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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22:49:56

송파산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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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ordercolor=#408080>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가무형유산
<colbgcolor=#408080><colcolor=#fff> 송파산대놀이
松坡山臺놀이
Songpa Sandaenori
파일:송파산대놀이.jpg
소재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분류 무형문화재 / 전통 공연·예술 / 연희
지정일 1973년 11월 11일
관리주체 (사)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파일: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로고.svg [[인류무형문화유산|{{{#1da3b2 인류무형문화유산}}}]]
<colbgcolor=#1DA3B2><colcolor=#fff> 한국의 탈춤
Talchum, mask dance drama
in the Republic of Korea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지정번호 1742
등재연도 2022년
목록구분 대표목록 }}}}}}

1. 개요2. 역사3. 구성
3.1. 내용3.2. 사용되는 탈3.3. 불림
4. 전승자 정보5. 출처 및 참고 문헌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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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국가무형유산이자[1]서울특별시 송파구 지역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연극적인 민중 놀이이다. 서울과 경기 지방의 산대도감극 계통의 중부형의 한 분파로 양주별산대놀이와 함께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보통 매년 정월대보름단오, 백중, 추석명절에 공연되었다.

2. 역사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송파나루[2]는 한강 오강[3]의 하나로, 조선 후기 전국 최대 향시 중 하나인 송파장이 서던 곳이었다. 이렇게 송파지역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품을 모아 개시하는 경기 지역의 최대 상원근거지이자 상업적 부촌이었다. 특히 송파나루는 한양이 아닌 광주유수부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금난전권이 미치지 못해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몰려들어 자유롭게 거래가 일어나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 송파장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에 상인들의 지원으로 경제적 여건이 갖춰지며 이때부터 송파의 자체적인 산대놀이가 등장한 걸로 추정된다. 주로 정월대보름, 초파일, 단오, 추석 등 명절에 연행했으며, 특히 7월 백중에는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여러 지역의 탈꾼들을 불러 7일씩 탈춤판을 벌였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경인, 경부 철도 개통으로 교통이 원활해지면서 송파장의 이점이 사라지고, 광진교 건설, 천호동 시장 신설로 인해 판권이 변화하면서 송파장도 쇠하게 되고, 이는 송파산대놀이 전승에도 타격을 입혔다. 그렇지만 이때까진 간간히 산대놀이를 연행한 걸로 보이는데, 허호영의 증언에 의하면 1900년대 초, 허윤(1867~1935)[4]이 구파발산대놀이 연희자 윤희중(1849~1932)을 초빙하여 재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구)송파 지역이 침수되고 주민들은 신송파인 가락동석촌동 일대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엔 크게 탈춤을 연희하지 못했고 명절 혹은 술자리에서 몇몇이 산대놀이를 놀았었다. 이때 돌말이(石村) 사람이던 한유성, 이범만 등이 송파의 윤종현을 모셔 탈 제작, 탈춤을 익혔었다.[5]

해방 이후엔 돌말이에서 몇 차례 놀았고, 6.25 전쟁 이후에도 3,4년 후 다시 몇 차례 놀았다. 그러던 1960년 초, 허호영이 주축이 되어 적극적으로 송파산대놀이를 재건하면서 연구, 연희가 활성화되고,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됐다. 현재에도 석촌호수 인근에 서울놀이마당과 송파산대놀이전수회관을 만들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놀이마당에서 종종 송파산대놀이 공연이 진행되고 있으며, 행사 일정에 따라 방문하면 볼 수 있다.

