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역의 발달로 15세기 후반부터 쇠퇴했지만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시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사문진은 대한민국 최초로 피아노를 운반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1900년 3월 26일 미국의 선교사였던 리차드 사이드보텀(Richard H. Sidebotham, 1874~1908)[1]이 이른 아침 어프하게 포장한 피아노 1대를 인부 30여 명이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나무토막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귀신통'이라고 부르며 신기해 했다고 한다. 사문진을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의료원을 세운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2]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을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으며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을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름철이면 대구 주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는데 다산면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을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덕분에 화원동산도 유명해졌고 금복주에 의해 유원지가 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 개통 후 사문진은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 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010년 이 후 입구에 무분별하게 있던 식당가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화원나루공원을 비롯하여 옛 사문진[3] 주막을 복원한 사문진 주막촌과 '달성호'라는 중형 유람선을 운항하는 사문진 선착장이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근처 화원체육공원을 비롯해 여름이면 행락객들이 많다. 최근 일대에 피아노박물관을 세우는 것을 추진 중이다.
[1] 한국명으로는 사보담(史保淡)이다. 개항기 부산에서 활동했던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로 1874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목사가 된 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으로 1899년 조선으로 와 1907년까지 대구와 부산에서 활동했다. 대구에 한국 최초로 피아노를 운반해 온 것을 시작으로 첫 1년 동안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이 후 부산으로 거점을 옮겨 7년 동안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1907년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었지만 지속적인 선교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한국 선교를 위한 기금모금 중 1908년 12월 3일 우연한 가솔린 폭발사고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후 한 세기가 지나 외손녀인 사라 커티 그린필드(Sara Curtice Greenfield) 박사가 자신의 어머니가 태어난 부산을 방문하여 외조부모의 귀중한 유품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했다.[2] 한국명으로는 장인차이다.[3] 사문진 나루터는 틀린 말로 이미 나루 진(津)이라는 한자가 나루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