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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21:49:31

부여새상

1. 개요2. 생애3. 기타4. 기록

1. 개요

扶餘塞上
생몰년도 미상

백제 말기의 왕족. 의자왕의 동생으로, '새성(塞城)'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국내 기록에는 없고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한다.

2. 생애

642년 음력 2월, 백제에서 돌아온 일본 조문사는 '백제는 새상이 항상 나쁜 짓만 하므로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주기를 청하더라도 日本 조정에서 허락하지 말라'고 백제 측의 요청을 일본 조정에 보고하면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650년 음력 2월 15일,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부여풍부여충승, 고구려 및 신라 사신들과 함께 하쿠치 연호 개원식에 참석했다. 이 때 이름은 '새성(塞城)'으로 나오는데, 부여충승과 함께 부여풍의 아우로 기록되어 있다.

660년 음력 10월,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귀실복신 등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한 기록의 주석에서 천황(사이메이 덴노)이 부여풍을 백제왕으로 삼고, 새상(塞上)을 내세워 '보(輔)'[1]로 삼았다고 한다.

3. 기타

의자왕의 조카인 부여교기처럼 의자왕에게 견제를 받아서 일본으로 쫓겨났을 가능성이 있다.[2] 자세한 내용은 의자왕 항목의 친위 쿠데타 항목을 참조.

4. 기록

2월 丁亥 초하루 戊子 阿曇山背連比羅夫, 草壁吉士磐金, 倭漢書直縣을 백제 조문사의 處所에 보내어 그 쪽 소식을 물었다. 조문사가 대답하기를 “백제국왕이 저희들에게 ‘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을 하므로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주기를 청하더라도 日本 조정에서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제 조문사의 從者 등이 “지난 해 11월 大佐平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륜(崑崙)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그 누이동생의 딸 4명,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24 天豐財重日足姬天皇 皇極天皇 元年 2월(642년 음력 2월 2일)

甲申 조정의 의장대가 元旦에 모이는 儀禮와 같았다. 좌우의 대신과 百官들이 紫門 밖에서 네 줄로 늘어섰다. 粟田臣飯蟲 등 4명이 꿩을 태운 수레를 잡고 앞서서 갔다. 좌우의 대신들은 백관과 백제군(百濟君) 풍장(豐璋), 그 아우 새성(塞城)·충승(忠勝), 高麗의 侍醫 毛治, 新羅의 侍學士 등을 거느리고 中庭에 이르렀다...(중략)
甲申 朝庭隊仗 如元會儀 左右大臣百官人等 爲四列於紫門外 以粟田臣飯蟲等四人 使執雉輿 而在前去 左右大臣 乃率百官及百濟君豐璋·其弟塞城·忠勝·高麗侍醫毛治·新羅侍學士等 至中庭...(중략)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25(卷第廿五) 天萬豐日天皇 孝德天皇 白雉元年 二月(650년 음력 2월 15일)

겨울 10월 百濟의 佐平鬼室福信이 佐平貴智 등을 보냈는데, 와서 唐의 포로 100여 명을 바쳤으니, 지금의 美濃國 不破·片縣 2郡의 唐人들이다...(중략)...왕자 豐璋 및 처자와 그 숙부 忠勝 등을 보냈다. 그들이 떠난 때는 7년조에 보인다. 어떤 책에는 “천황이 풍장(豐璋)을 세워 왕을 삼았으며 塞上을 세워 보(輔)로 삼고, 예를 갖추어 떠나보냈다”고 하였다.
冬十月 百濟佐平鬼室福信 遣佐平貴智等 來獻唐俘一百餘人 今美濃國不破·片縣 二郡唐人等也...(중략)...王子豐璋及妻子 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 立豐璋爲王 立塞上爲輔 而以禮發遣焉
日本書紀 卷第廿六 天豐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六年 冬 十月(660년 음력 겨울 10월)

[1] 백제 초기에 존재했던 좌보, 우보를 의미하는지는 불명.[2] 다만 백제 측 요청과는 별개로 고토쿠 덴노의 연호 개원식에도 참여하고, 부여풍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일본 내에서 활동은 크게 억압받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