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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4 10:10:43

영지(역사)

봉토에서 넘어옴
한자 領地
영어 Fief
라틴어 feudum
프랑스어 Fief
독일어 Lehnswesen

1. 개요2. 역사
2.1. 발생2.2. 사회 하부로의 확대2.3. 세습재산으로의 발전
3. 성격
3.1. 급여 보유지3.2. 부동산
4. 관련 문서

1. 개요

'영지(領地)'는 '제후를 봉하여 땅을 내줌. 또는 그 땅'이다.

군주제후에게 내린 땅으로 영지(領地)라는 한자는 본래 다스리는 땅이라는 뜻이 되며 이것은 영어로는 territory로 표현되나, 본 문서는 주로 중세 서유럽의 봉건제와 관련된 Fief 개념을 위주로 다룬다. 한자 단어의 형태로 인해 의미상의 혼동이 발생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Fief는 '왕이 제후에게 분봉한 땅'이라는 의미를 강조해서 '봉토', '봉읍'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2. 역사

2.1. 발생

서양에서는 고대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Gefolgschaft, retinue)와 후기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beneficium)가 결합하여 봉건제도(Feudalism)가 나타났다.

고대 게르만족은 자유민 출신으로 구성된 종사들이 서약을 맺어 약탈 원정 시에 수장에게 전투력을 제공하고, 수장은 그 대가로써 약탈에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종사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는 야만족 출신 군인이 국경을 수비하는 대가로 국가가 일정량의 먹고 살 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봉건제도 항목에서 언급하였듯 서양의 봉건제는 실질적으로는 권력이 밑에서부터 모여서 위로 수렴되는 것이었다. 즉, 군주가 제후에게 내린 땅이라는 것은 그저 형식이고, 실제로는 정 반대였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에게 신종선서를 하며 땅을 바치면, 주종 관계가 성립되고, 주군이 된 사람은 종사가 된 사람에게 다시 그 땅을 '하사'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정복이 일상적이던 중세 초기 서유럽 사회의 특성상, 이렇게 평화롭게 계약을 맺어서 주종관계를 성립한 경우만 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복자들도 관료제가 별달리 발전하지 못한 시대적 특성상 그냥 봉건제적 주종관계로 복종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복했으니 이제 여긴 프랑크 왕의 땅! 하지만 기존에 다스리던 가스코뉴 공작에게 다시 그대로 하사한다' 하는 식인 것이다. 즉, 이러한 서약은 가문과 가문 혹은 부족과 부족 간 우열관계를 확인하는 법적 절차였다.

이 은대지는 형식상으로 왕이 제후에게[1] '하사'한 것이므로, 은대지를 받은 가신이 사망하면 왕이 회수할 명분이 있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저런 서구 봉건제의 특성상 회수하기 매우 어려웠고, 사망한 가신의 가족이나 후손에게 재수여되는 경향이 금방 나타났다.

한편, 은대지와 별개로 샤를마뉴 시대에 파견한 공작, 백작 등의 행정관이 다스리는 행정 관구(공작령, 백작령)가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황제가 파견한 관료라는 특성 탓에 세습할 이유도 없었고, 황제의 의사에 따라 공작, 백작직을 박탈할 수도 있는 등 더 강한 통제가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어디까지나 공무상 설정된 것이므로 공법상 권한에 따라야지 사적 소유권 등을 행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프랑크 왕국 시대에는 이들 관직 및 관구를 주기적으로 순환시켰고,[2] 초기 신성 로마 제국은 백작이나 공작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명분 등으로 공작이나 백작령을 회수하고 추방하는 등의 강한 황권을 휘둘렀다. 하지만 게르만족의 관습상 그러한 관직은 세습직이었으므로, 관료의 행정 구역이라는 명분과 구별도 차츰 소멸하여 백작령, 공작령 등도 세습 재산화 되었다. A가 B에게 물건을 빌려줬는데 그걸 B가 아들과 손자에게 대대로 물려주다 보면 B의 증손자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거 그냥 내 거야."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니, 공적 관리권이 세습되면서 사적 소유권화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이 행정관구와 은대지는 점점 동일시되어 10세기 무렵에는 둘을 합쳐 봉급이라는 의미의 feudum로 불리기 시작한다. 봉건제도라고 번역되는 Feudalism의 어원이 바로 이 Feudum이며, 즉 봉건제도란 봉토를 매개로 맺어지는 관계라는 의미이다.

2.2. 사회 하부로의 확대

10세기 경 유럽 사회가 이민족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워지자 봉건제는 사회 하부로 확대된다.

