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마피아
1. 세계 대전 이전
이탈리아의 범죄조직들은 약 3000년 동안 이탈리아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 군대의 침략과 착취 기간을 지나며 진화했다. 지하 비밀 사회는 처음에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서 형성되었고, 억압에 대항하는 자경단원들의 정의를 명확히 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고유한 범죄조직들이 각자 자리를 잡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특기할만한 조직인 코사 노스트라(마피아)가 형성된 시칠리아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수천 년 침략의 역사를 거치면서 더욱 검소해졌고 안전, 보호, 정의, 생존을 위해 가족의 유대에 의존하기 시작했다.토착 무력집단으로 출발한 이들 무리는 더욱더 폐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나아가 19세기 중반을 경계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 집단으로 변하게 되었다. 즉 현대적인 마피아의 최초 등장은 보통 1800년대로 보고 있다. 현대적인 마피아는 대토지 지주 위주의 사회였던 19세기 시칠리아의 중간 토착 임대농 세력인 가벨로토(gabellotto)들이 고용한 자경단 캄피에로(campiero)들로부터 주로 기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한가지 설은 19세기 말 시칠리아의 레몬 농업이 발달하자 도둑들이 극성을 부렸는데, 이들로부터 농장을 지키기 위해 가벨로토(복수형 가벨로티)들이 마피아로 발전했다는 설이다.관련 기사 레몬 뿐만 아니라 여타 감귤류, 오렌지 농업도 시칠리아에서 중요한 농작물이었으며, 2012년 연구에 의하면 레몬 수출이 마피아의 성립에 큰 영향을 줬다는 학술적인 연구도 있다.출처
덧붙여 마피아들은 이탈리아인으로서 국교였던 가톨릭을 믿었으며, 이 과정에서 서로 종교적인 혈연을 맺는 경우가 생겼고, 거기에 더해 가톨릭 용어가 마피아 사회로 유입되는 경우가 생겼다. 예로 들자면 "영성체", "견진성사" 등이 있다. 후술할 이 단어들은 마리오 푸조의 소설 《대부》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당장 영화 <대부>에서 사람들이 비토 콜레오네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자.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행위와 흡사하다.
당시 마피아 조직은 이탈리아 왕국이 국력을 증강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정치, 경제, 사법에 걸쳐 세력을 확장했고, 결국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의 이민 붐을 틈타 마피아가 미국에 진출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1920년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시절, 극우 파시스트 정권은 시칠리아 섬에서의 정부 세력을 강고히 하기 위해 1925년부터 검찰과 경찰, 군대까지 동원하여 철저한 마피아 탄압을 시작했다. 이에 마피아는 미국으로부터 자객과 무기까지 수입하며 저항했으나, 강대한 정부의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원의 대부분이 수감되거나, 정부의 단속을 피해서 더 지하로 파고 들어가 숨어 지냈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친척'들이 사는 미국으로 달아났다. 때문에 이를 전쟁 전 세대의 몰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파시스트 정권의 서슬이 얼마나 퍼랬던지 시칠리아의 범죄율은 1/10 이하로 떨어졌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시칠리아가 가장 살기 좋았던 시절이 무솔리니 통치 시절이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2. 미국 진출과 세계 대전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시칠리아와 다른 이탈리아 지역에서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하거나 파시스트 정권을 피해 도주한 조직폭력배들이 그 나라에서 과거의 범죄 수법을 재현하기 시작했다.그 중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미국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기존의 미국인들이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단체를 원했다. 어느 정도로 이탈리아 이민자의 차별이 심했냐하면 뉴올리언스의 시장 조지프 셰익스피어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들을 가리켜 공공연히
"우리 중 가장 게으르고 사악하며 무가치한 인간들이며, 이 극악무도한 자들을 끝장내자, 설령 지구상의 모든 이탈리아인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할지라도."
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은 이탈리아 사회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범죄적인 요소를 사용하게끔 하는데 기름을 붓는 셈이 되었다. 이에 수백년 이탈리아 역사를 통해 이미 구축되어 있었던 범죄조직 구조와 충성심을 적절하게 이용한 미국 마피아가 동포 사회를 보호하는 것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그 사회를 착취해 나갔다. 또한 이탈리아계 이민자 공제회, 상업 조직 같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이 단체들은 곧 마피아들의 힘의 원천이 된다.[1]초창기 미국 마피아의 대표적인 활동으로 '검은 손'(Black Hand / 이탈리아어로 Mano Nera) 갈취가 있다. 이는 막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반이 튼튼하지 않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원시적인 조직 범죄라 할 수 있는데 내용은 돈 많은 부자의 집에 검은 손바닥이 그려진 종이를 배달하고 그 밑에
'언제까지 얼마를 내지 않으면 목숨을 가져가겠다.'
라는 내용을 덧붙인다. 그리고 글자에 씌어진 대로 실제로 행했다.[2][3][4]미국 마피아의 태동기인 1890년대부터 1928년에 이르기까지 약 30년에 걸쳐 뉴욕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 마피아 패밀리들이 자리를 잡았다. 초창기 미국 마피아의 원류로 파이브 포인트 갱과 모렐로 패밀리 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시칠리아 출신의 마피아는 유대계나 아일랜드 마피아 등의 다른 경쟁자들을 제압했다.[5] 이 과정을 거치면서 마피아는 확고한 암흑가에서의 입지를 다졌으며 때마침 닥쳐온 금주법으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축적하게 되었다. 만약 이 시기에 금주법이 시행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마피아 세력은 한낱 삼류 불량배 수준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금주법 시기 술에 관련된 각종 이권을 두고 오늘날 마약 카르텔들이 싸우듯이 마피아와 갱단들 사이에 전쟁이 잦았다. 차에 줄지어 타서 지나가면서 총기를 난사하는 드라이브 바이 슈팅[6]이나 시카고의 알 카포네와 밸런타인 데이 학살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 시기에 관련된 일화는 훗날 미국 영화와 소설 등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1930년에 이르러 5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최대 규모의 마피아 항쟁인 카스텔람마레세 항쟁이 벌어진다. 당시에 미국 마피아를 일종의 식민지로 삼고 싶었던 시칠리아 마피아 두목(Boss) 비토 카시오 페로(사진)가 자신의 부하인 살바토레 마란자노(사진)를 선봉장으로 세워 미국의 마피아를 규합하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였으나, 뉴욕 마피아 두목 주세페 마세리아(사진)가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두 파벌 사이에 항쟁이 시작됐다.
항쟁은 주세페 마세리아의 부두목(Underboss)인 러키 루치아노가 마세리아를 배신할 것을 마란자노와 결탁하고, 유대계 갱단을 포섭하여 마세리아를 제거하면서 끝났다.[7][8] 이후 살바토레 마란자노는 그동안 정체성이 모호한 채로 활동하던 미국 전역의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에 공식적으로 라 코사 노스트라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조직화하여 본인이 총 두목(Capo Di Tutti I Capi)이 되었다.[9] 루치아노는 마란자노로부터 마세리아의 조직을 물려받고 서열 2위가 되었다. 하지만 마란자노는 루치아노가 점점 더 실세가 되고, 루치아노가 시칠리아 마피아의 전통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제거하기로 결심했으나, 역으로 루치아노가 먼저 행동하여 마란자노가 자리에 오른지 4개월 만에 살해당한다.[10] 이 시기 마피아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로 보드워크 엠파이어가 있다.
러키 루치아노는 유대계 마피아나 아일랜드계 조직들과 사이가 좋았다. 일단 루치아노의 최측근 마이어 랜스키(사진)부터 유대인이었다. 루치아노는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는 마란자노가 추구했던 이탈리아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조직은 오래가지 못 갈 거라고 보고, 혈통에 연연하지 않는 철저하게 기업화된 범죄조직을 원했다.
결국 러키 루치아노가 주도권을 장악한 뒤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때 '두목 중의 두목'이라는 뜻을 가진 최고 두목의 칭호인 "Capo Di Tutti i Capi"를 아예 폐지하고 민주적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미국 라 코사 노스트라 패밀리는 인종이나 혈통에 상관없이 사업 관계를 맺거나 조직원으로 받아주게 되었다.[11] 가장 강력한 패밀리의 우두머리들로 구성되는 위원회에서는 사법적 기능을 수행했다.[12] 각 패밀리의 우두머리는 '보스' 또는 '돈'(Don)이라고 불렸으며, 그들의 권위에 대해서는 오직 위원회만이 문제 삼을 수 있었다. 나아가 다른 인종으로 구성된 유력 범죄조직들과 함께 전미범죄연합체(National Crime Syndicate)를 결성했다. 러키 루치아노의 멘토인 아널드 로스스틴(사진)이 꿈꾸었던 민족적 분열을 넘어 협력하는 갱단의 새로운 조직구조는 루치아노와 랜스키에 의해 실현됐다. 이들이 만든 기본 구조와 위원회가 아직도 존재하며 오늘날 미국 마피아 상당수를 감독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창안자들이 얼마나 뛰어났으며 그 구상 자체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증명한다.
항쟁이 종결되고 느슨한 연합 구조가 된 마피아 패밀리는 전국에 25개의 패밀리가 움직이게 되었다.[13] 러키 루치아노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마피아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규모가 큰 범죄단으로 성장했으며, 범죄를 통해 획득한 이윤을 호텔·식당·유흥업 같은 합법적인 기업 소유에 재투자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본토로까지 세력을 역으로 확장,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산을 독과점한다. 당시 본토 두목(Boss)들은 이 하극상에 격분했으나 파시스트 정부의 탄압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어쩌지도 못하고 발만 구를 뿐이었다. 이 '격차' 때문에 본토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 사이는 한동안 어정쩡했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마피아는 밀주 제조•유통을 중단하고, 도박·파업 조종·고리대금·마약 유통·매춘 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미국 내에 마피아들이 활개치는 상태라, FBI는 창설 초창기부터 범죄조직을 주적으로 삼게 된다. 다만 초기에는 제대로 잡지 못하고 삽질만 반복했다. 당장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마저 "마피아라는 범죄조직은 없다!"라고 비호하는 걸 넘어 많은 마피아들을 "완벽한 반공주의자에다가 진실로 애국적인 훌륭한 미국의 사업가."라고 묘사했다. 더 자세한 내막은 후버 문서 참고.
1946년에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정부와 협력한 대가로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된 러키 루치아노는 본토 범죄조직의 재건을 도우며 본격적으로 양국 간 마피아 사업의 다리 역할을 맡았고, 국제 공조를 강화했다. 이로써 미국 마피아는 전국구 조직을 넘어 국제적 조직으로 발돋움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마피아는 쿠바에서 마피아 위원회를 개최하는 등 거점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라스베이거스 짓듯이 여러 카지노와 호텔을 지었다.[14] 그러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무능력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 때문에 마피아는 자신들이 투자했던 금액의 원금도 못 받고 철수하고 말았다.[15] 덧붙여 카스트로를 지지했던 시민들은 주인 없는 카지노에 있던 슬롯머신을 깨부수는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1951년에는 미국 상원의회에서 키포버 청문회가 열려 전국의 마피아 인사들이 TV 카메라 앞에 섰다. 그중에는 러키 루치아노의 후계자이자 당대 최고의 미국 마피아 두목(Boss)이었던 프랭크 코스텔로도 있었다. 다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라 코사 노스트라의 실체가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전이었고, 시민들은 청문회에 출석한 인물들을 '이탈리아 혈통의 거물 조직폭력배 두목' 정도로 생각했다.[16]
1957년에 뉴욕주 애팔러친에서 미국 전체의 마피아 두목(Boss)들이 모인 "애팔러친 회합"이 열렸는데, 동네 여관이 모두 예약되고 다른 지방의 자동차들이 너무 많자 이상하게 여긴 한 순경에 의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당국은 필사적으로 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60년대 초반에는 참석자와 회의 내용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입수된다.[17] 이때를 기점으로 비로소 미국 마피아의 존재가 대중들에게 드러났으며, 존 에드거 후버는 어쩔 수 없이 "마피아는 없다... 가 아니라 있었네요."라고 말을 바꾼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떨떠름한 것은 여전했다.
1960년 8월, 미국 CIA 안보국장인 셰필드 에드워즈 대령은 마피아 암살자들에 의한 피델 카스트로의 암살을 제안했다. 1960년 8월부터 1961년 4월 사이에 CIA는 마피아의 도움을 받아 카스트로를 독살하거나 사살하려는 음모를 연달아 추구했다. 동시기에 마피아는 쿠바에 무력 공격을 감행해서 카스트로 정권을 축출해 카지노를 돌려주겠다는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을 돕게 된다. 하지만 피그스만 침공 작전은 실패했고 그밖에 여러 요인으로 케네디는 마피아와 척을 지게 된다.
