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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8:07

마피아/국가/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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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1.1. 비토 카시오 페로1.2. 칼로제로 비지니1.3. 미켈레 나바라1.4. 루치아노 레지오1.5. 토마소 부셰타1.6. 살바토레 리이나1.7.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1.8. 조반니 브루스카1.9.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1.10. 인제릴로 파벌
2. 다른 지방
2.1. 카모라2.2. 은드랑게타2.3. 말라 델 브렌타2.4.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2.5. 스티다2.6. 반다 델 말리아나2.7. 카사모니카 클랜2.8. 소시에타 포지아나

1.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이들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은 마피아/역사 항목의 이탈리아 부분 참조.

1.1. 비토 카시오 페로

파일:비토 카시오 페로.jpg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시칠리아 마피아의 두목 중의 두목(Capo Di Tutti i Capi)이다. 자신의 부하인 살바토레 마란자노로 하여금 미국 마피아의 패권을 잡게 하여 미국을 시칠리아 마피아의 식민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러키 루치아노에 의해 실패했다. 한평생 69번 체포되어 모두 무죄 석방된 카시오 페로였지만 파시즘베니토 무솔리니의 등장으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고 1930년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동료 수형자들은 카시오 페로가 썼던 방을 사용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카시오 페로의 최후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 정확히 알 수 없다.

1.2. 칼로제로 비지니

파일:칼로제로 비지니.jpg

시칠리아의 빌랄바 마을을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의 두목(Boss)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시칠리아 마피아 두목으로 여겨지는 인물.[1] 그는 전후 연합군의 마피아 지원에서 핵심이었던 인물로 미국 마피아와 특히 가까웠다. 그는 파시스트 정권이 한창이던 1937년에도 미국 출신 비토 제노비스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암시장 사업을 벌였고, 파시스트 정권이 끝난 1949년에는 이탈리아로 추방된 러키 루치아노가 세운 (사탕공장으로 위장한) 마약공장에 관여했으며, 1950년에는 옛 팔레르모 중심가에 있는 솔레 호텔 앞에서, 그 러키 루치아노가 비지니의 경호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2] 또한 빌랄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간 필라델피아 마피아 두목 안젤로 브루노와도 줄이 닿았다. 그는 1954년 7월 10일 76세의 나이로 팔레르모의 한 병원에서 집으로 이송하던 구급차에 타고 빌랄바에 들어가던 중 사망했다. 당시 사망 소식을 바다 건너 미국 언론사인 뉴욕 타임스가 보도하기도 했다. 빌랄바의 관공서와 기독교민주당 본부는 애도 기간으로 1주일 동안 문을 닫았다.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검은 옷을 입고 애도를 표했으며, 수많은 고위층 마피아와 정치인들 및 성직자들이 참가했다. 묘비석엔 "그의 마피아는 범죄가 아니라 법의 존중, 모든 권리의 방어, 인성의 위대함을 상징한다 그것은 사랑이었다."라고 쓰였다. 게임 마피아 2에도 등장한다. 셔먼 전차를 직접 타고 와서 이탈리아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비토와 부대원들을 구하고 현지 수비대를 항복시킨다.

1.3. 미켈레 나바라

파일:마이클 나바라.jpg

시칠리아의 코를레오네 마을을 기반으로 한 조직인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의 두목(Boss). 의사 출신의 엘리트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뉴욕의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러키 루치아노가 미국 정부와 결탁해 마피아가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을 돕게 함으로써 무솔리니에 의해 탄압받은 시칠리아 마피아가 각종 이권을 보장받아 전후에 재도약하게 되는데, 나바라는 이 시기에 맞춰 조직의 영향력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로 확장했다. 특히 이 시기 러키 루치아노가 추진한 시칠리아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 간 회동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 나바라는 자신의 부하인 루치아노 레지오의 쿠데타로 인해 살바토레 리이나와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한다.

1.4. 루치아노 레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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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토마소 부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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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살바토레 리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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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

파일: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jpg

일명 코를레오네의 유령. 그의 선임자였던 루치아노 레지오는 프로벤자노를 가리켜 "멍청한 닭들(마피아) 사이에서 두뇌가 되었고, 총을 쏠 때는 천사 같았다."라고 묘사한 바 있다. 1993년에 수감된 살바토레 리이나의 뒤를 이어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된 후 시칠리아 마피아 쿠폴라(위원회)의 최고위급 인사가 된다.

