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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10:09:12

폴 카스텔라노

<colbgcolor=#000><colcolor=#fff> 폴 카스텔라노
Paul Castellano
파일:빅 폴 카스텔라노.jpg
이름 Constantino Paul Castellano
콘스탄티노 폴 카스텔라노
출생 1915년 6월 26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사망 1985년 12월 16일 (향년 70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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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마피아
신체 189cm
배우자 니나 마노 (1937년 ~ 1985년)

1. 개요2. 생애3. 여담4. 어록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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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Boss).

일명 빅 폴(Big Paul), 마피아계의 하워드 휴즈(The Howard Hughes of the Mob)[1], 교황(The Pope)

카를로 감비노의 후계자로, 부하들에 의해 맨해튼 한복판에서 살해당한 인물이다.

2. 생애

뉴욕 시에서 태어난 폴 카스텔라노는 8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19살에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공범자 2명의 신원을 경찰에 밝히기 거부하고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당국과의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오메르타로 명성을 높였다.

1926년 폴 카스텔라노의 누나는 미래의 마피아 두목(Boss) 카를로 감비노와 결혼했다.

1940년대 폴 카스텔라노는 망가노 패밀리(현 감비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되었다. 그 후 패밀리의 두목(Boss)인 앨버트 아나스타시아(사진) 휘하에서 행동대장(Caporegime)을 맡았다.

1957년 폴 카스텔라노는 마피아 전국 위원회 회동이 발각된 애팔러친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 회동에 대한 대배심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면서 법정 모독죄로 1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같은 해 카스텔라노의 매형 카를로 감비노가 앨버트 아나스타시아를 제거하고 패밀리를 장악한 뒤 두목(Boss)으로 추대되었다.

폴 카스텔라노는 폭력배라기보다는 사업가로 여겨졌다. 그는 합법적이지 않은 사업들을 인수하여 합법적인 사업으로 전환시켰다. 그럼에도 카스텔라노의 사업과 그의 아들들의 사업은 마피아 조직과의 연대를 통해 번창했다. 카스텔라노는 감비노 패밀리에서 자신의 입지가 강해지자 건설 콘크리트로 거액을 벌기 시작했다. 이 시기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고 있었던 카스텔라노는 다른 마피아 두목(Boss)들과 함께 자신들이 통제하는 노동조합, 납품업체, 도급업체, 하청업체들을 규합한 콘크리트 클럽(Concrete Club)을 결성했다. 마피아는 이 클럽을 통해 뉴욕 도시권 일대에서 진행되는 2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의 입찰을 조작하고 5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를 독점했으며 관련된 모든 회사와 노동자로부터 2%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 이 규칙에 저항하는 일부 관계자들은 노조를 움직여 공사를 중단시키겠다는 마피아 측의 협박에 시달리다 결국 타협했고 끝내 타협하지 않은 자들은 살해되거나 상해를 입거나 자신의 사업체 혹은 직장을 잃게 되었다. 이렇듯 마피아 위원회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맨해튼에 건설되는 모든 대형 건물에 관여했는데, 실제로 그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사업이었다. 당대 FBI 요원들은 건설업계 내 드라이월, 창문 같은 다른 분야에도 이와 유사한 마피아 클럽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일부는 그 실체가 드러났다.

1975년 폴 카스텔라노는 딸의 남자친구 비토 보렐리가 자신을 식품 대기업인 퍼듀 팜의 회장 프랭크 퍼듀와 비교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보렐리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지인들에게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치킨맨(Chicken Man)으로 지칭했는데, 실제로 카스텔라노는 퍼듀와 같은 가금류 유통계의 거물이었다. 그가 설립한 회사 중 하나인 다이얼 가금류는 키 푸드(Key Food)나 월트바움(Waldbaum's) 같은 슈퍼마켓 협동조합•체인들을 협박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납품했다. 치킨이란 단어에는 닭고기란 뜻 외에 겁쟁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카스텔라노가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2]

1976년 카를로 감비노가 사망하면서 폴 카스텔라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시 부두목(Underboss) 아니엘로 델라크로체(사진)는 탈세 혐의로 수감되어 카스텔라노의 승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감비노는 패밀리의 합법적인 영역은 카스텔라노가, 전통적인 불법사업은 델라크로체가 담당하게끔 했는데 이는 패밀리를 양 집단으로 분열시키는 결정이 되었다. 카스텔라노의 승계는 델라크로체가 참석한 1976년 11월 24일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1978년 폴 카스텔라노는 뉴욕 시의 아일랜드계 범죄조직 웨스티스 갱단과 협정을 맺었다. 그는 사법당국이 감비노 패밀리와 연관 지을 수 없는 암살자를 원했다. 웨스티스 측은 감비노 패밀리가 뉴욕의 다른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길 원했다. 감비노-웨스티스 동맹은 웨스티스 지도자인 제임스 코난과 카스텔라노의 만남에서 합의되었다. 웨스티스 소속 폭력배 미키 페더스톤에 따르면 카스텔라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은 카우보이처럼 굴면 안 돼. 난폭하게 구는 짓 말이야.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할 거야. 앞으로 누군가를 죽일 거면, 우리와 사전협의를 해야 돼.
You guys got to stop acting like cowboys - acting wild. You're going to be with us now. If anyone is going to get killed, you have to clear it with us.

