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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6:03:34

슝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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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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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웅희령.jpg
<colbgcolor=#000><colcolor=#fff> 중화민국 4대 국무총리
정체 熊希齡
간체 熊希龄
한국식 독음 웅희령
영문 Xiong Xiling
명지각주인(明志閣主人), 상청거사(雙清居士)
병삼(秉三)
출생 1870년 7월 23일 청나라 호남성 봉황현
사망 1937년 12월 25일 영국령 홍콩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청나라 진사
직업 정치가, 사업가, 교육가
국무총리
재임 기간
4대 7월 31일 ~ 1914년 2월 21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중화민국 4대 국무총리2.3. 이후의 활동과 말년
3. 기타4. 참고문헌5.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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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민초 시기의 인물로, 청말의 관료, 중화민국 4대 국무총리.

청나라 시절 호남성에서의 변법자강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중화민국 건국 후 국무총리, 재정총장을 지낸 재정 전문가였다. 이후 남북화의운동,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0년 호남성에서 태어났다. 호남성 원주 원수경학당의 주기의(朱其懿), 호남성 장사 상수교경서원에서 학자 장형가(張亨嘉) 슬하에서 실용학문을 공부하면서 호남성 변법파의 학맥을 구성하였고 1894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가 되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후 변법자강운동에 호응하여 입헌군주론자가 되었다. 변법자강운동 시기에 진보잠(陳寶箴)과 황준헌(黃遵憲)[1]의 지원을 받아 호남성의 개혁을 실시했고 청일전쟁 이후 불어온 인재육성의 분위기에 발맞춰 1896년 담사동, 당재상 등 호남의 지식인들과 함께 서원개혁론, 학당 설립을 주장했다. 호남성 시무학당이 창립되자 창설비용을 기부하였으며 1897년 1월, <청설호남성시무학당공정(請設湖南時務學堂公呈)>에 연명하여 10월에 시무학당을 창립했다. 1897년 4월 진보잠, 황준헌, 강표, 담사동, 당재상 등 호남의 변법파들과 함께 <상학신보>를 창간했으며 1898년 담사동과 장사에 연년회를 설립해 학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남학회의 조직, 보간 창립, 교육자재 기부 등 교육, 언론 분야에 두루 활동했다.

이후 호남성 시무학당 제조(提調)에 임명되어 교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위한 구시대적 교육을 제거하고 경세구국 교육방침을 내세워 호남성의 우수한 인재들을 모아 시험을 치러 입학시켰고 인품과 학식을 두루 갖춘 교사들을 불러모아 교사진을 꾸렸다. 이후 구미와 일본을 유람하며 각국의 경제를 연구하여 청의 민족기업 육성에 힘썼으며 동삼성재정감리관 등 재무관련 관직을 역임했다. 1911년 신해혁명 발생 이후 강소도독부 재정사장을 역임했으며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리위안훙의 공화당과 통일당에 입당, 탕사오이 내각 밑에서 1대 재정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고 탕사오이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재정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중화민국의 화폐본위를 금본위제도로 결정하고 싶어 했으나 현실적인 자본의 부족과 수천년간 중국이 은본위제도를 채택했던 것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은본위제도를 채택하였다.

1912년 6월 탕사오이 내각이 물러나고 루정샹이 새 총리가 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재무총장에 유임했으나 7월에 사퇴하여 주학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량치차오가 진보당을 창당하자 가입했다. 1913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8개 당적을 동시보유하였다. 이후 열하도통을 지냈다.

