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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6:43:15

보리스 옐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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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08080> 일생 생애
가족 아버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비치 옐친 · 어머니 클라브디야 바실리예브나 옐치나 · 아내 나이나 이오시포브나 옐치나 ·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 ·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
역대 선거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관련 정치인 빌 클린턴 · 블라디미르 푸틴
사건 · 사고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 8월 쿠데타
관련 전쟁 제1차 체첸 전쟁(1994~1995) ·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
기타 전략무기감축협정
평가 평가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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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초기1.2. 대통령
2. 개인사

1. 개요

보리스 옐친의 생애를 기록한 문서.

1.1. 초기

옐친은 1931년 2월 1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랄주 붓카구(現 러시아 연방 스베르들롭스크주 탈리차구)에 위치한 붓카(Бутк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건축 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뛰어난 흡인력과 업무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1976년에 스베르들롭스크주 지구당의 제1서기가 되었고, 1981년, 26차 당대회에서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1985년 7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에 선출되었으며, 훗날 그와 원수가 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지도자가 되면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을 등용하여 모스크바시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시정을 맡으면서 1986년 2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에서 물러났다. 옐친은 모스크바시 지구당의 제1서기 시절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보수파들의 반발에 1987년에 해임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아 올려갔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1]

그 결과 1989년 소련 첫 자유 총선거 때 모스크바 선거구에 출마, 89%의 득표를 얻어 초압승을 거두었고, 그의 동료들도 대거 의원직에 당선되면서 보수파의 세를 누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급진적인 노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여, 절충 개혁을 주장하던 고르바초프와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결국 1990년 공산당을 탈당했다. 원래는 고르비가 급진 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 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개혁파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고르바초프가 절충 개혁을 주장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몰아붙이면서 공산당을 탈당하게 된 것. 이 과정에서 그의 주벽에 대한 얘기가 보수파 사이에서 나왔지만 옐친의 인기는 더더욱 높아졌다. 1990년 5월에 옐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취임하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이 당시의 보리스 옐친은 의전상으로 부총리국무위원에 해당되어야 하지만, 경제개혁의 실패로 고르바초프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듭났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인 러시아를 다스리는 부총리급 국무위원을 재임하고 있다는 현실을 바탕으로 그것의 무게감은 엄청났다.

당시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 위주의 중앙집권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화국 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공산당 보수파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같은 공화국 정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포섭했고, 그런 혜택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옐친이었다. 옐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1991년 6월 12일에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58%만큼 득표했으니, 무소속 후보로서 국내 최초로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2. 대통령

파일:attachment/소련 보수파 쿠데타/thisisrussia.jpg
1991년 8월 보수파들이 8월 쿠데타를 일으키자 옐친은 러시아 시민들에게 실력 행사를 호소, 보수파의 쿠데타를 막아 내면서 소련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였던 겐나디 야나예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Владимир Крючков, 1924년 2월 29일 ~ 2007년 11월 23일) 등 두 세력 모두 쿠데타로 인해 몰락한 상황이었고, 중앙정부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옐친은 이 공백을 이용해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련 공산당을 압박했지만 정국은 옐친이 원하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갔다. 옐친은 연방의 유지는 찬성했으므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반대했었다. 1991년 8월말 옐친은 '크림반도와 돈바스 탄광 지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 분쟁 대상이 될 수 있고 만일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주장하면 국토를 분할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으며 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단장을 맡은 고위급 대표단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해서 우크라이나에 독립에 대한 입장을 바꾸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옐친에겐 그런 위협을 실현할 자원이 없었다.[2] 이 때의 위협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방침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옐친의 위협은 결국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실현됐다.푸틴:옐친씨 지켜봐줘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이후 옐친은 1991년 12월 8일 벨라루스 벨라베자의 사냥 휴양숲에서 크라우츠크를 만났을 때 한 번 더 새로운 연방 조약안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크라우추크는 크림 반도와 동부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모든 주의 국민투표 결과를 언급하며 이를 거부했다. 우크라이나가 연방조약안에 서명을 끝내 거부하자 옐친도 우크라이나 없이 서명할 수는 없다면서 연방안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3]그 이후 벨로베자 조약이 선언됐다.

