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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공화국 제14대 대통령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António de Spínola | |||
| |||
<colbgcolor=#006127><colcolor=#fff> 본명 | 안토니우 세바스티앙 히베이루 드 스피놀라 António Sebastião Ribeiro de Spínola | ||
출생 | 1910년 4월 11일 | ||
포르투갈 왕국 에스트레모즈 | |||
사망 | 1996년 8월 13일 (향년 86세) | ||
포르투갈 리스본 | |||
재임기간 | 제14대 대통령 | ||
1974년 5월 15일 ~ 1974년 9월 3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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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포르투갈 육군사관학교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1. 개요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구국군정위원회 위원장이자 포르투갈의 제14대 대통령이었다.2. 생애
1910년 포르투갈 왕국 에스트레모즈의 산투 안드레에서 마데이라 제도 출신의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났다. 1917년,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말려들자 마데이라의 포르투 다 크루즈에 있는 친가로 보내졌으며, 이듬해 전쟁이 마무리되자 다시 포르투갈 본토로 돌아와 리스본에서 학업을 마쳤다.1920년, 어머니를 여읜 뒤 형제들과 함께 1928년까지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30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기병 과정을 선택했다.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승마 실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실제 자신의 말을 굉장히 아꼈고 여러 승마 대회에 참여해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2.1. 군인 시절
1933년, 제7기병연대에 배치되어 교관으로 근무한 뒤 1943년까지는 국민근위대 사령부에서 부관으로 활동했다. 이 시절 친독 성향이 강했던 스피놀라는 1941년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동향을 관찰하기 위해 러시아 전선으로 파견되었으며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 현장을 참관하기도 했다.1944년 10월, 그는 다시 국민근위대로 복귀했으며, 이듬해 아소르스 제도의 상미겔 섬으로 전출되었다. 4년 뒤인 1948년 1월 23일, 그는 아비스 군사훈장(Ordem Militar de Avis)의 장교 등급 수훈을 받고, 1959년 5월 16일, 같은 훈장의 사령관으로 승격되었다. 1959년 6월,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이후 국민근위대 기병연대에 복귀하여 사령부 부관으로 근무했다.
1961년에는 독재자이자 포르투갈의 제100대 총리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에 자원 복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이를 받아들인 살라자르는 스피놀라를 앙골라로 파견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제345기병대대를 직접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내며 군 내 실력자로 떠올랐다.
2.2. 총독 시절
살라자르 총리의 신임을 받은 스피놀라는 1968년 포르투갈령 기니 총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PAIGC)의 독립운동이 거세지는 가운데, 그는 군사적 대응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접근을 병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령 기니 내 다양한 민족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전통 부족 지도자들을 행정에 적극 참여시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전쟁을 지속하는 양면 전략을 펼쳤다.한편, 그는 PAIGC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세네갈 대통령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와 비밀 회담을 가졌으며, 세네갈이 PAIGC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그는 코나크리 공격(그린 시 작전) 등 인접 지역에 대한 군사 작전을 수행하며 강경한 대응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외알안경, 지팡이, 장갑을 착용한 독특한 이미지와 함께 강인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72년경, 스피놀라는 더 이상 군사적 방법만으로 PAIGC를 억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일부 정치적 양보를 고려했다. 하지만 살라자르의 후임자인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는 이를 강력히 반대하며 협상을 금지했다. 이에 반발한 스피놀라는 1973년 총독직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복귀했다. 귀국 후, 그는 정부 정책에 대한 실망을 담아 《포르투갈과 미래(Portugal e o Futuro)》를 출간했으며, 이 책은 결과적으로 카네이션 혁명의 촉매제가 되어 포르투갈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2.3. 본국으로의 복귀, 그리고
1973년 11월, 본국으로 귀환한 스피놀라는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로부터 해외 식민지 담당 장관직을 제안받았다. 이는 기니 총독직 사임에 대한 정부 내 불만을 해소하고, 동시에 정치적으로 회유하려는 의도가 담긴 제안이었다. 그러나 스피놀라는 이스타두 노부 정권의 강경한 식민지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1974년 1월, 대신 포르투갈군 합동참모본부(Estado-Maior General das Forças Armadas) 부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이때 스피놀라가 상기한 저서 《포르투갈과 미래(Portugal e o Futuro)》를 출간하며,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군사적 패배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 책은 정권 내부에 큰 파장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군 내부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974년 3월, 그는 프란시스쿠 다 코스타 고메스 참모총장과 함께 해임되었다. 