기본적으로 세련된 관료 조직이 없었던 프랑크 제국은 사방에서 기민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침공해오는 바이킹, 헝가리인, 아랍인의 약탈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왕조차도 나라 곳곳에 설치된 궁정(팔츠)을 순회하며 다스리던 시절에, 소규모 집단이 약탈을 행하고 빠지는 야만족들을 왕 혼자서 일일이 대응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각지의 유력자는 성채를 건설하여 야만족의 침공을 막았고, 일부 유력자는 자신의 종사를 직접 무장시켜서 야만족에 대응한다. 프랑크 왕은 이들에게 현지의 관료직을 내렸다. 한편 왕에 버금가는 대규모 부족 제후들 역시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이들 역시 자신의 관할구 내부에서 그러한 현지 유력자들을 기용해서 대응해야했다.

대가족, 대일족 위주의 사회였던 서유럽 사회에서 축성술의 발전은 소규모 지방 세력의 발흥을 가져왔다. 왕과 제후들이 치안을 해결하지 못했던 서유럽에서, 각지의 유력자들은 성을 쌓아 스스로를 방어하고 주변을 지배했다. 행정력이 위와 같이 개판이었던 왕과 제후들은 소규모 유력자가 성을 쌓는 것을 방치할 수 밖에 없었고, 소규모 유력자들은 남작 등의 하위 작위로써 귀족으로 귀족 사회에 편입되거나 백작 등 관료를 자칭하거나 왕과 제후들에게 사후 승인을 받기도 했다.[3] 프랑스에서는 이런 소규모 유력자들을 칭하는 작위인 성주(Châtelain)가 생겨났다.

제후들의 토지도 이렇게 분할된 이후, 봉건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번에는 또 다시 소규모 영주들의 토지가 분할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땅이 끝없이 쪼개지는 이유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화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과, 당대인들이 돈 따위보다 다른 신민에 대한 지배권을 권력의 표징으로 여겼던 것과 관련이 있다. 돈보다 농노가 딸린 토지를 가지는 것이 더 자랑스러운 시대였던 것이다. 또 인구가 늘면서 게르만족의 분할상속으로 인해 땅이 자꾸 쪼개지는 것, 인구가 늘면서 그것을 관할해야할 관료 조직이 늘어나야 했던 점 등도 원인이다. 당연히 관료 조직과 군대 역시 이런 영지, 봉토를 급여로 대신 받았다.

이렇게 토지를 얻은 소규모 영주들은 원래라면 국가에게 귀속되어야 할 통행세, 관세, 교회의 소유권, 사법권 등도 자신들의 소유로 사유화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러한 국가 권력의 사유화 경향은 같은 서유럽도 각 지방마다 크게 차이가 났다. 공권력의 사유화가 제일 심각하게 진행된 것은 프랑스 남부였고, 같은 프랑스라도 북부는 왕이 임명한 백작이 여전히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각지 성주들도 독립적 영주로 행세하지 못하고 왕이나 영역제후가 갈아치울 수도 있는 가신이나 관료에 가까운 존재로 남았다.

2.3. 세습재산으로의 발전

봉건제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사회는 샤를마뉴 이후로 프랑스, 독일, 북이탈리아에서 점점 발전하였으며, 11세기 중반에는 노르망디 공작 정복왕 윌리엄을 통해서 정형화된 봉건제가 영국에 이식되었으므로, 각국과 각 지역에 따라 발전 방향과 경향이 상당히 다르다.

일단 샤를마뉴 당대에는 공작, 백작이 행정관료라는 명분도 살아 있었고 황제의 실권이 워낙 강해서 제후들이 쉽사리 후손에게 상속하지 못했다. 게다가 11세기 이전의 중세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장자 상습제가 아닌 형제 상습제, 분할상속제가 통용되었다. 또한, 은대지는 기본적으로 주군이 종사에게 군사적 충성과 봉사를 맹세하는 대가로 하사한다는 조건이 딸려있기에, 종사가 군사적 봉사를 하지 못한다면 상속할 명분이 없었다. 특히 장자는 살리카 법전에 예시된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영지 상속권을 받지 못한다. 장자가 너무 어려서 상속이 불가능할 때는 상급자가 영지를 몰수해가서 다른 놈에게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식들 잘먹고 잘 살게 해주고 싶은 것은 시공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공통적인 욕구였다. 그래서 영지가 다른데로 날아가버리는 것을 막고자, 죽은 전대 영주의 아내가 상속자인 장자가 자랄 때까지 영지를 관리하고는 했다. 중세에 여성의 역할은 생각 외로 컸다. 즉 후견인으로서 아내인데, 이때 아내는 죽은 영주의 성을 완전하게 세습받아 영주 가문의 완전한 일원이 되어야 했다. 즉 완전하게 친가와 연을 끊고 성을 가는 거다.