1991년 12월 21일 옐친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등의 지도자와 벨라루스에 있는 벨라베자 숲(Белавежская пушча, Biełaviežskaja Pušča)에서 만나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했다. 조약 체결 이후, 12월 12일에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는 1922년의 소련 수립 조약을 폐기하였고, '신연방 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사임하게 되었다.

새 러시아의 대통령이 된 옐친은 경제 개혁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그나마 간신히 지탱되던 경제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다. 원래 러시아 경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추진한 경제 자유화의 후유증을 떠안으면서 거의 파산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4]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Егор Гайдар, 1956년 3월 19일 ~ 2009년 12월 16일)가 추진한 경제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예금동결과 가격 자유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실패해 버렸다.

사실 고르바초프 시절 추진한 가격 자율 지정화[5]로 인해 이미 후유증이 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가이다르의 개혁은 너무 조급하고 낙관적이었다. 가격지정 자율화는 국영기업들의 생산성을 늘릴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되려 기업들은 국영상점에서 팔아야 될 물건을 농민시장에 내다파는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값싸게 물건을 사려면 발품을 수시로 파는 것이 일상이 되는 등 유통구조가 왜곡되었다. 가이다르는 기업들이 난잡한 유통구조를 이용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행태나 타 동유럽 국가에서 가격자유화로 인한 임금 및 자산손실이 엄청났던 점을 감안하지 않고 가격자유화를 시행한 결과 물가를 수십배 이상 폭등시켰다. 소련 루블의 가치는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이후 물가를 잡겠다고 시행한 예금동결까지 겹쳐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산손실과 실질임금 하락으로 빈곤층이 되어버렸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구 소련에 속한 나머지 14개국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이다르의 경제 개혁 실패로 러시아의 GDP는 추락했고, 소련 시절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던 수많은 국영기업, 공장, 콜호즈들과 연구소들은 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되면서 몰락했으며 예금은 초인플레이션과 예금동결로 휴지조각이 되고야 말았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경제 주체들이 사라지고 예금이 휴지조각으로 변하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은 임금체불과 사회복지예산 삭감까지 겹치며 빈곤과 실업의 늪에 빠져야했으며, 오직 소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모든 부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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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옐친은 재신임에 성공한 직후 9월 21일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기존 소련 체제의 잔재였던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를 폐지하고 상하원을 신설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이에 다수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등이 9월 23일 러시아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자, 분노한 옐친은 10월 4일 모스크바로 육군 병력을 소집했고, 제4근위전차사단T-80 전차들을 데려다 국회의사당을 포격해 버렸다. 18분 30초부터 나온다.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항목 참조.

2년 만에 전차 앞에서 맞서던 입장에서 전차를 끌고 가서 포격하는 입장이 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 군부가 옐친을 지지하면서 옐친은 빠르게 상황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가 나면서 러시아 국민들은 옐친에게 크게 실망했다.[6] 결국 그 해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옐친파 정당은 고작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으며, 극우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1995년 12월 의회에서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었다. 11%로 자유민주당이 2당을 차지했으며 10%의 여당 '러시아 - 우리집'[7]은 3당에 그쳤다. 하지만 비례대표제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순 없었고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8]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은 심장마비에도 불구하고[9] 다양한 이미지 플레이로 초반 지지율 6%에서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를 54%대 41%로 14% 가량 앞서며 승리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 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 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올리가르히(재벌)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범죄적 약속을 했다. 그 같은 조치는 러시아 내에서 올리가르히의 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가즈프롬이나 루살 등 에너지나 광물 관련 회사들 등 그 나름대로 흑자를 벌어들이는 사업이 많았는데,[10] 이런 사업체들이 모두 소련 내 관료나 시장원리에 밝았던 전직 공산관료들이나 권력 핵심부에 있던 정부 관리에 넘어감으로써 벼락부자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들 중 몇몇은 옐친 집권 몇년만에 세계적인 부호가 될 만큼 큰 재산을 모았다. 이런 벼락부자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보리스 베레좁스키로만 아브라모비치 등이 있다. 소련 시절에는 부동산 및 생산 수단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모을 수 있는 재산은 예금이 전부였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서방 기준으로 수천 달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옐친 집권 하에서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2, 3년 만에 수조에서 수십조원의 자산가가 된다.

