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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왕국 제9대 국왕 아마지야 אֲמַצְיָהוּ | Amaziah | |||
<colbgcolor=#0038B8,#467EFF><colcolor=#fff> 이름 | 아마지야공동번역, 아마츠야가톨릭, 아마샤개신교 | ||
출생 | 기원전 822년경 | ||
예루살렘 | |||
사망 | 기원전 769년경 | ||
라기스 | |||
재위 기간 | 제9대 남유다 왕국 국왕 | ||
기원전 796년 ~ 기원전 767년 (약 2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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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요아스 | ||
후임자 | 우찌야 | ||
부모 | 아버지 요아스 | ||
자녀 | 우찌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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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유다 왕국의 제9대 국왕. 요아스의 아들이다.요아스가 피살된 후 즉위했다. 그도 부왕 요아스와 같이 정직하게 거의 다 행하였지만 아직도 그의 조상 다윗의 길과 같지 않았으며, 신당을 그냥 놔두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아쉬운 평가를 받는 왕이다.
2. 즉위 후 행적
군사력 강화에 힘을 기울여 유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온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을 집안별로 세워 천인대장들과 백인대장들의 지휘 아래 두었다. 그리고 20살 이상 된 사람들을 사열해 보니 모두 30만 명이나 되었는데 창과 큰 방패로 무장해 군대에 나갈 수 있는 정병이었다. 그리고 은 100탈렌트를 주고 북이스라엘에서 용사 10만 명을 고용하기도 했다.3. 에돔, 북이스라엘과의 전쟁, 그리고 죽음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에프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않는다 하여 에프라임 자손들(북이스라엘 출신 병사들)을 돌려보내었다. 그 후 담력을 내어 공격해 소금 골짜기에서 세이르의 자손 1만 명을 쳐죽이고 유다의 자손이 또 1만 명을 붙잡아 바위 꼭대기로 끌고 가 내던졌다. 그리고 아마샤가 자기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낸 북이스라엘 군사들이 사마리아에서 벳 호론에까지 유다의 성읍들을 공격해 주민 3000명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했다. 이후 세이르 자손들의 신상을 가져와 자기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예배하며 향을 피웠다. 그러자 하나님이 크게 노해 예언자 한 사람을 보내 경고했으나 아마샤는 이를 무시했다.아마샤는 사람들과 의논해 예후의 손자이자 여호아하스 왕의 아들이자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 요아스에게 사람을 보내 싸움을 걸었고 그리하여 요아스가 올라와 남유다 왕국의 벳 세메스에서 겨루었다. 유다군은 이스라엘군에게 크게 패배해 도망쳤고 요아스는 아마샤를 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유다 왕궁의 보물들을 빼앗고 인질을 잡아 사마리아 성으로 데리고 갔다.
마지막에는 반란이 일어났고 도망쳤으나 부친 요아스처럼 반역자에게 암살되었다. 그가 죽자 아들인 웃시야(아사랴)가 보위를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