영주의 아내 외에도 그 상급자가 따로 영주의 친척이나 봉신이 후견인으로 자처한 것을 인정했으며, 중세 사회가 사실상 거의 가부장적이었기에 사실상 죽은 영주의 친척들이 아이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물론 그 친척들도 금세 태도가 돌변해 영지를 빼앗으려고 하는 전례가 많다.

고중세에는 상속자들 즉 장자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결혼도 못했다. 이는 1영지 1영주 정책으로 영지 내 상속 분란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덕분에 일반적으로 고중세의 영주들은 40세 이후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은 15세 ~ 17세의 귀족 여성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영주들이 죽어도, 영주의 부인들은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욕정도 강하고, 외로움도 강할 시기라서 이를 노리는 젊은 기사들도 많았다. 후견인인 아내가 상속자가 자라기 전에 누군가와 결혼하면 그 누군가는 해당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친가와 완전히 연을 끊고 성을 갈아야 한다. 다시 말해 데릴사위. 주로 젊은 기사들이 이런 수혜를 받았다. 이 경우 상속자는 큰일난 신세.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젊은 기사들이 영주가 되는 경우도 많지는 않았다. 고중세는 기본적으로 현대식 핵가족이 아니라 대가족 시대였다.[4] 영주가 어린 아들 하나만 남기고 죽었대도, 장성한 딸이 있거나 동생이 있거나 하는 경우는 많았다. 딸은 군사적 종사를 못한다해도, 딸의 남편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사망한 영주에게 남동생이 있다면? 군사적 종사를 바로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후견인이 되거나, 전 영주의 딸이 아들을 낳으면, 즉 원래 영주의 외손자가 생겨도 충분히 계승권이 있다고 간주되었다. 심지어 윌리엄 1세처럼 사생아 출신이라도 전임자의 친아들이므로 어렵게라도 계승이 가능한 경우가 꽤 있었다.

또한, 영주 밑에 속해있는 기존의 또 다른 영주나 가신이 있는 경우에도 젊은 기사들이 영주가 되기가 어려웠다. 여태까지 그 영주 집안을 모시던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웬 듣보잡이 결혼 한 방으로 자신의 상관이라고 거들먹거리면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반란이 터지기에 충분했다.

다만 이것은 귀천상혼이 엄격한 나라들이나 최소 백작급은 되는 대영주들의 이야기이고, 귀천상혼 개념이 희박한 나라의 시골뜨기 남작 같은 하급 귀족이라면 젊은 기사가 귀부인 꼬셔서 영지를 낼름하는 일들이 꽤 빈번히 일어났다. 사실 이 정도의 시골 영지라면 워낙 촌구석이라 미망인에게 후손도 없고 일가 친척이 없는 게 대다수다. 가장 흔한 사례는 상속 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상위 영주일 경우. 이럴 경우 미망인에게 재혼한 기사들이 영지를 차지하고 상위 영주에게 지배를 인정 받는 경우가 많다. 단, 유럽의 경우 동질혼근친혼이 생각보다 심했던 관계로 실제로는 미망인이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미망인이 혈통관계가 없으면 사망할 때까지 저택과 연금만 받고 실제 영지 소유권은 상위영주가 회수하는게 원칙이었다.[5]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영지를 세습하기 위한 영주들의 개족보 대잔치노력은 후기 중세에 들어선 12세기 무렵 종식된다.사실 개족보 대잔치는 훨씬 더 이후까지 계속된다 법적인 명분 상으로는 세습이 허용되지 않던 영지의 세습이 법적으로 보장되며 세습재산으로 굳어진 것이다. 1035년 북이탈리아에서 신성로마황제의 직속 봉신들과 그 하위 봉신, 즉 배신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는데, 배신들은 자기들에게 수여된 봉토들을 세습재산으로 인정하라고 주장했고 황제의 직속 봉신들은 봉토란 당대에 한하며 심지어 주군에 의해 임의로 회수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는 평소에 자기 말 안 듣다가 이럴 때만 자기를 부르는 북이탈리아 봉신들이 아니꼬왔는지 배신들의 편에 섰다. 봉토가 세습재산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한 것이다. 이 법은 아직 황제의 권력이 컸던 당대에는 하급 귀족들과 황제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대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결과적으로 신성로마황제가 영주들의 직위를 임의로 회수할 수 없게 만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을 오히려 약화시켰다.

