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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전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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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치3. 존속4. 임시부속 의학전문부5. 둘러보기

1. 개요

파일:早稲田大学専門部・高等師範部校舎(現1号館) (1).jpg
1935년 준공 당시 와세다대학 전문부 교사
(現 와세다대학 1호관)
대학 전문부는 일본 제국구제대학에 부속 기관으로서 설치된 구제전문학교급의 교육 조직이다.

전문부는 구제대학의 부속 기관으로 대부분의 구제대학에서 실존하였으나, 대학예과나 학부처럼 대학령에 근거 조항이 명시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구제대학들의 실행에 의해서 설치/존속/운영되었던 조직이다.

2. 설치

일본 제국에서 대학령 시행 이전까지 대학(구제)으로 세워진 고등교육기관제국대학뿐이었으므로, 사립학교들은 대학을 자칭하더라도 교명에는 반드시 사립을 넣어야 했고 정식 대학이 아니었다. 그런데 1919년 4월 1일 대학령이 시행되면서 제국대학 외의 구제대학도 설립이 가능해지자 신설되기 시작한 대학(학부)들은 거의 전부가 기존 전문학교령에 의거해 인가받은 구제전문학교에서 본과 졸업생을 교육하는 연구과/전공과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구제대학의 입학 자격은 기본적으로 해당대학의 예과 또는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에게 있었고(대학령 제9조 제1항), 해당 시점에 구제대학의 모태가 된 구제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경우는 바로 학부로 넘어갈 수 없었으므로, 전문학교급 과정의 신입생 모집은 즉각 중단하더라도 기존 재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과정을 존치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구제대학 설립 과도기에 3~4년간 존속할 것을 예정한 한시적인 조직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구제대학 부속 전문부였다.

그 유래는 대학령 시행 한참 전의 제국대학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1890년 도쿄농림학교를 흡수해 농과대학(1919년 이후 농학부)을 설치한 도쿄제국대학은 기존 도쿄농림학교 과정을 농과대학 을과(乙科, 1890~1898), 실과(實科,1898~1935)라 하여 대학(학부) 과정과 구분했고, 결국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는 1935년 도쿄고등농림학교로 다시 떨어져나가 전후 신제대학인 도쿄농공대학 농학부가 성립하게 된다. 이는 다이호쿠제국대학 부속 농림전문부가 되었다가 후에 독립해나와 오늘날 국립중흥대학이 된 대만이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의 경우도 거의 유사한 사례인데, 다이호쿠제국대학은 의학부를 설치할 때도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해 활용한 바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의 기존 관립 전문학교와 별도로 설립되었기에 일제강점기에는 부속 전문부가 없었지만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서울의대 전문부로 흡수했다.

그래서 대학 승격 후 관립대학들은 기존 구제전문학교 과정의 재학생들이 모두 졸업하자 부속 전문부를 폐지했다. 1922년 4월 1일 설립된 [1] 여순공과대학 부속 공학전문부는 설립 모체였던 여순공과학당(4년제) 시절의 최후 신입생이 졸업한 후인 1926년 2월 26일 폐지되었고,[2] 1929년 4월 1일 관립공업대학으로 함께 설립된 도쿄공업대학오사카공업대학(구제)[3] 부속 공학전문부 역시 고등공업학교 시절의 마지막 신입생의 졸업 후 1931년 3월 31일 폐지되었다.[4] 1929년 4월 1일 설립된 고베상업대학[5] 부속 상학전문부 역시 고등상업학교 시절 재학생들이 모두 졸업한 후인 1932년 4월 6일 폐지되었다.[6]

관립의과대학들 역시 마찬가지로 의학전문학교 시절 재학생들이 졸업하자 부속 의학전문부를 폐지시켰다. 1922년 4월 1일 설립된 니가타의과대학, 오카야마의과대학[7] 부속 의학전문부는 2년 후인 1924년 4월 22일 폐지되었고,[8] 1923년 4월 1일에 설립된[9] 치바의과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 나가사키의과대학 부속 의학전문부 역시 2년이 지난 1925년 4월 1일 폐지되었다.[10] 이후 1929년 5월 1일 설립된[11] 구마모토의과대학과 1931년 5월 1일 설립된[12] 나고야의과대학에는 의학전문부가 부설되지 않았다.

