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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토레 리이나



파일:살바토레 리나.jpg

Salvatore "totò" Riina

1930년 11월 16일 ~ 2017년 11월 17일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시칠리아 마피아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의 두목(Boss). 루치아노 레지오의 후임이다.

일명 '라 벨바'='야수(Beast)'.[1]

2. 생애

리이나는 코를레오네의 한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으며,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범죄와 가까웠으며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1940년대 후반,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사진)와 함께 루치아노 레지오를 만나 그의 오른팔이 되었다. 리이나는 그의 지시를 받고 다수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러던 중, 레지오가 일으킨 쿠데타에서 미켈레 나바라(사진)를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와 같이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레지오와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의 숙청 작업을 도왔고, 1974년 레지오가 체포되어 구금되자 그의 뒤를 이어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의 보스로 등극하고, 동시에 안토니아와 결혼했다.[2]

1980년대엔 400여 명이 사망하고만 2차 마피아 항쟁을 일으키고 승리한다. 23년간 도주를 하며 검거될 때까지 시칠리아 마피아의 "두목 중의 두목(Capo Di Tutti i Capi)"으로 불리워졌다. 도주하는 동안은 정부의 마피아 소탕에 저항하며 무수한 폭탄 테러와 암살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결국 1993년에 체포되고, 52명의 살해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26건의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복역 중에서도 대리인을 내세워 조직에 관여하며 살인이 포함된 각종 범죄의 배후에 있었다.[3] 그리고 결국 2017년에 87세로 수형자 병원에서 사망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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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칭이 토토이고, 160cm의 단신이어서 '토토 우 쿨트(키 작은 토토)'라는 재밌는 별명도 있다.[2] 참고로, 안토니아의 오빠는 레지오의 부하이자, 후에 본인이 오른팔이 되는 레오루카 바가렐라이다.[3] 이탈리아 정부에서 수감된 마피아들의 의사소통을 막기 위해 '41조 교도소 체제'라는 것을 도입했지만, 2002년에 수감된 마피아들이 원칙적으로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잘 짜인 대규모 시위를 벌여 8개 교도소로 번져나간 사례를 보아 법의 허술함을 파고들어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한 것으로 보인다.[4] 암살 지령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존 고티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