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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역사귀속과 계승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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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승
1.1. 현대
1.1.1. 남한1.1.2. 북한
1.2. 현대 이전
1.2.1. 고려1.2.2. 조선

[clearfix]

1. 계승

1.1. 현대

1.1.1. 남한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를 명명하여 신라가 적통이고 한국사가 통일신라에서 이어짐을 명시하였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도가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다.[1] 다만 여전히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신라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당시 삼국 사이에서는 지금만큼의 민족 의식이 없었다는 사실도 많이 알려지면서 이러한 비판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1960~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북한과 한창 체제경쟁을 벌였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 위치했던 고구려와 달리 남한 지역에 위치했던 신라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화랑이나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김춘추, 김유신, 문무왕 등을 부각시켰다.

냉전 종식 이후에는 북한에 국력이 크게 앞서게 되어 굳이 신라를 통해 정통성을 주장할 이유가 없어서 이러한 의식도 거의 없어졌지만 조갑제 등의 일부 보수 인사는 현재에도 신라정통론을 주장하며 신라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에서 몇몇 부대의 이름이 화랑부대라든지 몇몇 부대의 사단가에도 화랑이 들어가는 등 군대에도 이러한 신라 정통론의 영향이 남아 있다. 특히 국가 최고의 엘리트 장교 육성기관인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화랑으로 부르고 있다. 아예 뇌절을 해서 일부에서는 신라가 존속했으면 조선과 달리 한국이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근거는 없다.[2]

1.1.2. 북한

북한은 신라를 한국 고대사의 한 국가로서 인식하기는 하나 지리적 위치상 거리가 멀고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심지어 통일신라시대 역시 인정하지 않으며 그 시기를 발해 중심으로 서술한다. 또한 강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외세를 끌어 들인 점과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대적이었던 점을 들어 신라는 한민족을 외세에 팔아먹은 나라라고 가르친다.

1.2. 현대 이전

1.2.1. 고려

1.2.2. 조선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면 신라 초기에 양산(陽山) 기슭에 말이 있어 꿇어 울므로 사람이 가서 보니 말은 홀연히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大卵]이 있었습니다. 깨뜨리니 어린 아이가 껍질 속에서 나왔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니 대단히 숙성하였습니다. 6부(六部) 사람들이 신이(神異) 하게 여기어 추존하여 세워서 임금을 삼았으니, 곧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입니다. 북부여(北扶餘)의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겠으니 너는 피하라.’ 하였으니, 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입니다.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하백(河伯)의 딸을 압록강 강변의 실중(室中)에서 사통하였습니다. 왕이 실중에 가두어 두었는데, 해가 비추므로 몸을 이끌고 피하니 해의 그림자가 또 좇아서 비추었습니다. 인하여 잉태하여 큰 알 하나를 낳으니 왕이 버려서 개와 돼지를 주니 먹지 않고, 길 가운데에 두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새들이 날개로 덮어 주었습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이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高朱蒙) 곧 동명왕입니다.
-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 윤 이선제의 상서문
경주부(慶州府)

부윤(府尹)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바로 신라의 옛 서울이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원년(元年)[4] 갑자에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세워서 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 하였다. 【혹은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혹은 신라(新羅)라고 이른다. 】 탈해왕(脫解王) 9년 을축에 【바로 한나라 명제(明帝) 영년(永年) 8년. 】 시림(始林)에서 닭의 괴이한 일이 있어서,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인하여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가, 기림왕(基臨王) 10년 정묘에 【바로 서진(西晉) 회제(懷帝) 영가(永嘉) 원년. 】 다시 이름을 신라(新羅)로 하였다.
-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조선은 본류를 신라로 여기는 경향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5] 그래도 고구려백제를 포함한 삼국 모두의 계승의식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사가 있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3월 13일

실제로 조선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시조들에게 모두 똑같이 제사를 지냈었다.
사직 박필정(朴弼正)·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그 여러 일족들을 인솔하고 상서(上書)하기를,