3. 구성

본격적인 공연 이전에 연희자들이 과 의상을 갖춰 입고 악사들이 울리는 음악에 맞춰 마을을 한바퀴 돌고 공연 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행렬 순서는 현 연행 기준으로 용두기와 영기가 먼저 앞서고 뒤에 태평소 등을 연주하는 악사가 따르며, 탈을 쓴 연희자들도 뒤따른다. 연희자 순서는 등장 순서와 같으나 맨 뒤에 왜장녀와 노장, 소무가 위치한다. 이 길놀이는 탈놀이를 한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광고 기능과, 마을의 잡귀를 쫓는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길놀이가 끝나면 놀이마당에 멍석을 깔고 제사상을 차려 그 앞에 탈들을 쭉 진열하고 고사를 지내는 서막고사를 지낸다. 탈 순서는 상좌 2탈, 양반탈로서 연잎과 눈끔적이, 샌님과 신할아비, 다른 탈, 여자 배역 탈들로 놓는다.[6] 대표자가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축문을 읽은 뒤에 부정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흰 종이를 태워 올리는 소지를 한 다음 다시 절한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절한 뒤 고사를 마치면 음복을 하고 놀이를 시작한다.

3.1. 내용

현재 송파산대놀이보존회측에서는 열 두 마당 구성을 따르고 있다. 사실 마당 구별은 각 채록본마다 조금씩 다르다. 최초로 기록된 이두현 채록본엔 7과장 9경으로 나뉘는데, 이는 막, 장 구별법을 이용해 나눈 것으로, 연희상 차이가 없다.
7과장 9경 12마당
1. 상좌춤 1. 상좌춤놀이
2. 옴중 2. 옴중놀이
3. 연잎, 눈끔적이 3. 연잎, 눈끔적이 놀이
4. 팔먹중
  • 제1경. 애사당의 북놀이
  • 제2경. 팔목중의 곤장놀이(염불놀이)
  • 제3경. 신주부의 침놀이
4. 애사당 북놀이
5. 팔먹중 곤장놀이
6. 신주부 침놀이
5. 노장
  • 제1경. 파계승놀이
  • 제2경. 신장수놀이
  • 제3경. 취발이놀이
7. 노장놀이
8. 신장수 놀이
9. 취발이 놀이
6. 샌님
  • 제1경. 의막사령놀이(말뚝이놀이)
  • 제2경. 샌님과 미얄할미
10. 샌님, 말뚝이 놀이
11. 샌님, 미얄, 포도부장 놀이
7. 신할아비와 신할미 12. 신할아비 신할미 놀이

첫째마당 상좌춤 놀이
파일:송파산대놀이 1과장.jpg
붉은 고깔을 쓴 첫상좌가 먼저 나와 염불장단에 맞춰 합장재배, 사방재배를 하다가 음악이 타령장단으로 바뀔 때 화장무[7], 곱사위, 거울보기, 여다지 등 깨끼춤을 춘다. 이후 푸른 고깔을 쓴 둘째 상좌가 나와서 서로 대무를 하다가 첫째 상좌가 들어가고 둘째 상좌가 마저 춤을 춘다. 상좌가 나와서 조용히 의식무를 추는 것은 놀이판의 성황과 벽사(僻邪) 기원을 의미한다.
둘째마당 옴중, 먹중 놀이
파일:송파산대놀이_제2과장.jpg
위 사진에서 검은색 옷에 붉은 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오색 꽃이 달린 시루밀 벙거지를 쓴 쪽이 옴중이고, 붉은 옷을 입은 쪽이 먹중이다.
둘째 상좌가 마저 춤을 추는 중, 옴중이 제금[8]을 요란하게 울리며 등장한다. 둘째 상좌는 놀라서 춤을 멈추고 옴중의 제금을 빼앗는다. 옴중은 자신의 제금이 어딨는지 찾다가 자기 제금을 치는 상좌를 찾고는 대무를 하면서 상좌를 내쫓는다. 이후 옴중이 거드름춤과 깨끼춤을 추는 중, 먹중이 나와 옴중의 얼굴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서 서로 다툰다.[9] 서로 수작을 부린다. 그러다가 먹중이 옴중의 정체가 옴 걸린 중임을 알고는 이제 3년은 재수없을 거라며 침을 뱉으며 내빼는데, 빈정상한 옴중이 죽일 듯이 달려오자 예쁘게 잘 생겼다고 어쩔 수 없는 투로 말을 바꾼다. 이후 둘이 놀고 들어가자며 함께 타령장단에 맞춰 대무하며 나간다.
셋째마당 연잎, 눈끔적이 놀이
파일:송파산대놀이_셋째마당.jpg
사진의 오른쪽 초록 고깔과 붉은 고깔이 각각 연잎과 눈끔적이다. 먹중 3명이 서로 춤추다가 연잎과 눈끔적이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나온 걸 보고는 2명이 차례로 두 인물을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먹중들은 깜짝 놀라며 겁먹는데, 그 이유가 두 인물이 무서워서가 아닌 "명색이 양반"인데 "얼굴에 흠이 있어[10] 과거를 못 보고 노류장화(路柳墻花)[11]로 사도팔방을 돌아다니며 허송세월"을 보내기 때문. 마저 확인한 먹중이, 두 양반이 은근히 먹중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채 먹중 2명에게 설명하고, 먹중들은 흔쾌히 승낙하며 다같이 춤을 추고 퇴장한다.[12]

