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선택 |
작가 | 이문열 |
장르 | 장편소설 |
발표 | 세계의 문학 1996년 가을호 (연재 시작) 세계의 문학 1996년 겨울호 (연재 중단)[1] |
출간 | 선택 (민음사, 1997) |
1. 개요
1997년 출간된 이문열의 장편 소설. 발표되자마자 여성주의 진영으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논쟁작이기도 하다.조선 선조 때 출생하여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때까지 살아간 정부인(貞夫人) 장계향(張桂香)[2]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소설. 장계향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가정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과감히 버리고 아내, 어머니, 며느리로서 헌신했다는 내용이다.
2. 장계향
장계향에 관한 사이트장계향은 경상북도 안동[3]의 명문가인 재령 이씨 집안에 시집온 여인이다. 학식이 깊기로 당대에 유명했으며, 현종이 집권한 1670년 음식디미방 등의 귀중한 저서를 남겼다. 장계향의 후손이 바로 이문열[4]이다.
3. 창작 동기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이문열이 언급한 사연이 하나 있다. 우연히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듣는데, 사연을 보낸 47살의 가정주부가 말하기를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20여년 동안 집안에만 갇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나 자신을 소모하기만 한 인생이 허무하더라.'는 것이었다.이문열은 그 사연을 들으면서, "그녀에게 들릴 수만 있다면 '당신도 대단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다. 그렇게 허망해할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문열은 "이러한 삶 역시 가치 있고 훌륭한 삶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지, 페미니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의도는 좋았다.
4. 반론
다만 반박하자면, 이렇게 선해하기는 힘들다. 1990년대 중반인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남존여비가 심하고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시절이고, 이제 막 그나마 동등하게 교육받은 여성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올 무렵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맞벌이 구조가 완전히 정립되기 전이라, 당시 전업주부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여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사는 거지'라는 식의 분위기였다. 즉 여성 개개인들에게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도 남자들의 보조역할 정도로 짧게 몇년 소비되다가 결혼과 출산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전업주부가 되는 것에 사회의 절대다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런 게 문제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시대였던 것이다.사실 작가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선택'이라는 문제로 아주 가볍게 정리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논리도, 상상력도, 통찰도 없는 평면적인 서술이다. 작가가 그린 조선시대의 여성, 특히 사대부 가문의 여성들에겐 사회 진출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5][6]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가정에만 머무른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당대 여성들 중, 작가가 그린 것처럼 가정에서 살림, 내조, 시부모 봉양, 육아만 할 수 있는 계층도 얼마 되지 않았다. 백성 대부분이 농민이었으므로, 남녀불문 항상 중노동에 시달리는 터였다. 현대도 마찬가진데, 지금은 사회 진출이라는 팔자 좋은 단어를 써 주기도 민망하게 자신의 밥벌이와 기본적인 주거를 위해 남녀 불문 일하고 있을 뿐이다.
보다 이른 시기에 보다 사정이 좋았던 신사임당 정도 되면 '선택씩이나 할 수 있는 여유'[7]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장계향은 신사임당보다는 허난설헌에 더 가까웠던 인물이다. 장계향이 '감히 다른 쪽을 선택'했다면, 장계향은 허난설헌보다 딱히 처지가 좋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작가가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로 페미니스트로 '소비'되는 몇몇 통속 소설 작가나 그 무렵 몇몇 여성 인사들의 부적절한 발언만을 거론하면서 '암캐'라는 막말까지 쓰는 데 있다. 성, 역사와 사회의 구조, 변화가 막 시작되려는 사회의 방향성, 어쩔 수 없는 어설픔을 전혀 간파하지 못한 작가의 한계이자, 수구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문열은 작가의 말에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추구되고 있는 페미니즘에 저항할 논리는 이 세상에 없다'고 밝히고 있기는 하다. 그러면서도 '여자가 집에 있고 남자가 바깥 일을 하는 게 '효율적'이다.'라는 발언을 한다.