1960년대부터는 미국 마피아가 시칠리아 마피아와 공조해 프랑스의 프렌치 커넥션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헤로인을 밀수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초창기 마약장사를 싫어했던 전통적인(Old-School) 마피아들은 점점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일부 두목(Boss)들이 마약장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 이것은 영화 대부, 프렌치 커넥션 등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단, 프렌치 커넥션이 성행하던 시절에도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마약을 직접 거래하는 건 금기사항이었다. 훗날 뉴욕 루케시 패밀리 두목 카마인 트라몬티는 1974년에 프렌치 커넥션 사건의 흑막으로 지목되어 유죄판결을 받지만 "나는 마피아일 수도 있고 나쁜 짓을 했을 수도 있지만 마약상은 아니다.(I may be a mobster and may have done bad things but I am not a drug dealer.)"라고 얘기하며 마약 사업과 본인을 철저히 분리했다.[18]
전 뉴욕 타임스 기자이자 마피아 전문가인 셀윈 랍은 자신의 저서에 '정부 분석 결과, 1960년대 20여 개 미국 마피아 패밀리의 범죄수익은 연간 7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는 당시 미국 10대 대기업의 수익을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하다. 범죄수익에 대한 제일 좋은 몫은 라 코사 노스트라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인 뉴욕의 5대 갱단이 거둬들였다.(A government analysis estimated that, in the 1960s, the illicit profit of the nation's twenty-odd Mafia families topped $7 billion annually, ap- proximately the combined earnings of the ten largest industrial corporations in the country. the lion's share of the illicit wealth was reaped by the most power-ful segment of the Cosa Nostra conglomerate - the five New York gangs.)'라고 적었다.
1963년에는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는 미국 마피아가 대통령 암살에 개입했다는 음모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것만 집중적으로 다루려면 책 한 권이 나올 정도인데, 암살 사건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케네디 암살에 관한 공인된 '사실'은 리 하비 오즈월드가 케네디를 암살했고 그 오스왈드를 암살한 것은 잭 루비라는 댈러스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던 마피아와 연루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19] 두 사건 모두 당시 조사 기관에 의해 우발적인 살인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그 외에 암살의 배후세력이라든가 하는 것은 법원 판결 등 공인된 사실로 드러난 것은 하나도 없기에 추측의 영역이고 일종의 음모론이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미국인 대상으로 진행된 케네디 암살의 배후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에서 마피아가 1위를 차지하거나, 하버드 대학교 출신 사학자 데이비드 E. 카이저(David E. Kaiser)는 본인의 저서 Road to Dallas에서 대통령 암살 배후로 마피아 개입설을 채택하기도 했다.[20][21] 만약 마피아가 개입했다면 제일 적극적으로 가담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인물은 3명의 두목(Boss)인데, 시카고 두목 샘 지앙카나(사진)와[22][23] 뉴올리언스 두목 카를로스 마셀로[24], 플로리다 주 두목 산토 트리피칸테 주니어(사진)[25]가 있다.[26]
1963년에 매클러런 상원 위원회에 출석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셉 발라키(사진)가 "마피아는 존재합니다."라고 증언하며 미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마피아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20세기에 미국 마피아는 여러 차례 연방정부와 협력했는데, 파시스트 정권이나 카스트로 정권에 대항할 때뿐만 아니고 흑인 척살을 목표로 하는 인종차별 집단인 KKK단을 수사하는 FBI를 돕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27] 이는 원래 KKK단은 단순히 흑인만 싫어한게 아니라 유대인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인이나 아일랜드인, 폴란드인 같은 가톨릭 계열 이민자도 싫어했고 금주법 시절에는 사회정화를 한답시고 마피아가 운영하는 술집이나 사창가를 습격하기도 했기 때문에 마피아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술하였듯, 금주법이 폐지된 이후 미국 마피아의 핵심사업은 밀주 유통에서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노동 공갈과 도박 사업으로 옮겨갔다. 회사를 형성하는 세 다리 중 하나[28]인 노동자들이 "일 안 해!"라고 버티면 회사로서는 답이 없다. 마피아는 산업계에 침투하고 기업을 협박, 갈취하는 수단으로 노조를 장악한 것이다. 실제로 상당수의 마피아들이 합법적인 노조 지도위원 행세를 했고, FBI에서는 노조를 "라 코사 노스트라가 얻는 금전적 이득, 국가적 권력, 영향력의 근본적인 원천"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1970년대 지미 카터 대통령은 뉴욕 갬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서니 스코토를 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고려했다. 마피아의 노조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인 1975년 지미 호파 실종사건이 있다.
미국 마피아는 트럭운송노조, 건설노동자조합, 항만노동자조합, 호텔종사원노조 등 주요 노동조합들을 장악했고 돈벌이를 위해 노조를 여러 방면으로 이용했다. 마피아는 친구의 일자리를 위해 회사를 갈취할 수 있었고, 지인들에게 의료 혜택도 줄 수 있었다. 당시 마피아가 트럭운송노조를 조종해 파업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무려 250만 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그밖에 노조 연금 기금은 마피아 마음대로 쓸 수 있었고 은행에 잠자고 있는 수억 달러의 돈은 어디든 송금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마피아는 은행가들과 보험회사들을 조종해 그들을 이용했다. 특히 1970년대에 뉴욕 콜롬보 패밀리가 주도해 결성된 '이탈리아계 미국인 민권 연맹'은 한 번에 3만~4만 명의 군중을 시위에 동원할 수 있었으며[29] 당대 뉴욕 마피아 두목(Boss)들은 그림자 시장(Shadow Mayor)으로 불린 거물 정치인과 결탁해 정계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30]
마피아들의 노동조합 장악은 전후 뉴딜동맹의 약화와 노 - 사 - 정 3개 집단 간의 갈등이 낳은 비극이었다. 전쟁 이후 노조와 기업은 서로 갈등을 빚었고 45 - 46년 불황이 미국 경제에 미친 악영향과 45 ~ 46년 대파업의 실패는 미국 노동 조합에 큰 상처를 남겼으며 여론까지 노조에 등을 돌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딜 시대의 진보적 노동법인 와그너 법을 무력화하는 태프트 - 하틀리 법이 제정되었고, 법적인 변화와 냉전 체제가 구축되며 사회적으로 심화된 레드 컴플렉스(후대의 매카시즘 포함) 공세는 미국 노조들을 분열시켰다. 노조 위원장들이 산하 활동가들에게 '나는 반공주의자입니다'라는 충성서약서를 요구했던 시절이었고 이 과정에서 급진적 사회주의 지향의 IWW는 쇠퇴, MMWIU는 CIO에 합병되었으며 많은 노동조합들과 그를 뒷받침하던 주축 활동가들이 공산주의적이란 이유로 AFL과 CIO에서 축출당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단결력은 약화되었고 노조 또한 그 지지세가 약화되었다. 마피아들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노조를 장악해 버린 것이다.
FBI는 업계를 완전히 장악한 마피아의 산업 지배력과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관계자를 살해할 수도 있는 그들의 위험성을 뉴욕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 앤서니 코랄로(사진)의 재규어 차량을 도청하며 잘 알게 되었다. 연방정부는 마피아가 돈과 상업에 끼친 경제적 해악을 천문학적으로 보았다.[도청내용]
그렇게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마피아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32] 1960년대 중반에 FBI와 법무부, 재무부는 마피아를 공공의 적(Public Enemy)으로 규정하고 1970년에는 의회에서 마피아를 겨냥한 RICO 법이 통과, 1972년에는 마피아와 사실상 결탁 관계에 있던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사망하고 이후 FBI 측에서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여 1980~1990년대에 절정을 맞이한다. 특히 마피아는 197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소비되는 마약 제조와 밀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생기는 막대한 이윤은 마피아 내부의 여러 계파 간에 강한 경쟁의 불씨가 되었으며, 그결과 살인이 빈발하자 정부에서 다시 마피아 지도자들을 재판·투옥하게 되었다. 그 밖에 조직원에 대한 감시와 도청, 이권 사업의 세무 사찰, 조직 내 잠입수사원 투입 등을 통해 팔다리를 자르기 시작했고, 처벌도 강화되어 형량이 심하면 수십 년까지 올라가면서 타격을 많이 입게된다. 1980년대부터는 마피아 내부 규율을 무시한 채 오직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 조직원들이 꽤 생기면서 기강이 흔들리기 시작한다.[33]
1980년대에는 미국 법무부 서열 3위인 사법 차관 자리에 있다가 뉴욕남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으로 온 검사장 루돌프 줄리아니가 우선 월 스트리트의 거물급 재계 인사들에게 법의 심판을 내린 뒤 마피아 수사에 착수했는데, 그가 주도하여 뉴욕 5대 패밀리의 주요 지도자들을 겨냥해 일명 세기의 재판(Case of Cases)이라 불린 마피아 위원회 재판(Mafia Commission Trial)이 1985년에 진행된다. 이 재판의 수석 피고인이 그 유명한 앤서니 살레르노다. 1986년 말에는 위원회 구성원들이 줄리아니의 암살을 논의했다.[34] 강경파인 콜롬보 패밀리 두목(Boss) 카마인 퍼시코(사진)와 줄리아니의 기소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은 신임 갬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는 암살을 찬성했지만 나머지 구성원들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35][36] 결국 위원회 재판은 연방정부가 승소하고 피고인들은 유죄판결을 받는다. 당시 타임지에서는 위원회 재판을 가리켜 '1943년 시카고 마피아의 최고 지휘부가 휩쓸려 간 이후 조직범죄의 기반에 대한 가장 중대한 공격'으로 묘사했다. 결국 1987년에 마피아 수사를 주도했던 연방검사 출신 변호사 윌리엄 아론왈드가 표적이 되었고 그의 판사 아버지가 보복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피아 위원회 재판과 더불어 또 다른 미국 마피아 관련 재판으로 유명한 피자 커넥션 재판(Pizza Connection Trial)은 1985년 9월 30일부터 1987년 3월 2일까지 계속되어 18건의 유죄 판결로 끝났으며 1987년 6월 22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이는 미국 사법 역사상 가장 긴 재판으로 남았다. 이 재판은 시칠리아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가 터키와 서남아시아에서 수입한 모르핀과 남아메리카에서 수입한 코카인을 처리하는 마피아 자금을 여러 은행과 증권사를 통해 세탁하고, 마피아들이 독자적으로 소유한 피자 가게를 통해 미국에서 마약을 최종 유통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4개 대륙을 아우르는 이 일련의 체계는 1975년~1984년 사이에 미국 북동부와 중서부에 16억 5천만 달러의 헤로인을 공급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성취는 미국 FBI 소속 잠입요원 도니 브래스코가 수집한 증거와 조반니 팔코네 판사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사법기관의 공조, 시칠리아 마피아 변절자 톰마소 부셰타의 내부 증언으로 이루어졌다.[37]
일부 조직원들은 수십 년간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는 도리가 없었던 듯 재판에서 정부 측 증인이 되어 협조했고, FBI의 끈질긴 수사로 인해 1990년대에는 세력이 크게 타격을 입었다. 1993년에는 변절한 갬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그라바노(사진)가 미국 상원의회에 출석해 국회의원들에게 미국 내 조직범죄에 대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38]
기존에는 마피아 생활에 회의를 느껴 조직을 탈퇴하면 오메르타(Omertà), 즉 침묵의 계율을 어겼다는 배신자의 낙인과 함께 돌아오는 죽음뿐이었지만, 이제는 FBI 및 연방검사와 협조한 대가로 낮은 형량 혹은 불기소처분을 보장받는 사법거래를 하고 법정에서 Pentito라 불리는 증언자가 되어 증언을 하면, 증인보호법으로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현상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보통 이탈리아인 조직원 보다 자본주의에 물든 미국인 조직원들이 오메르타를 더 잘 어긴다는 시각이 있다.
불법사업 및 조직범죄법과 FBI의 도청 등이 활발하게 사용되면서, 마피아들은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조직 수뇌부도 타격을 입는 상황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의 경우 말단 조직원이 누구의 지시를 받는지, 같이 일하는 동료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이러한 경향은 다른 패밀리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빈센트 지간테 같은 인물은 마피아의 황금기인 1960년대 후반부터 정신병자 행세를 시작했는데, 그 덕에 조직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인 1980년대에 두목(Boss)이 되었음에도 아주 오랫동안 법망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FBI 요원들도 최대한 범죄 혐의를 입증하려 수사에 몰두한다. 현대 마피아들은 도청기가 수사에 도입된 이래 여러 차례 당해온 과거의 경험으로 전자기기를 찾아내는 전문가를 초빙하여 수시로 아지트에 도청기 설치 유무를 검사하거나, 재밍 장치를 이용해 도청을 방지하는 등의 대응을 하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사업 논의는 상대를 직접 만나 노트에 글씨를 써 가며 의사소통을 나눈다고 알려져 있다.
