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2. 생애
1947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68학번)를 졸업했다.1963년 고려대학교 주최 전국고교생백일장에서 시가 당선되었고, 196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면의 밤에’가 당선되었다. 1968년 서라벌예술대학 주최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으로 뽑히면서 4년 장학생으로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서정주 시인을 사사했다. 대학 재학 중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974년 단편소설 '경외성서'가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회복기의 노래'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4차례 옥고를 치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회원이었던 그는 1974년 자실 결성식에서 고은, 윤흥길, 이문구, 황석영, 이시영 등 자실 회원 30여 명과 함께 긴급조치와 ‘자유언론실천선언’ 참여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를 비판하고 김지하 시인의 석방 등을 촉구하는 '자유실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해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이호철이 구속되자 동료 문인들과 함께 항의 시위에 나섰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제적되었다.
[1]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오자 그 역시 복학해 가정도 꾸리고 교생 실습도 나가면서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듯 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당시 중앙대 운동권의 중심이었던 백남기의 요청으로 전두환 화형식 시위에 참여했다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이후 수배되었다. 1개월 후 붙잡힌 그는 안기부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2]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됐다.[3] 이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있을 때 어머니가 사회적 낙인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출소 후에는 '실천문학'의 주간 및 발행인으로 활동했고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윤재걸의 화려한 휴가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출판했다. 그러나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4], 1990년 '붉은 산 검은 피 필화사건'[5]에 연루되어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모교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강단에 섰다. 하지만 둘째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간호에 전념했고, 딸이 세상을 떠나자 명상, 요가 등에 빠져 방랑자로 살았다.[6] 인도, 네팔, 미얀마, 지리산, 계룡산 등을 오가며 정신적 수련에 몰두했고 2022년에는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에서 '선정, 그 깊고 아득한 순정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시와 수묵화 전시회를 열었다. 2021년에 출간한 마지막 장편소설 '숨'에서는 백혈병으로 딸을 먼저 떠나보낸 주인공이 불교 수행과 명상을 통해 자기혐오와 죄의식,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고 완전한 평온에 이르는 과정을 그렸다.
2024년 7월 31일, 향년 77세로 사망했다. 사후 동료 문인 서해성 작가가 한겨레에 추모글을 기고하였다.
3. 작품
3.1. 소설
- 경외성서 (1974)
- 월행 (1977)
- 처자식 (1984)
-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 (1994)[7]
- 여자에 관한 명상 (1996)[8]
- 청산 (1997)
- 안으로의 여행 (1999)
- 또 하나의 나 (2000)
- 아름다운 얼굴 (2006)
- 숨 (2021)
- 누나 (2021)
3.2. 소설집
- 열아홉 살의 시 (1977)
- 월행 (1979)
- 다시 월문리에서 (1984)
- 인도로 간 예수 (1995)
- 사람의 향기 (2003)
- 별밭 공원 (2013)
- 늙은 창녀의 노래 (2023)
3.3. 시집
-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1983)
- 마음속 붉은 꽃잎 (1990)
-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 (2006)
- 저녁 (2010)
- 그대가 그대에게 절을 올리니 (2023)
- 그대는 언제나 밖에 (2023)
3.4. 수필
4. 수상
5. 논란
- 최영미 시인의 고은 시인 성폭행 피해 폭로와 함께 시인 이소라씨의 송기원 작가의 성추행 목격담이 화제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 어느날 행사를 끝낸 문인들이 탑골공원 근처 단골 술집 ‘탑골’에 모였다. 글에 따르면, 당시 이 자리에는 시인 고은, 이시영, 정희성, 김사인, 강형철, 이재무, 박철, 김성동, 송기원 등 많은 시인·소설가가 모였다.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었던 최영미 시인도 합석했다. “소설가 송기원이 그때 창작과비평(창비)으로 갓 등단한 최영미 등 여러 문인과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다가 은근슬쩍 시인 최영미 뺨에 입술을 댔던 모양이었다. ‘철썩!’ ‘어어어~ 쟤가 천하의 송기원한테 왜 저래?’ 새내기 시인 최영미가 이를 참지 못하고 소설가 송기원 뺨을 세게 후려친 뒤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고 한다. #
6. 여담
- 어린 시절 가정환경이 상당히 불우했던 듯하다. 본인은 “얼굴조차 모르는 노름쟁이에다 아편쟁이인 건달의 사생아, 오일장을 떠돌며 미역이나 멸치를 파는 가난한 장돌뱅이 어머니의 자식"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가정환경과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 공동묘지 옆 소나무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고 한다.
- 고등학교 시절 호남예술제에서 시로 입상하였는데, 문제는 당시 문예부가 아니라 미술부 소속이었던지라 빠따를 맞고 미술부에서 퇴출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 소식을 들은 문예부에서 스카웃하여 문학 쪽으로 진로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1] 1974년 11월 18일, 광화문 문인협회 사무실이 있던 의사회관(지금의 교보빌딩) 현관 앞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식을 치른 후 ‘자유실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는 모습. 왼쪽부터 송기원, 고은, 조해일, 황석영, 임정남, 염무웅, 박태순, 윤흥길.[2] 당시 몸무게가 78kg에서 48㎏로 줄었다고 한다.[3] “안기부에서 작살나게 얻어터졌는데, 처음에는 김대중에게서 돈을 받아 상여를 사서 화형식을 한 것으로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김대중을 알지도 못하고, 백남기가 주도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김대중이 고은 시인에게 돈을 줬고, 다시 고은에게 돈이 온 것으로 하자고 했어요. 고은은 짠돌이여서 돈을 받은 적이 없고(...) 둘째 딸이 5000원을 받은 것이 전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고은에게서 1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둔갑시키더라." #[4] 1985년 5월,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현직 교사들이 당시 교육 현장을 비판한 '교육현장-교사와 학생의 참 삶을 찾아서'와 '민중교육-교육의 민주화를 위하여'가 실천문학을 통해 출판한 사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대표되는 교육운동의 시초로 평가되는 사건이다.[5] 1989년 오봉옥 시인이 빨치산을 주제로 다룬 시집 '붉은 산 검은 피'를 실천문학을 통해 출판한 사건.[6] 1990년 이후에는 국선도에 입문하기도 했다.[7] 1996년 나에게 오라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8] 외딴방(신경숙), 빗살무늬토기의 추억(김훈)과 함께 1994년 ‘문학동네’ 창간호 첫 연재 장편이었다. 그러나 여성비하 논란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9]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