송파산대놀이에서 연잎과 눈끔적이는 양주별산대와 달리 신성성이 속화된 채 등장한다. 양주에서는 고승으로 등장해 파계승들을 꾸짖는 것과 달리 송파에선 낙오된 한량으로서 먹중과 동격으로 논다.

3.2. 사용되는 탈

송파산대놀이는 연희 시기에 따라 탈이 달리 쓰였다. 복원 초기 1960~1970년대엔 허호영 옹이 제작한 탈을 썼으나 1970년대 중반 모종의 사유로 쓸 수 없게 되자 한유성 옹이 제작한 탈을 현재까지도 쓰고 있다. 허호영 제작 탈(이하 허호영탈)은 각 배역마다 특징이 뚜렷하고 타 지역 산대놀이 계통 탈과 공유하는 상징성, 그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조형성을 가졌으며 한유성 제작 탈(이하 한유성 탈)은 소박하고 토속성이 강하다.
참고로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송파산대놀이 탈(특히 노장탈)은 허호영 제작 탈을 본딴 것이다.
상좌
파일:송파산대놀이/상좌.jpg
상좌는 스승의 대를 이을 여러 승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뜻한다. 송파산대놀이는 2명이 등장한다. 탈은 하얀 바탕에 붉은 입술을 가졌다. 그런데 중의 모범생이란 이미지랑 달리 첫째, 둘째 상좌는 각각 붉거나 푸른 한삼이 달린 백장삼, 띠, 고깔을 써서 복식 측면에도 승려와 거리가 멀다. 염불 장단에서 첫상좌는 의식무를 근엄하게 치루나 이내 타령 장단에선 속인처럼 춤을 춘다. 둘째 상좌는 아예 옴중이 나올 때 제금을 훔치고는 불가사리 같은 놈이라고 욕먹는다.
옴중
파일:송파산대놀이/옴중.jpg
이름 그대로 옴 걸린 중으로, 밤색 바탕에 옴을 표현하였으며 험상궂은 눈매에 웃는 입을 하고 있다. 마당에 나와 둘째상좌를 내쫓고 춤추다 먹중에게 허세 부리는데 도리어 아유를 받는다. 옴중탈은 송파탈 중에서 굉장히 사나운 형상을 가졌는데, 이는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僻邪) 역할을 한다. 옴중이 염불장단에 맞추어 추는 용트림춤[13] 또한 잡귀를 쫓는 기능을 한다. 옛 놀이판에서 옴중은 퇴장하지 않고 여러 마당에도 나왔었는데 이 때문에 '옴중은 두 몫 한다'란 말도 있다고 한다. 주로 마당별 등장 배역들, 특히 먹중들의 조롱감이 되었다.

