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808080><tablebgcolor=#808080> | 보리스 옐친 관련 문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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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버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비치 옐친 · 어머니 클라브디야 바실리예브나 옐치나 · 아내 나이나 이오시포브나 옐치나 ·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 ·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 | ||
역대 선거 |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
관련 정치인 | 빌 클린턴 · 블라디미르 푸틴 | ||
사건 · 사고 |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 8월 쿠데타 | ||
관련 전쟁 | 제1차 체첸 전쟁(1994~1995) ·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 ||
기타 | 전략무기감축협정 | ||
평가 | 평가 | ||
보수주의 |
1. 개요
보리스 옐친의 생애를 기록한 문서.2. 초기
옐친은 1931년 2월 1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랄주 붓카군(現 러시아 연방 스베르들롭스크주 탈리차군)에 위치한 붓카(Бутк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건축 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뛰어난 흡인력과 업무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1976년에 스베르들롭스크주 지구당의 제1서기가 되었고, 1981년, 26차 당대회에서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후 1985년 4월, 당중앙위원회 건설부장에 임명되면서 모스크바로 불려오게 되는데, 옐친은 자신이 최소한 건설담당 서기에 임명되어야 한다고 여겨 매우 불만스럽게 여겼고, 결국 1985년 7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에 선출되었으며, 훗날 그와 원수가 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지도자가 되면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을 등용하여 빅토르 그리신의 후임으로 모스크바시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시정을 맡으면서 1986년 2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에서 물러났으며, 대신에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86년 3월, 27차 당대회에서 당연히 정치국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옐친은 모스크바시 지구당의 제1서기 시절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보수파들의 반발에 1987년에 해임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아 올려갔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1]그 결과 1989년 소련 첫 자유 총선거 때 모스크바 선거구에 출마, 89%의 득표를 얻어 초압승을 거두었고, 그의 동료들도 대거 의원직에 당선되면서 보수파의 세를 누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급진적인 노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여, 절충 개혁을 주장하던 고르바초프와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결국 1990년 공산당을 탈당했다.[2] 원래는 고르비가 급진 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 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개혁파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고르바초프가 절충 개혁을 주장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몰아붙이면서 공산당을 탈당하게 된 것. 이 과정에서 그의 주벽에 대한 얘기가 보수파 사이에서 나왔지만 옐친의 인기는 더더욱 높아졌다. 1990년 5월에 옐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SFSR)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취임하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이 당시의 보리스 옐친은 의전상으로 부총리급 국무위원에 해당되어야 하지만, 경제개혁의 실패로 고르바초프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듭났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인 러시아를 다스리는 부총리급 국무위원을 재임하고 있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그것의 무게감은 엄청났다.
당시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 위주의 중앙집권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화국 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공산당 보수파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같은 공화국 정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포섭했고, 그런 혜택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옐친이었다. 옐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1991년 6월 12일에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58%만큼 득표했으니, 무소속 후보로서 국내 최초로 러시아 SFSR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3. 러시아 SFSR 대통령
1991년 8월 보수파들이 8월 쿠데타를 일으키자 옐친은 러시아 시민들에게 실력 행사를 호소, 보수파의 쿠데타를 막아 내면서 소련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였던 겐나디 야나예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Владимир Крючков, 1924년 2월 29일 ~ 2007년 11월 23일) 등 두 세력 모두 쿠데타로 인해 몰락한 상황이었고, 중앙정부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옐친은 이 공백을 이용해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련 공산당을 압박했지만 정국은 옐친이 원하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갔다. 옐친은 연방의 유지는 찬성했으므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반대했었다. 1991년 8월말 옐친은 '크림반도와 돈바스 탄광 지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 분쟁 대상이 될 수 있고 만일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주장하면 국토를 분할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으며 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단장을 맡은 고위급 대표단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해서 우크라이나에 독립에 대한 입장을 바꾸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옐친에겐 그런 위협을 실현할 자원이 없었다.[3] 이 때의 위협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방침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옐친의 위협은 결국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실현됐다.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이후 옐친은 1991년 12월 8일 벨라루스 벨라베자의 사냥 휴양숲에서 크라우츠크를 만났을 때 한 번 더 새로운 연방 조약안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크라우추크는 크림 반도와 동부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모든 주의 국민투표 결과를 언급하며 이를 거부했다. 우크라이나가 연방조약안에 서명을 끝내 거부하자 옐친도 우크라이나 없이 서명할 수는 없다면서 연방안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4] 그 이후 벨로베자 조약이 선언됐다.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인구에서 중앙아시아 무슬림 비율이 높아져 옐친에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1991년 12월 21일 옐친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등의 지도자와 벨라루스에 있는 벨라베자 숲(Белавежская пушча, Biełaviežskaja Pušča)에서 만나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했다. 조약 체결 이후, 12월 12일에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는 1922년의 소련 수립 조약을 폐기하였고, '신연방 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사임하게 되었다. 옐친이 수장으로 있는 러시아 SFSR도 소련에서 독립하여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되었다.