3. 세계 대전 이후
다시 시칠리아로 돌아가서,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재직기간 동안 '철의 장관' 체사르 모리를 시칠리아 주지사로 임명해 마피아를 강하게 탄압했다. 모리는 수천 명의 마피아를 체포하고 고문해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지만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를 원천적으로 근절시키지는 못했다.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고 무솔리니가 총살되어 측근들과 함께 피아잘레 로레토 광장에 전시되었을 때, 숨죽이고 있던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는 때맞춰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된 러키 루치아노를 위시로 한 미국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부활한다.
특히 가난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섬에서 공산주의가 번저나가는걸 막기 위해 가톨릭 교회, 우익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마피아와 손을 잡았다. 이후 반공의 선두에 서며 좌익에 대해 견제를 했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했다. 특히 악명 높은건 '포르텔라 델라 지네스트라 학살'로 노동절 퍼레이드를 하던 좌익들에게 마피아와 살바토레 줄리아노 같은 산적, 우익 지주들이 연합해서 공격을 해[39] 수많은 사람을 살상시킨 사건이다. 대부분의 마피아 두목(Boss)들이 지주나 시칠리아섬의 자본가, 구체제 권력자와 연계되어있었는데 이들은 토지개혁에 불만을 품고, 이탈리아 공산당 같은 사회주의 세력을 적대시하고 매우 반공적이었다. 또 파시스트 체제에서 탄압 받고 있는 점을 이용해 자신을 반체제 인사로 포장하여 미군정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했다.
뿐만아니라 전후 혼란기 미군 폭격으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고 범죄가 치솟고, 암시장이 활성화되자 마피아들은 치안을 유지하며 건설업을 비롯한 여러 사업을 장악해 많은 돈을 벌고 미군정과도 연계하여 시칠리아섬을 좌지우지 했다.[40]
또 이렇게 얻은 우익 정치권과의 인연으로 전후 이탈리아 정치를 가장 좌지우지한 대 정치가이자 7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줄리오 안드레오티와 관계를 맺어 본토 정치권에도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1962년 미국으로 선적하던 헤로인 사업을 하던 체자레 만젤라는 두 조직인 그레코 패밀리와 라 바르베라스 패밀리의 도움을 얻어 사업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근데 그레코 패밀리의 동맹인 칼케도니오 디 피사의 선적물이 미국에 도착했을때 일부 헤로인이 비어있었고 미국 바이어는 양이 적다면서 실제보다 더 적은 금액을 지불했다. 디 피사는 미국인들이 우리를 속였다고 비난 했지만, 라 바르베라스는 디 피사가 헤로인을 횡령하고 마피아 위원회를 속이고 있다고 의심했다. 마피아 커미션의 재판이 열렸으나 디 피사는 만젤라의 옹호를 받았고 결국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라 바르베라스는 매우 격분했고 하필이면 그때에 디 피사가 살해 되어 버렸다. 디 피사는 사실 라이벌인 미켈레 카바타이오에게 살해됐지만 카바타이오는 디 피사와도 바르베라와도 사이가 안좋았기에 이간질을 목적으로 마치 바르베라 형제가 디 피사를 죽인것으로 조작했고, 이는 갈등을 폭발시켰다. 위원회의 타겟이 된 살바토레 라 바르베라가 실종됐고 사망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참다못한 라 바르베라스 패밀리가 만젤라를 폭탄테러로 죽이면서 그레코 패밀리와 위원회 vs 라 바르베라스의 대전쟁이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무고한 사람들이 휘말려서 다쳤다.
1963년, 위원회 수장이었던 살바토레 그레코를 죽이기 위해 설치된 마피아의 자동차 폭탄을 처리하려던 이탈리아 헌병군 (Carabinieri) 소속 헌병 7명이 폭발에 휘말려 죽는 치아쿨리 참사를 계기로 1차 마피아 항쟁(Prima Guerra di Mafia)이 시작되었다. 무고한 카라비니에리의 죽음에 전국이 분노했고 결국 본토 정부의 강력한 탄압을 받아 2,000명 이상의 마피아들이 체포되고 마피아간의 전쟁은 종결을 맺었다. 전쟁의 결과로 68명이 사망했고 살바토레 라 바르베라의 동생인 안젤로 라 바르베라도 체포됐다가 감옥에서 살해됐다. 또 사건을 조작한 카바타이오도 살바토레 그레코의 명령으로 살해당하면서 전쟁은 그레코 패밀리와 위원회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지금까지 그레코 패밀리는 코사 노스트라의 강력하면서도 주요한 조직으로 남아있다.
한편 전쟁과 체포를 피해 해외로 도피한 사람들도 있어 체포자가 많았지만 마피아를 뿌리 뽑진 못했고, 또 추후의 재판에서도 대부분이 가벼운 형을 받거나 무죄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으로 많은 마피아 클랜들이 해체되고 위원회도 일시 해체됐으며 다수의 조직원들이 빈곤속에 빠졌다. 이는 마피아들이 마약 이권에 더더욱 집착하는 계기가 되어 2차 마피아 항쟁의 불씨를 남겼다.
한편 70년대 초에 밀수붐이 일어났는데 주요 사업은 담배 밀수 였지만, 마약 밀수 역시 중요한 사업이었다. 원래 프렌치 커넥션으로 이어지는 터키,시칠리아,코르시카,마르세유,미국의 거대한 마약 밀수 루트가 미국-프랑스 당국의 탄압으로 소멸하자 헤로인 제조인들은 아예 시칠리아에 헤로인 제조 공장을 세우고 직수출을 시도했는데 이를 받던 미국 마피아들이 겉으로는 합법적인 피자 가게를 운영하면서 위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를 '피자 커넥션'이라 불렀다.
이렇게 세워진 피자 커넥션으로 미국의 헤로인 중독이 늘어나 가뜩이나 남미의 마약 카르텔들의 코카인 밀수에 골머리를 사던 미국 정부에 크나큰 분노를 안겨주었다. 1982년까지 미국 북동부의 헤로인 무역의 약 80%를 시칠리아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미국 정부가 이탈리아 정부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게 되는 계기가 됐으며 미국-이탈리아 양국의 공조와 1980년대 세기의 재판과 조직범죄와의 전쟁을 불러와 많은 마피아들의 체포와 조직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한편 1970년대 말부터 헤로인 무역의 지배권 및 여러 이권을 두고 발생한 팔레르모 세력과 코를레오네시간의 갈등,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 간의 내부 항쟁으로 시작된 2차 마피아 항쟁(Seconda Guerra di Mafia)이 발발, 이것이 1980년대를 관통하는 마피아 대전(The Great Mafia War)으로 번져 항쟁으로만 연간 200여 명이 죽어 나가는 참사를 빚었다.
항쟁의 주역인 루치아노 레지오의 코를레오네시 패밀리는 1970년대부터 급성장 하여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있었다. 1974년 레지오 체포 된후 그의 오른팔인 살바토레 리이나가 두목 대행(Acting Boss)-두목(Boss)을 하면서 마약 이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른 조직들을 매수하여 자기편으로 삼고 여러 조직원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불리더니 체자레 만젤라의 부하로 있다가 커미션의 수장이 된 가에타노 바달라멘티와의 갈등이 이어젔다. 가에타노는 코를레오네시의 동맹인 프란체스코 마도니아를 죽였지만 곧장 보복을 받아 동맹 조직의 보스들인 쥐세페 디 크리스티나와 쥐세페 칼데로네가 사망하고 본인도 위원회에서 추방되어 쫒겨났다. 이후 그 자리는 코를레오네시의 동맹인 미켈레 그레코[41]로 대체되었다. 한편 위기를 감지하고 1차 마피아 전쟁 이후 체포를 피해 베네수엘라로 달아났던 살바토레 그레코가 시칠리아로 돌아와서 중재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긴장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이라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코를레오네시는 계속 숙청 작업을 해 결국 라이벌 조직의 두목(Boss)인 스테파노 본타데를 암살하면서 거대한 전쟁을 열었다. 3주 뒤에는 본타데의 동맹인 살바토레 인제릴로도 총알에 벌집이 되어 죽었다. 팔레르모에서만 2년 동안 400명이 죽었고 160명 이상이 실종됐으며 시칠리아 전역에서도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코를레오네시의 전쟁은 굉장히 과격했는데 마피아를 비판하는 언론인이나 무고한 일반인도 거침없이 살해했고, 눈 밖에 난 정치인,자신들을 방해하는 경찰, 판사, 검사, 반마피아 수사관도 죽였으며 심지어 1982년에는 치안 확보를 위해 출동한 헌병군의 지휘관 키에르자 장군조차 암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 파견 지원을 간 한 FBI 요원은 "미국 마피아 간 항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극을 시칠리아에서는 볼 수 있었다."라고 밝힐 정도였다. 2차 마피아 대전은 거의 일방적인 결과가 나올 정도로 코를레오네시와 동맹 조직의 완승으로 끝나고 이후 이 전쟁을 주도한 살바토레 리이나는 두목중의 두목(Capo Di Tutti I Capi)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말 안듣는 동맹 조직의 주요 구성원들을 숙청하기도 하는등 코를레오네시의 행각은 잔혹 그 자체였다.
4. 막시프로체소, 마피아와의 전쟁
아무리 태평한 이탈리아인들도 이것만은 참지 못했다. 결국 의회가 나서서 '반마피아 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힘을 얻은 사법당국도 용기 있는 젊은 검사들을 주축으로 대규모 검거 작전을 시행한다. 이 과정에서 피비린내나는 내부 투쟁을 겪으며 마피아에 환멸을 느낀 시칠리아 마피아 행동대원(Soldier) 톰마소 부셰타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중에는 최초로 오메르타를 어기고 정부 증인으로 나선다.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이어진 대재판(Maxiprocesso)은 조직으로서의 마피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당시 마피아와의 전면전에 나섰던 검사들은 암살 위협을 피하기 위해 경호가 용이한 교도소에서 교정경찰의 경호 아래 생활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제소자들과 같이 산 것은 아니고, 격리 구역에서 지냈다.
1992년, 마피아 검거의 선봉에 섰던 지오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판사 부부와 그들을 호위하던 3명의 경찰관이 자동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42][43],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미국 FBI의 지원으로 DNA 분석을 하여 법정 증거로 제출되기도 하였다. 2019년에는 팔코네 판사 암살에 미국 마피아 조직인 갬비노 패밀리가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44]
조반니 팔코네 판사가 암살당한 후, 그의 절친한 동료 파올로 보르셀리노(Paolo Borsellino) 판사가 마피아 소탕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결국 보르셀리노까지 마피아 조직에 살해된다. 시칠리아 마피아 수뇌부는 음지의 잔혹한 무력으로 국가와 시민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 만행은 이탈리아 전역과 그들의 터전이던 시칠리아 시민들까지도 격분하게 만들었다. 두 판사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시민 차원의 제보와 하부 조직원의 자수가 잇따랐다. 결국 살바토레 리이나가 포함된 다수의 최고위급 두목(Boss)들이 검거, 투옥되었고, 마피아는 폭탄 테러까지 불사하며 격렬히 저항했으나 이탈리아 정부의 군•검•경찰을 동원한 총공격을 받자 당해낼수 없어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현재까지 꾸준히 '반마피아 운동'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들 두 명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현재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공항 이름은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으로 되어 있다.