게다가 분리 독립을 선포하려던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제압하기 위해 당시 체첸 지도자였던 조하르 두다예프와 협상을 거부하고 무리하게 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체첸군은 아슬란 마스하도프(Аслан Масхадов, 1951년 9월 21일 ~ 2005년 3월 8일) 같은 전직 소련군 출신 인사들에 의해 훈련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11]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그로즈니 시로 진입했다가 체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12] 1996년 샤밀 바사예프가 주도한 부됸놉스크 병원 인질극과 체첸군의 그로즈니 재탈환으로 체첸군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1996년 하사뷰르트 협정을 맺고 굴욕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면서 체첸에 국가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준 다음 물러났다. 사실 러시아군으로써는 붕괴 이후 군 조직이 약화되고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체첸에 투입되었으니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개 지방이었던 체첸에 패배한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8년 러시아 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미 옐친의 권위는 잦은 실정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탄핵 직전에까지 몰렸다가 겨우 회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 8월에는 건강까지 좋지 않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다. 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도 없었던 옐친이 마지막으로 내던진 승부수였는데, 이후 건강 이상으로 물러난 옐친을 대신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푸틴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체첸을 공격, 옐친이 5천 명 이상을 죽게 만들고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을 겨우 2,500여 명의 전사자만으로[13] 러시아군도 큰 피해를 입긴했지만 10년 가까이 지지부진했던 전쟁을 신임 총리인 푸틴이 체첸 반군을 남김없이 쓸어버리며 순식간에 매듭짓자 푸틴은 국민들 사이에서 일약 깜짝 스타로 등극하게 되었다. 여당의 지지율 역시 자연스레 다시 회복되었다. 그 해 12월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하였고, 총선에서 선전한 대가로 옐친은 푸틴을 차기 대권 주자로 내정하였다.

옐친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 해 말인 12월 31일, 대국민 신년담화에서 건강 문제[14]와 함께 자신의 실정에 대해 사과하면서 임기를 아직 6개월이나 남긴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사임을 선언했다. 대통령 직무는 푸틴 총리에게 위임되었고 이듬해에 푸틴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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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크렘린을 떠날 당시 후임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악수하는 모습.

한편 1999년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옐친은 푸틴에게 사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푸틴은 이러한 옐친의 요구를 수용해 퇴임한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이에 보답하였다.[15] 그리고 푸틴 정권이 승승장구하면서 옐친은 푸틴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일 없이 잘 지내며 한가롭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 향년 7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놈의 때문에 건강이 나빠서 죽었다고 한다. 옐친은 살아 생전 지독한 주당이었다.[16] 가족으로는 아내 나이나와 장녀 옐레나와 차녀 타티아나, 외손자 3명이 있다.

그 동안의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옐친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말 그대로 국가 지도자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에 비하면 격이 살짝 낮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러시아의 위인들이 많이 묻힌 곳으로 유명하며 결정적으로 옐친은 소련의 지도자가 아닌 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의 지도자를 역임했던 사람이다. 옐친 사망 15년 후, 악연의 연속이던 고르바초프도 같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묻히게 되었다.

2. 개인사

러시아인들 중에서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옐친은 단순히 주당이나 애주가 수준을 넘어 알코올 중독자 수준이었다. 주변 인사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보드카와 오이[17]를 찾았다고 증언할 만큼 술에 쩔어 살았다. 심지어 TV로 신년사를 진행할 때에도 맨 마지막에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할 정도였다.1995년 신년사, 5분 4초부터 해당 장면이 나옴 농담 삼아 보리술 옐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술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옐친의 추태는 심각했다. 얼마나 술을 마셔 댔는지, 공식 석상에서까지도 술에 취해서 추태를 부리는 등 러시아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을 정도.

대표적인 예로, 1994년 9월 아일랜드 총리와 회담할 예정으로 섀넌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때 이미 기내에서 만취해 있었던 탓에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해 전용기가 섀넌 상공을 빙빙 돌던 끝에 회담이 연기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로 한동안 아일랜드에서는 '섀넌 위를 돈다'(circling over Shannon)가 고주망태가 됐다는 완곡어법으로 쓰였다. 해당 사건을 다룬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

1994년 8월 독일을 방문했을 때도 공식 행사 때 술에 취해 있었고 행사 중에 지나가다가 갑자기 독일 경찰 악대 지휘자의 지휘봉을 빼앗더니 본인이 직접 지휘했다. 지휘봉을 빼앗기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다가, 결국 뒤에서 적당히 코칭해주고 어울려주는 지휘자와, 지휘자 없이도 어떻게든 카츄사를 잘 연주해 내는 경찰악대의 모습도 재미있다. 이후 독일 어린이합창단이 러시아 민요를 부르자 갑자기 나오더니 앞에 있던 마이크를 뽑아들고 술에 취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이 장면은 독일 전역에 생중계되었고, 각국의 해외토픽이 되었다.




