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지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봉기(삼국지)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蜂起 / Uprising蜂起軍 / Uprising Armed Forces
봉기는 한자어로 직역하면 벌 떼처럼 무리지어 세차게 일어난다는 말이다.
폭정이나 박해로 인하여[1]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항의하기 위하여 집단으로 실력행사를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쿠데타나 반란 혹은 반정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계획하여 조직적인 체계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는다. 다만 조기에 제압을 하지 못하면 동학 농민 혁명이나 5.18 민주화운동처럼 조직과 체계를 가질 수도 있다. 조직과 체계를 가진 뒤에는 무력으로 진압을 하여 사건을 종료시킨다고 하더라도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은 남아서 불안요소가 될 수 있다. 독재국가에서는 봉기가 혁명이나 대규모 시민 반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2] 민주공화정에서는 봉기가 혁명이나 반란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고 보통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온건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꽤나 중립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나 폭동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쓰는 중립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폭동의 양상을 보여도[3] 폭동이 아닌 봉기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타도의 대상이 명백한 악이거나 난을 일으킨 세력이 명백히 우리편인 경우이다. 혁명 혹은 시민 운동을 봉기로 보는 시각은 정확히 정반대로 해석하면 된다.
2. 상세
전봉준: “그간 도처에 무수히 많은 민란(民亂)들이 터졌고, 수없이 많은 탐관오리들을 죽였네. 허나 무엇이 바뀌었는가? 새로운 탐관오리는 보복을 자행하고, 탐학을 일삼고, 해서 또 민란이 터지고 또 죽이고 죽고 또... 이젠 종지부를 찍어야 하네!”
녹두꽃 3회 중에서
시대가 더욱 먼 과거에 해당할 수록 봉기는 무력을 수반한 민란으로 번질 확률이 높았다. 민권과 인권이란 개념이 없었던 전근대에 봉기는 가만히 있어도 죽고 싸워도 죽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전근대에는 농업 사회였으므로 대규모 흉작이나 가혹한 세금은 일반 민중의 생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기 때문에 싸우지 않는다면 어차피 굶어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적 색체가 강한 나라나 지역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4] 생계와 종교 외에는 홍경래의 난처럼 심각한 차별로 인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녹두꽃 3회 중에서
인권이란 개념이 태어나고 국민국가라는 관념이 보편화 된 이후에는 신념을 이유로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근대에 있었던 시민 혁명들은 봉기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맨 처음에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그 다음에는 현 체제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붙고 정권이 진압을 하지 못하면 현 상황을 바꾸고 싶은 하류층이나 승리한 측에 붙고 싶은 사람들까지 붙어서 더욱 불어난다. 킬 군항의 반란이 혁명으로 이어져 군주정이 무너졌던 독일 제국의 사례를 보면 왜 독재국가들이 초장부터 무장한 군대를 보내서 시위대를 유혈진압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5]
역사속에서는 민란(民亂)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민중에 의한 봉기를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지배층 입장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서에도 많이 나오지만 현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보다 가치중립적인 민중봉기 정도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동학란 이전까지의 민란은 탐관오리 수령과 결탁해서 횡포를 저지르던 아전이나 지역 유지들은 분풀이로 폭행, 살해당하는 경우가 흔했던 반면 수령 본인은 모욕을 가할 뿐 죽이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임금이 임명한 수령을 죽이면 역모로 몰렸기 때문이다[6]. 그래서 민란 주동자들은 "우리는 수령의 탐학과 폭정에 항거 할 뿐이지 조정과 임금에게 반역할 생각이 없다."라는 것을 해명할 정도였다. 조정에서도 이럴 경우엔 "수령에 대해선 따로 처벌할 것이니 해산하라. 민란의 주동자는 별도로 처벌할 것이며 단순 가담자들은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결정하는게 보통이었다. 다만 홍경래의 난은 예외적으로 이쪽은 아예 정부 전복을 목표로 일어난 반란이었기 때문에 수령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는 경우 가차없이 죽였다.
일본사에서는 잇키(一揆)라는 단어가 쓰인다. 사실은 공동체를 결성하는 일을 뜻하는 거지만, 봉기도 어쨌든 사람이 모여서 일어날 테니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생기는 건 자명하고, 잇키 공동체나 잇키 공동체가 일으키는 분규·반란이나 다 잇키로 부르기에 구분하기는 어렵다.
세계사를 보면 봉기가 조직화되어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지거나 혁명으로 이어지는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정권을 바꾸는데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국가 멸망의 한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대부분 봉기 자체는 관군에 의해 진압된다. 급히 조직된 반란군은 조직력, 명분, 부패와 변질 등의 각종 문제가 중앙정부 못지 않기 때문이다.[7] 또 본격적으로 관군과 전투에 들어가면 무기, 훈련도 등 모든 면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어서[8] 한 번 대패하면 급격히 기세가 꺾이고 와해되곤 했다. 여기서 전술했듯 정부가 "단순 가담자는 조용히 돌아가면 묻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면 대부분 이탈해버린다.[9]
그래서 역사적으로 정권을 완전히 바꾸는 사건은 주로 어느정도 탄탄한 기반을 가진 중간 계급 이상이 의도적으로 주도하는 혁명이다. 가장 유명한 시민 혁명인 프랑스 혁명도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했고, 러시아 혁명의 2월 혁명은 진압군이 봉기에 가담해 성공했다.
[1] 봉기는 심각한 차별이나 경제적으로 생존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울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2]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임오군란이 있다. 급료에 불만을 가진 구식 군인들이 봉기를 하는 것이 시작이었지만 결국 일시적인 정권교체로까지 이어졌다. 청나라의 군대가 진압하러 들어오지 않았다면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3] 예를 들어서 평양 화교 학살을 폭동으로 보는 시각과 봉기로 보는 시각이 따로 있다.[4] 독일 농민전쟁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한국사에서는 종교로 인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난 사례가 없다. 동학 농민 혁명도 결국 생존권의 문제인 이유가 주된 이유였다.[5] 일반적으로 군대를 보내야 할 정도라고 판단할 정도면 그 봉기를 진압하는데 실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6] 실제로 본격적인 반란의 경우 수령 등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직접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일례로 이괄의 난의 경우는 이괄이 자신의 아들을 체포하기 위해 파견된 의금부의 도사와 선전관 등을 죽인 것이 반란의 시작이었다.[7] 대표적으로 황건적의 난의 경우 조정의 부패로 인한 민중봉기가 분명하지만, 타 지역으로 넘어가며 약탈을 일삼아 결국 대부분의 민중들에게도 도적떼로 인식되었으며, 수장에 대한 개인숭배로 사이비종교의 면모를 보여 결국 천하는 커녕 제후국의 그릇도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태평천국, 동학 농민 운동 등도 나름의 의의는 인정받지만 이런 폐해를 피할 수 없었다. 기존 식자층의 지지를 얻고, 약탈을 전면금지하고 구성원의 일탈을 막을 만큼 강한 사상적 토대, 행정력과 보급선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이미 국가이지 반군이 아니다.[8] 어지간히 관군이 심각한 부패로 허울뿐인 수준에 도달했더라도 기득권들을 보호할 수도 방어군, 친위대만큼은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조차 아니더라도 이런 나라들은 하다못해 유력자들의 사병대가 강력해서 이들이 관군의 탈을 쓰고 진압에 나서면 농민군들은 대개 패퇴한다.[9] 다만 민중이 들고 일어날 정도로 몰렸다는 것은 이미 그 사회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진압 성패와는 상관없이 얼마 못가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