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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훈/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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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입문전2. 정치 활동
2.1. 주요 의정활동
2.1.1. 교육 관련2.1.2. 외교·통일2.1.3. 경제2.1.4. 보건복지
2.2. 이낙연 캠프2.3. 20대 대선이후2.4. 22대 총선 국면2.5. 22대 총선이후

1. 정치 입문전

1953년 4월 23일,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면(현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 남포동마을에서 당시 창녕군 남지중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설철수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옥진(金玉珍, 1917.5.14.~1994.8.26.)[1] 사이에서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설철수는 대구사범학교 출신의 교사로 일제강점기 때 삼동공립보통학교와 통영제일공립심상소학교 등에서 훈도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1938년 12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아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이후 6살 때 마산시로 이사하여 회원국민학교와 마산중학교, 마산고등학교(31회),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신계륜, 홍의락과 동기였다. 고려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5년 5월 19일 육군방위병으로 입대하여 제30보병사단에서 소총수로 복무하였으며, 1976년 7월 31일 일병으로 소집해제되어 병역을 마쳤다. 복학 후 유신 반대 시위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2. 정치 활동

젊은 나이에 동교동계 정치인이 된 인물이지만 동교동계보다 민평련계로 보는 시각도 있다. 본인 스스로는 동교동계로 칭한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친야 무소속 이철 국회의원에 밀려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출마하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합민주당 유인태 국회의원을 꺾고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업과 함께 병풍 사건을 일으키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최규선에게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기소되어 2005년에 징역 1년 6개월과 집행유예 3년, 피선거권이 10년 동안 제한되는 형을 선고받았다.[2] 2007년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사면복권되었다. 한편 2003년말 범노무현계가 정치개혁을 주장하면서 분당해 나갈 때도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자, 탄핵소추안에 반발하여 삭발시위를 하였고, 같은 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원래 지역구였던 도봉구 을 지역구 공천을 신청했으나 상기한 최규선게이트에서 허위사실 유포 혐의 때문에 통합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당시 통합민주당 공천은 집행유예 이상의 범죄 경력이 있는 후보자들[3]은 모두 배제하는 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4] 하단에 서술된 단식 투쟁 등의 방법으로 저항했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공천 탈락을 수용하고 당에 잔류하면서 18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을(현 부천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누리당 손숙미 후보를 꺾고 당선되면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지역구를 서울에서 부천으로 옮긴 것은 동교동계 선배인 배기선 전 의원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2008년 공천에서 탈락한 다음부터 원미구 을에서 준비를 해 왔다고 한다. 같은 해 김황식 국무총리로부터 1977년 긴급조치 9호에 따라 실형을 선고받은 것에 대하여 사과를 받았다. 2014년 대한민국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5] 이때 코미디언 자니 윤(본명 윤종승)의 한국관광공사 사장 임명에 대해 나이를 문제삼았다가 논란이 되었다.

2015년 더불어민주당이 분당 사태를 맞게 되었고, 계파나 성향을 감안하면 국민의당을 택할 의원으로 지목됐으나, 동교동계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가운데에서도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하였다. 동교동계라 불리는 의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잔류파 의원이었다. 그래서인지 이후에도 민주평화당-민생당과 더불어민주당의 합당 추진에 우호적 의견을 냈던 소수의 더불어민주당 인사로 분류된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누리당 이사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면서 4선에 성공하였다. 2019년 12월 16일 2019년 국회 난입 사태에 말려들어 자유한국당 당원과 보수단체 회원 10여 명에게 폭행당했다.# 이쪽은 본인이 피해자인 경우.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부천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서진웅 전 경기도의원, 서헌성 전 청와대 행정관과의 경선 끝에 승리하여 더불어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았다. 총선에서는 미래통합당 서영석 후보를 꺾고 5선 고지에 올랐다.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컷오프 대상에 올라 공천에서 배제됐으며 이에 반발하여 2024년 2월 28일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표를 비난하면서 더불어민주당 탈당을 선언했다. 이후 새로운미래에 합류할 것이라고 발언해 새로운미래로 갈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결국 합류하지 않았고 부천 을에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었다. 하지만 이후 3월 17일 새로운미래에 입당해 새로운미래 소속으로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선거 본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공천된 김기표 전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은 물론 서울 서초구 을에서 넘어온 박성중 국민의힘 후보에게도 크게 뒤지며 3위로 낙선했다. 이후 낙선인사 현수막을 걸었는데, 기이하게도 본인 소속인 새로운미래의 터콰이즈 블루 컬러가 아니라 탈당한 더불어민주당을 상징하는 파랑색을 사용했다.

