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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0 09:51:42

설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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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卿東, Sul Kyung dong
1901년[1] 3월 19일 ~ 1974년 1월 20일

1. 개요2. 생애3. 가계도4. 이야깃거리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본관은 경주 설씨[2], 자는 진경(鎭卿), 호는 인송(仁松). 아명은 설정동(薛鄭童).

대한방직, 대한제당, 대한전선 등의 창립자이다.

2. 생애

1901년 3월 19일 평안북도 철산군 정혜면 인송동(현 철산군 오봉리)에서 아버지 설흥업(薛興業, 1869. 4. 9 ~ 1919. 10. 2)과 어머니 한양 조씨 조성녀(趙성녀, 1878. 8. 4 ~ 1933. 3. 7)[3]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한 시대를 이끈 사업가이기는 하지만 보기와는 달리 어린 시절이 좀 어둡다. 아버지가 3살 때 돌아가셨으며, 어머니와 단 둘이서 함경북도 부령군으로 이사해 무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유학보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과감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쿠라 고등상업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하지 못하고 중퇴했다.

결국 한국으로 귀국해 부령군청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본격적인 사업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사업 수완이 뛰어난 듯하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그는 일본인을 동업자로 끌어들여 삼광운송점과 삼광상회를 세우며 운송업과 곡물, 해산물 위탁판매 를 해서 부를 축적했으며, 뒤이어 동해수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청진 앞바다에서 정어리를 잡아 이를 가공해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에 힘입어 어선 70척에 비행기로 고기를 탐지할 정도의 함경도 거부로 성장했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북한의 공산군이 점령하면서 월남해 무역회사인 대한산업과 부동산 회사인 원동흥업을 세워 남한에서도 곧 거부 대열에 올라섰다. 6.25전까지 그가 수원시에 세운 성냥공장은 한국시장을 석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인해 전 재산을 모두 날렸으나, 전쟁이 끝난 뒤 방직공장을 인수하여 대한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장이 되었고, 귀속재산 조선전선을 불하받아 대한전선도 세웠으며 자유당 재정부장도 지냈다.

그러나 4.19 혁명5.16 군사정변은 그에게 치명타를 입혔고, 이 사건을 계기로 장남 설원식이 구속돼 실형을 살기도 하였다. 1960년에 대한방직과 대한산업을 장남 설원식에게 넘겨 분리시키고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대한전선의 시설확충에 입김을 불었다. 이후 텔레비전, 냉장고, 선풍기 등 전자제품 생산을 해 당시 가전제품 판매율 2위로 올랐으며,[4] 이의 호황에 힘을 실어 그의 기업체군은 대한재벌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설원량에게 사업기반을 물려 주고 물러났다.

1974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2가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3. 가계도

4. 이야깃거리

여담으로 두 명의 부인이 있다.[14] 첫번째 부인 이태하씨와 결혼해 사이에 설원식, 설원철 등을 두었는데 6.25 전쟁 당시 부인과 아들 둘만 남한에 내려오고 나머지 자녀들은 다 북에 남았다고 한다. 두번째 부인인 유인순씨 사이엔 설원량과 설명옥, 설원봉, 설영자를 뒀다. 현재 남한에 있는 4남 2녀의 자식들 가운데 여자 형제는 중매로, 남자 형제는 연애 결혼했다.

5. 관련 문서


[1] 호적상 1903년.[2] 참의공파 61세 진(鎭) 항렬.[3] 조성래(趙聖來)의 딸이다.[4] 당시 1위는 금성사. 현재 가전부문은 위니아전자가 되었다.[5] 이건호(李建浩)의 딸이다.[6] 임송본 식산은행장의 딸[7] 전처 경주 이씨 이서진(李瑞眞, 1957. 8. 28 ~ ).[8]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의 딸.[9] 양태진(梁泰振) 전 국제상사 회장의 딸,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의 여동생.[10] 초명 설동석(薛東碩).[11] 초명 설동성(薛東盛).[12] 박용학(朴龍學)의 딸이다.[13] 초명 설동호(薛東皓).[14] 이게 놀랄 일이 아닌 게,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부인 두 명 이상을 얻는 남성이 소수 있었다. 돈 많은 남성의 경우는 거의 본처와 첩을 데리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 지금도 소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