이후 감시를 피하기 위해 피지니(pizzini)라는 작은 종이 조각에 지령 내용을 타이핑해 전달하는 식으로 국제적인 범죄 조직망을 운영했다. 그는 '폭탄을 쓰지 말 것, 살인하지 말 것, 다른 파벌과 화합할 것.'을 3대 원칙으로 세우며 고위 인사 죽이기 등 호전적인 태도를 보인 전임자 리이나와는 정반대의 처세를 보였다.[3] 또 재직 기간 동안 시대 변화에 맞춰 사이버 범죄 같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63년 이래로 약 43년간 지명수배를 피해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2006년 4월 11일에 체포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총선 패배가 확정되자마자 체포되어 '정부 차원에서 프로벤자노를 비호하고 있었다.'라는 수석 검사와 시민들이 제기한 음모론이 일기도 했다. 그 역시 종신형을 복역하는 중에도 대리인을 통해 조직에 관여했지만 방광암에 시달렸고 2012년에 자살을 기도했으나 교도관에 의해 발견되었다.[4] 결국 2014년에 건강 상태를 고려해 형 집행을 정지한 뒤 밀라노에 위치한 민간병원인 산 파올로 병원에 입원했다.[5]

2015년에는 마피아의 뿌리를 만난다는 컨셉으로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의 아들인 안젤로 프로벤자노와 만남을 가지는 미국인 대상의 시칠리아 관광 상품이 출시되어 운영되기도 했다.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는 2016년에 앞서 입원한 민간병원에서 사망했다.

1.8. 조반니 브루스카

파일:지오반니 브루스카.jpg

지오반니 팔코네 판사의 죽음에 연루된 두목(Boss). 마피아 역사상 가장 잔인했다고 추정된다. 100~200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부 증인이 된 조직원 산티노 디 마테오의 아들을 납치해 교살하고 시신을 강산에 녹여 유기했다고 알려져 있다. 우습게도 1996년 체포되고 그 역시 정부 증인인 펜티토가 됐다. 수많은 악행에 대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정부에 협조하는 대가로 26년형으로 감형되었다.

2021년 5월 31일 드디어 25년의 형기를 마치고[6] 출소하였다. 이탈리아 전국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기사

1.9.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

파일:마테오 메시나 디네로.jpg

일명 '악마(Diabolik)'라 불리는 시칠리아 마피아 내 유명 파벌인 데나로 패밀리 출신의 인물.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의 후계자로 알려져 있다. 현재 시칠리아 마피아의 두목 중의 두목(Capo Di Tutti i Capi)이라고 추정된다.[7]

데나로는 살바토레 리이나를 후견인 삼아 마피아 세계에 가담했고 1993년부터 도피를 시작해 지명수배를 받아왔으며 라이벌 마피아 두목(Boss) 빈첸조 밀라노가 포함된 50건 이상의 살인을 배후조종했다고 여겨진다.

결국 2002년에 궐석재판이 진행되어 종신형이 선고되었으나 아직까지 체포하지 못했다. 데나로는 2008년, 2011년 FBI 세계 10대 지명수배자로 등재되었다. 이탈리아의 테레사 프린시파토 판사는 데나로를 가리켜 '마피아란 진정으로 상을 받을 만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인정하는 엘리트이자 우월한 기관'이라고 믿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멋진 자동차, 시계, 옷으로 대표되는 현대적인 취향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임도 즐겨서 은신처에서 슈퍼 패미컴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플레이보이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많은 사생아들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마피아 수사의 일환으로 2008년에 데나로의 주요 돈 세탁업자로 여겨지는 슈퍼마켓 거물 주세페 그리골리에게서 7억 유로의 자산을, 2009년 11월에 건설 업계 거물인 프란치스코 페코라에게서 2억 유로의 자산을 압류했다. 2010년 1월에는 시칠리아 건설업계 거물 로사리오로부터 5억 5000만 유로 상당의 회사, 빌라, 상점, 차량을 압류했다.

2010년 9월, 경찰은 데나로와 일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시칠리아인 사업가 비토 니카스트리로부터 15억 유로 상당의 기록적인 자산을 압류했다.[8] 2011년 5월 19일에 이탈리아 경찰은 데나로를 체포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카스텔베트라노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장원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의 흔적은 없었다. 2014년에는 데나로의 여동생이 체포되었고 데나로가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2천만 유로 상당의 올리브 농장을 압류했다.[9]

현재까지 데나로와 연관되었다고 지적되어 정부로부터 압류된 자본가들의 자산을 모두 합하면 29억 7천만 유로(약 3조 9,777억 원)에 달한다. 2017년에는 200명이 넘는 경찰관이 카스텔베트라노 주변 동굴과 벙커를 수색하면서 데나로가 그곳에 숨어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믿었지만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같은 해 카스텔베트라노 인근 30여 명의 마피아 조직원들이 소유한 부동산들을 대상으로 수색 영장을 집행했지만 그곳에서도 데나로를 발견할 수 없었다.

