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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2:12:16

사이토 오토사쿠

<colbgcolor=#008331><colcolor=#fff> 사이토 오토사쿠
[ruby(齋藤音作, ruby=さいとう おとさく)]
Otosaku Saito
출생 <colbgcolor=#fff,#191919><colcolor=#191919,#fff>1866년 9월 16일

[[일본|]][[틀:국기|]][[틀:국기|]] 니가타현 세키야무라(현 세키카와무라)
사망 1939년 6월 28일 (향년 72세)
파일:일본 국기.svg 일제강점기 조선
직업 육군보병중위, 조선총독부기사
주요 업적 식목일(기념식수일) 제언, 조선임야분포도 작성, 한반도에 포플러아까시나무 보급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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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국적의 조선총독부 초대 산림과장 및 영림청장.

일제 시대 산림 정책의 총수로, 조선 임야 수탈의 지휘자이자 조선 임업의 설계자이다. 일본과 대만, 조선에서 약 30년간 산림관료를 역임하고, 은퇴 후에는 임업자본 유치활동으로 조선 임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2. 생애

1866년 9월 16일 일본 니가타현 세키야무라(현 세키카와무라)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0년 도쿄고등농림학교 임학과 졸업 후 농상무성 산림국에서 근무했지만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중위로 소집되었다.

1896년 대만총독부 임이포[1]무간서장(撫墾署長)[2]으로 임명되었고 임이포의 위산을 일본인 최초로 탐험하였으나, 위산에서 있었던 한인(漢人) 23명 살육 사건으로 파면 및 귀국이라는 행정처분을 받게 되어 이듬해 아내의 친가인 야마나시현에서 머무르게 된다.

1899년부터 야마나시현, 이시카와현에서 임업 과장으로서 산림 정치를 담당했으며, 1906년 홋카이도청 임정과장으로 임용되어 국유림정리강령을 작성하고 놋포로임업시험장의 개설을 실시했다.

이러한 수완을 인정받아 1910년 1월 대한제국의 농상공부 산림국 기사로 초빙되어 칙임기사에 취임했다. 조선총독부 식산국 산림과 초대과장으로서 산림과장, 영림청장(1915)년을 역임했고, 민간 식림사업을 장려하였다. 그는 재임 중 조선임야분포도를 제작하였고, 조선 삼림령을 작성하였으며, 기념식수일 제도를 만들며 애수애림(愛樹愛林) 사상을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1918년 면관 후에도 조선에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에는 조선산림회[3] 창립에 기여하였고, 제국삼림회 평의원에도 추대되었으며, 주식회사 황해사의 임업부 고문의 이름으로 산림 신탁업부를 만들었다. 1931년에는 임업부를 계승하여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세워 조선의 녹화 및 활산활수(活山活水)의 촉진에 노력하였다.

1936년 6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경기도 구리시의 망우리공원에 그의 묘소가 남아있다.

3. 평가

사이토는 식민지 조선 임정 수립의 기초가 된 1910년 임적조사를 지휘하였으며, '한국 임야정리에 관한 의견서'의 제안자이자 식민지 산림행정의 기본이 된 삼림령 입안의 중심인물이었다. 1910년에 작성된 조선임야분포도는 이러한 임적조사의 결과물로써 한반도의 산림 상태를 정량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최고(最古)이자 첫 한반도 전역 산림분포도이다. 1910년 8월에는 농상공부에서 삼림령과 그 부속법령을 조사 및 심의하였고 이듬해 6월 20일 제령(制令) 제 10호로 삼림령이 공포되었다. 삼림령은 총독의 재량으로 보안림의 해제가 가능하게 하였고, 삼림방화죄, 삼림절도죄, 삼림훼기죄 등의 특별형벌규정을 지정하였는데, 이를 통해 일제는 국유 임야를 창출하고 일반 국민의 임야를 박탈하고자 하였다.

사이토는 또한 조림 방식으로 혼효림을 강조하였다. 그는 재직 이전 조선의 소나무 숲으로만 이루어진 단순림의 여러 문제점[4]을 지적하며 소나무졸참나무, 상수리나무가 어우러진 혼효림을 권장하였다. 실제로, 혼효림은 여러 나무의 해충들이 서로를 견제하기 때문에 충해에 대한 저항력을 증가시키고, 유기물 분해가 빨라져 무기양료의 순환이 더 잘 된다는 점, 수관에 의한 공간의 이용이 효과적으로 된다는 점 등의 장점을 지닌다.[5] 1920년대부터 40년대까지 소나무로 대표되는 침염수 대신 활엽수 비중이 증가하는 것을 보면 총독부 또한 혼효림을 조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이토는 식수장려책의 일환으로 진무(神武)천황의 기일인 4월 3일을 전후하여 기념식수를 행할 것을 입안했고, 이후에도 매년 전국 단위로 거행하며 현대의 식목일의 근간이 되는 기념식수일을 창안하였다.