4. 러시아 연방 대통령
4.1. 보리스 옐친 행정부
자세한 내용은 보리스 옐친 행정부 문서 참고하십시오.5. 사망
1999년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옐친은 푸틴에게 사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푸틴은 이러한 옐친의 요구를 수용해 퇴임한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이에 보답하였다.[5] 그리고 푸틴 정권이 승승장구하면서 옐친은 푸틴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일 없이 잘 지내며 한가롭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 향년 7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놈의 술 때문에 건강이 나빠서 죽었다고 한다. 옐친은 살아 생전 지독한 주당이었다. 가족으로는 아내 나이나와 장녀 옐레나와 차녀 타티아나, 외손자 3명이 있다.그 동안의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옐친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말 그대로 국가 지도자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에 비하면 격이 살짝 낮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러시아의 위인들이 많이 묻힌 곳으로 유명하며 결정적으로 옐친은 소련의 지도자가 아닌 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의 지도자를 역임했던 사람이다. 옐친 사망 15년 후, 악연의 연속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같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묻히게 되었다.
6. 개인사
러시아인들 중에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옐친은 단순히 주당이나 애주가 수준을 넘어 알코올 중독자 수준이었다. 주변 인사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보드카와 오이[6]를 찾았다고 증언할 만큼 술에 쩔어 살았다. 심지어 TV로 신년사를 진행할 때에도 맨 마지막에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할 정도였다.1995년 신년사, 5분 4초부터 해당 장면이 나옴 농담 삼아 보리술 옐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처럼 술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옐친의 추태는 심각했다. 얼마나 술을 마셔 댔는지, 공식 석상에서까지도 술에 취해서 추태를 부리는 등 러시아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을 정도.
대표적인 예로, 1994년 9월 아일랜드 총리와 회담할 예정으로 섀넌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때 이미 기내에서 만취해 있었던 탓에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해 전용기가 섀넌 상공을 빙빙 돌던 끝에 회담이 연기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로 한동안 아일랜드에서는 '섀넌 위를 돈다'(circling over Shannon)가 고주망태가 됐다는 완곡어법으로 쓰였다. 해당 사건을 다룬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
1994년 8월 독일을 방문했을 때도 공식 행사 때 술에 취해 있었고 행사 중에 지나가다가 갑자기 독일 경찰 악대 지휘자의 지휘봉을 빼앗더니 본인이 직접 지휘했다. 지휘봉을 빼앗기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다가, 결국 뒤에서 적당히 코칭해주고 어울려주는 지휘자와, 지휘자 없이도 어떻게든 카츄사를 잘 연주해 내는 경찰악대의 모습도 재미있다. 이후 독일 어린이합창단이 러시아 민요를 부르자 갑자기 나오더니 앞에 있던 마이크를 뽑아들고 술에 취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이 장면은 독일 전역에 생중계되었고, 각국의 해외토픽이 되었다.
1995년 10월, 클린턴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러시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서는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백악관 문 앞까지 나간 적도 있었다.[7] 당연히 이걸 본 경호원들과 비서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건은 국가 기밀로 취급되어 언론에는 비공개 처리되었다가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되면서 까발려졌다.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이번 옐친과 클린턴의 미팅이 재앙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기사를 썼던 기자들에게 '당신들이 재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발언해 클린턴의 폭소를 터뜨리고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때 역시 화이트 와인을 진탕 마시고 만취해 있던 상황. 그나마 이 사건은 분위기를 띄워준 위트있는 농담에 가까워서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외교 쪽에서 이런 짓궂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것 역시 흔한 일이니까.
원본은 검지를 펴고 있는 사진인데, 클린턴에게 뻐큐하는 사진으로 합성되었다. 근데 이 사람이 하도 술 먹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한 나머지 이 사진조차 합성이 아니라 진짜로 아는 사람도 많다.