1993년, 고향인 시칠리아 브랑카초(Branccacio)에서 반 마피아 운동을 하던 주세페 풀리시(Giuseppe Pino Puglisi) 신부가 56번째 생일이던 9월 15일에 마피아에게 총을 맞아 순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풀리지 신부는 뭍에 있는 교구를 돌아다니다 1990년에 고향 교구로 돌아온 이후로 지속적으로 마피아에 대항할 것을 설교하고, 아이들이 탈선하여 마피아에 가입하는 일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자기 성당 앞에서 괴한들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45] 풀리지 신부가 사망한 사건은 다시 한 번 이탈리아에 충격을 주었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풀리지 신부의 고향 교구인 팔레르모 대교구의 전임 교구장 주교였던 살바테로 데 조르지 추기경을 대리인으로 삼아 시복식을 허가하였으며, 삼종기도 시간에 풀리지 신부를 언급하며 마피아의 악행을 규탄하였다. 풀리시 신부의 일대기는 2005년 이탈리아에서 'Alla luce del sole' 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줄리오 안드레오티 또한 정치 은퇴 이후 마피아와 관련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치열한 재판 끝에 1심에선 무죄를 받았고, 이후의 항소심에선 공소시효 만료로 무죄를 받았다. 마피아의 내부 고발자이자 살바토레 리이나의 전 운전기사였던 발두치오 디 마지오는 안드레오티가 일국의 총리로써 시칠리아 마피아 고위 간부들과 직접 대면해가면서 일을 논의했으며, 지명수배자였던 시칠리아 마피아 두목(Boss) 살바토레 리이나의 손등에 존경의 입맞춤을 했다고 증언했으나 안드레오티 측은 코미디 영화라며 일축했고 베테랑 기자인 인드로 몬타넬리는 안드레오티는 자기 자식한테도 키스를 안 한다며 이 주장을 의심했다. 이후 재판에서 내부고발자의 범죄행각과 모순적 발언이 드러나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46] 또한 2014년 교도소 안의 살바토레 리이나와 풀리아의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 두목 알베르토 로루소의 대화를 몰래카메라로 도청한 바에 의하면 살바토레 리이나와 안드레오티 총리는 서로 만났으나 키스를 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 안드레오티는 1980년대부터 반마피아 법안을 여러 개 통과시켰기에 이점은 재판에서 그에게 매우 유리한 정황이 되었다. 실제로 재판부는 1980년 봄까지 마피아와 안드레오티 사이의 관계를 입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법의 처벌을 가할 순 없었다. 여담으로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1986년 막시 재판 당시 배심원 평결을 뒤집기로 유명한 판사를 임명해 수많은 마피아들이 받은 유죄 판결을 번복 시키기도 했다. 그는 총리 시절인 1991년에 반 마피아 법안을 여러 개 통과시키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해 화가 난 살바토레 리이나의 암살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리이나는 곧 고위 인사 죽이기 운동으로 안드레오티의 최측근 살바토레 리마를 죽이게 된다.[47] 하지만 당시 안드레오티가 법안을 통과시킨 건 정의감이 아닌 당대 '깨끗한 손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시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추진한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안드레오티는 이후 재기를 시도했지만 마피아와의 관계가 명확했기에 결국 정계에서 퇴출되었고 그의 퇴출과 함께 부정부패와 마피아 관련 수사로 당 지도부가 대거 입건되면서 기독교민주당도 같이 몰락하여 결국 해체되고 당내 좌파가 권력을 잡아 한때 반목하던 이탈리아 민주당에 최종적으로 합당되었다. (우파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 합류한다) 기민당과 마피아들의 관계는 마피아들이 기민당에 암묵적으로 투표하는 게 관행이었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안드레오티는 이들을 일종의 정치깡패로 부리면서 서로 이용하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시칠리아 마피아의 지나친 살육전으로 인해 대부분의 지도부들이 종신형을 선고받아 수감되거나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이 선고되어 지명 수배자 신세가 된다. 수감된 두목급 인사들은 자신의 대리인을 두목 대행(Acting Boss)으로 내세워 복역 중에도 조직을 이끌었고 지명 수배자가 된 두목급 인물들은 정부의 수사망을 피하면서 조직을 이끌었다. 하지만 과거처럼 안정된 상태에서 조직을 운영하는 것과 비교하면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1991년경 이탈리아는 그동안의 마피아와의 전쟁을 좀 더 체계적으로 이끌고 앞으로도 마피아와의 전쟁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Direzione Investigativa Antimafia (DIA - 반마피아 조사국)이라는 수사기관을 신설했다. DIA는 대 마피아 전문기관으로 이탈리아 헌병군, 이탈리아 경찰, 이탈리아 재무경찰 (Guardia di Finanza)를 모두 통솔해서 마피아 범죄를 뿌리뽑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 의회에 반마피아 위원회를 열었으며[48] 강력한 증인보호 프로그램과 범죄조직에 대한 도청도 도입하였다. 또한 FBI를 비롯한 국제수사기구와도 적극적으로 공조해서 마피아와 싸우고 있다.
살바토레 리이나의 뒤를 이은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사진)는 '반마피아 운동'에 열심히 매진하는 공무원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세간에서 정계와의 유착 의혹이 끊이질 않았고, 리이나 수감 이후 13년동안 이탈리아 검경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니다 2006년에 검거되었다. 이탈리아 언론에 따르면 그의 검거를 끝으로 코를레오네시 패밀리는 코사 노스트라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
프로벤자노의 후계자로 여겨지는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사진)[49]는 2020년 새해가 밝을 때까지 검거되지 않는 등, 여전히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는 국제적인 범죄 조직으로서 그 위상을 지키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지속적인 검거와 수사로 인해 본토의 조직들에 비해서 다소 잠잠한 편이다.[50] 그리고 그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도 2023년 1월 결국 체포되었다. 이탈리아 경찰은 이를 큰 업적으로 자축했다. #
한편 시칠리아에서는 얼마 전에도 카라비니에리를 동원하여 거의 내전을 방불케하는 대규모 체포 작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1980년대 큐폴라(위원회)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항쟁에서 패배해 밀려났던 세력들이 살바토레 리이나의 수감 이후 미국 마피아의 지원하에 시칠리아로 돌아와 조직을 재건하는 등 21세기 들어 새로운 양상들이 관측되는 중이다.
하지만 1980~1990년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이탈리아-미국 양국 정부의 대대적인 수사와 재판으로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 세력과 미국의 라 코사 노스트라 세력은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약화됐다. 다만 여기서 이탈리아는 새로운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5. 본토 범죄조직 세력의 대두
1992년 '깨끗한 손'이라는 기치 아래 시작된 반부패 운동과 정부의 반 마피아 단속 조치는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전역의 다른 범죄조직들도 대상으로 했지만, 이들 본토 세력들은 수사망이 집중된 시칠리아 마피아에 비하면 훨씬 작은 타격을 받았다.[51] 대표적인 본토 범죄조직들로, 17세기부터 시작되어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범죄조직 중 하나인 나폴리의 '카모라'와 18세기 말부터 시칠리아에서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강제 이주된 이들로 구성되어 전통적인 범죄를 저지르던 조직들이 성장한 '은드랑게타'가 있다. 이들은 시칠리아 마피아와 협력하면서 사업을 같이하고 친분을 다지며 조직을 성장시켰다.어린 마피아 지망생들을 시골에 설립한 '범죄 학교'에 데려와서 전문적인 훈련을 시킨다는 1999년자 기사도 있다.#
2010년 칼라브리아 지방의 은드랑게타는 정부 상대로 선전포고도 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대전차 화기를 동원해 고속도로 확장공사를 방해하려는 은드랑게타 조직원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군 병력을 투입하기도 했다.
FBI에 의하면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거대한 범죄조직은 나폴리의 카모라고, 2번째가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라고 한다.# 단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은드랑게타의 세력을 코사 노스트라보다 더 크게 보는 경우도 있다. 은드랑게타의 주 사업은 마약 밀수로 전 유럽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은드랑게타는 최근들어 카모라보다 더 활동성이 강해지고 있어서 이탈리아 경찰의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 은드랑게타는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과도 연계하고 있으며 2017~2019년동안 이탈리아 경찰은 최대 규모의 검거작전을 개시해 약 400명의 단원들을 체포했다. 이는 시칠리아의 코사 노스트라를 대상으로한 막시 재판에 이은 두번째로 큰 규모이다. 은드랑게타는 정부와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며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고 조직의 결속력이 강해 펜티토(정부증인)가 되는 경우도 타조직에 비해 적은 편이라고 한다. 또한 은드랑게타는 해외 활동도 왕성해 캐나다나 호주의 마피아들과도 연계하고 있다고 한다.[52]
본토 세력들은 해외 범죄조직들과 연계하면서 초국가적인 조직이 되었다. 미국 FBI에서는 시칠리아 마피아(코사 노스트라)와 미국 마피아(라 코사 노스트라) 간의 전통적인 국제 공조에는 '오래된 다리(Old Bridge)'라는 이름을 붙였고, 칼라브리아의 은드랑게타와 미국 마피아(라 코사 노스트라), 캐나다 마피아 간의 신흥 국제 공조에는 '새로운 다리(New Bridge)'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0년대 배경의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를 보면, 미국 뉴저지 주의 마피아 부두목(Underboss)인 주인공이 국제 범죄 공조를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하는데, 시칠리아 마피아가 아닌 나폴리의 카모라를 찾아간다. 이것은 (비록 픽션이긴 하지만) 21세기 들어 이탈리아 본토의 범죄조직들과 교류가 많아진 현대 미국 마피아를 나타낸 것으로, 나름의 현실 고증인 셈이다.
본토 범죄조직들은 여전히 주요 사업영역을 장악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구역을 동유럽 알바니아계 범죄조직 같은 외국 세력들에게 기꺼이 빌려주고 있는데 이탈리아 마피아와 알바니아 마피아의 연대는 매우 뿌리 깊다.
2004년경 나폴리 카모라의 강력한 조직인 디 라우로 클랜간에 마약이권을 두고 분열이 생겨나 라파엘레 아마토를 중심으로한 분리파가 스페인쪽에 근거지를 두고 나폴리를 오가면서 디 라우로 패밀리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2004~2005년에 전쟁으로 60명이 죽었다. 이는 드라마 고모라에 많은 모티브를 주었다. 디 라우로 클랜의 두목(Boss) 파올로 디 라우로 같은 경우 고모라의 저자 로베르토 사비아노가 직접 나폴리 범죄계의 왕이었다고 설명하는 유튜브 영상이 있다.# 파올로 디 라우로는 체포돼서 징역 30년형을 받고 그 아들들인 마르코와 코시모도 체포됐으나 빈첸조와 치로가 여전히 디 라우로 클랜을 이끌고 있다고 한다.
2021년 2월 17일 카모라 조직인 누오바 카모라 오르가니자타의 전설적인 보스였던 라파엘레 쿠톨로가 옥중에서 사망했다. 70년대에 라이벌 조직인 누오바 파밀리아와의 전쟁으로 양 조직을 합쳐 7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던 대규모 전쟁의 주역이었다. 담배밀수로 큰 돈을 벌었으며 은드랑게타와 협력하고 코사 노스트라와는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현재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카모라의 가장 강력한 조직은 리차르디 클랜, 콘티니 클랜, 디 라우로 클랜을 중심으로 여러 클랜이 뭉친 세컨딜리아노 얼라이언스와 마짜렐라 클랜이라고 한다.
카모라의 첫 여성 두목(Boss)이었던 아순타 마레스카가 2021년 12월 30일 사망했다.#
6. 현황
6.1. 이탈리아
2008년,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모든 범죄조직의 총수익 예상치는 한화 약 240조 원에 달한다. 거기다 장기간의 경제 불황으로 18만 명의 자영업자들이 추가로 이들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을 빌릴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으며, 마찬가지로 경제 불황으로 인한 마약류의 수요 증가, 불법 외국 이민자의 유입(당연히 브로커는 범죄조직) 등으로 이들의 자금력은 앞으로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시칠리아 마피아는 팔레르모에만 50개가 넘는 조직이 활동하고 있으며 시칠리아 섬 전체의 조직은 100여 개가 넘고 3500~4000명의 핵심 멤버들과 그 이상의 추종세력(Associate)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미국 마피아와도 연계하면서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 FBI에서는 시칠리아 마피아를 '헤로인 밀매, 정치 부패, 군사 무기 밀거래를 전문으로 하고 있으며, 방화, 사기, 위조, 공갈 범죄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약 2,500명 이상의 시칠리아 마피아가 연계된 미국의 라 코사 노스트라 조직을 '미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활동적인 이탈리아 조직범죄 단체'라고 정의한다.[53]
카모라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으로 나폴리와 캄파니아 주 전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다. 111개 단체와 7000명 이상의 조직원과 그 이상의 추종세력(Associate)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역시 미국 마피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은드랑게타는 칼라브리아에서 근거지를 가지고 전 유럽에서 마약 사업을 하며 100여개 단체와 6000명 이상의 조직원과 그 이상의 추종세력(Associate)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역시 미국 마피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독일을 비롯해서 캐나다에도 은드랑게타와 관련된 조직이 있으며 특히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리주토 패밀리의 항쟁에도 은드랑게타가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근들어 활동성이 매우 두드러지고 있다.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는 카모라에서 떨어져 나와 1981년에 성립되었다. 은드랑게타의 전통을 받아들여 아풀리아에서 활동하고 있고 조직원은 2000명 이상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범죄조직들이 풍부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합법 사업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모든 범죄조직이 자금 세탁을 통해 확보한 자금은 약 220조 원인데, 어디까지나 추산 가능한 수준이며, 지하에 감춘 검은 돈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불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건설, 소매업, 운송과 숙박 등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사업을 노린다고 한다.
