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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9 23:36:42

소문국

진한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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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삼한 소국의 형성 배경3. 조문국의 형성4. 구조5. 조문국의 멸망과 조문군으로의 편제6. 조문군 이후의 의성7. 관련 서적

1. 개요

경상북도 의성군 지역에 있었던 원삼국시대 초기 국가로 소문국(召文國) 또는 조문국이라고도 한다. 召라는 한자는 조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2. 삼한 소국의 형성 배경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 중에서 일정 이상의 정치성을 띤 집단의 존재를 나타내어 주는 것이 고인돌 유적이며, 정치적 지배자의 존재와 성격을 나타내 주는 것이 청동기 유물이다. 경상도 지역에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경의 한강 유역에서 내려온 무문 토기 계통의 문화를 영위하던 이주민들이 정착하였다. 유이민들은 좋은 기후 조건 아래 농경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고인돌 축조가 가능하였다. 이들 고인돌 축조 계급들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경에 충청도·전라도 지역에서 수입한 청동기를 소유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치 집단의 형성이나 정치 권력의 성장 면에서 충청도·전라도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후진적이었다. 이 당시의 경상도 지역에서는 청동기를 다량으로 소유한 집단이 나타난 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대된 지배 권력의 성장이나 지배자의 대두를 이 지방의 광범위한 사회 현상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것이며 고인돌의 주인공이 이 지방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지배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원전 1세기경상도 지역에서는 위만조선 계통의 유이민들이 마한 지역의 강력한 선주 집단의 세력 기반을 피하여 정착함으로써 이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세력 집단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집단이 주위의 단위 집단을 통합하게 되면서 대구·영천·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진한 소국들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조문국도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3. 조문국의 형성

의성 지역 내 선사 유적은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서부 지역과 동남쪽의 쌍계천 유역, 북부 미천 유역의 크게 세 군데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도 이 세 하천 유역 구릉에 주로 집중되어 있으며 또한 주변에 260여 기 이상의 고분이 함께 분포한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서는 이들 3곳의 고인돌 분포 집단이 초기 국가 형성기의 대표적인 정치 집단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문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금성면 일대의 고분군이 있다. 의성 지역 전역에 많은 고분군이 있으나, 금성면 일대의 고분들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규모가 월등히 크며 탑리리에는 봉분의 지경이 20m가 넘는 것이 16기나 되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르는 대형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이 중심 고분군이라 할 수 있겠다. 기록에 나타나는 조문국의 중심지와 문헌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탑리 고분에서는 공작새 날개 모양 3개의 입식(立飾)을 가진 금동관[조문국 금동관]도 발굴되어 이곳이 의성 지역 유력 지배층들의 분묘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조문국의 중심지는 금성산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금성면 탑리리, 학미리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4. 구조

조문국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금성면 탑리리, 학미리 일대를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을 보면 삼한 소국의 수장은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 등이며 이들은 국읍에 존재하여 읍락을 통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 읍락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이는 사로 육촌과 가락 구촌 등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울러 소국에는 제천 의식을 주관하던 ‘천군(天君)’이 있었다. 그리고 『삼국지』에 보이는 관가의 존재는 일정 정도의 지배 체제가 형성되어 있어서 관리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며, 축성 등의 일들이 있을 때 여기에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시의 소국의 신분 구조는 주수(主帥), 천군(天君), 민(民), 하호(下戶), 노비(奴婢) 등의 계층으로 분화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문국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문국도 경상도 일대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읍과 다수의 촌락으로 구성된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국읍은 용어 그대로 ‘나라의 중심 읍락’, ‘대읍락’인데 앞에서 이야기한 금성면 일원일 것이다.

5. 조문국의 멸망과 조문군으로의 편제

2세기 말 국읍 중심의 내부 결합을 바탕으로 군대 조직을 재편한 사로국은 조문국을 정벌하면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내용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조문국이 위치한 금성면 일대는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즉 소백산맥 안팎을 연결하는 계립령과 죽령의 두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 경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절대 요충지였다. 경주의 사로국이 이곳을 장악하여 조문군으로 삼으면서 일단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고, 북방에서 정치 변동 등의 이유로 이곳으로 남하하여 내려오는 유이민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6. 조문군 이후의 의성

조문군은 757년(경덕왕 16)에 진보(眞寶)[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비옥(比屋)[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안현(安賢)[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단밀(單密)[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의 4개 현을 속현으로 가진 문소군(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기록된 이래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조문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지지』와 『읍지』에는 현재의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고 밝혀 놓고 있어 그곳이 조문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21세기 현재 의성군은 조문국을 위시한 컨텐츠를 지자체 역사의 간판으로 밀고 있고 옆에 군립박물관으로 조문국박물관까지 있다.

7. 관련 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