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카를로 감비노 Carlo Gambino | |
출생 | 1902년 8월 24일 |
이탈리아 왕국 시칠리아 팔레르모 | |
사망 | 1976년 10월 15일 (향년 74세) |
미국 뉴욕 주 매서피쿠아(Massapequa) | |
국적 | 이탈리아 왕국 → 미국 |
직업 | 마피아 |
신체 | 168cm |
배우자 | 카테리나 카스텔라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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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갬비노 패밀리의 두목(Boss).일명 돈 카를로(Don Carlo)
러키 루치아노 이후 20세기 중반의 미국 조직범죄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로 여겨진다.
2. 생애
카를로 감비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마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12월 23일에 밀항자로 미국에 입국했다. 이후 삼촌 가족이 소유한 작은 트럭 운송 회사에서 일했다.1930년 카를로 감비노는 당시 금주법으로 인한 밀주 유통이 한창이었던 조직범죄 세계에 발을 들였다. 동시기 뉴욕에서는 미국 마피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쟁인 카스텔람마레 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항쟁이 끝난 후 미국의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은 '라 코사 노스트라'라는 이름하에 체계화되었고 최종 승자는 전설의 마피아 두목(Boss) 러키 루치아노가 되었다.
카를로 감비노는 빈센트 망가노(사진)가 이끌던 망가노 패밀리(현 갬비노 패밀리)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1937년에 체포되어 탈세 혐의로 22개월 동안 복역했다. 이는 감비노의 범죄 인생을 통틀어 유일한 수감 기록이다.
1951년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앨버트 아나스타시아(사진)가 빈센트 망가노를 살해하고 두목(Boss)이 되었다.
1957년 당시 미국 마피아 내 최대 파벌이던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는 내부 항쟁이 한창이었다. 카를로 감비노는 그 과정에서 비토 제노비스(사진)와 손잡고 부하 두 명을 보내 자신의 두목(Boss) 앨버트 아나스타시아를 이발소에서 살해한 뒤[1] 패밀리를 장악했다.
1959년 카를로 감비노는 이탈리아로 추방되어 있던 러키 루치아노와 손잡고 비토 제노비스를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계획을 성공시켰다. 이 유죄판결로 제노비스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2]
1962년 카를로 감비노는 러키 루치아노의 뉴욕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 같은 해 감비노는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 토마스 루케시(사진)와 사돈을 맺었다. 이 암흑가 정략결혼은 당시 1000명이 넘는 하객이 참석했다.
카를로 감비노는 이후 보나노 패밀리 두목(Boss) 조셉 보나노(사진)와 '바나나 항쟁'을 치러 승리했다. 감비노는 이류 조직에 불과했던 자신의 패밀리를 제노비스 패밀리(구 루치아노 패밀리)를 뛰어넘는 미국 마피아 내 최대 파벌로 만들었다.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 마피아 전문가 셀윈 랍은 2006년에 발간한 자신의 저서에 '정부 분석 결과, 1960년대 20여 개 미국 마피아 패밀리의 범죄수익은 연간 7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는 당시 미국 10대 대기업의 수익을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하다. 범죄수익에 대한 제일 좋은 몫은 라 코사 노스트라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인 뉴욕의 5대 갱단이 거둬들였다.'라고 서술했다. 상술했듯 1960년대 미국 마피아계 정점에 위치한 두목(Boss)은 다름 아닌 카를로 감비노였다.