세리에 A를 비롯해서 하부리그와 유소년 축구에 마피아 자금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 선수들에게 죽은 두목(Boss)의 추모까지 시킨다고 한다. 또 유명한 축구 스타들과 어울려서 친분을 다지고 축구 도박과 승부조작에도 관여한다고 한다.관련 영상
2012년 기사에 따르면 주요 이탈리아 마피아의 수익은 연 매출 1400억 유로(약 180조 원), 순이익은 1000억 유로(약 129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기사
다만 2015년, 경제전문지 포춘지에서 카모라와 은드랑게타의 1년 수익을 합친 액수가 94억 달러(약 11조 1,766억 원)로 비교적 다른 조사 결과들에 비해서 작게 집계했는데, 범죄조직의 매출은 정확한 조사가 어렵다는 그 특성상 통계 작성 주체와 기준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이탈리아 범죄조직의 수익을 집계한 다른 조사에서는 이들이 애플 매출을 능가한다거나, 맥도날드와 도이체방크 매출의 합을 능가한다거나 하는 결론을 내기도 했다. 반면 로이터 통신은 이탈리아 정부 출연 연구 단체의 보고서를 인용해서 생각보다 그들의 수입이 낮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즉 이는 각 연구단체의 조사결과나 통계방식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간의 마피아 수입 통계에 대해 Sos impresa 같은 경우 13차 보고서에서 1,140 억 유로의 매출과 연간 1,100 억 유로의 이익을 준다고 했지만 이 연구는 출처와 연구 방법론에 대해 투명성이 거의 없다고 지적되었다.[54] 그간 마피아의 수입에 대한 통계는 이탈리아 내무부의 국가통계청과 이탈리아 범죄 연구 단체 TransCrime[55] 의 분석에 의하면 지나치게 과장됐으며 이는 모든 범죄수익과 마피아의 연관된 수입에 대해 제대로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되었다.여러 공개된 자료를 연구 분석한 통계에 따르면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했을시 그 수치는 크게 떨어진다고 파악되었다. TransCrime 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불법 활동으로 인한 수익은 GDP 1.7%이며 최소 180억에서 340억유로까지의 수익이 발생한다. 2012년 이탈리아 국가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그 수익은 257억 유로에 달했다. 그 모든 수익이 마피아의 수익이 아니며 그 중 마피아의 수입은 총 불법수익의 32%~51%인 8억유로~130억 유로 정도라고 한다.출처1, 출처2
1990년대에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실각되고 기독교민주당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이탈리아 정계와 범죄조직 간의 검은 커넥션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안드레오티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정계를 풍미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경우 2019년까지도 많은 의혹이 있기 때문.
나이지리아 마피아와 손을 잡고 그들을 일종의 하청업체처럼 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는 드라마,영화 고모라 등지에도 묘사되는데 충돌을 빚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마피아의 하청조직으로 일하며 각종 잡다한 범죄와 난민 밀입국 사업에 동원된다고 한다. 관련 다큐 2008년경에 카모라가 나이지리아 갱단과 전쟁을 벌여 6명을 사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나이지리아 갱은 카모라와 화해하고 그들의 허락아래 세금을 바치고 각종 범죄 사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드라마 고모라의 에피소드에 모티브를 주었다.
독일에서 은드랑게타가 마약사업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여 6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고 # 그 후에도 독일 토착 갱단과 손잡고 계속 마약밀수 사업을 해 결국 독일-이탈리아 양국 경찰의 노력으로 300명이 이상이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 은드랑게타 같은 경우 남미에서 유럽으로의 마약 밀수를 도맡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작전으로 90명 이상이 또 체포되었다. #
2018년엔 토토 리이나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불리며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의 거물급 두목(Boss)으로 불렸던 세티모 미네오가 체포되었다. # 또 다른 강력한 두목인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는 계속 도망 중이지만 이탈리아 군검경의 추적은 계속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탈리아 정부의 강력한 탄압과 토벌로 숨죽이고 있던 마피아가 코로나19 확산 사태를 틈타 다시 기지개를 펼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일간 라 레푸블리카에 따르면 이탈리아 경찰은 마피아 조직이 코로나19 위기를 악용해 조직 재건과 수익 확대를 꾀하고 있다고 보고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고 한다.기사, 기사2
코로나19로 인해 장기 징역형을 받거나 종신형을 받았던 고령의 마피아들이 풀려나와 이탈리아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관련 기사. 결국 법무부 장관이 해임결의까지 됐으나 간신히 기사회생 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이탈리아 경제가 고통 받자, 코사 노스트라, 카모라, 은드랑게타의 마피아 두목(Boss)들이 시민들에게 구호품을 나눠주고 무료로 먹을 것을 베풀었다고 한다. 카탄자로 검찰청장인 니콜라 그라테리는 마피아 보스들은 지역사회를 자신의 영지라고 생각한다며, 지역 사회를 통치하려면 시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범죄학 교수 페데리코 바레시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들이 시민들을 구호하는 것이 여기서도 그대로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호의는 공짜가 아니며 나중에 도망자를 돕거나, 총을 들고 마약을 거래하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갚아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칠리아섬의 일부 교구에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을 때 대부모를 지정하는 제도를 실험적으로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유는 마피아의 결속에 악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반적으로 원래 기반인 남부에서 여러 마피아 조직들이 설치지만 이들이 북부로 이동해서 일종의 분파, 지점을 만들고 있다. 밀라노나 파르마 같은 북부 대도시에서 남부 출신 마피아들의 범죄조직이 발각되기도 했다. 특히 은드랑게타가 이런 북부거점을 만드는데 열성적이라고 한다.#,#,#
2023년 1월 30년동안 도망다니던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가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이탈리아 경찰은 이를 큰 업적으로 자축했다. # 데나로는 체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6.2. 미국 마피아
FBI 보고서에 따르면 미 북동부•중서부•남부 지방과 캘리포니아 주의 주요 도시에서 3000명이 넘는 라 코사 노스트라 정규조직원(Made Member)과 추종세력(Associate)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은 해외 조직과 공조해 초국가적인 범죄활동을 펼친다고 한다. FBI는 여전히 라 코사 노스트라를 가리켜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조직범죄(one of the foremost organized criminal threats to American society)'로 설명하고 있다.#20세기 후반 들어 미국 조직범죄 세계에서 라 코사 노스트라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다는 여러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여기에는 1980년대부터 여러 마피아 활동의 기반을 와해시킨 FBI의 성공적인 단속과 더불어 고립되어 있던 이탈리아-시칠리아계 사회가 차츰 해체되고 이들이 전체 미국 사회로 흡수됨에 따라 마피아 단원을 기르기 위한 전통적 양육의 기초가 실제적으로 줄어든다는 데 있다. 마피아 전문가 셀윈 랍(Selwyn Raab)의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를 보면, 오늘날의 미국 마피아는 신입 조직원들을 주로 나폴리, 칼라브리아 같은 남부 이탈리아나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 코를레오네, 트리파니 등지에서 많이 채용해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BI 특수요원 제임스 E. 퓨리(James E. Furry)는 "나이 든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죽으면, 그들은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여 그 결번을 다시 채운다. 거기다 라 코사 노스트라나 마피아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는 개인의 숫자도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 법 집행기관이 마피아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순환적인 것이고 그들은 아마 재생하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뉴저지 주 경찰청 마약조직범죄 국장 로버트 J. 치치노(Robert J. Cicchino)도 “상당수의 라 코사 노스트라 행동대원(Soldier)과 추종세력(Associate)이 교도소에 있지만, 언론의 과장된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적 힘은 십여 년 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다."라고 증언했다. 뉴어크 노동공갈 및 사기조사국(Newark Office of Labor Racketering and Fraud Researchs)의 제임스 밴더버그는 "전국적으로나 뉴저지 주에서 라 코사 노스트라의 노조 장악력이 여전히 강하다."라고 증언했다. 특히 노동조합 내에서 라 코사 노스트라의 수익성이 "전혀 소멸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더불어 "이러한 상황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논픽션 작가 데이비드 사우스웰(David Southwell)이 2006년에 발간한 조폭연대기(원제: The History of Organized Crime)의 본문을 보면 '언론에서는 관심을 끌기 위해 미국 범죄의 지배세력인 라 코사 노스트라를 대신할 새로운 조직이 나타났다는 소재를 즐겨 쓰지만 대부분 지나친 억지 추측이나 거짓으로 판명 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56] 덧붙여 사우스웰은 '미국 내 마피아의 세력이 너무 강해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라 코사 노스트라가 자국 조직범죄계의 도전받지 않는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마피아와 애증 관계에 있는 할리우드 연예산업이 보통 잘 알려진 작품들을 통해[57] 마피아를 모든 범죄 사업 분야의 정점으로 묘사하고 다른 범죄조직에 비해 호의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려놓기에 그런 생각은 더 강화됐다.[58] 엄청난 권력과 규모를 자랑하지만 라 코사 노스트라가 미국 범죄사에 유일한 선수였던 적은 없었다. 마피아가 미국에 진출하기 50년도 훨씬 전부터 미국은 늘 갱들의 땅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일부 학자들은 (21세기 들어) 흑인 계열과 라틴 계열 사람들이 (미국 내) 조직범죄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체하고는 있지만, 이탈리아계 미국인 집단이 위험에 비해 이익이 적어 손을 뗀 시장에서만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의 발달로 도박업의 영역이 온라인으로 확장되자 도박사들은 손쉽게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으로 마피아가 주관하는 사이트에 내기를 걸 수 있게 되었다. 일례로 1995년에 경찰이 한 불법 도박업자의 사무실을 불시 단속했을 때 총 거래액은 6500만 달러에 달했고 업자가 챙기는 수익은 약 20%였다. 그들의 컴퓨터에는 독자적으로 제작된 스포츠 베팅 프로그램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기록되어 있었으며 최근의 스포츠 경기 결과를 알려주는 라스베이거스의 온라인 서비스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업은 뉴욕의 콜롬보 패밀리 및 감비노 패밀리와 연계되어 있었다.#
2001년 9.11 테러는 FBI 내 조직범죄 부서가 대폭 축소되고 많은 인력이 대테러 부서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약 3년간 뉴욕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으로 잠입수사를 했던 전 FBI 특수요원 호아킨 가르시아(Joaquín García)가 2014년 인터뷰에서 말하길 "마피아는 조용하고 원활한 사업을 원한다. 그들은 더 이상 야생의 서부가 아니라는 배움을 과거로부터 얻었다. 1950~1970년대와 달리 마피아는 이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 하고만 일한다. 마피아는 약해지지 않았다. FBI가 라 코사 노스트라를 진압하는 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당시는 마피아가 그들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제 테러다. 그들은 한 번에 너무 많은 핵심 목표에 집중할 인력이 부족하다. 그 결과 마피아의 세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과거의 마피아는 수사기관에서 자신들을 미행하는 걸 알았고, 본인들이 실내에 있을 때면 수사관이 차량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알았지만, 이제 FBI에서는 더 이상 그들을 미행하지 않고 마피아도 그 사실을 잘 안다. 마피아는 지하로 들어갔고 이제 누구도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른다."라고 꼬집었다.#[59][60][61] 호아킨 가르시아의 말대로 2013년에는 FBI의 뉴욕 마피아 전담반이 대대적인 감축을 진행했다.# 제노비스 패밀리만 담당하던 C5 팀이 보나노 패밀리와 콜롬보 패밀리까지 담당하고, 감비노 패밀리만 담당하던 C16 팀이 루케시 패밀리까지 담당하게 된 것. 마피아 수사가 한창이던 시절 300~400명에 달하던 수사인력은 여러 차례 개편을 통해 10분의 1 수준으로 감축되었다. 이러한 개편을 두고 FBI 내부에서 상부의 성급한 결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일선 수사관들은 미국 사회 내 마피아의 위협이 여전하며 그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많은 수사인력은 필수적이라고 밝혔다.[62] 이런 경향은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라서, 2003년엔 시카고 마피아를 전담하던 FBI 2개 팀 중 1개 팀이 해체되어 다른 부서에 배치되었다. 이에 크리스틴 모나코 FBI 뉴욕지국 대변인은 "테러가 우리의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그녀는 "2번은 방첩, 3번은 사이버범죄, 4번이 조직범죄라고 밝혔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알 수 있듯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로 대표되는 미국 마피아는 주택 거품 기간 동안 은행들의 실사가 느슨한 점을 이용해 모기지저당증권 사기 같은 신종 범죄의 물결을 이뤄냈다. 이에 미국 법무부는 고리대금을 빌린 많은 채무자들이 마피아 채권자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고 밝혀냈다.#
2011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이탈리아계 마피아가 여전히 미국 암흑가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남아있는 이유에 대한 특집 기사를 썼다.#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라 코사 노스트라의 유구한 역사, 강력한 조직구조, 원활한 조직원 수급 능력도 한몫하지만 이들의 도전자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계 레드 마피아의 경우 특정한 범죄 공모를 위해 잠시 뭉친 후 해체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이 수사망을 피하는 데는 유리할지 모르나 많은 조직원의 수를 갖춘 체계적인 집단으로는 성장하지 못하게 했다.[63] 한편 대부분의 아시아계 갱단들은 그들 자신의 이민자 집단 구성원들만을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뉴욕시 차이나타운을 거점으로 많은 아시아계 조직들이 형성되었지만, 당시 연방정부에서 성공적으로 주도한 일련의 기소는 이들 집단들을 효과적으로 해체시켰고 여러 중국계와 베트남계 갱단들을 방황하는 늑대 무리에 가까운 소규모 집단으로 전락시켰다. 존 길브라이드 DEA 뉴욕지국 요원은 멕시코와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을 가리켜 잘하는 게 한 가지뿐인 집단(One-Trick Pony)이라고 묘사하며 미국 내에서는 마약 거래 지배권에만 집중하여 다른 수지맞는 범죄에는 가담하지 않는 약점이 있다고 했다.