3. 존속

그러나 기존 구제전문학교 과정 재학생들을 졸업시켜주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어 한시적으로 운영될 예정이었던 구제대학 부속 전문부는 제국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의 경우, 특히 사립대학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부속 전문부를 존속시켰다.

고등교육 수요자 입장에서는 구제중학교를 마친 시점 기준으로 구제대학까지 졸업하려면 대학예과와 학부 과정까지 도합 최소 5~6년을 다녀야하므로 부담이 컸는데, 3년 과정인 부속 전문부를 나와서 대학(전문부) 졸업자라고 하는 게 일반 구제전문학교 졸업 보다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내지의 사립대학 학부를 졸업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해당 대학의 유학생 모임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100명 중 2~3명을 빼고 전부 전문부 과정생이더라'고 할 정도로 대학 재적생 중에 학부생은 극소수였고 대다수는 전문부 과정에 다니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유수한 사립대학들도 대학령에서 요구하는 기본재산 확보 등 엄격한 대학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만성적인 재정 압박에 시달렸는데, 수요가 많이 몰리는 부속 전문부를 유지함으로써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최소 5~6년 코스의 대학예과+학부 과정에서 보다 훨씬 많은 신입생을 유치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나아가 부속 전문부를 마치면 대학예과에 상당하는 학력으로 인정되어 예과를 다시 다니지 않고 바로 그 사립대학 학부로 진학이 가능한 경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립대학에서는 부속 전문부 졸업자가 그 대학 학부 신입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사실 제도상 구제전문학교와 마찬가지로 전문부 졸업은 원칙적으로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 졸업에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제대학 입시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시 구제고등학교 또는 대학예과 등을 거치거나 이에 상당하는 학력을 가진 자인지 각 교육기관에서 별도 심사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다만, 문부성의 "고등학교 또는 대학예과와 동등 이상"으로 인정되는 학교의 경우는 대학 진학에 관한 개별 심사의 필요는 없었고, 사립대학들에서는 예과와 함께 부속 전문부를 이에 상응하는 학력으로 대우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 입장에서는 부속 전문부를 키우는 것은 등록금 수입을 통한 재정 여건의 개선과 함께 학부 과정 예비신입생의 풀을 넓히는 효과가 있었다.

이는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를 신입생으로 받는 제국대학관립의과대학을 제외한 다른 대학들, 특히 사립대학의 경우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제국대학이나 관립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구제고등학교 졸업생들은 일반적인 경우 제국대학이나 혹은 관립대학을 놔두고 다른 공립/사립대학으로 지원할 리 만무했고, 그래서 이 대학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부속 기관으로 대학예과를 설치해야 했다. 그러나 예과 과정 중에 질병, 사망, 경제적 사유 기타 사정으로 인한 중도 탈락자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학부에 결원이 생길 위험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부속 전문부였다. 그래서 관립대학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도쿄상과대학의 경우는 1931년 10월 이른바 농성사건(籠城事件)[13] 등으로 정부와 정면 충돌하면서까지 예과와 함께 상학전문부를 존치켰을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부속 전문부는 구제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당해대학 학부 신입생을 공급하는 제2의 예과로서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와 별도로 관립의학전문학교에서 승격된 관립의과대학들은 부속 의학전문부를 두어 의전 과정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을 수용한 후, 이들이 졸업하면 예외없이 부속 의학전문부를 폐지했으나[14] 치바의과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 나가사키의과대학 등 3개 의과대학은 부속 의학전문부를 폐지하면서도 의학전문학교 약학과를 계승한 부속 약학전문부는 계속 유지했다(다이쇼 14년 칙령 제79호 관제개정 참조). 약학의학과 밀접하게 연관된 학문이며, 약학 교습에 부속 병원과 협력이 필수불가결한 관계로 별도의 약학전문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4. 임시부속 의학전문부