법적으로는 '자유민' 혹은 '부자유민'이고 사회적으로는 귀족이던 계층, 즉 기사(역사)가 법적으로도 완전히 귀족이 된 시대 역시 12세기였다.

3. 성격

3.1. 급여 보유지

이 봉토 즉 fief 혹은 beneficium으로 표현되는 토지는 상기했듯 근원적으로 봉급으로써 화폐가 아닌 토지를 수여하는 방식이었으므로, 귀족의 커다란 영지 말고 가신에 급여로 수여한 작은 밭뙈기라도 같은 표현으로 지칭되었다. 이러한 봉토는 전문직, 예를 들면 대장장이, 화가, 목수, 석공, 집사, 병사 등이 수여받았다.

물론 이런 봉토는 1망스(manse),[6] 즉 가족 하나를 부양할 정도로 크기가 작은 토지로서 농노도 딸려있다기에는 좀 애매한 수준으로, 커다란 권한이 있거나 수익성이 높은 토지는 아니었다. 따라서 저렇게 최소한의 기사봉만 받은 최하급 기사들은 토지를 동네 농노에게 알아서 경작하라고 맡겨둔 채 가끔 들러서 식량 좀 보충하러 오는 정도였고, 자신은 용병업 뛰러 돌아다니는 게 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기사가 아니라 서전트라면 의무상 군역보다는 기타 봉사가 우선이라 본인 봉토나 주군 곁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으니 그냥 자기가 농사를 짓기도 했다. 다만, 이들 전문직은 영주와 가까운 마을 유지 정도의 신분이니 관습적인 권력으로서 이런저런 편의를 볼 수 있기는 했다.

당대 사람들은 이런 소토지가 영주가 지배하는 대토지와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는 것을 매우 난감해해서, 이런저런 말을 붙여서 어떻게든 구분하려고 했다.[7] 하지만 fief라는 단어가 어원에서부터 가지고 온 '봉급'이라는 개념은 봉건사회가 끝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고, 현대에도 영어에 fee라는 단어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3.2. 부동산

중세의 영지를 생각할 때 현대인이 곧잘 실수하는 것은 하나의 영지를 하나의 소국가적 존재로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 내 봉토로서의 영지는 주권이 있는 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부동산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대에 산이나 임야를 소유한 사람이, 그 땅의 숲이나 석재를 당연 소유하지만 추가로 등기를 하면 목재를 따로 팔 수 있고 석재도 따로 팔 수 있는 것처럼, 중세시대의 영지도 그랬다. 다만 저 '등기하면 따로 팔 수 있는 것'에 그 땅에 묶여 사는 사람들이 포함되는게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관념은 작은 백작령 따위의 영지가 아니라 심지어 왕국이나 제국 단위의 커다란 영토도 마찬가지였으며, 중세 유럽에는 근대적인 국가와 민족 관념이 없었다는 서술이나 백년 전쟁으로 민족주의가 출현했다는 서술, 30년 전쟁으로 근대적 국가 개념이 생겼다는 서술 등도 전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학문적으로는 이들 영지를 '국가'가 아니라 '영역'이나 '영방' 등으로 표현하며, '토지 및 그와 결부된 인적 공동체' 정도로 설명한다. 이런 영지는 제후 끼리의 거래 뿐만 아니고 국왕과의 거래도 가능했는데, 대표적으로 맨 섬이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기존 영주가 소유한 영지를 영국 국왕이 사들여서 왕실령으로 복속시킨 사례가 있다.

심지어 영지 내 농노에 대한 조세권, 재판권, 부역동원권 등도 다 분할해서 사고 팔거나 상속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시대가 지날수록 영지의 분할 상태나 소유관계는 복잡해졌다. 저 조세권도 세금의 종류별로 다시 나뉘었으므로 미시사적으로 파고 들면 무간 지옥이 펼쳐진다.