데나로의 최측근 부하로 여겨지는 지아니 니치는 2008년에 미국 마피아 감비노 패밀리와 연루된 대륙 간 불법 범죄 혐의로 18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20대라는 어린 나이에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의 핵심 간부가 된 지아니 니치는 뉴욕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칼리와 같이 찍은 사진이 알려지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미국으로 자주 출장을 갔으며 양 대륙 간 마피아 사업을 관장했다. 이탈리아 정치인 로베르토 마로니는 니치를 " 젊고, 위험하고, 야심 있고, 무자비한 살인자"라고 불렀다. 이탈리아 경찰 당국은 니치를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에서 데나로의 뒤를 잇는 2인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넷플릭스에서 2020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원티드: 세계 최악의 수배자들에서 데나로를 다룬 회차가 존재한다.

2023년 1월, 30년 동안 도망다니던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도 결국 체포되었다. 이탈리아 경찰은 이를 큰 업적으로 자축했다. # 체포돼서 이송되는 영상도 공개되었다.# 이미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이 선고되었기 때문에 라퀼라 교도소로 바로 이송되었다. 도피 중에도 명품을 사입고 호화생활을 했다고 한다.# 도피 중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지하벙커도 발견되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병원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2023년 9월 25일 체포된지 8개월 만에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1.10. 인제릴로 파벌

파일:살바토레 인제릴로.jpg 파일:지오반니 인제릴로.jpg
살바토레 인제릴로 지오바니 인제릴로
뉴욕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카를로 감비노의 사촌인 살바토레 인제릴로(Salvatore Inzerillo)가 1950년대부터 이끌던 시칠리아 마피아 파벌. 1980년대의 2차 마피아 항쟁 중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에 의해 두목 살바토레 인제릴로가 살해되고 상대측 암살자가 대서양을 건너가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인제릴로 측 간부마저 살해하는 등 항쟁에서 패배해 주요 구성원들이 미국으로 도피한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2000년대에 살바토레의 아들 지오바니 인제릴로(Giovanni Inzerillo)가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지원을 등에 업고 미국에서 시칠리아로 돌아와 조직을 재건했다.

2. 다른 지방

2.1. 카모라

나폴리 지방의 범죄조직. 은드랑게타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범죄조직으로 평가받는다. 역사에서도 이미 17세기부터 형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카모라 조직을 다룬 잠입 르포소설 고모라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폴리와 캄파니아 주 전역에 세력을 떨치고 있다. 111개 클랜과 7000명 이상의 조직원 및 그 이상의 추종세력(Associate)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역시 미국 마피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 모로코, 멕시코, 우루과이에도 영향력을 갖고 마약 밀수를 하고 있다.

2.2. 은드랑게타

칼라브리아 지방의 범죄조직. 21세기 들어 미국 마피아와 공조하는 경향을 보인다.[10] 2006년 이탈리아 반 마피아 조사반에 따르면 약 200개의 은드리나[11]와 6000명 이상의 조직원이 있다고 한다. 2014년 6월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 지역을 방문해 은드랑게타 조직을 '악의 길을 따르는 자'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파문을 선언했다.[12]

2.3. 말라 델 브렌타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베네토 지방의 범죄조직. 7~80년대에 크게 활동하다가 90년대에 해체되고나서 새롭게 누오바 말라 델 브렌타란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직원은 5000명 이상이라고 한다.

2.4.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풀리아 지방의 범죄조직. 초창기에는 라파엘레 쿠톨로가 세운 카모라의 풀리아 지부에서 시작됐으나, 그가 몰락한 이후 조직은 은드랑게타 출신인 쥐세페 로골리가 별도로 풀리아 조직을 운영하면서 시작되었다.

2.5. 스티다

시칠리아의 젤라를 비롯한 각지에서 활동하는 범죄조직. 주로 시골에서 활동하며 이탈리아 본토로도 진출했다. 원래 코사 노스트라의 주요한 두목(Boss)이었던 쥐세페 디 크리스티나를 추종하던 세력이었다. 그가 살해되고 3년 뒤에 제2차 마피아 대전쟁이 터졌다. 2차 마피아 대전쟁 시기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에 의해 숙청된 라 바르베라 코스카 파벌의 잔존 세력들이 시골로 도피해서 스티다에 가입했고, 작은 갱단을 세워 코사 노스트라와 경쟁했다. 주요한 보스로는 쥐세페 크로체 벤베누토, 살바토레 칼라파토였으며 다이너마이트 폭탄으로 살해된 칼로제로 루리아가 있다.