1995년 10월, 클린턴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러시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서는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백악관 문 앞까지 나간 적도 있었다.[18] 당연히 이걸 본 경호원들과 비서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건은 국가 기밀로 취급되어 언론에는 비공개 처리되었다가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되면서 까발려졌다.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이번 옐친과 클린턴의 미팅이 재앙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기사를 썼던 기자들에게 '당신들이 재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발언해 클린턴의 폭소를 터뜨리고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때 역시 화이트 와인을 진탕 마시고 만취해 있던 상황. 그나마 이 사건은 분위기를 띄워준 위트있는 농담에 가까워서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외교 쪽에서 이런 짓궂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것 역시 흔한 일이니까.[19]

파일:TVBXaUg.jpg
원본은 검지를 펴고 있는 사진인데, 클린턴에게 뻐큐하는 사진으로 합성되었다. 근데 이 사람이 하도 술 먹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한 나머지 이 사진조차 합성이 아니라 진짜로 아는 사람도 많다.

그 덕에 옐친의 국제적 이미지는 대폭 추락했다. 측근들은 이 사람이 술 취해서 부린 추태를 수습한다고 애를 먹었다. 그 덕인지 말년에는 하도 병을 많이 달고 다녀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소리를 들었다. 그 외에도 온갖 기행이란 기행은 다 벌리고 다녔는데, 집권 초기에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또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1년에는 음주운전을 한 전과도 있다. 기사.

파일:external/por-img.cimcontent.net/cc22fd579835b3fc29af7cacb205fff7.jpg
사진은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로스토프에서의 선거 유세 중 춤을 춘 사진. 당시 옐친이 선거에서 시도한, 일종의 친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이 사진은 1996년 올해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영상 자료로도 매우 확실하게 남아 있다. 물론 이 때도 술에 잔뜩 쩔어 있는 상태였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옐친은 떡대가 상당했으며 키 187cm의 장신에 거구였다. 외국인들 입장에선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겠으나, 술에 관대한 러시아의 특성상 의도한 대로 친서민적인 이미지를 통한 지지율 상승 효과는 있었다. 이는 만취했다는 점을 빼면, 외국에서도 서민들에게 친밀감을 주기 위해 많은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이다.

말년의 삶은 황금우리에 갇힌 죄수. 옐친 자신이 고르바초프를 농락했던 것처럼 이후로 옐친 자신도 푸틴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게 되는데 고르바초프를 사실상 연금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옐친 자신도 푸틴에 의해 똑같은 상태가 되버리는데 옐친을 믿지 않는 푸틴은 통화도청, 방문객 통제등을 하며 옐친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면책 특권이 감옥에 보내지 않는 것이지 그 외에 감시, 도청 등등의 행동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에 권좌에서 멀어진 옐친을 가두고 감시하는게 얼마나 효과를 봤는지는...[20]


