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영어: Schleswig-Holstein Question독일어: Schleswig-Holsteinische Frage
덴마크어: Spørgsmålet om Sønderjylland og Holsten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건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있는 사람은 단 세 명밖에 없다 – 이미 세상을 뜬 국서 – 이미 미쳐버린 한 독일 교수 – 그리고 이미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
Only three people have ever really understood the Schleswig-Holstein business – the Prince Consort, who is dead – a German professor, who has gone mad – and I, who have forgotten all about it.
헨리 존 템플, 영국 총리
Only three people have ever really understood the Schleswig-Holstein business – the Prince Consort, who is dead – a German professor, who has gone mad – and I, who have forgotten all about it.
헨리 존 템플, 영국 총리
19세기 중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의 귀속에 관하여 벌어진 외교적 위기. 두 차례의 전쟁이 이 문제로 인해 벌어졌으며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무력으로 최종 종결되었다.
2. 배경
슐레스비히 공국은 바이킹이 활동하던 시기에 성립된 덴마크계 국가이며, 12세기경 덴마크 국왕 휘하에 들어온 이후 지속적으로 덴마크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홀슈타인 공국은 역사적으로 독일계 국가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연방의 가맹국이었으나 1460년 이래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세가 공작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두 국가들은 덴마크와의 동군연합 상태로 수백 년간 있어왔고 슐레스비히, 홀슈타인과 덴마크 간 사회 시스템 차이가 있을지언정 세 국가 모두 덴마크 국왕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없이 운영되었다.
홀슈타인은 독일계가 다수인 국가였고 슐레스비히는 전통적으로 덴마크계가 다수였지만 지속적으로 독일계 인구가 증가하여 19세기 초에는 남부 슐레스비히 인구 상당수가 독일계였다.
따라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은 기존까지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발흥한 19세기 무렵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던 상황에 놓여 있었다.
3. 1차 위기: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1848-1852)
3.1. 발단
1848년, 덴마크에서는 자유주의에 입각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덴마크,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은 각기 사정이 다른 국가들이었는지라 1848년 이후 덴마크는 개혁적 성향의 자유주의 인사가 등용된 반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은 개혁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힘을 쓰던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개혁적 시스템을 도입하면 자신들의 특권을 잃게될 것을 우려했다.덴마크에서 집권한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슐레스비히에서 점점 늘어나는 독일계 주민들, 그리고 독일 연방의 일부인 홀슈타인 공국을 통해 독일이 덴마크에 직 · 간접적 영향력 행사를 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덴마크에 통합해야함을 주장했다.
유약하여 자손을 남기지 못할 것으로 여겨지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7세[1]를 우려한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8세는 프레데리크 7세의 후계로 먼 친척 크리스티안 9세를 들였는데[2] 크리스티안 9세가 덴마크 왕위는 부계 후손으로서 즉위하게 되지만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으로는 모계 후손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살리카법에 저촉되어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따라서 덴마크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분리를 막기 위해 1846년 프레데리크 7세는 불법적으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들의 모계 혈통 상속을 허가하는 칙령을 내려 두 공국들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우려와 반발들 속에서 1848년 3월 27일, 프레데리크 7세는 기존 자치권을 유지하는 선에서 슐레스비히 공국의 덴마크로의 합병을 선언했으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측은 이를 즉각 반대했고 두 곳에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들의 봉기가 발발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노어(Noer) 공 프레데리크가 제5소총군단 "라우엔부르크"와 킬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렌츠부르크 요새를 차지하면서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한다.
3.2. 대외 상황
당시 덴마크 해협은 발트해의 출구로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고, 덴마크와 관련된 문제는 당연히 열강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우선 프로이센은 덴마크 국왕으로 유약한 프레데리크 7세가 등극한 상황, 그리고 프랑스가 2월 혁명으로 발이 묶여있는 상황을 호재로 보고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프로이센 정부가 독일 민족주와 독일 통일에 찬동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독일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을 독일 영토로 끌어들이면 프로이센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독일 연방 회원국 민족주의자들의 반감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당대 최강의 해군 보유국이었던 만큼 덴마크 해협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관심을 보였는데, 영국의 입장에서는 약소국인 덴마크가 해협을 차지하고 있는게 자신들에게 더 좋은 상황이었기에 프로이센을 위시한 다른 열강의 손에 드러가는 것을 막아야 했으며 이 때문에 프로이센의 개입에 반대했다.