2.1. 주요 의정활동

2.1.1. 교육 관련

2.1.2. 외교·통일

2.1.3. 경제

2.1.4. 보건복지

2.2. 이낙연 캠프

이낙연 후보의 필연캠프의 선대위원장에 임명됐다. 2021년 9월,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힌 이낙연 대선 후보를 따라 본인도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철회했다. #

2.3. 20대 대선이후

2022년 7월 17일, 민주당의 8.28 전당대회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7월 19일, 만일 이재명이 당대표가 되면 당에 분열이 일어나 민주당이 다음 총선에 패배하고 이어서 대통령 선거도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7월 28일 1차 컷오프에서 탈락했다.#

2.4. 22대 총선 국면

대선 경선 당시부터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가결까지 일련의 강성 반명 행보를 거듭해서 보인 탓에 친명 지지자들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때문에 본인은 6선 도전을 천명했지만, 그 도전을 채 하기도 전에 공천에서 탈락당할 가능성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본인도 과거 음주운전과 막말 논란 등으로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올랐던 적이 많았던 것도 설훈의 차기 총선 출마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만 이낙연이낙연계의 탈당과 관련해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7] 이후 하위 10%에 해당한다는 통보를 받자 반발하였다. "친명횡재 비명횡사"라고 강하게 반발하였고, 탈당하여 출마할 것을 내비쳤다.

2024년 2월 28일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했다. 본인은 무소속 출마와 새로운미래 입당을 두고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2024년 2월 29일, 비명계 의원 10여 명을 모아 무소속 연대인 '민주연합'을 조직한 다음 새로운미래와 합당하여 원내 제3당으로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호 3번을 받는 '민주연대'를 구성할 구상을 발표했다. #

이후 새로운미래에 입당한 홍영표 의원과 달리, 새로운미래에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

그러나 다시 입장을 선회하여 17일에 새로운미래에 입당할 것을 밝혔다. #

17일, 새로운미래 합류를 위해 탈당한 오영환 의원하고 동시에 입당을 해 입당식을 가졌다.#

개표 결과 6.15%, 9,087표만을 얻으며 3위를 기록하며 6선 도전에 실패했다

2.5. 22대 총선이후

낙선의 후유증이 컷는지 지독한 선거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지역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본인은 끝까지 탈당을 하고싶지 않았으나 강제로 떠밀린 측면이 있다면서 당분간 쉬면서 진로를 모색하겠다는 입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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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용선(金容善)의 딸이다.[2] 이때의 일로 이회창 후보의 참모였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과는 여전히 서먹서먹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김한길안철수가 합당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할 시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이 설훈과 윤여준이라는 점은 아이러니...[3] 벌금형을 선고받은 후보들은 그대로 공천을 받았다.[4] 이 룰로 인하여 실형 전과가 있던 박지원, 안희정 등 다른 민주당계 거물 인사들도 모두 공천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박지원은 공천 탈락에 불복하여 목포에서 무소속 출마 후 당선, 안희정은 탈락을 수용하고 당에 남았다가 2년 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청남도지사로 출마해 당선된다.[5] 이 때 똑같은 3선 의원인 박주선 의원과 임기를 1년씩 나눠서 맡기로 합의하였는데, 그래서 임기 중도에 사직했다. 상임위원장 자리는 한정되어 있지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6] 두 의원 모두 3선 의원으로 상임위원장직을 원하기도 했다. 3선 이상 다선 국회의원인 경우 상임위원장직을 원하는 경우가 많으나 자리가 한정되어 임기 2년을 1년씩 나누어 하는 경우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다. 제18대 국회 후반기 행정안전위원장도 안경률이인기가 1년씩 나누어 수행한 전례가 있다.[7] 과거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열 당시에도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하였으며, 통합민주당 공천 탈락 시에도 무소속 출마를 선택하지 않고 불출마하였으며,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분열 당시에 동교동계 의원들이 모두 국민의당으로 넘어가는 와중에도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한 적이 있고, 이후에도 민주평화당 인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을 계속 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탈당 및 분열을 경계하는 본인의 소신으로 보인다. 다만 정계 입문 초창기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는 등 탈당을 하였던 사례가 있다. 근데 그때는 탈당 안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한나라당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