그럼에도 옐친은 끝까지 공식적으로는 계속 푸틴을 지지했으나, 옐친의 말년 시절에 찍힌 위 동영상을 보면 2000년 대선에서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푸틴의 당선이 유력하자 가족들은 기뻐하지만 본인은 별로 감흥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나, 2001년 새해가 밝자 TV에서 본인이 집권했을 때의 국가인 러시아 애국가가 아닌 소련 국가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한 새 국가가 연주되자 대놓고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등 말년에 그가 푸틴에게 힘없이 러시아 연방의 정권을 넘겨 준 것을 후회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정황이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술은 끊지 못하고 계속 마셔댔다. 어쩌면 이후의 러시아가 어떤 길을 걸을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하여 술을 더 마셔서 그 시름을 달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1] 젊은 시절에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을 해서 여러 차례 중요 당직을 맡으며 뛰어난 업무로 이름을 날렸지만, 반대로 소련 공산당의 부패와 무능을 눈으로 보았기에 그 시점부터 공산당에 대한 실망감과 회의감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2] 세르히 플로히,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허승철 역, (서울 : 한길사, 2022), p.548[3]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p.550.[4] 사실 소련은 1990년부터 이미 경제 체제가 거의 마비되어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로 악화되었다.[5] 국가가 가격을 정하지 않고 생산자가 가격을 정하는 것.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이미 당연한 논리겠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에서 국영화된 생산 시설(공장, 농장 등)을 통해 가격을 책정,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현실공산주의 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였다.[6] 당시 러시아 정부 공식 통계 추산 사상자 187명, 최고회의 추산 약 2,000명 가량으로 집계했다.[7] 옐친은 임기 내내 무소속이었으므로 여기서 여당은 옐친 지지 정당을 말한다.[8] 이런 기조는 1999년 총선까지도 이어지지만,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이 선전하고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들어서면서 정치는 안정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전까지 러시아는 혼란이 심각했단 이야기다.[9] 실제로 옐친은 심장이 좋지 못했는데 1996년에 심장 수술까지 받을 정도였다. 사망했을때도 사인이 심장마비였다.[10] 원래 소련은 1930년대 산업화 시절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1950년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공업 생산력과 경쟁력이 서방보다 떨어지면서 적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원 채굴 사업에 많이 기댔고, 실제로도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자원 소득에서 얻었다. 이런 자원의존형 구조는 소련 붕괴 이후 점차 심각해져 오늘날 러시아는 국고의 52%를 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의 재벌들 역시 주요 수익이 자원 채굴과 수출이다.[11] 이미 러시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같은 분쟁이나 1992년 조지아 내전샤밀 바사예프 같은 체첸계 군인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12] 제대로 된 보병과 포병, 공군의 지원없이 무리하게 기갑전력을 시가지로 밀어넣은 결과 고층 건물에서 체첸 반군이 내리 쏘는 대전차무기들에게 뚜껑이 따이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당시 그로즈니 시가전을 숫제 연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3] 사실 이 정도의 전사자도 러시아에겐 상당한 피해였다. 그만큼 체첸의 저항이 워낙 거세 고생했던 것.[14] 실제로 재임 중 건강이 좋지 못해 병원에 자주 갔으며 앓아눕는 일도 많았다.[15] 옐친은 이미 대통령일 때에도 임기 중에 많은 뇌물을 받고 부정 축재를 했다는 당시 검찰의 폭로가 있어서 제1야당인 공산당이 재집권할 경우 이걸로 건수를 잡아 퇴임하자마자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16] 허나 지독한 주당 치고는 장수한 편인데 그도 그럴게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60대다. 이유는 당연히 술 때문이다.[17] 러시아에서 절인 오이(Солёные огурцы)는 살로(Сало, 돼지 비계)와 더불어서 보드카와 함께 가장 흔하게 먹는 술안주이다. 여기에 좀 더 사치를 부리면 염장 연어알과 같이 먹고, 부자들은 캐비어를 술안주삼아 먹는다.[18] 빌 클린턴과의 퇴임 후 인터뷰를 담은 책 'The Clinton Tapes'에 의하면 정확히는 2번 정도 난동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난동은 백악관 앞 도로에서 만취한 상태로 잠옷만 입고 택시라고 소리쳐대고 있었다고 한다. 사유는 택시를 타고 피자를 먹으러 가고 싶다는 이유로(…). 클린턴에 의하면 결국 피자를 먹는데는 성공했다고. 두번째 난동 역시 만취한 상태에서 백악관 내 숙소 뒷문으로 들어가려다 미국 대통령 경호팀 & 러시아 대통령 경호팀 양쪽 요원 모두에게 불법침입자로 오인당한 것. 다행히 큰 소동까진 가지 않았다고 한다. 택시와 피자로도 어질어질한데 과연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19] 독소 불가침조약 당시 스탈린의 사절단 환영 언사인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를 생각해보면 된다.[20] 옐친 정권 시절 공직자를 맡았던 우익들을 옐친으로부터 떨어지게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포섭하는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러시아 우익들은 대다수가 친푸틴 성향으로 전향해 통합 러시아에 합류했고, 보리스 넴초프야블로코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같이 푸틴에 협조하지 않고 자유주의 성향을 고수한 소수의 우파 세력들은 주류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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