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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9:49:57

쇼신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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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 제3대 왕
尚真 王
쇼신 왕
파일:external/bt.suitenrou.com/2.jpg
출생 1465년
사망 1527년 (향년 62세)
신호[1] 오갸카모이[ruby((於義也嘉茂慧,ruby=おぎゃかもい)])[2][3]
묘소 옥릉(玉陵, 다마우둔)
재위년도 제9대 중산왕
1477년 ~ 1527년
신장 155cm[4]
쇼엔 왕
쇼세이 왕
손자 쇼겐 왕

1. 개요2. 생애
2.1. 즉위2.2. 중앙집권화정책2.3. 군사와 종교2.4. 류큐 왕국의 황금기와 쇠락의 시작
3. 가족 관계4. 평가5. 《조선왕조실록》에서의 등장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류큐 왕국 제2차 쇼씨 왕조의 제3대 국왕이자 류큐 역사상 최고의 명군은 물론이며 성군이었다.[5]

쇼신은 15세기경 류큐 왕국의 번영을 이끌었던 왕이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50년 동안 재위하면서 류큐 역사상 군사, 영토, 문화,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쇼신이 류큐의 왕위에 있었던 긴 시간은 중산의 위대한 날들로 묘사되며, 당시 장기간 지속되었던 평화와 그에 따라왔던 번영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2. 생애

2.1. 즉위

쇼신은 반란를 일으켜 제2차 쇼씨 왕조를 개창한 농민 출신의 초대 왕 쇼엔의 아들로 태어났다.(1465년) 쇼신이 13살이 되었을 때 부왕 쇼엔이 승하했는데, 왕의 아들인 쇼신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쇼엔의 뒤를 이어 죽은 왕의 동생인 쇼센이가 제2대 왕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 해인 1477년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에서
'쇼신이야말로 왕위에 올라야 한다.'
는 신탁이 내림에 따라 쇼센이는 즉시 퇴위하고 조카인 쇼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6] 이러한 과정을 거쳐 즉위하게 된 쇼신은 2년 후인 1479년 명나라의 헌종 성화제로부터 책봉을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중산국[7]의 국왕이 되었다.

2.2. 중앙집권화정책

구스쿠 시대 이래 지방에서 할거하던 아지 계층은 중앙의 슈리 정부에게 매우 큰 위협이 되었다. 새로운 왕가가 된 제2차 쇼씨 가문 역시 이러한 호족층으로부터 출발하여 쿠데타를 통해 왕위를 거머쥐었기에, 쇼신은 다음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쇼신은 지방의 아지들을 중앙의 슈리에 모여 살도록 조치했다. 이를 통해 슈리성은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지 계층을 모아 들임으로써 영주를 잃어버린 지방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는 아지웃치(按司掟, あいうっち, 안사정)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에서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도에 모인 아지 계층을 대상으로 관인 하치마키(冠, はちまき)의 색깔과 비녀인 지화(簪, じーふぁ)의 색을 결정했다. 하쿠 제도로 아지 계층의 위계를 결정한 쇼신은 지방의 호족이었던 아지 계층을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류큐 왕국이 빠르게 중앙집권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일부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쇼신은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진압했다.

2.3. 군사와 종교

쇼신은 100여 척의 전선을 파견하며 미야코 제도야에야마 제도 등의 사키시마 제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이와는 반대로 쇼신은 모든 사람들의 무기 소유를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이전에 일어났던 지방 반란과 같은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쇼신은 모든 무기를 수도인 슈리성 내부의 무기창고에 보관하도록 함으로써 국왕과 중앙 정부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쇼신은 류큐의 민족종교를 정비하여 신녀 조직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에 신녀인 '노로'를 편제하고, 이 노로 직위 위에 좀 더 넓은 범위를 관리하는 '오아모'를 두었으며, 이 모두를 통솔하는 '기코에오키미' 등의 직위를 창설했다. 또한 신녀 전부를 중앙의 슈리성에서 임명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성공했다. 이때 최고 신녀직인 기코에오키미에 쇼신의 누이였던 오토치토노 모이카네 공주가 임명되어 류큐 왕실의 제정일치 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한편 쇼신은 치세 말기,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는데, 그가 세운 엔가쿠지(円覚寺, 원각사)는 이후 대대로 류큐 왕실의 비호를 받아 1945년 오키나와 전투로 소실되기 전까지 류큐 제일의 사찰로 번영했다.