그나마 간단하게 예화를 들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프랑스 시골에 바론 남작이라는 영주가 3개의 마을을 영지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셋 있어 죽을 때 그들에게 공평하게 물려줘야 하는데, 마을 셋을 아들에게 각기 쪼개주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랬다가는 가문의 재산이 산산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남작은 마을 셋을 분할하지 않고, 소유권과 조세권은 첫째, 부역동원권은 둘째, 재판권은 셋째에게 준다. 아직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셋째는 재판을 하고 그 수고비나 벌금을 자기가 가져서 그 소득으로 먹고 산다. 그런데 셋째가 마을 셋의 재판을 혼자 도맡으려니 힘이 부쳐서, 기사 하나를 고용해서 함께 일한다. 그 기사에게 주어진 봉토는 세 마을 중 마을 하나 분량의 재판권이다. 기사는 셋째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평소에는 셋째를 위해 재판을 하다가 셋째가 싸울 일이 있다면 1년에 40일간 셋째를 위해 싸워야한다. 하지만 기사 입장에서는 마을 하나 분량의 재판권 소득은 너무 적다. 때문에 첫째와도 봉신 계약을 맺어서, 농노 데니스네 집에서 나오는 조세권을 또 봉토로 받는다. 이 와중에 둘째가 후사 없이 사망했고, 부역권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야한다. 첫째는 당연히 영지의 소유자인 자신에게 귀속된다고 했고, 셋째는 반반으로 나누자고 주장한다. 중세 관념상 이것은 무력으로 해결을 볼 수 있는 종류의 일이었다. 위의 기사는 첫째 편을 들었고, 결국 셋째는 아무것도 못 받는다. 열 받는 셋째는 자신의 남작령 재판권을 국왕에게 돈 받고 팔아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그럼 셋째에게 재판권을 받아먹은 기사는 어떻게 될까? 프랑스의 경우 최하위 봉신들의 봉토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령이 있었기 때문에, 셋째는 그 기사의 재판권을 멋대로 남에게 팔 수 없다. 하지만 셋째 스스로가 남작령을 떠나는데, 남작령에 사는 기사의 충성서약권이 쓸모가 있을리가 없다. 때문에 셋째는 배신자 기사에게서 받은 충성 서약권도 국왕에게 팔아버렸다. 다행히 그 기사는 가신 계약의 주군을 셋째에서 국왕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사례는 중세 동안에 수도 없이 많았고, 이 예화에서 사용된 프랑스 왕국의 경우 이런 식의 사례가 끝없이 누적되어 앙시앙 레짐 시기 프랑스는 지방의 경계가 행정 구역/군사 관할구/사법구가 전부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위 예화 그대로 프랑스 왕이 '소유권과 조세권', '부역동원권', '재판권'을 각기 따로따로 수백년에 걸쳐 지속해서 매입하는 방식으로 중앙집권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작령 수준의 영지를 주권 국가처럼 표현하게 되는 단어인 백국이라는 말은 사실 그다지 좋은 번역은 아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19세기 초에 주권국가로서 쓸 수 있다고 여겨진 최소한의 타이틀은 퓌르스트(fürst)였다.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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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조하려는 성격에 따라서는 가신이나 봉신 등으로도 표현된다. '제후'는 황제나 왕 등 군주의 봉신, 즉 영역제후와 같은 유력 귀족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한다. '가신'은 학문적으로는 봉건사회의 사회적·인신적 구조를 경제적 구조(장원제 혹은 봉건제)와 분리하여 설명할 때 전자를 가리키기도 하고, 혹은 보통 '봉신의 봉신' 혹은 '배신(陪臣)' 등으로 불리는, 자기 아래에 다른 가신이나 봉신을 두지 못하면서 의무적 봉사로써 그 관계를 형성하는 말단 귀족을 가리킨다. '봉신'은 비교적 폭 넓게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배신과 함께 쓰인다면 자기 아래에 다른 봉신을 둘 여력이 있어 그럭저럭 큰 영주 정도를 의미한다.[2] 이러한 제도는 순찰사 제도(missi dominici)라고 불렀다.[3]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 가문도 이 시대, 스위스 시골 왕초가 작은 성을 쌓고서 백작을 자칭한 것에서 시작했다.[4] 당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혈연적 연대의식이 컸다. 가문원이 위해를 입었을 때 연쇄적으로 복수나 보호에 가담하는 일은 예사였고, 중세 초 작위가 세습화하였을 때, 가장으로서 대표자 외 나머지 친족들도 칭호로써 작위를 칭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후대에 가문작위(왕실작위) 내지 칭호로서의 개념(prince)으로 분화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문 소유지가 외부로 넘어가는 경우 그 친족들이 대금을 주고서 우선적으로 토지소유권을 회복하는 '되사기 권리'가 있었다.[5] 당시 귀족의 경우 재혼을 정식으로 허락받으려면 상위 영주의 허락을 받아야했다.[6] 영국에서는 'hide'가 정확하게 대응하는 개념이며, 우리말에서도 '결'()에 같은 뜻과 용례가 있다. 'manse'의 동원어로는 'mansion', 'manor'가 있고, 한편으로는 'manse' 그 자체가 성직자의 관사인 '사제관' 혹은 '목사관'이라는 뜻으로도 파생되었다.[7] 가령 독일어권에서는 'gut'을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기사봉은 'rittergut'이라 하였다. 이 말은 영어 'good'과 동원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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