1937년 중일전쟁 개전과 함께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된 일본 제국에서 가장 모자란 인력은 하급 군의관이었다. 당시 일본제국 육군 1개 연대에 10명의 군의관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구제대학 중 의과대학이나 의학부가 설치된 곳은 많지 않았고, 각 학교의 정원도 60~80명이 보통이었으며, 학부 졸업시까지 징병이 유예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되고 동원되는 병력 규모가 커질수록 의무사관의 공급 부족이 극심해졌다. 그러자 일제는 전시 중의 의사부족대책(戰時中の醫師不足對策)으로 제일 먼저 제국대학 의학부 및 관립의과대학에 임시부속 의학전문부를 설치하였다.

1939년 5월 15일 쇼와 14년 칙령 제315호 제국대학과 관립의과대학에 임시부속의학전문부를 설치하는 건(帝國大學及官立醫科大學ニ臨時附屬醫學專門部ヲ設置スルノ件)을 공포하여 내지의 제국대학 일곱 곳과 관립의과대학 여섯 곳 등 도합 13개 대학에 임시부속 의학전문부를 부설하였다. 이로써 부속 전문부를 둘 필요가 없었던 제국대학과[15] 소규모 단과대학이었던 관립의대까지[16] 임시부속 의학전문부를 두게 되었다.

이 임시부속 의학전문부는 중일전쟁으로 인한 임시 조치로 설치된 것인 만큼 각각 이를 관할하는 주사(主事) 1인씩만을 두고, 별도 교원을 충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는 중일전쟁을 끝내기 위한 왕징웨이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고, 심지어 1941년 진주만 공습과 함께 태평양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1943년 10월 전시비상조치로 각지에 의학전문학교를 대규모로 추가 설립하면서, 수많은 여자의학전문학교도 신설하는 등[17] 의사 배출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면서 임시부속 의학전문부의 폐지는 요원해졌다. 1944년 4월로 가면 치과의사를 양성하는 각 치과의학전문학교에 의학과를 증설하며 치과의사를 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편입시키는 '편입과'(정원 각 80명)를 설치했고[18] 1945년 2월에는 게이오기주쿠대학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부속 의학전문부에 치과의사를 편입시켜 1년 과정으로 의사를 배출하도록 하는 정원 각 160명의 임시과를 설치했다. 최종적으로 1945년 4월 6일에는 쇼와 20년 칙령 제216호로 "의사 면허의 특례에 관한 건"을 공포해 치과의사가 의학부/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 교육을 받지 않고도 의사 면허시험에 응시해 의사가 될 수 있는 길까지 열었던 일본 제국은 1945년 8월 패망 당시까지 제국대학관립의과대학 13개교의 임시부속 의학전문부를 존치시킬 수밖에 없었다.