1981년 폴 카스텔라노는 비토 보렐리 살인사건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업가 프랭크 퍼듀와 2번 만났다. 퍼듀는 카스텔라노에게 버지니아 주 노동조합의 파업을 막아달라고 부탁했지만 퍼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카스텔라노가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두목(Boss)으로 재직하던 폴 카스텔라노는 로이 디메오, 제임스 에폴리토, 니콜라스 스키베타 등 스무 명 넘는 휘하 조직원과 관련자들의 살인을 지시했다.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되는 감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존 앨라이트는 "카스텔라노는 살인을 저질러도 살인자라 불리지 않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래도 살인자는 맞아요.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미국 마피아의 지배 기구인 마피아 위원회의 의장으로 재직하는 등 당대 최고의 마피아 두목(Boss)으로 두루 인정받으며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폴 카스텔라노는 스태튼 아일랜드 토트 힐 능선에 자신이 거주할 방 17개짜리 호화 저택을 지었다.
파일:폴 카스텔라노 집.jpg
폴 카스텔라노 저택의 모습
이 저택은 당대 암흑가에서 백악관이라고 불렸다. 이 집은 그의 고립을 상징한다. 일부 원로 마피아들은 비밀결사의 일원인 카스텔라노가 보란 듯 거대한 저택을 짓는 모습을 못마땅해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을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한 채 스스로를 화이트칼라 상류층으로 여기면서 거리 조직원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1985년 폴 카스텔라노는 상술한 콘크리트 클럽을 겨냥한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기소되었다. 보석금 2백만 달러를 내고 풀려나왔지만 FBI가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거기다 부하 행동대장(Caporegime) 존 고티와 허가받지 않은 마약 거래로 분쟁이 있었다. 특히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다소 이기적인 이유로 거리 조직원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던 부두목(Underboss) 아니엘로 델라크로체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해 부하들의 신망을 완전히 잃었다.

1985년 12월 16일 폴 카스텔라노는 신임 부두목(Underboss) 토마스 빌로티와 함께 맨해튼 한복판 스파크 스테이크 하우스 앞에서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이는 아니엘로 델라크로체가 사망한지 14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영화 고티(1996)에서 묘사한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을 다룬 뉴스

폴 카스텔라노 사후 감비노 패밀리는 존 고티가 장악했다. 이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가 카스텔라노의 마피아 위원회 의장 직책을 승계했고 지간테는 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두목을 살해한 고티와 그의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데치코(사진)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고티는 운 좋게 목숨을 건졌고 데치코만 살해되었다. 결국 지간테를 필두로 한 위원회도 고티의 통제권을 인정하고 그를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3] 더욱이 당시 카스텔라노와 가까웠던 시칠리아 마피아 두목 살바토레 리이나도 복수를 위해 고티 암살 지령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4]

폴 카스텔라노를 수사하던 FBI 요원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아주 허탈해했다. 훗날 그들은 "수 년째 카스텔라노를 수사하다 보니 그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꼈다. 카스텔라노는 그렇게 죽을 게 아니라 우리들이 수집한 증거로 유죄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갔어야 됐다."라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3. 여담

4. 어록

만약 미국 대통령이 똑똑한 데다 도움이 필요하면 날 찾아올 거야. 그럼 나는 대통령을 위해 호의를 베풀 수 있지.
I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f he's smart, if he needs help, he'd come. I could do a favor for the president.
법정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도 신성한 약속들이 있어, 네가 얼마나 많은 성경 책 위에 손에 얹고 증인 선서를 했는지는 상관없이.
There are certain promises you make that are more sacred than anything that happens in a court of law, I don't care how many Bibles you put your hand on.

5. 관련 문서


[1] 혼자 고립된 채 거리의 단원들과 소통하지 않고 귀족적인 이미지를 과시하던 카스텔라노의 모습을 은둔 생활을 하던 하워드 휴즈에 빗댄 것으로, 썩 좋은 별명은 아니다.[2] 2004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보난노 패밀리 두목(Boss) 조셉 마시노(사진)는 1975년 당시 보난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신분이었던 자신이 카스텔라노를 위한 보렐리 살인 작업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3] 한편, 지간테의 고티에 대한 복수심은 대단했는데, 1990년 고티 구속을 전후로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에드워드 리노(사진)와 행동대원(Soldier) 바르톨로뮤 보리엘로(사진)가 살해되었다. 이는 카스텔라노 살인사건에 대한 지간테의 마지막 복수이자 그가 고티에게 가한 마지막 타격으로 여겨진다. 리노는 카스텔라노를 살해한 총잡이 중 한 명이었고 보리엘로는 고티가 총애한 운전기사였기 때문이다. 영화 고티(2018)에서 묘사한 리노와 보리엘로 살인사건(gif).[4] 암살 지령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존 고티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