그 덕에 옐친의 국제적 이미지는 대폭 추락했다. 측근들은 이 사람이 술 취해서 부린 추태를 수습한다고 애를 먹었다. 그 덕인지 말년에는 하도 병을 많이 달고 다녀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소리를 들었다. 그 외에도 온갖 기행이란 기행은 다 벌리고 다녔는데, 집권 초기에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또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1년에는 음주운전을 한 전과도 있다. 기사.
사진은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로스토프에서의 선거 유세 중 춤을 춘 사진. 당시 옐친이 선거에서 시도한, 일종의 친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이 사진은 1996년 올해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영상 자료로도 매우 확실하게 남아 있다. 물론 이 때도 술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옐친은 떡대가 상당했으며 키 187cm의 장신에 거구였다. 외국인들 입장에선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겠으나, 술에 관대한 러시아의 특성상 의도한 대로 친서민적인 이미지를 통한 지지율 상승 효과는 있었다. 이는 만취했다는 점을 빼면, 외국에서도 서민들에게 친밀감을 주기 위해 많은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이다.
말년의 삶은 황금우리에 갇힌 죄수. 옐친 자신이 고르바초프를 농락했던 것처럼 이후로 옐친 자신도 푸틴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게 되는데 고르바초프를 사실상 연금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옐친 자신도 푸틴에 의해 똑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는데 옐친을 믿지 않는 푸틴은 통화도청, 방문객 통제 등을 하며 옐친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면책 특권이 감옥에 보내지 않는 것이지 그 외에 감시, 도청 등등의 행동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에 권좌에서 멀어진 옐친을 가두고 감시하는게 얼마나 효과를 봤는지는...[8]
그럼에도 옐친은 끝까지 공식적으로는 계속 푸틴을 지지했으나, 옐친의 말년 시절에 찍힌 위 동영상을 보면 2000년 대선에서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푸틴의 당선이 유력하자 가족들은 기뻐하지만 본인은 별로 감흥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나, 2001년 새해가 밝자 TV에서 본인이 집권했을 때의 국가인 러시아 애국가가 아닌 소련 국가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한 새 국가가 연주되자 대놓고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등 말년에 그가 푸틴에게 힘없이 러시아 연방의 정권을 넘겨 준 것을 후회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정황이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술은 끊지 못하고 계속 마셔댔다. 어쩌면 이후의 러시아가 어떤 길을 걸을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하여 술이라도 마셔서 그 시름을 달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1] 젊은 시절에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을 해서 여러 차례 중요 당직을 맡으며 뛰어난 업무로 이름을 날렸지만, 반대로 소련 공산당의 부패와 무능을 눈으로 보았기에 그 시점부터 공산당에 대한 실망감과 회의감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2] 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 내의 급진 개혁파 관료들도 옐친을 따라서 전부 탈당해버린다.[3] 세르히 플로히,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허승철 역, (서울 : 한길사, 2022), p.548[4]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p.550.[5] 옐친은 이미 대통령일 때에도 임기 중에 많은 뇌물을 받고 부정 축재를 했다는 당시 검찰의 폭로가 있어서 제1야당인 공산당이 재집권할 경우 이걸로 건수를 잡아 퇴임하자마자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6] 러시아에서 절인 오이(Солёные огурцы)는 살로(Сало, 돼지 비계)와 더불어서 보드카와 함께 가장 흔하게 먹는 술안주이다. 여기에 좀 더 사치를 부리면 염장 연어알과 같이 먹고, 부자들은 캐비어를 술안주삼아 먹는다.[7] 빌 클린턴과의 퇴임 후 인터뷰를 담은 책 'The Clinton Tapes'에 의하면 정확히는 2번 정도 난동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난동은 백악관 앞 도로에서 만취한 상태로 잠옷만 입고 택시라고 소리쳐대고 있었다고 한다. 사유는 택시를 타고 피자를 먹으러 가고 싶다는 이유로(…). 클린턴에 의하면 결국 피자를 먹는데는 성공했다고. 두번째 난동 역시 만취한 상태에서 백악관 내 숙소 뒷문으로 들어가려다 미국 대통령 경호팀 & 러시아 대통령 경호팀 양쪽 요원 모두에게 불법침입자로 오인당한 것. 다행히 큰 소동까진 가지 않았다고 한다. 택시와 피자로도 어질어질한데 과연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8] 옐친 정권 시절 공직자를 맡았던 우익들을 옐친으로부터 떨어지게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포섭하는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러시아 우익들은 대다수가 친푸틴 성향으로 전향해 통합 러시아에 합류했고, 보리스 넴초프나 야블로코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같이 푸틴에 협조하지 않고 자유주의 성향을 고수한 소수의 우파 세력들은 주류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