1990년대 초에 코사 노스트라와 직접적인 전쟁에 연루되었다. 이때 민간인을 포함한 3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코사 노스트라가 정부와의 투쟁을 벌이는 사이에 크게 성장했다. 스티다는 엄격한 조직 체계가 아니라 느슨한 갱단 연합체에 가깝고 스티다 내의 여러 클랜들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늘날엔 코사 노스트라 클랜들과 동맹을 맺은 조직들도 있고, 비슷한 의식과 규칙을 가지고 있다. 특이한 문신도 있는데 엄지와 검지사이에 오각별을 새기며 이를 '스티다리'라고 한다.

2021년 스티다의 전직 두목(Boss)인 지오아치노 감미노가 스페인으로 도피해 이탈리아 요리사로 신분을 세탁해 숨어 살다가 구글 스트릿 뷰에 찍힌 사진 때문에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2.6. 반다 델 말리아나

우익 파시스트 단체였던 NAR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었던 로마-라치오의 조직으로 전형적인 피라미드 조직이라기보다는 여러 파벌이 뭉처서 이합집산하면서 각종 흉악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후 전설적인 갱스터였던 프랑코 쥐세푸치의 영도 아래 한 조직으로 뭉쳤는데 라이벌인 프로이에티 조직과의 전쟁 끝에 승리하여 로마를 장악하였다. 마약을 비롯한 각종 범죄에 연루됐으며 특히 정치인들과의 부패 범죄나 납치 범죄로 악명이 높았다.

이들의 분파가 마피아 카피탈레로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는 범죄조직이라 하며 코사 노스트라나 카모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마피아 카피탈레는 2014년 이탈리아 검경의 주요한 타깃이 되어 조직원들이 대거 체포됐다. 카라비니에리 특공대가 마피아 카피탈레 두목(Boss)을 체포하는 동영상. 2014년 이후 반다 델 말리아나나 마피아 카피탈레는 해체됐다는 설도 있다.

2.7. 카사모니카 클랜

카사모니카-디 실비오-스파다 가문의 연합체로 로마와 라치오 지방에서 현재도 활동하는 강력한 조직으로 손꼽힌다. 반다 델 말리아나와 협조관계였고, 원류가 집시 계열의 범죄조직이라고 한다.

2.8. 소시에타 포지아나

포지아 지방의 마피아로 1989년경 사크라 코로나 우니타에서 분리되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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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목 중의 두목(Capo Di Tutti i Capi)으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당시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 체계에는 총 두목 직책이 없었다고 한다.[2] 사진사는 호되게 두드려 맞았지만 값비싼 새 카메라와 현금을 받은 뒤 당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3] 프로벤자노의 유죄판결 혐의 중에는 1980년에 시칠리아 주지사 피에르산티 마타렐라를 살해한 혐의도 포함되어 있다. 피에르산티 마타렐라는 제12대 이탈리아 대통령 세르조 마타렐라의 형이다. 즉 리이나에 비해 덜할 뿐이지 그도 호전적인 성향임은 틀림없다.[4] 이탈리아 교정당국은 프로벤자노의 원활한 형 집행을 위해 전담인력 700명을 배정했고 그가 거실에 있을 때조차 24시간 전자감시장비 계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5]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만약 자살 소동이 형 집행정지를 위한 연극이었다면 끝까지 희생자들에 대한 참회나 뉘우침을 하지 않고 온 세상을 기만한 셈이다.[6] 26년형보다 약간 빨리 가석방 되었다.[7] 데나로와 함께 프로벤자노의 공동 후계자로 여겨지던 살바토레 로 피콜로는 2007년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8] 2019년에 니카스트리는 9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바람의 왕'이라고 불린 이탈리아 풍력 발전계의 거물이었다.[9] 체포된 여동생. 그녀는 재판에서 14년 형을 선고받았다.[10] 은드랑게타는 2014년에 뉴욕 마피아와 연계해 500kg의 액체 코카인을 파인애플이나 코코넛 통에 숨긴 뒤 중남미에서 이탈리아로 들여오다 적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측은 말단 조직원들만 엮여들어갔지만 은드랑게타 측에서는 우르시노 일족의 두목(Boss)인 프란체스코 우르시노가 검거되기도 했다.[11] 19세기에 은드랑게타 패밀리, 곧 은드리나는 주로 혈족으로 구성되어 규모가 큰 조직이라도 30명을 좀처럼 넘지 않았다.[12] 사실 이러한 발언만으로 교회법에 의해 파문하는 정식 칙령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나, 이들에게는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평소 자신들이 속해 있는 지역의 신뢰를 얻기 위해 신실한 가톨릭 신도로서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교황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