"숭덕전(崇德殿)[6]의 위판(位版)에 단지 신라 시조(新羅始祖)라고만 쓰고 왕자(王字)를 쓰지 않았으니, 청컨대 위판 및 비(碑)에 ‘신라 시조왕(新羅始祖王)’이라 쓰고 비문(碑文)도 또한 숭인전(崇仁殿)[7]·숭의전(崇義殿)[8]의 준례에 따라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 사직 박필정 등이 일족을 인솔하고 상서하여 신라 시조의 위판 및 비에 대해 아뢰다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이 의리를 중히 여겨 승국(勝國)[9]을 위하여 숭의전(崇義殿)[10]을 두고 신라를 위하여 숭덕전(崇德殿)[S]을 두고 관원을 두어 수호하고 비를 세워 업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숭덕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천묘(東川廟)가 있는데 곧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사당입니다. 국가에서 숭의전·숭덕전과 마찬가지로 관원을 두어 수호하고 예(禮)로 제사하니, 신 등은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흠앙(欽仰)하고 감축(感祝)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대저 경순왕은 임금 자리에 있다가 갑자기 물러나서 신기(神器)를 가지고 덕 있는 이에게 귀순하였습니다.
- 부사직 김효대가 동천묘에 비문을 세울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사당을 수리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경순왕의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입춘일과 입추일을 쓰고 있으므로 숭덕전(崇德殿)[S]에서 2월과 8월의 상순(上旬) 가운데 좋은 날을 받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숭덕전에는 8변(八籩)·8두(八豆)를 쓰고 있고 이 사당에는 7변(七籩)·7두(七豆)를 쓰고 있으며, 숭덕전에는 복호(復戶)한 것이 22결(結)이고 이 사당에는 5결뿐이며, 참봉(參奉)을 임명하는 첩문(帖文)도 이조를 거치지 않고 예조에서 만들어 보내고 있으니, 이는 대체로 사면(事面)의 존중되는 정도가 신라 시조의 사당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당초부터 등급을 낮추었던 것이므로 지금 갑자기 등급을 격상시키는 일을 논의할 수 없으니, 모두 그전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先朝) 때에 조경묘(肇慶廟)를 창건하고 완경과(完慶科)를 베풀었었다. 그후로는 사면의 존중되는 정도가 자별해졌으니, 참봉의 직첩은 이조에서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신라 경순왕의 사당을 수리하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에 대한 제사 】
> 이윽고 승지에게 명하기를, ‘특별히 승지를 보내는 것은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니, 경(卿)은 부디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묘우(廟宇)나 무덤에 만일 무너진 곳이 있으면 낱낱이 서계(書啓)하여 수즙(修葺)하는 바탕으로 삼게 할 것이며, 자손(子孫) 가운데 녹용(錄用)에 적합한 자 또한 방문(訪問)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단군(檀君)·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또한 그곳에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부터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렸으니, 마땅히 똑같이 제사를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먼저 기자(箕子)의 사당에 제사지낸 뒤 또한 택일(擇日)하여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유악이 아뢰기를,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기자의 사당 옆에 있어, 세종(世宗) 때부터 봄, 가을에 중뢰(中牢)[13]로써 제사를 올렸습니다. 여기에도 전부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정유악이 이어 따라갈 사람을 선발하여 서로(西路)의 형승(形勝)을 두루 살펴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것도 윤허하였다.
- 기자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도록 명하다
예조에 명하여 관원을 보내어 중화(中和)의 동명왕묘(東明王墓)에 치제하게 하였는데, 지경연사 김취로(金取魯)이 말을 따른 것이었으며, 묘를 새로 수축하였기 때문이었다.
- 관원을 보내 새로 수축한 중화의 동명왕묘에 치제하게 하다
이어서 동명왕묘(東明王廟)의 제문(祭文)을 몸소 짓고, 향축(香祝)을 보내며, 삼성묘의 토판(土版)을 나무 독(櫝)으로 만들어 덮으라 하고는 독제(櫝制)를 몸소 그려서 예조참의 홍낙인(洪樂仁)을 특별히 보내어 덮도록 하였다.
- 예조판서 심수가 황해도 구월산 삼성묘의 위판을 개조할 것을 청하다


【백제 시조 온조에 대한 제사 】
> 승지를 보내어 남한(南漢)에 있는 온조왕(溫祚王)의 묘(廟)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광주 부윤 김응순(金應淳)에게 온조왕(溫祚王)의 묘(廟)를 중수(重修)하라고 명하였다.
-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다. 온조왕의 묘를 중수하라고 명하다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고려(高麗) 시조들의 왕릉(王陵)을 개수하였다. 왕은 지난 시대 왕조들에 대해 덕 있는 이를 숭배하고 어진 이를 본받는 일이면 더욱 그를 못잊어하여 수로왕(首露王)의 능을 비롯해서 신라 여러 왕의 능에다 잔을 올리고, 삼성사(三聖祠) 제례 의식을 다시 정했으며, 온조왕(溫祚王)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이라 이름하고, 고려 4태사(四太師)[14] 사우(祠宇)에는 사액(賜額)을 하였다.
- 정조 대왕 행장(行狀)
또 전교하기를,

"온조왕묘(溫祚王廟)와 현절사(顯節祠)에도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고(故) 영의정(領議政) 상진(尙震)의 묘(墓)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며,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의 묘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고 고(故)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 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묘에 광주 판관(廣州判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등의 묘에 종신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계보를 정리하면서 시조인 이한신라태종 무열왕의 10대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 <총서>와 왕실 족보인 《선원록》의 내용이다. 이는 태종 무열왕의 계보와 연결함으로써 단일국가의 정통성, 즉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를 이어서 전주 이씨가 세운 조선이 통일 삼한을 잇는다는 상징적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1] 여기서 얘기하는 현대의 계승의식은 어디까지나 향토사의 관점에서 고향에 위치한 고대 국가에 애착을 갖는다 정도이지 그 나라만을 계승한다는 편협한 사고방식이 아니다. 일례로 경주시부여군에 사는 한국인이 각각 신라나 백제에만 계승의식을 갖고 나머지 2국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갖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물론 일부 진영에서 지역주의를 극단적으로 내세우며 신라가 나머지 2국보다 위대했다는 근자감을 표하기는 한다.[2] 정말 개방적이었으면 골품제가 발목을 잡아 망할 이유도 없고 청해진 등의 무역 기지를 폐쇄할 리도 없다. 차라리 당시 동아시아의 다변성에 원인을 찾는 것이 옳다.[3] 계림후(鷄林侯)에서 승작된 작위이다.[4] 원년(元年) : BC 57.[5] 반대로 고구려를 신라보다 더 고평가하는 경향도 분명있었는데 이중에는 소중화 사상을 깊게 가진 유학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종휘의 서적인 《동사》에서는 고구려야말로 중화문명의 기치인 유교 사상이 발달했으며 신라는 도리어 유교보다 불교의 영향이 깊었다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고구려를 더 고평가했다.[6]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모신 사당.[7] 평양에 있는 기자(箕子) 사당.[8] 고려 태조 이하 8왕을 모신 사당.[9] 고려를 가리킴.[10] 조선 시대에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지내던 사당.[S]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모신 사당.[S]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모신 사당.[13] 소뢰의 별칭[14] 사태사(四太師) :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을 이름.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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