2011년 하워드 아바딘스키 세인트 존스 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미국 마피아는 부분적인 아웃소싱 형태로 발달했으며, 수사기관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일부 범죄 활동을 바이커 갱단으로 대표되는 다른 조직범죄 집단에 맡긴다고 한다.[64] 아바딘스키 교수에 의하면 아웃로 MC(사진)는 최근 몇 년간 시카고 아웃핏과 많은 일을 해왔고, 헬스 엔젤스 MC는 뉴욕 마피아 패밀리들에 이용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마피아는 페이건스 MC(사진)라는 조직을 사용한다고 한다. RICO 법의 권위자 조지 블레이키 노트르담 법대 교수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코사 노스트라는 범죄자들에게 돈을 제공한다. 오늘날의 마피아는 암흑가의 은행처럼 행동한다.(Cosa Nostra provides money to criminals. Today's mafia, behaves like the bank of the underworld.)"고 얘기했다.#
물론 FBI 같은 수사기관들은 미국 마피아에 대한 감시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마피아 조직원 100여 명을 구속해 타격을 입혔다.[65] 이 작전은 기소 인원으로 봤을 때 FBI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마피아 작전이라고 평가받는다. 뉴욕의 5대 패밀리와 뉴저지 주의 데카발칸테 패밀리, 뉴잉글랜드 지방의 페트리아카 패밀리를 대상으로 진행된 수사의 결실로, 뉴욕 콜롬보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앤드루 루소(사진)가 포함된 100여 명의 마피아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기소해 타격을 입혔지만 역설적으로 뉴욕 항 주변은 물론이고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여전히 마피아의 영향력 하에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66]
2015년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한 관계자는 NBC 방송에 출연해 연방정부를 향해 "테러 조직 IS에 대항할 때만큼은 같이 싸우자. 마피아는 세간으로부터 나쁜 평판을 받고 있지만 그중 상당 부분은 부당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극단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들, 특히 이슬람 국가라고 부르는 잔인하고 정신병적인 조직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해야 한다. 우리 마피아는 정부의 뛰어난 최신 기술로도 포착할 수 없는 개인의 움직임과 행동에 대한 정보, 즉 인간 정보(Human Intelligence)를 얻기 쉬운 위치에 있다."라고 얘기했다.# 이 같은 감비노 패밀리의 제안은 파리 테러가 일어난 직후, 남부 이탈리아 경찰 당국이 "마피아가 이슬람 테러 음모와 싸우기 위한 정부의 핵심 동맹이 되었다."라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 나온 것이다. 한 이탈리아 경찰관은 "IS가 마피아 두목(Boss)들에게 끌려갈 것을 우려해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풀리아, 나폴리 등지에 진입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2019년 GQ 매거진에서 뉴욕 동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 조직범죄 수사팀장 크리스틴 메이스(Kristin Mace)와 부팀장 알론 리프시츠(Allon Lifshitz)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러시아 마피아, 알바니아인들, 일본 야쿠자, 중국 삼합회는 잊어버려라. 이탈리아계 마피아가 여전히 뉴욕을 지배한다.(Forget the Russian mafia, the Albanians, the Japanese Yakuza or Chinese Triads: the Italian-American mafia still rules the roost in New York.)’라고 쓴 뒤 “과거와 다름없이 마피아는 중요한 존재다. 뉴욕 내에 그들을 능가하는 다른 조직범죄 집단은 없는 것 같다.(It’s a significant presence and no less than in the past, I don’t think there’s any other organised crime group that has surpassed it in influence in New York City.)”라는 수사기관 관계자의 의견을 전했다. 같은 기사에서 ‘오늘날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사업은 궁극적으로 뉴욕으로 귀결되고, 로스앤젤레스의 MS-13 같은 거리의 갱범죄자들은 자신들의 범죄(총기•마약•돈)에 대한 증거를 스스로 페이스북에 올릴 수도 있지만 그건 마피아 스타일이 아니다. 침묵의 계율 오메르타로 무장된 마피아 범죄는 수사와 기소를 어렵게 만든다.’라고 전했다. 같은 기사에서 전 뉴욕 감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살 로마노는 “오늘날의 미국 마피아가 1990년대 보다 더 강력할 수도 있다.(In a way, the mob may be more powerful than they were in the Nineties.)”라고 말했다. 동시에 201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은 범죄조직의 지갑도 채워준다고 덧붙였다.[67]
2019년 마피아 전문가 제리 카피시가 출연한 방송을 보면# 진행자가 "최근 멕시코나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 MS-13 같은 거리의 갱단, 러시아계 레드 마피아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고 있는데, 그들이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힘을 가져갔는가?"라고 질문하자 카피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마피아와 달리 합법적인 사업에 관심이 없고, 연방정부도 그들이 합법적인 영역에 침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반면 마피아는 1940년대 수사기관의 비호 아래 일찍이 합법적인 영역에 침투했다."라고 답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듯, 뉴저지 주 경찰청 마약조직범죄 국장 로버트 J. 치치노(Robert J. Cicchino)는 전통적 범죄조직인 이탈리아계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와 러시아계•쿠바계•아프리카계•히스패닉계•바이커 갱 같은 비전통적 범죄조직들과의 관계를 도급업자-하청업자에 비유하면서 “라 코사 노스트라는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어 비전통적 범죄조직들이 그들을 통해 특정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 비전통적 범죄조직들은 그 대가로 라 코사 노스트라의 일을 처리해 자신들의 수익을 증대시킨다. 라 코사 노스트라가 비전통적 범죄조직들을 통해 자신들의 갈취, 살인, 마약류 수입 같은 업무를 하청하는 것이라면 양측 모두에게 최선이다. 비전통적 범죄조직들은 라 코사 노스트라에 용역을 제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길이 있고, 라 코사 노스트라는 그렇지 않으면 갖지 못할 용역에 접근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연방검사 마크 W. 루폴로(Mark W. Rufolo) 역시 "범죄조직들 간 영역 다툼보다 영역 공유가 더 많았다"라고 증언하며 동의했다. 그는 최근 라 코사 노스트라가 누군가를 갈취하거나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유라시아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범죄 활동을 은폐하려 한 여러 사례를 본 적 있다고 증언했다.[68][69][70]
2019년에 치러진 마피아 재판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은 미국 마피아를 '지나간 역사(The mafia is history)'로 묘사했다. 곧이어 무고한 시민들을 미국 땅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 집단의 구성원으로 지목해 공소를 제기한 검찰을 비판했다. 결국 뉴욕 보나노 패밀리의 수뇌부로 알려진 피고인들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는 1987년 뉴욕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존 고티가 RICO 재판에서 승소한 이후 32년 만에 마피아 수괴급 피고인이 RICO 재판에서 승소한 사건이다.[71] 이 같은 미국 마피아의 부활은 과거 조직범죄와의 전쟁 시기 라 코사 노스트라 없는 미국, 더 나아가 범죄조직 없는 미국을 자신 있게 주장한 정치 지도자들과 수사기관 관계자들의 지나친 낙관론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 것일 수도 있다.
요약하면 수사기관의 옅어진 감시망, 약 100년 넘게 자신들이 쥐어온 미국 암흑가의 패권, 여전히 단단한 이탈리아 본토 조직들과의 연계, 1980~90년대 조직범죄와의 전쟁 시기 수감되었던 베테랑 조직원들의 석방[72], 기소망을 피한 기존 조직원들의 인도하에 뉴욕시의 뒷골목과 남부 이탈리아의 거리에서 차출된 신입 조직원들, 2000년대를 덮친 경기 불황으로 고리대금을 빌리는 시민들의 증가, 인터넷 등 기술의 발달로 더욱 다양해진 범죄 수법, 과거 존 고티 시대의 교훈을 발판 삼아 더욱 강해진 비밀주의 등 다양한 내•외부적 요인으로 여전히 이탈리아계 마피아는 미국 북동부 및 중서부의 암흑가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으로 남아있다.[73]
2019년 3월 14일 뉴욕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칼리가 암살당했다.#[74]
2019년 7월 FBI와 이탈리아 경찰의 약 1년에 걸친 공조 수사로 시칠리아 마피아의 인제릴로 파벌과 뉴욕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 19명을 체포했다.#[75] 한 마피아 전문가는 시칠리아와 뉴욕의 범죄조직 수뇌부가 대서양 양안 마피아 조직의 세를 규합하고 있으며, 양국의 마피아 조직이 여전히 강력한 유대를 갖고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BBC에서는 양측 조직원들이 일전에 사망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칼리가 생전에 소유했던 부동산의 판매를 논의하기도 했으며, 시칠리아에서의 이번 작전은 감비노 패밀리의 근거지인 뉴욕 브루클린 18번가에도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전했다.
2020년을 덮친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이 미국 마피아계에도 번졌다.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모든 스포츠 행사가 취소되자 스포츠 도박을 주요 사업으로 삼는 뉴욕의 마피아 패밀리들이 이미 수천만 달러의 손실에 직면했다는 예측 기사가 나왔다.# 기사를 보면 도박 사업 외에도 건설, 폐기물관리 등 다른 마피아 사업 분야도 바이러스로 인한 침체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 한편 2022년에 출소 예정이었던 뉴욕 보나노 패밀리의 한 고위 간부는 고령의 나이인 탓에 혹시 있을지 모를 시설 내 집단 감염에 취약하다는 점이 인정되었고, 2020년에 조기 가석방되어 출소하는 등 바이러스로 인한 혜택을 보기도 했다.
2023년 6월 기사#에 의하면 오늘날의 마피아는 비교적 감시가 허술한 비노조 건설업자들과 결탁한 뒤 업계에 침투하는 방식으로 활동 양상을 바꾸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같은 기사에선 뉴욕주지사 앤드루 쿠오모와 관계가 있을 정도의 거물 노조위원장 제임스 케이힐이 2023년 5월에 부패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례를 소개하며 FBI 수사 과정에서 그가 마피아 고위 간부들과 직접 접촉하는 모습과 뉴욕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드루 캄포스(사진)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육성이 도청기에 포착된 사례를 지적하며 여전히 단단한 마피아와 노조의 관계 또한 소개하고 있다.