카를로 감비노를 겨냥한 연방정부의 추방 시도는 1953년부터 시작했지만 감비노의 심장 상태와 지속적인 입원 때문에 몇 년 간 아무 진전이 없었다. 1970년엔 연방대법원이 ‘감비노는 미국에 불법으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추방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부가 이 판결을 실행하려 하자 감비노는 중대한 심장마비를 겪은 후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결국 추방은 없던 일이 되었다.[3]
1970년대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추정되는 이탈리아인 은행가 미켈레 신도나(사진)는 갬비노 패밀리의 헤로인 사업 수익을 세탁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6년 카를로 감비노는 자신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서 제럴드 포드로 대통령이 4번 바뀌는 약 19년 동안 암흑가의 정점에서 군림하며 미국 마피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산 두목(Boss)으로 남았다. 감비노는 사망 직전 자신의 처남 폴 카스텔라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카를로 감비노의 장례행렬은 13대의 리무진, 12대의 자가용, 1대의 꽃차로 구성되었다. 후계자 폴 카스텔라노가 참석했고 일부 조문객이 감비노의 죽음에 오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카를로 감비노의 장례식 |
3. 여담
- 카를로 감비노는 겉으로는 전혀 폭력배 같지 않은 부드러운 인상과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사진만 놓고 보면 정말 인상 좋은 할아버지처럼 생겼다. 성격 또한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었고 일처리가 상당히 치밀했다. 단적인 예로 1974년 10월의 어느 날, 감비노는 코니 아일랜드의 제왕이라 불린 악명 높은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도미닉 시알로(Dominick Scialo)와 한 레스토랑에서 마주쳤는데 그는 술을 마시면 아주 거만해지고 무례해지는 타입이었다. 이는 마피아 패밀리의 두목(Boss)인 감비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알로는 그 자리에서 감비노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는데 풍월에 따르면 "당신은 망할 늙은이야(You fucking old man)", "당신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나?(who the fuck do you think you are?")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제지하여 레스토랑 밖으로 쫓아냈지만 정작 그 상황에서도 감비노는 침착했다. 그날 이후 거리에는 '시알로가 사라졌다'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실제로 콘크리트 더미에 처박힌 시체로 발견되었다.
- 카를로 감비노는 정통 마피아 단원답게 결코 사치를 부리거나 오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자그마한 집에 거주하며 아주 소박한 생활을 했다. 그는 20년 가까이 패밀리의 두목(Boss)으로 모든 사업을 총괄했고, 1970년대에 한화로 최소 1000억 원대의 재산(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2020년 기준 3000억 원 이상)을 후대에 물려줬다.[4] 더욱이 감비노는 자신의 여름 별장이 따로 있었다. 대외적인 눈속임을 한 것.
- 영화 대부 1편은 촬영 때부터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촬영장에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들 중에는 실제 마피아 조직원들도 상당했다. 마피아들은 대체로 배우들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두는 등 위화감을 조성하며 촬영장 분위기를 흐리곤 했다. 이후 비토 콜레오네가 맨해튼 리틀 이탈리아 거리에서 총 맞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도 어김없이 마피아가 포함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마피아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해 이내 곧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맞은편 카페에서 폴 카스텔라노와 2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촬영장을 노려보던 한 노인을 마피아들이 인식했기 때문인데, 그 노인이 바로 카를로 감비노였다. 감비노는 주기적으로 리틀 이탈리아에 위치한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이탈리아계 주민들의 이런저런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마침 그날이 영화 대부 촬영과 겹쳐버린 것으로, 감비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신변이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잘 아는 마피아들이 달아난 것이었다.
- 카를로 감비노 인생 최대의 오점으로 꼽히는 사건은 아일랜드계 조직폭력배 제임스 맥브래트니에 의해 조카가 납치되어 살해된 사건이다. 맥브래트니는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을 납치해 당시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 카마인 트라몬티에게 성공적으로 몸값을 받아낸 후 자신감이 생겨 감비노의 조카를 납치했다. 원했던 몸값의 절반의 절반도 채 받지 못한 맥브래트니는 인질을 살해했다. 격분한 감비노는 수뇌부 회의를 연 후 부하 조직원 존 고티, 랄프 갈리온, 안젤로 루지에로에게 맥브래트니 암살을 지시했고 그들은 1년 만에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술집에서 목표물을 발견했다. 갈리온이 방아쇠를 당겨 3발의 총격을 가해 맥브래트니를 살해했다.
- 카를로 감비노의 아들 토마스 감비노는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패밀리 내에서 행동대장(Caporegime)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감비노 의학•과학 재단의 이사장이기도 했는데, 1991년에 롱아일랜드 유대인 의료센터 소아 골수 이식 부서에 2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존 고티가 패밀리를 장악한 뒤에도 조직의 중역으로 활동한 그는 약 4년의 복역을 마치고 2000년에 출소한 이후 마피아 세계에서 은퇴했다.