2.2. 중화민국 4대 국무총리

1913년 5월,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의 결과로 출범했던 자오빙쥔 내각이 1913년 3월의 쑹자오런 암살 사건과 4월의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물의를 빚어 사퇴한 이후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2개월 간 대행체제를 유지했는데 정식 내각을 출범시키자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슝시링이 7월 31일 국민당과 진보당 양당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중화민국 4대 국무총리 겸 재정총장에 임명되어 진보당을 중심으로 제일류내각이라 일컫는 소위 '명류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때 량치차오가 사법총장, 왕대섭이 교육총장, 교통총장에 저우쯔치(周自齊), 농상총장에 장젠(張謇)이 임명되는 등 진보당원들이 약진했다. 그 외에 육군총장 돤치루이, 해군총장 유관웅이 유임했으며 교통총장 주치첸(朱啓鈐)이 내무총장에, 청말에 주불, 주독 공사를 지냈던 쑨바오치가 외교총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각료들의 상당수가 위안스카이와 특수관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 내각에 대한 위안스카이의 입김은 거세 슝시링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결국 1913년 계축전쟁으로 국민당이 박살나는 꼴을 보았으며 1913년 10월 위안스카이의 입맛에 맞지 않던 천단헌법이 통과될 조짐을 보이자 11월 3일 위안스카이는 슝시링을 총통부에 불렀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슝시링이 열하도통 시절에 발생했던 열하별장의 보물 절도건에 관한 문서를 일부러 흘려 슝시링에 겁을 준 다음에 슝시링을 만나 국민당을 마구 욕하며 국민당 국회의원들의 국회의원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슝시링은 위안스카이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해산 이후 진보당에서 국회 유지를 주장하자 위안스카이는 슝시링에게 이 문제를 맡겼으나 슝시링은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거치며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강화되는 꼴을 보고 1914년 2월에 국무총리에서 사퇴했다. 슝시링 내각은 중화민국 역사상 사실상 마지막 정당내각이었다.

2.3. 이후의 활동과 말년

1915년 위안스카이가 제제운동을 벌이자 반대했다. 1918년 차이위안페이, 장젠 등과 함께 10월 23일 평화기성회를 조직하여 호법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등 내전 중지와 평화 통일을 주장했고 전 대총통 펑궈장, 안휘독군 니쓰충 등이 여기에 호응하여 11월에 호법전쟁이 종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에 발맞춰 량치차오, 왕대섭, 임장민, 법원렴 등 연구계 지식인들과 함께 안복파가 추대한 총통 쉬스창과의 합작을 추진했고 국민외교협회, 국제연맹동지회를 창설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중국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일본의 중국 침략에 저항하여 일본의 산동철도 조약 연장에 강력하게 반대했고 조봉창, 탕사오이 등과 힘을 합쳐 일본과 타협하려는 교통계 정치인들을 공격하고 유럽외교를 후원하려 했다. 또한 국제전보비용을 사비로 지원하는 등 외교활동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19년 5.4운동에 타격을 입은 첸넝쉰 내각이 붕괴되고 궁신잔 대리내각이 들어서면서 학생들을 선동해서 사익을 위해 학조를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고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시보>는 슝시링을 매국노로 공격하면서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슝시링은 자신은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죄악정치, 죄악사회와는 더 이상 하늘을 같이 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에 매진하여 1920년에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을 창설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마상백, 장빙린(章炳麟), 선쥔루, 좌순생, 황옌페이 등 60여명과 함께 중화민국국난구제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을 불러들인 원인은 국내의 일부 인사들이 당치를 표방하고 국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정당활동 금지의 해제, 헌법 제정, 집회 결사 자유 보장 등을 주장하며 제1차 헌정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중국공산당의 반장항일에 반대하여 장제스가 앞장서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라는 보장항일(保蔣抗日)을 주장했다. 마침 1차 양광사변제3차 초공작전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중화민국 국가주석 장제스린썬에게 자리를 내주고 하야했다. 이후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고 장제스왕징웨이의 연합내각이 출범하자 1932년 4월, 상하이에서 국난회의를 조직하고 평진지역에서 장동손, 이황, 나융기, 후스 등과 함께 참여, 언론, 결사의 자유보장, 헌정실행, 헌법기초위원회 조직법 제정을 주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발생한 난민들을 돕기 위한 자선사업을 행했다. 상하이 함락 이후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으며 12월에 그곳에서 사망하여 중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국민정부는 국장을 거행하여 그의 죽음을 기렸다.

3. 기타

슝시링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손과 발에 기형이 있었다고 한다. 장녀는 미국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베이징에서 교육자로 지냈고 이후에는 타이베이로 건너갔다. 차녀는 미국에 유학갔다가 미국에 정착했다고 한다.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1] 조선책략을 지은 그 사람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