2024년 10월 뉴욕 마피아, 특히 제노비스 패밀리와 연계되었다고 알려진 미국 최대 항만노조 ILA가 총파업에 돌입하여 미국 내 36개 항구가 올스톱되었고 JP 모건은 이들의 파업이 미국 경제에 하루 최대 6조 6천억 원 규모의 손실을 입힐 수 있다고 예측하는 등 크게 화제가 되어 국내 제도권 언론에서도 관련 소식을 보도했다. 美동남부 항만 47년만의 파업…인플레 자극 등 경제여파 주목
[1] 국산 게임인 더 보스 : 라 코사 노스트라가 이 사실을 제대로 고증했다.[2] 대부 2편의 등장인물 파누치가 설정상 검은 손 조직의 일원이며, 실존 마피아 두목(Boss) 살바토레 마란자노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 마란잘라의 부하이다. 참고로 마란잘라는 작중 언급만 되고 등장은 하지 않는다.[3] 검은 손 갈취 사업은 엘더스크롤 시리즈의 암살 집단인 다크 브라더후드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크 브라더후드도 암살 대상자에게 검은 손이 그려져있고 아래에 '우리는 알고 있다(We know)'라고 쓰여진 종이를 배달하기 때문.[4] 다만 이 '마노 네라'가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었는데, 바로 빈센트 "짐" 콜로시모가 그 주인공으로, 그 또한 마노 네라를 젊은 시절 여러 번 해봤기에 그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후 자신이 타겟이 되자 아내의 아는 조카뻘 청년인 "조니 토리오"를 뉴욕에서 불러 돈을 주겠다고 해놓고서는 조직원을 데려가 벌집으로 만들면서 마노 네라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 조니 토리오는 후일, 알 카포네의 스승이자, 러키 루치아노, 마이어 랜스키 등의 거물들이 연합한 "전미범죄연합"을 처음으로 제창한 인물이 된다.[5] 마피아는 같은 이탈리아계 조직폭력배끼리도 항쟁을 했다. 특히 뉴욕시에서는 시칠리아 출신의 모렐로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신)가 나폴리 출신의 카모라와 세력 다툼을 벌이는 마피아-카모라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약 3년간 이어진 항쟁의 결과로 카모라가 사법당국의 집중적인 수사를 받은 뒤 잔존 조직원들은 시칠리아 마피아(모렐로 패밀리)에 들어가면서 미국의 카모라 세력은 자연스레 소멸된다. 만약 이 항쟁에서 카모라가 승리했다면 미국 암흑가의 주도권은 나폴리 출신이 주축이 된 카모라가 잡았을 것이고 훗날 전 세계로 배급되는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마피아'가 아닌 '카모라'라는 단어가 범죄조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6] 원래 아일랜드 갱단이 알카포네와 싸우면서 창안한 전술이다.[7] 루치아노는 마세리아와의 식사 자리에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사이 비토 제노비스(사진), 앨버트 아나스타시아(사진), 조 아도니스(Joe Adonis), 벅시 시겔(사진)이 들어와 마세리아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대부 1편의 식당 화장실 암살 장면의 영감을 제공했다.[8]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마세리아의 최후.[9]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라 코사 노스트라 창설 장면. 상석에 앉은 이가 마란자노, 칼을 들고 의식을 치르는 이가 러키 루치아노.[10] 이때는 암살자들이 마란자노의 경호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세무사찰 공무원으로 위장해서 접근했다.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마란자노의 최후.[11] 단, 정규조직원(Made Member)은 이탈리아 혈통만 가능.[12] 초창기 위원회의 표결권은 뉴욕 5대 패밀리와 시카고 아웃핏, 버팔로 패밀리의 두목(Boss)들이 가지고 있었고, 다른 도시의 패밀리들은 이들의 결정을 따랐다. 미국 마피아의 위원회는 역으로 시칠리아 마피아에 수출되어 그들이 '큐폴라(Cupola)'라는 기구를 만드는데 영향을 준다.[13] 뉴욕의 5개 패밀리, 시카고, 필라델피아, 디트로이트, 버팔로, 뉴잉글랜드 지역, 뉴저지 주, 뉴올리언스, 플로리다 주 템파 시, 클리블랜드, 피츠버그,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 로스앤젤레스, 덴버, 펜실베이니아 주 북부, 샌프란시스코, 댈러스, 밀워키, 뉴욕주 로체스터 시, 산호세. 21세기에는 6~7개 패밀리가 다른 지역 패밀리에 흡수되었거나 계보가 끊겼다고 평가받는다.[14] 쿠바를 개척한 이유는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이어지는 프렌치 커넥션이 점차 노출되기 시작한지라 이것을 감추기 위해 쿠바를 경유지로 택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 쿠바는 미국의 기업들이 상당수 진출해 있었고, 그 상황은 마피아들에게 있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았다. 실제로 1950년 경에 도박사업은 연 1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마이어 랜스키가 30여 년에 걸쳐 계획한 작전의 일부이기도 했다.[15] 대부 2편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16] 당시 언론에서 프랭크 코스텔로를 가리켜 '마피아 두목(Mob Boss)'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도박왕(Gambling Boss)'으로 소개했다.[17] 한 순경에 의해 우연히 알려진 게 아니라 당시 비토 제노비스(사진)에 의해 밀려나고 은퇴한 루치아노 패밀리 두목 프랭크 코스텔로가 앙심을 품고 회합의 정보를 당국에 흘렸다는 설이 있다. 이 당시 코스텔로는 참석자 명단에 있었지만 동료들에게 통보도 없이 불참했다.[18] 사실 마피아나 야쿠자같은 거대 범죄조직들이 자기들은 마약 거래는 안 한다고 주장하는 건 다 똑같다. 자기들 스스로는 '우리는 역사와 전통과 품격이 있는 협객(또는 자경조직)이라서 사회를 좀먹는 마약 거래같은 짓은 안 합니다' 라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거짓말이고, 단순한 이권이나 갈취, 자기들끼리의 분쟁 정도는 해당 국가와 지역의 상황에 따라 적당한 선에서 방치되는 경우도 있지만 국가의 근간을 위협할수도 있는 마약 거래는 정상적인 국가라면 절대로 방치하거나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거대 범죄조직일수록 공권력이나 사회의 시선에 노출되는 부분도 많은 만큼 직접 마약을 거래하는 것이 드러나면 노출된 부분 부터 차근차근 박살나게 되는 것. 결국 거대 범죄조직이 자기들은 마약거래는 안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열에 아홉은 '공권력의 집중적인 제제를 받게 되는 것이 무서워서 못 합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나머지 열에 하나는 '이웃 조직과 항쟁에서 져서 마약 거래의 이권을 뺐겼습니다. 우리 사업 영역이 아니라서 못 합니다' 라는 듯이다. 범죄 사회의 영역분쟁은 대단히 치열하다.) 미국 마피아의 공식 규율에서 조직원이 마약을 직접 거래하다 발각되면 처형까지 한다는 것 역시, 마약 사범에 대한 처벌이 철저하고 엄격한 미국 사회에서 정식 조직원이 마약 거래에 관여했다 적발될 경우 조직 자체가 책임을 지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말 마약으로 돈 벌기를 포기한 것도 아니고, 경찰등의 주목을 덜 받는 잔챙이 동네 마약상들이나 스트리트 갱단에게 직접적인 딜러 역할을 떠넘기고 2차 수익을 얻는 것이다. 즉 이익은 좀 더 줄어들지만 덜 노출되기 때문에 더 안전하고 교활한 방식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마약 거래는 이렇게 마피아가 해외에서 마약 카르텔과 연계해 마약을 운송해오면 바이커 갱이 국내 유통을 맡고 스트리트 갱스터들이 거리에서 소매를 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와 반대로 거대 범죄조직 자체가 마약을 취급하는 남미나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들을 생각해 보자. 마약 관련 범죄를 제대로 엄단하지 못할만큼 공권력이 취약한 경우에만 거대 범죄조직이 직접 마약을 취급할 수 있고, 역으로 공권력이 취약한 상태라면 거대 범죄조직은 절대로 마약과 같이 엄청난 이익이 남는 영역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마약의 막대한 이득 탓인데, 쑨원이나 마오쩌둥같은 인물들도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마약을 팔아 자금원으로 썼을 정도다.[19] 후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루비가 시카고 마피아 두목(Boss) 샘 지앙카나의 하수인이었다는, 전 뉴욕 마피아 두목 조셉 보나노 아들의 아주 신뢰성 있는 증언이 있다.[20] 마피아 이외에 FBI, CIA, 닉슨, 존 에드거 후버등이 후보에 있었다. 모두가 대통령 암살에 가담한 정황증거가 있고 암살로 이득을 본 집단이나 개인들이다.[21] 케네디 암살을 어느 한 집단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했다기 보다는 마피아와 케네디에 불만있던 연방기관이(주로 국가 안보 담당 부서) 합세해서 암살했다는 추측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22] 소프라노스에서 치매에 걸린 원로 마피아 코라도 소프라노가 사고를 치고 체포되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샘 지앙카나를 거론했다는 이유만으로 연방 수사관이 주인공 토니의 집에 찾아와서 케네디 암살과 관련 있는지 조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토니의 부인이 남편은 1963년에 3살이었다고 나가라고 한다.[23] 샘 지앙카나는 케네디와 얽힌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사적으로 마릴린 먼로라는 애인을 공유하던 사이였고 이것을 불쾌해했다고 한다. 케네디와 지앙카나가 한 여자를 사귀었다는 얘기는 영화 아이리시맨에서도 언급된다.[24] 카를로스 마셀로는 1961년 당시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가 FBI 요원을 동원해 자택 근처를 산책하고 있던 자신을 납치하여 과테말라로 강제 추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용기를 이용해 미국에 재입국했다. 마셀로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던 날 불법 입국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끝내 무죄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도 후에 암살당하는데 이 또한 마피아의 소행이라는 음모론이 있다.[25] 1959년 여름에 잠시 수감 중이던 트리피칸테 주니어를 잭 루비가 면회했었다. 말단 조직원이 두목을 면회하는 것이 평범한 사례는 아니다. 또한 트리피칸테의 변호사는 그가 사망하기 4일 전 카를로스 마셀로가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을 추구했다는 임종 고백을 했다고 증언했다.[26] 이 같은 마피아 배후 음모론에 대한 반박도 많다. 우선 잭 루비 같은 조직원인지 아닌지 신원도 불확실한 자에게 대통령 암살에 연루되는 거대한 음모를 맡긴다는 건 마피아의 수법이 아니다. 특히 잭 루비에 대해 ‘잡스러운 범죄를 저지르고 평소 입이 가벼웠다’라는 평가를 한 관계자가 있다. 또 케네디 대통령이 죽었을 때 잭 루비가 실제로 슬퍼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케네디 대통령 암살 전 잭 루비와 마피아들과의 통화량 증가나 잭 루비와 마피아들과의 접촉 같은 부분은 워런 조사와 더불어 1979년 연방하원의원 조사보고서 등 당대 심도 있는 조사에서 이미 다루어졌는데, 최종적으로 케네디 암살은 오즈월드의 단독범행이고 잭 루비는 암살과 연관된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려졌다. 즉, 잭 루비가 마피아들과 잘 알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고 그가 오즈월드를 살해한 것 역시 사실이며 몇몇 의심스러운 정황이 마피아가 대통령 암살에 개입하였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키지만 잭 루비가 마피아의 지시를 받고 오즈월드를 살해해 입막음을 했다는 추정의 객관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27] 자세한 건 마피아/기타 문서의 '그레고리 스카르파' 참고.[28] 다른 두 다리는 당연히 경영진과 자금이다.[29] 자신들은 62만 명이라고 과장했다.[30] 자세한 건 빈센트 지간테 문서 참고.[도청내용] 이제 사람을 포섭하자고. 아들이건 사위건 포섭해서 사무실에 들어앉혀. 일자리를 주는 거지. 누구 딸이라도 잡아다 앉히고 간사를 시키면 돼. 조합을 우리 사람들로 채우면, 그땐 망할 노조가 우리 것이 돼.(Now let's take somebody. let's take a son, a son-in-law somebody, put them into the office. they got a job. Let's take somebody's daughter whatever, she's the secretary. Let's staff it with our people. Then it's our fucking union.), 이제 우리는 협회로써 상사들을 제대로 단속한다. 우리가 아랫것들을 단속하면, 상사들은 말을 더 잘 듣게 돼 있어. 왜냐하면 지금 그 망할 것들은 겁먹었거든.(Right now we as the association we control the bosses right. Now when we control the men, we even control the bosses even better now. because now they are even more fuckin' afraid.), 강한 노조는 모두에게 돈을 벌어주지. 거긴 조직원들도 포함돼. 조직원들은 강한 노조로 더 많은 돈을 벌게 돼.(A strong union makes money for everybody. including the wise guys. The wise guys even make more money from a strong union.), 선을 넘는 놈들이 있으면, 싹 쓸어버리면 돼.(When you got a guy that steps out of line, Now you got the whip.) 이상 소개된 발언들은 모두 뉴욕 루케시 패밀리 두목 앤서니 코랄로의 자동차를 도청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32] 물론 폭력배와 징역은 한 몸이라는 전 야마구치구미 두목 다케나카 마사히사의 말처럼, 러키 루치아노나 알 카포네같은 전성기 시절의 마피아 두목(Boss)들도 시대적 요구, 정치 상황의 급변 등에 따라 아예 수감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카를로 감비노, 앤서니 아카르도(사진) 같이 두목으로 재직한 뒤에는 단 한차례도 수감되지 않은 특별한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33] 미국의 사법체계는 주 정부의 법과 사법체계가 있고, 연방정부의 법이 따로 있다. 마피아 정도되는 중대한 범죄조직의 경우 연방정부 차원에서 대응하는데, 때문에 NYPD 같은 지역 경찰이나 지방 법정은 매수하기 쉬울지 몰라도 연방정부 차원에서의 대응은 마피아도 대응하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롭다. 반대로 어느 FBI 요원은 마피아를 상대하는 조직범죄와의 전쟁을 시작할 당시 상관이 뉴욕 5대 패밀리의 두목들을 한꺼번에 재판정에 세우는 작전을 브리핑하자 불가능한 일이라고 자조했다는 증언을 했다.[34] 이 사실은 2007년에 FBI 내부 문서가 공개되며 알려졌다.