- 카를로 감비노는 존 고티의 삶을 다룬 1996년 영화 고티에서 마크 로렌스가, 폴 카스텔라노의 삶을 다룬 2001년 영화 두목 중의 두목(Boss of Bosses)에서 알 루치오가, 2015년 범죄 드라마 더 메이킹 오브 더 맙 뉴욕에서 노아 포레스트가, 존 고티의 삶을 다룬 2018년 영화 고티에서 마이클 시피티가 각각 연기했다.
- 2020년 FBI 기밀문서가 정보 공개 청구에 따라 공개되며 카를로 감비노의 통찰력이 다시 한번 알려졌다. 1976년 FBI가 뉴욕 마피아 위원회 회동을 기록한 이 문서는 '극도로 민감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FBI 밖으로 전파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당시 감비노가 뉴욕 5대 패밀리 수괴들을 소집하여 진행된 이 회동은 당대 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Street Boss) 프랭크 티에리(사진)[5],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 앤서니 코랄로(사진), 콜롬보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토마스 디벨라[6], 보나노 패밀리 두목 대행 카마인 갈란테(사진)[7]가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감비노는 이 회합에서 정보원의 침투를 우려해 신입 정규조직원(Made Member) 입단을 반대했다. 하지만 표결에서 4 대 1로 압도당했고, 그는 마지못해 각 패밀리가 10명의 새로운 정규조직원을 입단시킨다는 내용을 동의했다. 그해 FBI 특수요원 도니 브래스코가 보나노 패밀리에 추종세력(Associate)으로 입문한 걸 생각하면 실로 감비노의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마피아 전문가들은 감비노가 젊은 세대의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한편, 다른 마피아 전문가는 당시 갬비노 패밀리가 가장 큰 조직이었기에 단순히 신입 정규조직원이 필요 없었을 뿐이고, 그런 이유로 감비노만 조직원 충원을 반대하지 않았을까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 마피아 역사 유튜버 OC SHORTZ는 러시모어 산에 비견될 가장 중요한 4명의 뉴욕 마피아 두목으로 카를로 감비노와 함께 러키 루치아노, 토마스 루케시, 빈센트 지간테를 꼽았다.#
4. 어록
판사, 변호사 그리고 정치인들은 도둑질할 수 있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우린 자격증이 필요 없다.
Judges, lawyers and politicians have a license to steal. We don't need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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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여우처럼 되어야 한다. 여우는 덫을 알아챌 만큼 똑똑하고, 사자는 늑대 무리를 쫓아낼 정도로 강하다. 사자와 여우처럼 되어라. 그러면 아무도 널 이길 수 없을 것이다.
You have to be like a lion and a fox. The fox is smart enough to recognize traps, and the lion is strong enough to scare away the wolves. Be like a lion and a fox, and no one will ever bea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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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당시 아나스타시아와 동행한 부하 한명은 이발소 밖에 있었고, 이로 인해 아나스타시아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사살당한다. 이 때 아나스타시아는 자신이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자신을 쏜 자객들에게 달려들었으나 사실 자객은 아나스타시아의 뒤에 있었으며, 아나스타시아 본인은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앞에 있는 이발소 거울에 반사된 자객의 모습을 잘못 보고선 거기에 달려들었다가 계속 총격을 당해 결국 사망한다.[2] 당시 제노비스 휘하 행동대원(Soldier)이었던 빈센트 지간테도 함께 수감되어 약 5년간 복역했다.[3] 바꿔 말하면 당시 감비노는 미국 최고법원의 판결을 흐지부지 시킬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다.[4] 1992년에 카를로 감비노의 아들 토마스 감비노가 정부에 신고한 재산이 7500만 달러(약 890억 원)였다. 카를로 감비노는 토마스 감비노 외에도 3명의 자녀가 더 있는 데다, 범죄수익 특성상 차명 자산과 은닉 자산까지 감안하면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상속 재산이 최소 1억 달러(약 1000억 원) 이상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카를로 감비노의 자녀들은 '라켓(Racket)'이라고 부르는 부정한 돈벌이 수단들을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아 부를 쌓았다.[5] 당시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Boss)은 필립 롬바르도(사진)였지만 그는 티에리를 자신의 간판으로 내세웠다.[6] 수감 중인 카마인 페르시코(사진)의 대리인.[7] 수감 중인 필립 라스텔리(사진)의 대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