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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중기 원 간섭기에서 여말선초의 친위대, 사법, 공안 기구.약칭은 순군부로, 사평순위부, 의용순금사로 부르기도 했다. 이를 줄여 부르면 순위부, 순금사가 된다.[1]
2. 역사
충렬왕이 치안을 담당하고자 편성한 순마소(巡馬所)가 그 시초이다. 순마소는 몽골의 간섭 당시 원나라가 치안을 명목으로 고려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내정간섭 기구 중 하나로, 그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제공관(提控官)을 몽골에서 파견한 다루가치가 맡았다. 이후 고려 후기가 되면서 순마소는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로 명칭이 바뀌어 확대 개편되어 그 명맥이 유지된다. '만호(萬戶)'가 들어간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관제 또한 몽골 천호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병력 대부분이 기병화되어 있었다.이 시기 순군부의 역할을 보면 전문수사기관이라기보다는 일본의 경시청이나 영국의 런던광역경찰청과 유사했다. 초기에는 설치 의도대로 개경을 순찰하며 도둑을 잡는 등 치안 업무만 처리했다. 하지만 고려 말의 혼란 속에 갈수록 그 권한은 갈수록 늘어났다. 직접 수사를 진행하거나 사헌부와 공조해 관리들을 감찰하기도 했고, 재산권 소송을 처리하거나 형벌을 집행하고 감옥을 관리하는 등, 군사 겸 사법기관 및 수사, 공안 역할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종국에는 반란군 진압과 외적 방어, 헌병 역할에다 친위대 역할까지 도맡아 하는 일종의 내무군으로까지 성장했다. 병력 숫자도 갈수록 증가해, 고려 말을 기준으로 만호부 휘하에 3개 군, 조선 초에는 5개 군으로 늘어났다.
순군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공민왕 시기 원나라와 고려의 주종관계가 깨지면서 순군만호부는 원나라의 내정 간섭 기구에서 고려 왕실의 수족으로 변화했다. 친원파 기철 일당을 일망타진한 것도 이들이다. 그 막강한 권한과 군사력 덕에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 반대파를 감찰, 체포하고 제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이나 충신 최영은 순군을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했고, 이성계 또한 위화도 회군 이후 순군을 바탕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했다. 이 때문에 순군부는 간관들의 주요 비판 대상이기도 했다.
3. 후신
조선이 건국된 후 순군만호부는 군사적 기능은 신생 조선군으로 이관하고 사법, 공안 기구로 재편되는데 이것이 바로 의금부이다. 그리고 의금부는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기에 공안기구라는 속성이 제거되고 근대적 법제에 따라 완전한 사법기구인 평리원으로 개편된다. 평리원은 3심을 담당하며 대한제국의 최고법원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었으나 1907년 일제가 강제로 폐지하고 통감부 휘하의 대심원[2]으로 업무를 이관했다. 이로써 고려 말의 순마소에서 근대의 평리원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최고법원 역할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이 맡다가 광복 이후 대한민국 대법원이 이어받았다.
4. 기타
순군만호부, 즉 약칭인 순군부(巡軍府)는 나말여초 고려의 군령권 관부인 순군부(詢軍部)와는 시대적 배경과 업무가 다른 별개의 관청이다.5. 관련글
[1] 또다른 순금사로는 이후 오위의 충무위로 발전한 충무순금사가 있었다. 충무순금사의 본래 이름은 금오위.[2] 일본 제국의 대법원인 대심원(현 일본국 최고재판소)의 제도를 본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