사이토는 경성도시계획연구회의 공원부장으로써 도시환경 정비에 관한 정책 수립을 위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환경문제를 비중 있게 거론하며 가로수를 심고, 공원, 광장, 삼림공원 등을 설치하여 삼림을 정비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대도시의 밀집화로 인한 비위생적이고 강렬한 자극은 도시 거주자에게 신경쇠약 등의 악영향을 일으킨다고 여겼으며, 이러한 공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 내외부의 상당수 지역을 공원으로 만들어 자연환경과 접하며 심신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도시의 풍치 향상뿐만 아니라 교육상의 이유로도 공원수, 가로수 등의 식물 애호가 고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이토의 도시정비사업에 대한 견해는 지금의 '지속가능한 발전'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환경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대목이다.

한편, 임업에 전념해왔던 사이토는 조선을 세계에 유례없는 산국(山國)이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폐와 조선정부 및 지배층의 착취문제로 발생한 남벌과 화전민에 의해 산림의 황폐화가 급속히 진행었다고 보았다. 그는 산림보호와 녹화운동의 전개에 도채(盜採). 남채(濫採), 난채(亂採)등의 조선인의 관습과 문화가 방해가 된다고 여겼으며 당국의 엄벌주의를 단행하려는 움직임을 반기며 단속을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즉, 애수애림의 정신을 갖추지 못한 조선인들을 교화하고, 교화되지 않는 자들을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생존을 위해 산림에서 땔감 등 임산물을 공급해왔던 조선인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사항이었기도 하다.

사이토는 치산치수책을 강조하며 산림정책을 식민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았다. 이를 위해 그가 줄창 주장한 애수애림의 정신은 순수하게 자연 환경을 보호하자기보다는 경쟁력 있는 조선 산림의 이윤을 최대화하기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조선 임업에 투자할 것을 장려하였으며 퇴임 후 임업기업에 종사하던 그에게 있어 조선의 숲과 나무는 자연의 금융화를 위한 도구였다.

요약하자면, 사이토는 치산근본주의를 주창하며 삼림령 반포, 조선임야분포도 작성, 식수기념일 제정, 혼효림 및 공원의 필요성 강조 등의 조선의 산림정책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치수정책의 근본적인 목표가 조선 산림 개발과 이윤 추구였고, 이를 위해 엄벌주의로 다스릴 것을 강조했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4. 기타

2017년에 한국 망우리공원에서 사이토 오토사쿠의 첫 추모 행사가 열렸다. 행사는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형제 현창회측에서 주최하였으며, 그간 식목일을 즈음해 아사카와 다쿠미[6]를 추모하던 것에 더해 열렸다. 주최측은 사이토가 논란이 있는 인물이지만 조선 산하의 녹화에 이바지했으며 최근 긍정적 평가를 얻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일부에서는 사이토는 식민지 임업 정책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라며 식민지문명화론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비판하였다.

5. 참고문헌

Takemoto, T. (2021). Thoughts and practices of Saito Otosaku, a colonial forester, during his early years in the Jpapanese empire. 林業経済研究, 67(1), 16-30. doi : 10.20818/jfe.67.1_16
고태우. (2017). 개발과 이윤 추구에 갇힌 산림보호 - 식민지 임업가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를 중심으로 - 역사와 현실 (103), 151-193. doi : 10.35865/YWH.2017.03.103.151
정진각. (n.d.). 사이토 오토사쿠. 디지털구리문화대전. http://guri.grandculture.net/guri/toc/GC06143011


[1] 林圯埔, 현 주산진[2] 식민지 무육 및 개척을 담당한 조직으로, 무간서장이 대만총독부의 민정국장 지휘및 감독 아래 식민지 백성의 관리감독과 토지 및 산림 개척 사업에 종사하였다. 1989년 폐국 후 변무서(弁務署)라는 조직에 일부 계승되었다.[3] 일제가 조선의 산림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산림관계의 조선총독부 관리 및 민간인들로 조직한 단체[4] 사이토는 단순림이 송충이가 번식하여 소나무 잎을 먹어치우게 하고, 낙엽을 쉽게 긁어갈 수 있게 만들며, 토지 건조로 숲속 잡초 생육을 악화시켜 가축 사료와 퇴비 원료의 결핍을 초래한다고 하였다.[5] 산림청에서 발간한 『산림과 임업기술 제2편 - 산림자원 조성』에 순림과 혼효림의 장점이 설명되어 있다.[6] 다쿠미 또한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조선 산림녹화에 힘썻던 사람으로, 동향 출신 선배인 사이토의 영향으로 임업계에 투신했고 한국에서도 인연을 이어갔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