5. 둘러보기



[1] 다이쇼 11년 칙령 제130호 여순공과대학관제(旅順工科大學官制)에 의거.[2] 다이쇼 15년 칙령 제6호 여순공과대학관제중개정의건(旅順工科大學官制中改正ノ件) 공포.[3] 관립공업대학관제(官立工業大學官制)에 의거 설립.[4] 쇼와 6년 칙령 제23호 관립공업대학관제중개정의건(官立工業大學官制中改正ノ件) 공포.[5] 다이쇼 9년 칙령 제71호 도쿄상과대학관제(東京商科大學官制)를 전부 개정하는 쇼와 4년 칙령 제38호 관립상업대학관제(官立商業大學官制)에 의거 설립.[6] 쇼와 7년 칙령 제53호 관립상업대학관제중개정의건(官立商業大學官制中改正ノ件)에 의거. 다만 도쿄상과대학의 경우는 1931년 10월 정부의 대학예과 및 부속 상학전문부의 폐지 계획에 대해 격렬히 저항한 이른바 농성사건(籠城事件)을 통해 예과와 함께 부속 전문부를 존속시켰다.[7] 다이쇼 11년 칙령 제143호 관립의과대학관제(官立醫科大學官制)(1922.3.31)에 의거.[8] 다이쇼 13년 칙령 제94호 관립의과대학관제중개정의건(官立醫科大學官制中改正ノ件)에 의거.[9] 다이쇼 12년 칙령 제93호 관립의과대학관제중개정추가의건(官立醫科大學官制中改正追加ノ件)(1923.3.30)에 의거.[10] 다이쇼 4년 칙령 제79호 관립의과대학관제중개정의건(官立醫科大學官制中改正ノ件)(1925.4.1)에 의거. 다만 치바의대, 가나자와의대, 나가사키의대 부속 약학전문부는 존치되었다.[11] 쇼와 4년 칙령 제75호 관립의과대학관제중개정의건(官立醫科大學官制中改正ノ件)(1929.4.17)에 의거 공립(구마모토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을 모체로 관립 구마모토의과대학으로 이관.[12] 쇼와 6년 칙령 제70호 관립의과대학관제중개정의건(官立醫科大學官制中改正ノ件)(1931.4.28)에 의거 신설.[13] 1931년 10월 1일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에서 특종 보도로,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구제고등학교가 있으니 별도의 대학예과는 필요없고, 구제전문학교가 있으므로 역시 부속 전문부 또한 불필요하다."는 대장성의 의견에 따라 도쿄상대 예과 및 부속 전문부 폐지를 계획한 원안이 상정되었음이 알려졌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구제고교 또는 여타 고등상업학교 졸업생들을 입학하게 한다는 구상이었으나, 이러한 계획이 알려지자 도쿄상과대학의 교수진·학생·동창회(如水会)가 단결하여 대장대신·문부대신 관저에 몰려가 항의하였으며, 특히 재학생들이 히토츠바시 캠퍼스를 점령 농성하면서 가두 데모를 실시하는 등 격렬히 반발하여 경찰과 충돌해 검속 당하는 학생들이 발생하고, 전교생 2,000명이 총퇴학을 결의하는 등 도쿄상대측의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내각은 결국 예과 및 부속전문부 폐지안을 취소하였으며, 이 사건이 바로 제2의 신유사건이라고 불리는 농성사건이다.[14] 1922년 4월 1일 설립된 니가타의과대학오카야마의과대학은 2년 후인 1924년 4월 22일 부속 의학전문부를 폐지했고(다이쇼 13년 칙령 제94호 관제개정), 1923년 4월 1일 설립된 치바의과대학, 가나자와의과대학, 나가사키의과대학의 경우도 역시 2년 후인 1925년 4월 1일 부속 의학전문부를 폐지했으나(다이쇼 14년 칙령 제79호 관제개정) 부속 약학전문부는 존속했다. 1929년 5월 1일 설립된 구마모토의과대학 및 1931년 5월 1일 설립된 나고야의과대학은 이미 대학령에 따른 공립대학인 구마모토현립 구마모토의과대학(1922.5), 아이치현립 아이치의과대학(1920.7)으로 설립되어 7~11년 동안 운영된 후에 관립 이관된 케이스라서 기존 의학전문학교 시절 입학생이 없었으므로 부속 전문부를 두지 않았다.[15] 1945년 8월 일본 제국 패망 당시 제국대학 9개교를 통틀어 부설되어있던 전문부는 이 임시부속 의학전문부 7곳을 제외하면, 1936년 대만총독부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흡수해 의학부를 설치하는 과정에 설치된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전문부, 삿포로농학교 이래로 유서 깊은 홋카이도제국대학의 농림전문부와 토목전문부 그리고 규슈제국대학의 공학전문부가 전부였다.[16] 파일:1612536503400.jpg 1개 학년 정원이 60명 가량에 불과했었다.[17] 의사들 중 상당수가 징집되어 군의관으로 출전하게 되면서 사회에 의료 공백이 발생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18] 도쿄고등치과의학교였던 도쿄의과치과대학이 의과대학이 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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