러시아 제국 역시 덴마크 해협에 프로이센의 영향력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덴마크를 지지했다. 거기에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설령 슐레스히비, 홀슈타인이 프로이센에 병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기회에 덴마크가 스칸디나비아 통일주의에[3] 가담, 발트해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의 입지를 위협할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하는 것을 우려했다.
3.3. 전개
1848년 4월 12일, 독일 연방 의회는 슐레스비히 임시정부를 인정하면서 프로이센군의 개입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프로이센군이 덴마크 영토로 진격, 초전에는 승리를 거뒀지만 열강의 개입 없이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프로이센의 계산은 빗나가버렸다. 스웨덴은 덴마크에 지원병을 보냈으며 영국과 러시아는 프로이센에 현상유지 준수 경고를 보냈고 같은 독일계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제국마저 프로이센 편을 들지 않았다.열강들의 경고에 프로이센은 철군하는 대신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독립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한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한편으로는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강력한 행동 요구, 다른 한편으로는 열강들의 위협에 몰려 결국 협상에 임한다.
영국의 중재 하에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국들은 덴마크 국왕과의 동군연합체제를 이어 나가되 독자적 정부 구성이 가능한 협상 방안이 나왔다. 이는 영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았지만 덴마크는 슐레스비히를 덴마크 영토로 합병하고자 시도했고 결국 협상에 실패해 전쟁이 계속되었다.
1849년 2월, 협상이 실패한 후 프로이센군은 덴마크 본토까지 진격하였고 7월에 다시 협상이 재개되었다.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합병에 대해서는 뜻을 굽혔으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들의 모계 혈통 상속에 대해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협상은 결국 1852년 런던 의정서 조인이 체결될 때까지 끌게 되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스웨덴 말뫼에서 프로이센과 덴마크 간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프로이센군은 철수하였다.
3.4. 종결: 1852년 런던 의정서
당사자 덴마크와 당대 열강들인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 그리고 중재자로 참여한 스웨덴이 조인한 1852년 런던 의정서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과 덴마크의 동군연합체제가 유럽 평화 유지에 필수라 여겨 동군연합체제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독립을 요구한 프로이센과 슐레스비히의 합병을 원했던 덴마크 모두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였다.여기에 더해 덴마크가 제시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상속법 개정도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프레데리크 7세 사후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을 둘러싼 덴마크와 독일(연방)의 갈등은 결국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재폭발한다.
4. 2차 위기: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5. 국제연맹 주민투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의 패전 이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 그중 슐레스비히 지역은 국경조정에 들어갔다. 본래 슐레스비히는 독일인 인구와 덴마크인 인구 모두가 거주하던지라 주민투표로 슐레스비히를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슐레스비히는 북부, 중부, 남부 세 지역으로 나뉘었고 이 중 북부와 중부가 주민투표를 시행했는데 북부는 덴마크 합병, 중부는 독일 잔류로 결정되었고 중부는 남부에 합병되어 지금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이른다.참고로 이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0세에 의해 '부활절 위기'라는 덴마크의 정치 위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크리스티안은 강성 민족주의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덴마크 총리 칼 테오도르 잘레에게 중부를 강제 합병하라고 명령했는데, 잘레는 왕명에 불복하고 북부만 합병한 채 사임했다. 이에 왕이 진노하여 내각을 해산하고 보수파 내각을 새로 결성했는데 부활절 기간에 일어난 이 사건이 바로 부활절 위기다.
그러나 시민들은 왕의 독선에 크게 반발했고 그는 결국 내각을 다시 해산한 뒤 총선을 치러야 했다. 이후 덴마크 왕의 권력이 크게 실추되었고 마침내 입헌군주제가 정착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