3.3. 불림

불림은 연희자들이 장단을 청하는 것으로, 송파에는 같은 산대놀이 계통인 양주별산대, 봉산탈춤과 유사한 것도 있으면서 독자적인 불림도 있다.

4. 전승자 정보

<rowcolor=#fff> 이름 성별 기예능 지역 인정일 해제일
함완식(咸完植)
옴중, 먹중 서울 2006.08.16 -
김학석(金學鉐)
연희(무당) 서울 1995.06.01 2014.10.23
한유성(韓有星)
포도부장, 샌님 기타 1973.11.11 1994.03.23
문육지(文陸地)
둘째상좌 기타 1973.11.11 1992.07.28
이충선(李忠善)
장고, 대금, 피리 기타 1973.11.11 1989.11.21
이범만(李範萬)
팥먹중, 샌님 기타 1973.11.11 1984.07.31
김윤택(金潤澤)
첫상좌, 취밭이, 초랭이 기타 1973.11.11 1979.08.09
허호영(許浩永)
말뚝이, 가면제작 기타 1973.11.11 1976.08.01

5. 출처 및 참고 문헌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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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은율탈춤, 제61호 은율탈춤보존회
탈춤 강령탈춤, 제34호 강령탈춤보존회/강령탈춤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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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틀에서는 국가/시,도 지정 탈놀이만 취급한다.

[1] 지정될 당시 제49호로 지정되었다.[2] 현재 위치로는 잠실 아파트와 석촌호수 지역에 해당된다.[3] 송파,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4] 허호영의 부친. 허성복, 허성백으로도 불렸는데 이 이름들은 그의 아명(兒名)이다. 산대놀이 외에도 송파다리밟기 전승에 큰 역할을 했다.[5] 이때까지 돌말이에서 탈춤을 춘 적이 없었기에 탈춤을 추면 마을 어른들이 "물 들어온다"라며 말렸다고 한다. 그래서 남한산성, 봉은사, 장지리 등지에서 대신 놀다 오고 했었다.[6] 최근 정기공연에선 벽걸이 형식으로 탈을 걸고, 순서는 상좌 2탈, 연잎과 눈끔적이, 샌님, 서방님, 도련님, 포도부장, 신할아비, 여타의 탈, 마지막 행에는 여자 배역 탈로 놓았다.[7] 팔을 들어 화장을 올리는 춤사위. 여기서 화장은 저고리의 깃고대 중심에서 소매 끝까지의 길이를 말한다.본래 양주별산대에도 있었으나 전승 도중 단절됐다.[8] 놋쇠로 만든 타악기의 하나. 둥글넓적하고 배가 불룩하며, 불교 의식에서 많이 쓴다.[9] 먹중은 곰보타령을 부르면서 옴중의 우둘투둘한 얼굴을 야유하고, 옴중은 먹중 면상이 십년 묵은 목탁 같다고 비난한다.[10] 과거 공연 해설 설명에 의하면 연잎은 어릴 적에 뜨거운 물에 데여 연잎사귀를 쓰고 있고 눈끔적이는 눈을 끔적이는 병에 걸렸다고 한다.[11] 아무나 쉽게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창녀나 기생을 말한다.[12] 이전엔 이때 '초라니'란 배역이 나타나 훼방을 놓고 갔다고 한다.[13] 장삼자락을 비껴 아래에서 붙잡아 방향을 틀고 위로 올려 뒤로 젖히다가 다시 앞으로 숙였다 젖혀 흔드는 춤.[14] 참고로 옛날엔 정말로 옷을 벗고 쳤다고 한다.[15] 연잎과 눈끔적이에게 다가가 벗이 되주거나 곤장을 들고 먹중들을 혼내거나 신주부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16] 보존회측에선 2014년 이후 '연닢'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하 눈끔적이도 마찬가지.[17] 탈놀이에서 하얀색은 아이, 여인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