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old Gombrowicz | ||
본명 | 비톨트 마리안 곰브로비치 Witold Marian Gombrowicz | |
국적 | 폴란드 | |
출생 | 1904년 8월 4일, 러시아 제국 남부 마워시체 | |
사망 | 1969년 7월 24일(65세), 프랑스 방스 | |
직업 | 저널리스트, 작가, 변호사[1], 은행원 | |
학력 | 바르샤바 대학교 법학 석사 학위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공부. | |
경력 | 바르샤바 대학교로 가서 법학 석사 학위 수령. (1927년)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공부, (1928년) 이후 바르샤바에서 변호사로 근무.(1929년) 단편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 (Pamięnikz okresu dojerzwania)>(1933년) 출간 희곡 <부르고뉴의 공주, 이보나 (Iwona, księznicka Burgunda)>(1935년) 상연 장편 소설 <페르디두르케 (Ferdydurke)> (1937년) 출간. 희곡 <결혼 (Ślub)> (1946년) 집필. 문예지 <<쿨투라 (Kultura)>> 간행에 참여. 장편 소설<트란스 아틀란틱 (Trans-Atlantyk)>(1957년) 출간. 장편 소설 <포르노그라피아 (Pornografia)> (1960년) 출간. 장편소설 <코스모스 (Kosmos)> (1965년) 출간. 희곡 <오페레타(Operetka)> (1967년) 출간, 국제 문학상 수상. 1968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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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래서 나는 웃음을 떠뜨렸다. 나는 들판을 가로질러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참새는 매달려 있고,
나는 걸어간다. 막대기는 매달려 있고, 나는 걸어간다.
나는 고양이를 매달았고, 걸어가고 있다. 루드빅은 매달려 있고,
나는 걸어간다.[스포일러]
―코스모스 (Kosmos) 中
나는 걸어간다. 막대기는 매달려 있고, 나는 걸어간다.
나는 고양이를 매달았고, 걸어가고 있다. 루드빅은 매달려 있고,
나는 걸어간다.[스포일러]
―코스모스 (Kosmos) 中
폴란드 출생의 작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당시에는 주로 쓰지 않았던 소재인 정신착란이나 자아와 내면의 균열을 그리기도 했다. 워낙 소재가 다양하다 보니 비톨트 본인이 직접 "문학이란 아마도 다른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가장 열려 있고, 가장 자유로운 장르일 것이다. 문학 속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기괴하고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희극적인 면모를 보인다.
2. 일생
비톨트는 굉장히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다.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명맥을 이어갈 자식을 양육해야 했기에 비톨트를 변호사로 만들려고 기를 썼고, 1927년 바르샤바 대학교에 입학해 법학 석사 학위를 얻는다. 이듬해,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공부한다. 1929년, 바르샤바에서 변호사로 개업하며 가문의 꿈을 이루었으나, 비밀리에 작품 활동을 병행한다. 1933년, 비톨트는 단편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 (Pamięnikz okresu dojerzwania)>을 출간하며 아마추어 작가로 발을 내딛었으나, 전업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후 1935년과 1937년에 각각 <부르고뉴의 공주, 이보나>와 <페르디두르케>를 출간하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다.1939년, 변호사라는 직업에 싫증을 느낀 그는 아르헨티나에 대해 취재를 하고 기자가 되려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며, 마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폴란드가 침공을 당하자 은행원으로 8년간 근무한다. 동시에 희곡 <결혼>을 집필하면서 작품 활동도 함께 이어간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도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페르디두르케>를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스페인어 번역에 착수했다. 1951년에는 문예지 <쿨투라>를 간행하는데 일조했으며 1957년에는 <트란스 아틀란틱>을 출간한다. 하지만, 이 작품과 <바카카이>등 일부 작품이 폴란드에서 금서로 묶여서 30여 년 동안 판매금지 상태였다.[3] 1958년에는 <페르디두르케>가 이제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으며, 1960년에는 뒤따라서 <포르노그라피아>를 출간하게 된다. 1963년에는 포드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를 떠나서 독일의 베를린에서 체류하고 그곳에서 귄터 그라스, 잉게보르크 바흐만등의 작가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리고 1964년에 프랑스 방스로 이주하고 결국 고국 땅을 못 밟은 채 그곳에서 계속 살게되었다. 바로 다음해에는 그 유명한 <코스모스>를 출간하였고 결국은 <코스모스>로 국제 문학상을 수상하고 뒤이어 1968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오르지만, 아쉽게도 다음년도에 7월 24일에 향년 65세로 프랑스 방스에서 생을 마감한다.[4]
3. 여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폴란드에서 벗어나서 끊임없이 다른 나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이 강해서 프랑스에서도 프랑스어가 아닌 폴란드어로 책을 집필했다.한국어 번역본은 민음사에서 내놓은 <페르디두르케>, <포르노그라피아>, <코스모스> 3권의 장편 소설을 발간했고 워크룸프레스에서 희곡전집을 번역했다. 이중 <코스모스>와 희곡전집 두 권만 빼놓고는 모두 중역이다. <코스모스>는 시엔키비치의 쿠오바디스 번역으로 알려진 폴란드어 학자 최성은이 번역했고, 희곡을 번역한 정보라는 러시아어와 폴란드어 번역가다. 그러나 <페르디두르케>와 <포르노그라피아> 를 번역한 윤진과 임미경은 프랑스어 번역가다. 나쁜 번역까진 아니지만 중역의 한계는 자명하다.
세계적인 문호였으나 한국에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책)를 치다 길 잘못들어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문예창작과 교수도 가끔씩 듣는 인지도다. 폴란드어 번역가도 워낙 적어서 제대로 된 폴란드어 역본이 언제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폴란드에서 세 번이나 영화화 되었다. 페르디두르케가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하에 영화화되었으며 [5], 포르노그라피아는 얀 야쿱 콜스키가, 코스모스가 안드레이 줄랍스키 유작으로 영화화되었다.
4. 주요 저작
단편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 (Pamięnikz okresu dojerzwania)>(1933년) - 해당 제목은 초판 제목으로 재판을 내며 집근처 거리명에서 따온 바카케이로 변경했다.희곡 <부르고뉴의 공주, 이보나 (Iwona, księznicka Burgunda)>(1935년)
장편 소설 <페르디두르케 (Ferdydurke)> (1937년)
장편 소설 <악령 (possessed)> (1939년) - 고딕소설로 그의 작품들중에선 가장 이질적이다. 가명으로 발표했고 임종 직전에야 자신이 썼음을 밝힌 소설이라서 민음사의 작가 설명이나 영문 위키피디아 등 상당수의 텍스트에서 이 소설을 빠뜨린다.
희곡 <결혼 (Ślub)> (1946년)
장편 소설 <대서양 횡단 (Trans-Atlantyk)>(1957년)
장편 소설 <포르노그라피아 (Pornografia)> (1960년)
장편 소설 <코스모스 (Kosmos)> (1965년)
희곡 <오페레타(Operetka)> (1967년)
[1] 사실 부모님이 등을 떠밀어서 변호사가 되었고 변호사로써 개업했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았기에 직업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공식적으로는 기술하기로 한다.[스포일러] 주인공은 자살한 참새를 보고 미쳐가다가 결국은 고양이를 죽이게 된다. 고양이는 무슨 죄 동물학대?[3]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고국, 폴란드에서도 책을 아직 못 내었는데 생뚱맞은 아르헨티나에서 작가로 이름을 날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4] 노벨 문학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면 알겠지만, 노벨상은 수상자가 죽은 후에는 시상을 못한다.[5] 다만 감독은 흑역사로 여기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