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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사의 시대 구분론에서 통용되던 기존의 삼국시대에 가야를 더해 사국 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 변종으로, 고구려+백제+신라+가야+부여의 오국 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과 고구려+백제+신라+가야+북부여+동부여의 육국 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탐라, 우산국, 두막루 등까지 포함하여 다국시대 또는 전국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2. 긍정론
일반적으로 삼국 시대라 부르는 시대(고백신 3국의 건국 ~ 삼국통일)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 가야도 엄연히 실체로 존재하였으므로 네 개 나라가 있었던 시대라는 것을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하자는 주장이다.다른 탐라나 우산국 같은 국가들에 비해 가야가 그나마 영향력을 행세했고 각 국에서도 언급이 나오니 연맹국이라곤 해도 하나로 취급하고 사국 시대로 하자는 말이다. 물론 더 파고 들면 부여나 그 후계국 두막루 등도 있지만 이들의 영향은 고구려 한정에 가깝지만 가야 쪽은 고대부터 통일이 오기 전까지 견디고 영향을 주고 있던건 국가니 빼기엔 문제가 있다는 말.
3. 부정론
하지만 이 주장에는 약점이 있다.일단 가야가 기존의 통설인 고대 중앙 집권 국가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느슨한 연맹왕국이었다는 주장은 가야가 연맹 왕국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신라에 편입되지 않은 여러 크고 작은 세력들이었다는 주장으로 교체되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가야 연맹론이 논파되고 가야 연맹의 구성국이라 여겨지던 여러 나라들이 전부 남남이였다는 설이 통설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씀. 이렇게 되면 고백신 + 가야가 아니라 고백신 + 한반도 남부의 여러 소국들이 되어 사국 시대가 아니라 열국(다국) 시대가 된다. 가야는 그럭저럭 리더십을 발휘하는 소위 '맹주'격인 나라가 시기별로 한둘씩 있긴 했지만[1] 포상팔국 전쟁이나 탁순국의 사례,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바 각자의 나라는 맹주국과 별개로 행동할 수 있는 독립적인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가야뿐만 아니라 이미 삼국이 정립된 494년까지 버틴 부여나 가야보다 훨씬 오래 간 부여의 후계국 두막루[2], 고려 시대까지 이질적이였던 탐라국 같은 나라들은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도 있다. 이들까지 합치면 6~7 + n국 시대가 된다.[3]
당장에 가야가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삼국처럼 고대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도 못했고, 단일 정치 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현대의 한 시군 정도만 지배하는 소국들이 난립하다가 삼국 시대 중, 후반기를 전후하여 무너졌는데다 이에 대한 반론도 여러모로 만만치 않다.
그리고 가야 중 마지막으로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부터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는 660년대까지 약 100여년간은 사국시대란 용어로 포괄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소수 주장으로 심지어는 삼국 시대 후기 660년 이후 백제가 멸망하고 삼국들 중 고구려와 신라 단 2개국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백제 멸망 후 고구려와 신라 밖에 안 남았던 시기[4]를 이국시대로 분류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또 일부는 고백신 + 가야가 아니라 고백신 왜의 사국 시대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미 삼국 시대부터 왜인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나중에 통합되지도 않았으므로 가야를 끌어들이는 것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 그리고 당시 왜도 왜라는 통일 정권이 있던 게 아니라 길비, 축자, 하야토 등등 온갖 소수 세력으로 나뉘는 건 마찬가지였고, 요즘은 좀 부정되는 추세지만 규슈 왕조설 같은 떡밥도 있기 때문에 그래봤자 고백신 왜의 사국 시대가 아니라 고백신 + 왜 제국의 n국 시대가 된다.
4. 결론
삼국 시대에 대한 여러 주장과 설들 중에는 그나마 많이 지지 받고 그것도 맞기는 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주장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바꾸자고 하기엔 지지가 확실히 많이 떨어지고 반박도 많다.애초에 이 사국시대론이 나오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인 가야 자체가 과거의 연맹설이 구식 학설로 밀려나고 있어서 '1국'으로 카운트할 한 덩어리라고 보기 힘들게 됐고, 이후에도 제국(諸國)설이 나오는 상태에다가 중앙 집권 국가에 도달하지도 못한데다가 다른 삼국에 비해 전성기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실제로도 눈에 띄일 정도로 크지도 않아서 여러모로 부족한 상황. 하지만 존속 기간과 위치등과 남긴 대내외 영향력등이 있기에 없다고 쳐버리기도 애매해서 톡까놓고 말해 사국 시대로 치기엔 부족하고 무시하기엔 눈에 띄인다 정도. 결론적으로 사국 시대로는 안쳐도 삼국 시대에 가야라는 제4의 세력이 오랜 시대동안 존속하고 발자취를 남긴 것은 인정하는게 현재 국내 평가다.
