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발 파스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이름 | 아니발 루이스 파스 피우마 (Aníbal Luis Paz Piuma) |
출생 | 1917년 5월 21일 |
사망 | 2013년 3월 21일 (향년 95세) |
국적 | [[우루과이|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몬테비데오 |
포지션 | 골키퍼 |
신체조건 | 불명 |
소속팀 | 리버풀 FC (1933~1937) CA 베야 비스타 (1937~1938)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38~1953) 라싱 클루브 데 몬테비데오 (1954) |
국가대표 | 13경기 (우루과이 / 1940~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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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파스는 1933년, 몬테비데오의 리버풀에서 처음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파스는 CA 베야 비스타를 거쳐 1938년, 로베르토 포르타의 추천으로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에 정착했고 이후 15년간 471경기[2]에서 나시오날의 골문을 지켰다.
이 기간동안 나시오날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의 리그 5연패를 포함, 9회 우승을 달성했다.
2.1.2. 국가대표
파스는 CA 베야 비스타 소속일 때부터 우루과이 대표팀에 소집되었지만 데뷔하는 데에는 3년이 더 걸렸다.파스는 1941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과 1942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당시 우루과이의 주전 골키퍼였다. 하지만 로케 마스폴리의 등장 이후 파스는 대표팀 주전에서 멀어졌고 우루과이의 월드컵 복귀 무대에서도 주전은 마스폴리였다.
파스는 결선 리그 스웨덴전에서 골문을 지켰고 2실점을 했다. 하지만 우루과이가 3대2로 승리하면서 우승의 향방은 최종전에서 갈리게 되었다. 스웨덴전이 파스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였다.
2.2. 이후
파스는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에서 1969년에 제제 모레이라 감독을 도와 골키퍼 코치로 재직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파스는 골키퍼로서 자신감 있는 플레이를 펼쳤다고 한다.4. 뒷이야기
- 2006년, 1938년 월드컵의 우승팀 이탈리아의 멤버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피에트로 라바의 사망으로 파스가 최고령 생존 FIFA 월드컵 우승 선수가 되었다. 파스의 사망 이후 최고령 생존 월드컵 우승 선수는 오트마어 발터였다. 1950년 월드컵 우승팀 멤버 중 마지막 생존자는 알시데스 기지아지만 사망 시점에서 각자의 나이로 따지면 파스가 가장 오래 살았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9회: 1939, 1940, 1941, 1942, 1943, 1946, 1947, 1950, 1952(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6회: 1938, 1944, 1945, 1949, 1951, 1953(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5.1.2. 국가대표
분류
- 1917년 출생
- 2013년 사망
- 1933년 데뷔
- 1954년 은퇴
- 몬테비데오 출신 인물
- 우루과이의 남자 축구 선수
- 골키퍼
- 리버풀 FC(몬테비데오)/은퇴, 이적
- CA 베야 비스타/은퇴, 이적
- 나시오날/은퇴, 이적
- 라싱 클루브 데 몬테비데오/은퇴, 이적
- 우루과이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참가 선수
- FIFA 월드컵 우승 선수
- 우루과이의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
- 1939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페루 참가 선수
- 1941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칠레 참가 선수
- 1942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우루과이 참가 선수
- 1946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