2.4. 류큐 왕국의 황금기와 쇠락의 시작

쇼신은 명나라에 대한 조공을 기존의 2년 1공에서 1년 1공으로 바꾸고[8] 멀리 떨어진 시암(태국)과도 교역을 시작하는 등 중개무역을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이렇게 얻어진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쇼신은 여러 건설사업을 벌였는데, 슈리성 정비와 왕실의 능묘인 다마우돈(옥릉) 조영, 엔가쿠지 준공, 슈리성과 나하 항을 잇는 마다마미치 건설 등이 그 예였다. 또한 쇼신은 각지의 옛 노래인 오모로를 모은 가요집인《오모로소시》[9]를 편찬하여 류큐의 역사적, 언어학적 측면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쇼신의 치세 말년부터 명나라의 해금령 완화와 서양 세력의 유입[10], 그리고 센고쿠 시대라는 희대의 난세 속에서 교토무로마치 막부가 제어하지 못하는 틈을 타 바다로 확장하려는 일본 다이묘들의 진출 등으로 인해 류큐의 중개무역은 점차 쇠락하게 되었다. 그래도 어찌 어찌 잘 버티던 류큐 왕국에게 결정타로 작용한 것은 임진왜란사쓰마 번의 침공이었다. 임진왜란 때 몇천 명의 군대에게 점령당했던 류큐는 쇼네이 왕 때 일어난 사쓰마 번의 침공에 의해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3. 가족 관계

4. 평가

"Okinawa was never again to know the halcyon days of Sho Shin's reign."
"오키나와는 두 번 다시 쇼 신의 치세에 버금가는 평온한 시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조지 커(George H. Kerr)
라고 호평했듯이 쇼신의 시대는 류큐가 매우 번창했던 시기였다. 그가 세운 여러 위대한 건물들은 이러한 쇼신 시대의 광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5. 《조선왕조실록》에서의 등장

조선왕조실록》중《성종실록》 105권에 제주도의 어부가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야에야마 제도를 거쳐 류큐 왕국의 오키나와까지 가서 쇼신 왕을 만나 후한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류큐의 유우나》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국의 대체역사 소설인《대한제국 연대기》에서 나름 비중있게 등장한다. 고유 종교 대신 정교회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해외 진출을 장려하여 이후 류큐가 열강 사이의 각축 시대에도 중견국으로 자리잡게 될 기반을 다졌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도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2,3,4로써, 류큐를 통일한 쇼하시 왕의 뒤를 이어 류큐 왕 중에서 두번째로 좋다.

[1] 류큐어판 한풍시호[2] 한자로 받아 적으면 비친공(丕親公)이다. 뜻은 친애하는 임금이었다.[3] 출처는 http://ameblo.jp/yaaraami/entry-11297001960.html 해석을 하자면 (お)는 일본어의 '미'(み)처럼 높임 앞가지로 말을 아름답게 꾸민다. 일본어나 류큐어나 이걸 '어'(御)로 쓰지만 한자의 원래 뜻을 생각하면 '비'(丕)가 맞다.(중국의 서주시대 금석문에서 '비'(丕)가 일본어의 '미'(み)나 류큐어의 '오'(お)처럼 쓰였다.) 갸캬(ぎやか)는 일본어에서 가까움을 뜻하는 '치카'(ちか)와 같은 뜻이며, 뜻이 확장되어 친애함을 뜻한다. 모이(もい)는 생각을 뜻하는 '오모이'(おもい)에서 나온 말로 을 뜻한다. 류큐의 시가집인《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 제1권 제9수에서도 나온다.[4] 출처 제3대 쇼신 왕과 제4대 쇼세이 왕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에서 조사한 결과 나온 키다.[5] 삼산을 통일한 쇼하시 역시 무역을 중시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등 뛰어난 정복군주이자 명군이었다. 하지만 지방 호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후계자를 명확하게 정하지 못해 쇼하시 사후 쿠데타가 여러 차례 발생하게 되었고, 결국 권신인 가나마루(쇼엔)에게 왕통을 빼앗기게 되었다. 한편 쇼신은 류큐의 황금기를 연 것 외에도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통해 당시까지만 해도 매우 불안정하던 류큐를 굳건히 만든 최대의 공로가 있다.[6] 이러한 쇼센이 왕의 퇴위는 쇼신의 모후이자 '어머니 여왕'으로 언급되는 오기야카의 책동이라는 이야기도 있다.[7] 류큐 왕국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류큐를 일컫는 오랜 별칭 중 하나다.[8] 조공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대부분의 조공은 하면 할수록 바치는 쪽에 이득이었다.[9] https://ko.m.wikipedia.org/wiki/%EC%98%A4%EB%AA%A8%EB%A1%9C%EC%86%8C%EC%8B%9C[10] 처음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는 오히려 류큐에게 있어 중개무역을 확장할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와 필리핀을 점령하는 등 유럽인들이 직접 무역에 뛰어들게 되자 이것은 류큐에 있어 커다란 악재로 작용하게 되었다.[11] 생몰년 미상이다. 제2대 쇼센이 왕의 장녀로 쇼신 왕과는 사촌지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