이때문인 아직도 이따금씩 사국 시대라고 적힌 책이나 사국시대라는 단어에 대한 주제로 항목이나 한두 페이지 장식하는 게 가끔씩 보인다.[5]
즉, 한국사에서 통용하는 삼국시대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각자 전에 없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한 뒤(혹은 더 넓게는 이들 세 나라들이 중앙집권이 되기 전의 시기도 포함해서) 한반도에서 서로에게, 혹은 기타 여러 소국들을 상대로 쟁패한 시절을 일컫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중앙집권국으로 변하진 못해도 가야의 여러 나라들 역시 백제와 신라 등 한반도 및 고대 한국사의 국가들과도 외교를 맺고 왜와 한나라(한사군 포함) 등 중국의 옛 국가들과도 교류하고, 백제, 왜와 좀 더 외교를 긴밀하게 맺어 신라나 고구려 등을 견제하기도 했었다.[7]
일단 가야까지 합쳐서 부르는 경우가 없다보니 '삼국시대와 가야' 정도의 이름으로 간략하게나마 나오긴 한다.
5. 후사국 시대?
후삼국시대에도 발해가 남아있었다며 후사국 시대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허나 이 주장의 문제가 있다면 후삼국이 싸우고 있는 동안 발해는 남쪽 동네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고[8] 강성해지고 있던 거란족의 요나라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던데다 고려와 후백제, 신라 등 후삼국들이 싸우고 있던 중간에 요나라의 침공으로 나라가 멸망해버려 연계성과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그 외에도 자세히 따져보면 후삼국 시대에도 앞서 언급된 탐라국이 존재했고, 딱 후고구려(혹은 고려) 후백제 신라 3국만 깔끔하게 나와있는 교과서의 후삼국 시대 지도와 다르게 실제로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장악했던 왕봉규 같이 나라만 안 칭했을 뿐 삼국 시대의 가야에 비견될 만한 세력을 갖춘 군벌, 독립세력이 수십개에 달했기 때문에 이런 걸 모두 포함시키다보면 끝이 없을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에서 갈라진 3개 이상의 국가들을 일컫는 이유도 있다. 다만 이럴 경우 이렇게되면 발해는 어떻게 봐야되느냐는 주장도 있긴 하다. 일단 발해까지 합쳐서 부르는 경우가 없다보니 '후삼국시대와 발해' 정도의 이름으로 간략하게나마 나오긴 한다.[1] 보통 간단히 도식화해 전기에는 금관가야, 후기에는 대가야가 맹주 이런 식으로 배우는 편이지만 당장 함안 안라국만 해도 전기와 후기 모두 저 두 나라에 맞먹었다고 볼만한 나름의 근거가 있다. 6세기 초중반에는 오히려 대가야가 안라국의 외교노선을 조용히 따라오는 구도가 나오기도 했다.[2] 다만 두막루는 한국사로 보아야할지 애매해서 제외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3] 그래서인지 부여까지 포함해 오국시대로 불러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야처럼 여러나라들이 있거나 연맹체제이다보니 사실상 무시되는 주장이 되었고, 사국시대보다 더 마이너한 용어이다.[4] 의자왕의 항복을 기준으로 하면 8년, 그나마도 부여풍이나 복신, 흑치상지 등이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을 갖추고 있던 시대를 감안하면 5년도 안 된다.[5] 예를 들면 "가야가 있는데 왜 사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라고 부르는가?" 등의 떡밥이 담긴 이야기 정도.[6] 여러 나라들.[7] 물론 실익은 없었다(...)[8] 헌강왕대인 886년 신라와의 접경 지대에서 소국들이 독립하는 것을 보면 안 준게 아니라 못 줬을 가능성도 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