴 프란츠 슈탕글의 전기&증언록인 'Into That Darkness: An Examination of Conscience'이다.[13] 수용소 간부였던 하켄홀트 하사를 의미. 가스실을 설계한 장본인이다.[14] 프란츠 슈탕글이 1970년 종신형을 선고 받자 전기작가 기타 세레니는 그를 6개월간 취재했다. 그때 슈탕글은 자신의 '일'에 대한 상세를 많이 증언했는데, 자신과 많이 얽혔던 상관 크리스티안 비르트에 관한 증언도 했다. 슈탕글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이곳 참조 바란다.[15] Unterscharfuhrer. SS 하급분대지도자.[16]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나치당 입당 전 독일 유수의 대학인 라인 베스트팔렌 아헨 공과대학교를 나왔다. 1941년 초 SS에 입대했는데, 이는 T4 작전으로 정신지체를 앓던 자신의 누이가 처형되자 SS 내부의 일을 직접 알기 위해 일부러 자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튼 그는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942년 중순에는 절멸수용소의 방역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이 되었다. 게르슈타인은 베우제츠와 트레블링카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고 아우슈비츠에 치클론 B를 납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1942년 8월 19~20일 베우제츠와 트레블링카를 직접 방문한 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베우제츠에서는 아래에 기술한 것처럼 3,000명의 유대인 처형을 직접 목격했고 바로 다음날 견학한 트레블링카에서는 학살을 직접 목격하진 않았지만 광장에 엄청나게 쌓인 희생자들의 옷가지와 물품들을 목격했다. 견학 후 며칠 뒤 그는 바르샤바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스웨덴 외교관 예란 본 오테르를 만나 그가 본 것을 들려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국제사회에 퍼뜨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한편 바티칸,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와도 접촉해 홀로코스트 사실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등 1945년 전까지 그의 노력은 거의 어떤 효과도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를 통해 그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고 1945년 4월 그가 연합국에 투항하자 연합국은 그가 목격한 사실을 보고서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따라 게르슈타인 보고서가 만들어져 홀로코스트를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행적 덕분에 그는 SS 소속이었음에도 프랑스에서 동정적인 대우를 받았다. 얼마 뒤 그는 셰르셔 미디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안타깝게도 다른 나치 전범들과 똑같이 취급 받고 말았고 결국 7월 25일 감방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러나 그의 증언이 담긴 게르슈타인 보고서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어 헤르만 괴링한스 프랑크를 비롯한 전범 여럿을 지옥으로 보냈고,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서도 증거로 채택되어 아이히만을 지옥으로 보내는 데 기여했다.[17] Unterscharfuhrer. 하사에 대응.[18] T4 작전에 참여했고 트레블링카 폐쇄 후엔 아드리아해 일대에서 파르티잔 소탕을 명목으로 한 학살에도 참여했다. 트레블링카의 증거인멸 때문에 전후 꽤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하지만 결국 1964년 재판대에 올랐는데 학살의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진 않았다고 인정되어 6년형만을 선고 받았다. 오랜 기간이 지나있었기 때문에 트레블링카 간부에 대한 처리는 아우슈비츠의 경우와 달리 대단히 찝찝했다.[19] 프란츠 슈탕글은 종신형을 선고 받은 뒤 한 인터뷰에서 나치의 상부가 증거인멸 차원에서 절멸수용소 간부들도 사라지길 원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의도에서 나치는 병사에게나 간부에게나 가장 위험한 전선이었던 파르티잔 토벌 임무를 맡겼고, 이 관점에 따른다면 비르트는 나치의 의도대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라인하르트 작전에 실무를 담당했던 간부들은 대부분 트리에스테로 발령 받았다.[20] 존더코만도들은 당연히 자신이 어떻게 될 지 알았다. 그들은 소비보르에 도착하자 마자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 다녔고 소비보르의 경비병들에게 모두 사살 당했다.[21] 나머지 일부는 아몬 괴트가 소장으로 있던 프와쇼프 노동수용소로 보내지거나 벨라루스-러시아에서처럼 대규모 총살로 학살되었다.[22] SS 돌격대지도자 헤르만 회플러가 1943년 1월 11일 베를린의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보낸 일급 기밀의 전보로 1942년 12월 31일까지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세워진 절멸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 수를 보고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이 입수한 독일의 자료들 중에서 2000년 기밀해체되어 공개되었다. 상당히 암호화 되어있어서 각 수용소들은 이니셜로만 표기되었다(예를 들어 트레블링카는 T, 베우제츠는 B). 한편 다른 수용소로 보내진 희생자 수를 보면, 12월 31일까지 마이다네크로는 24,733명, 소비보르로는 101,370명, 트레블링카로 713,555명이 보내져 1942년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총 127만 4166명이 라인하르트 절멸수용소들로 보내졌다.[23] 폴란드 국내군의 한 게시판에는 1942년 6월 13일 베우제츠에서 봉기가 일어나 SS 6명을 죽였다고 하나 다른 자료들에는 이 내용이 전혀 기록되지 않아 단순히 사기 진작 차원에서 만들어낸 내용으로 보인다.[24] 이름만 슈테틴 성이지 슈테틴에 있진 않았다.[25] 러맨의 가족은 루블린 근교에 살면서 큰 밀가루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치 침공 뒤 르부프로 피신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러맨은 비니키 노동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족들은 르부프 게토에 수용되었다가 베우제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본인은 노동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끝까지 숨어 지내는 데 성공한 덕분에 살아남았다.[26] '산 자들의 행진' 캐나다 지부의 의장이었다.[27] 문서 도입부의 사진에는 영어 부분이 잘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