'이 놈들아.' 하는 식의 어투와, 주인공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과정에서의 논리의 문제점 때문에,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굉장한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여성주의 진영은 거의 총공세를 퍼부었다.[8] 또한 첫 대목에서 작가 이경자와 공지영의 소설 제목[9]을 본문에서 대놓고 언급하면서 문단의 여성 작가들을 은연 중에 비난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이문열은 저 작가들의 소설들을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소설의 모델인 장계향은 시 짓기, 글 짓기, 그림, 각종 학문에 두루 능통하여 몇 가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고, 나름대로 조선 시대 여성으로서는 성취를 이룬 인물이다. 하지만 장계향의 삶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여성에게 허용되는 영역 내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어낸 삶이고, 조선시대는 허용된 영역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 여성들에게 결코 우호적인 시대가 아니었다. 즉 비범하게 태어나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인물이지만, 규방의 일 이외의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비해 진출이 허용된 사회적 영역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현대의 여성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여자는 집안에서 살림이나 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비치기 딱 좋다.
특히 작가 자신이 밝힌 창작 동기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매우 해괴하게 읽힐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장계향이라는 인물 자체가 단순히 <규방 안에서만 머무르며 가정을 돌보는 가모의 역할에 그 삶을 다한> 인물이 아니라 역사에 나름의 업적을 남긴 역사적 위인 중 한 사람이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 중 한 사람으로써 당대 여성들의 문학 사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집인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를 남겼고, 요리 분야에서 그녀가 남긴 저서인 음식디미방의 경우 일단 동아시아 최초로 여성이 쓴 요리책이며 꼭 '여성'의 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조선 중기 안동지방 앙반가 음식문화의 집대성으로써 막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성의 사회 진출을 철저히 억누르던 조선 중후기 양반가에서 태어나 당시 사회가 강요하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제약을 넘어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뤄낸 인물이라는 것.
그렇다면 '반평생 동안 집안에서만 지내다보니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것 같아 허무감을 느끼던 여성'들에게 장계향을 롤 모델로 제시한다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위로가 아니라 "당신에게 재능이 있고 노력을 기울였으면 집안에 머무르면서도 충분히 의미있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건 본인이 못나서다."라고 조롱하고 윽박지르는 것이 목적이든지, 그게 아니라면 이문열 자신이 (작품 내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여성에게는 무엇보다 집안일이 우선이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여성관에 따라 (자기 집안의 조상이기도 한) 장계향의 업적을 폄훼하여 단지 '집안을 잘 챙긴 아내이자 어머니' 이외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이 부분은 이문열의 작품에서 작가가 일관적으로 이상화하고 그리워하는 삶의 형태가 '명문대가(재령 이씨) 집안의 남자로 태어나기만 하면 번잡한 세상의 잡사에서 딱 관심을 끊고 그저 좋아하는 책과 글에 파묻혀 살고 있어도 때가 되면 밥이 차려져 나오고 벗어둔 옷은 누군가 빨아주는
결국 이문열도 이러한 논란에 대해 '허무감에 젖어 있는 여성들을 위해 쓴 소설이었으나, 결론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고 글을 썼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1] 제2부의 일부까지만 연재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이듬해 책으로 출간되면서 발표되었다.[2] 경당일기의 저자인 장흥효의 장녀[3] 정확히는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4] 장계향의 아들인 이현일은 이문열의 직계 조상이다.[5] 오히려 중인~천민 출신의 여성이 때에 따라 장사를 하거나 주막에서 국밥을 파는 게 사회 진출이라면 진출이라고 할수 있다. 사실 이 신분부터는 남성도 할수 있는 게 농사짓기 꼴베기 등 뿐이라 의미 없긴 하다.[6] 남자는 시험을 통해 공직에 진출할수 있지 않나? 하겠지만 조선시대 관직에 들어갈수 있는 시험은 웬만히 경제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통과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상은 양반에게 독식당한 상황이었으며 중인 이하는 먹고살기 바빴다.[7] 해당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신사임당은 임진왜란 한참 전에 나고 죽은 인물로, 생전에 집안의 경제권을 독점했다.[8] 당시 이문열을 비판했던 이들 중에는 전여옥도 있었는데, 전여옥은 이문열을 비난한답시고 '정부인 장계향은 매춘부와 다를 바가 없다'는 망언을 해 욕만 얻어먹었다.[9] <절반의 실패>, <황홀한 반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0] 이문열의 이러한 정체성, 지향점은 평단의 대단한 찬사를 받던 초기부터 일관되게 나타난다. 단지 초기에는 희미하게 아련하게 비추다가 점점 부와 명성을 얻게 되면서 노골화된다는 게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