[35] 퍼시코와 고티는 다른 3개 패밀리의 두목들을 설득하고자 애를 썼지만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36] 사견을 덧붙이자면 당시 줄리아니가 연방정부 차원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마피아의 조직력으로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면 암살 자체는 성공했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문제는 그다음의 일인데 당시 줄리아니는 언론에 의해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마피아 재판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집중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대 흐름을 읽어보면 줄리아니 암살은 너무 무모한 작전이었다. 미국 마피아는 이미 1930년대 러키 루치아노의 혜안으로 보다 원활한 사업을 위해서 정부와의 강경 투쟁 노선을 지양해야 한다는 지혜를 얻은 바 있다. 후배 마피아 조직원들 입장에서 보면 당시 결정권자들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 훗날 줄리아니는 단 한 표 차이로 자신이 살 수 있었다는 강골 검사다운 농담을 했다.[37] 유사한 사건으로 1980년에 '시실리안 커넥션'이란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 재판은 마피아 측이 승소했다.[38] 유튜브에 청문회 영상이 있다. 과거에도 마피아 두목급 간부가 미국 상원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사례는 몇 차례 있었지만 대부분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적극적인 방어를 한 반면, 제대로 된 내부 증언을 하러 나온 건 1993년이 처음이다.[39] 퍼레이드를 향해 언덕에서 기관총 사격을 했다. 11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했다.[40] 이는 일본 야쿠자가 정치깡패 노릇을 하면서 반공 전위부대가 되고 전후 혼란기 암시장을 거치면서 성장한것과 매우 비슷하다.[41] 살바토레 그레코의 사촌으로 인품이 좋아 마피아간의 교황(중재자)로 불렸다. 다만 코를레오네시의 기세에 눌려 토토 리이나의 꼭두각시였다고 한다.[42] 이탈리아는 최고사법회의(Consiglio Superiore della Magistratura) 아래에 법원과 검찰이 병립되어 있는 구조이며, 양측에서 법조 인력을 교류하기 때문에 판사가 검사(수사 판사)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 경우도 흔히 있다.[43] 이는 건슬링거 걸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44] 1994년에 정부 증인이 된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원 마우리지오 아볼라는 1992년에 갬비노 패밀리 두목(Boss) 존 고티가 시칠리아로 파견한 미국 마피아 조직원을 "나이는 40대쯤 되어 보였고,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졌으며 건장한 체격에 우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그 사람과의 만남 직후 주위 동료들이 아볼라에게 "오늘 너는 정말 중요한 사람을 만났다."라는 말을 했었다고 밝혔다. 그 이름 모를 미국 마피아가 바로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원들에게 폭탄과 원격 조종 기폭장치를 가지고 암살 훈련을 시켰으며 최종적으로 팔코네 암살에도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45] 이후 체포된 범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풀리지 신부는 피살되기 직전 자기 앞에 나타난 범인들에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소"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46] 참고로 발두치오 디마지오는 이후 다른 내부고발자들과 합세하여 개인적인 벤데타를 하려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발두치오 디마지오에 따르면 살바토레 리이나가 명확히 "정치인은 마피아가 될 수 없으며 마피아는 정치를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밀접한 커넥션 관계였지만 마피아의 조직원이었다는 과장된 주장을 부인하는 명확한 증거이다.[47] 살바토레 리마는 '안드레오티의 시칠리아 총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기독교민주당의 핵심 인물이다.[48] 위원회 자체는 1963년부터 열렸다.1994년에 열린 4차 위원회는 줄리오 안드레오티를 조사하는데도 큰 기여를 한다.[49] 단 그는 코를레오네시가 아니라 그들의 동맹이었던 다른 유명한 마피아 가문인 데나로 패밀리 출신이다.[50] 이탈리아 최대의 범죄조직 자리는 나폴리 카모라에 내줬다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의 견해이며, 칼라브리아의 은드랑게타가 최근 강성해지면서 코사 노스트라를 능가하고 있다.[51] 실제로 본토 세력들은 정부 인사를 직접적으로 살해하는 일이나 민간인 대상 테러에는 소극적이었다.[52] 특히 캐나다 마피아간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은드랑게타가 직간접적으로 많이 연루되었다.[53] 즉, 미국에서는 카모라나 은드랑게타보다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의 활동이 더 활발하다는 뜻이다. 이는 시칠리아 마피아 코사 노스트라와 미국 마피아 라 코사 노스트라가 쌍둥이 조직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다.[54] 마피아 수입에 대한 보도들은 대부분 제대로 조사가 힘든 이런 출처 불분명한 조사에 의거해 보도된다. 이는 지나치게 마피아의 위력을 과대포장한다는 위험성을 불러일으킨다.[55] 밀라노의 사크로 쿠오레 가톨릭 대학교에서 설립한 범죄연구단체[56] 사우스웰에 따르면 마피아를 제외할 경우 미국 암흑가의 지배적인 세력은 바이커 갱단이라고 한다.[57] 대부, 좋은 친구들, 카지노, 소프라노스, 아이리시맨, 털사 킹 등.[58] 알 파치노가 출연한 갱스터 영화 중 라 코사 노스트라를 다룬 영화와 다른 영화들을 비교하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59] 2007년 배경의 소프라노스 마지막 시즌을 보면, 시리즈 내내 주인공을 따라붙던 FBI의 마피아 전담 요원이 대테러 부서로 발령받아 파키스탄에 다녀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 요원은 주인공에게 부서 변경을 알리고 안부 인사를 하는데, 테러 용의점이 있는 수상한 인물을 신고해주면 혹시 있을지 모를 미래의 재판에 유리한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한다. 후에 주인공은 자신이 관리하는 클럽에 드나들며 불법 신용 카드 복제를 하던 중동 출신 남자들을 신고하는데 그들은 알 카에다의 자금책으로 드러난다.[60] 더 와이어의 한 에피소드를 보면 볼티모어 경찰청 소속 형사가 친구인 FBI 요원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9.11 테러 이후 FBI 내 마약 전담팀이 모조리 대테러 부서로 이동했다는 요원의 대사가 나온다. 또한 FBI 요원이 마약 사건 협조를 구하는 볼티모어 시경 측에 말하길, 9.11 테러 이후 내부 규정이 바뀌어 이탈리아계 라 코사 노스트라나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 더 넓게 봐주어 레드 마피아 같은 특급 조직범죄단(Priority Organized Crime)이 연루된 경우가 아닌 이상, FBI에서는 마약 사건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마디로 FBI는 테러에 집중하기 위해서 거물급 아니면 조폭 수사를 하지 말라는 방침. 이에 볼티모어 형사는 우리 도시엔 콜롬비아 조직도, 마피아(Wise Guys)도 없다며 불평한다. 실제로 볼티모어에는 1920년대부터 항구를 기반으로 활동한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행동대(Crew)가 있었지만, 구성원들의 사망과 은퇴로 인해 1990년대를 끝으로 계보가 끊겼다. 2000년대 배경의 더 와이어에서 묘사하기를, 라 코사 노스트라 패밀리가 아닌 어느 동유럽계 범죄조직이 볼티모어 항을 장악하고 있다는 설정인데, 제작진이 이러한 현실을 알고 연출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고증이 꽤 잘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61] 물론 창작물이긴 하지만 더 와이어 속 볼티모어의 동유럽계 범죄조직이 본인들의 영향력으로 미국으로 가는 화물 밀수품 중 테러와 연관될만한 물건의 정보를 FBI의 대테러 요원에게 주고, 그 대가로 요원은 FBI 내부 수사 정보를 범죄조직에 흘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애국심에 기반한 국가 안보를 위해서나, 부패한 수사관이 관료제 사회에서 승진하기 위한 높은 실적을 쌓기 위해서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마피아 수사가 한창이었던 1980~90년대와 달리 테러에 대한 경각심이 더 높아진 21세기에는 연방정부에서 공식적이든 수사관 개인의 일탈이든 범죄조직과 손잡는 일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는 말.[62] 2018년엔 뉴욕 루케시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인 존 페니시가 조직으로부터 처형 대상으로 지목된 후 목숨을 구하기 위해 FBI 사무실에 찾아가 정부 측 증인이 되었는데, 당시 연방정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루케시 패밀리 계보에 그가 없었기 때문에 일선 수사관들이 상당히 당황했었다고 한다. 이는 마피아 수사가 한창이던 1980~90년대엔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63] FBI 요원 리처드 프랜켈(Richard Frankel)은 “어떤 사람들은 러시아 조직 얘기를 하지만 그들은 이탈리아 마피아에 견줄 수 없다. 물론 러시아 조직은 그들의 조국에서 강력하다, 하지만 마피아도 (이탈리아에서) 강력하지 않은가?(Sure the Russians are powerful in their home country, but what mob isn’t?)”라고 답했다.[64] 폭대법과 그 밖의 여러 요인으로 일본 야쿠자가 한구레 조직들에 자신들의 일부 범죄 활동을 맡기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65] 국내 언론에도 소개된 바 있다.(영상)[66] 당시 영화 대부에서 산티노 콜레오네를 연기했던 배우 제임스 칸이 앤드루 루소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후 루소는 단기형을 선고받은 후 2013년에 출소했다.[67]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 TV를 틀기만 하면 뉴스에 마피아가 나오던 그 시절이 오늘날보다 더욱 강력했다고 믿기 쉽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마피아가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금주법 시기~1970년대까지다.[68] 보통 미국 마피아는 동업자로 바이커 갱단을 제일 선호하긴 하지만, 다른 범죄조직과도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다. 2013년 뉴욕 브롱스에서 벌어진 퍼플 갱 두목(Boss) 살인사건에서는 흑인 암살자를 총잡이로 고용했고, 2019년 마피아 공소장을 보면#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행동대원(Soldier) 빈센트 피오레가 자신의 아들을 폭행한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히스패닉 갱단 라틴 킹스 조직원들을 보내겠다고 협박한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또한 마피아는 조직원이 수감되었을 때를 대비해 교도소 갱단 아리안 형제단과도 동맹을 맺었다.# 1983년에 기밀이 해제된 한 보고서를 보면 두 집단은 윈-윈 구조로, 마피아들이 교도소 내에서 아리안 형제단의 보호를 받는 대신, 사회에 있는 아리안 형제단 조직원들에게 돈과 마약, 원조를 제공한다. 1990년대에는 양 집단의 최고지도자들이 관계를 맺기도 했다. 마피아 측에서 아리안 형제단에게 교도소 내 암살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으며, 교도소 내에서는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조차 아리안 형제단 지도자에게 존중을 표한다. 다만 교도소마다 사정이 다를 것이다. 마피아/기타 문서의 세스 페란티가 증언한 부분을 보면 아리안 형제단은 일절 등장하지 않기 때문. 아마 형제단의 본거지인 캘리포니아 쪽 교도소로 갈수록 이런 경향이 더 심한 듯하다.[69] 전 감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존 앨라이트 역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미국 암흑가의 범죄조직들은 인종이나 파벌로 갈라져서 항쟁하기보다는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며 과거 자신이 상부의 지시를 받아 대상자를 살해할 때 히스패닉 갱단 라틴 킹스 총잡이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플로리다 주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자신과 라틴 킹스의 한 고위 조직원이 사이좋게 TV 맨 앞줄에 앉았다고 밝혔다. (보통 교도소 사회에서 TV 맨 앞줄은 서열 1위를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교도소 수감 기간이 길면 길수록 다른 인종, 다른 파벌과의 연줄도 함께 깊어진다고. 실제로 1931년에 러키 루치아노가 살바토레 마란자노를 제거한 가장 큰 이유가 시칠리아 출신이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으려는 기존 마피아들의 폐쇄성에 반발해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니 만큼, 미국 마피아와 다른 인종 간 협력은 1930년대부터 오랫동안 이어져왔다.[70] 최근엔 동유럽 이민자, 러시아 정부의 토벌에 의해 국외로 향한 레드 마피아 세력들이 가세하고 있다. 미국의 이탈리아계 라 코사 노스트라 조직과 미국의 러시아계 오르가니자치야 조직은 양측 다 고향 국가에 강력한 조직 기반을 두고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글로벌 범죄조직으로, 사업하는 데 있어 대결하고 반목하기보다는 서로 협력하는 입장에 있다.[71] 상술했듯 RICO 법은 마피아를 겨냥해 제정된 법이다.[72] 형기를 채우고 석방된 뉴잉글랜드 지방의 거물 마피아를 다룬 뉴스(영상)[73] 캘리포니아 주로 대표되는 미국 서부의 경우 마피아/국가/미국 문서의 로스앤젤레스 패밀리 설명 참고. 텍사스 주로 대표되는 미국 남부 지방도 마피아 불모지에 가깝다. 마피아/국가/미국 문서의 댈러스 패밀리 설명 참고.[74] 마피아 조직에서 두목(Boss), 두목 대행(Acting Boss), 일선 책임자•거리 책임자(Front Boss•Street Boss), 부두목(Underboss)은 구분되는 직책이고 권한도 다르다. 이러한 구분 개념이 희박한 대다수 언론에서는 주로 셋을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Boss'라고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누구보다 정확한 정보 제공자인 미국 연방검사의 말을 전한 기사를 보면 칼리의 신원을 '감비노 조직 부두목(Underboss of the Gambino organization.)'으로 특정한 걸 알 수 있다.#[75] 체포된 인물 중에는 팔레르모 인근 마을의 시장인 살바토레 감비노가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