공식적인 해임 사유는 ‘류머티즘 여단(Brigada do Reumático)’이라 불리는 고위 장성들의 친정부 행사에 불참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의 저서가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한 달 후인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 당일 밤, 스피놀라는 구국군정위원회(Junta de Salvação Nacional)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 소장파(무장군 운동, Movimento das Forças Armadas)는 원래 프란시스쿠 다 코스타 고메스 참모총장을 초대 위원장으로 고려했으나, 결국 스피놀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세 가지 주요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 고메스 참모총장이 위원장직을 맡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둘째, 혁명 당일 스피놀라가 직접 카에타누 총리의 항복을 받아내며 자연스럽게 혁명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셋째, 군부 소장파는 이미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스피놀라를 혁명의 상징적 지도자로 내세움으로써 혁명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다. 특히, 스피놀라는 기니 총독 시절부터 강한 카리스마와 독특한 리더십을 보여주며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한 인물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스피놀라가 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은 혁명 직후 국민들의 큰 환호를 받았으며, 혁명의 성공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피놀라의 식민지 정책과 정치 체제 변화에 대한 입장은 군부 소장파와 상당한 차이를 보였으며, 이는 이후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2.4. 군정위원장에서 대통령으로
구국군정위원회 위원장이 된 스피놀라는 이스타두 노부 독재 체제의 해체를 주도하며, 정치범 석방과 언론 자유 보장 등 초기 개혁 조치를 시행했다. 이후, 혁명 직후 제정된 신헌법(Lei Constitucional n.º 1/74)을 바탕으로 과도정부가 운영되었으며, 구국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스피놀라는 1974년 5월 15일 포르투갈의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대통령에 취임한 뒤 민주정부로의 정권 이양을 목표로 삼고, 자유주의 성향의 법조인 아델리누 다 팔마 카를루스를 총리로 임명하여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팔마 카를루스는 대통령 중심 체제를 강화하고 선거를 연기하려 했으며, 이는 혁명 세력 내 좌익과 MFA(무장군 운동) 소장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군부 소장파가 신속한 민주 개혁과 식민지 독립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반면, 스피놀라와 팔마 카를루스는 보다 점진적인 변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1974년 7월 8일 열린 구국군정위원회 회의에서 팔마 카를루스 총리가 제안한 대통령 권한 강화 및 선거 연기안이 만장일치로 부결되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팔마 카를루스가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팔마 카를루스 총리의 사임은 스피놀라에게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혔으며, 이는 군부 소장파와의 갈등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혁명 세력 내 급진 좌파가 부상하면서 스피놀라는 점차 정치적 입지를 잃어갔다.
이후 군부 및 임시 정부 내에서 좌익 세력이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1974년 9월 28일 대규모 반혁명 시위를 조직하려 했다.(9월 28일 위기, Crise de 28 de Setembro) 이를 통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 내 보수 세력과 연대하여 정국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는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이는 심각한 오판이었다.
군부 소장파인 MFA는 사전에 이를 감지하고 시위를 무력화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스피놀라의 정치적 입지는 완전히 무너졌다. MFA는 경찰을 동원해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과 반혁명 인사들을 체포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피놀라는 1974년 9월 30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불과 취임 4개월 15일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이는 포르투갈 역사상 최단기 재임 기록이다.
2.5. 혁명 영웅에서 반역자가 되다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난 것으로 보였던 스피놀라 전 대통령은 반격을 시도했다. 특히 포르투갈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지고, 군부 소장파에 의해 식민지 독립이 성급하고 졸속으로 진행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수부대와 일부 보수 성향 군 장교들의 지원을 받아 1975년 3월 11일, 쿠데타를 감행하며 구국군정의 지원 아래 수립된 임시정부와 구국군정을 장악한 군부 소장파들을 축출하려 시도했다.쿠데타군은 정부 청사와 주요 군사 시설을 장악하려 했으나, 혁명 세력과 군부 소장파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병사 1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구국군정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프랑코 정권이 아직 집권하고 있던 스페인으로 도주하였다가 브라질로 망명하며, 사실상 포르투갈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망명 후에도 유럽과 브라질을 오가며 반혁명 활동을 계속 모색했는데 같은해 5월에는 아예 반정부 단체인 MDLP(포르투갈 해방을 위한 민주운동, Movimento Democrático de Libertação de Portugal)를 창설했다. 카네이션 혁명의 영웅이 혁명 정부의 반역자가 된 셈인데 MDLP는 폭탄 테러와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국제사회의 압박과 내부 분열로 인해 점점 약화되었고, 스피놀라는 오히려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망명 생활을 이어가던 1976년 3월, 스피놀라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또 다른 쿠데타를 모의했다. 독일 기사련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연계된 독일 극우 세력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 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독일 기자 귄터 발라프(Günter Wallraff)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발라프는 신분을 숨긴 채 스피놀라에게 접근하여 그가 포르투갈에서 쿠데타를 준비 중이며, 독일에서 무기를 구매하려 한다는 사실을 캐내고 이를 폭로했다.
결국 이로 인해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추방당하며 브라질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는데, 스피놀라로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브라질이 군부독재 중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귄터 발라프는 이때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스피놀라의 쿠데타 계획과 반혁명 활동에 대한 구체적 증거를 촘촘히 담은 르포를 발간했고 스피놀라와 연계된 여러 인물들이 연쇄적으로 체포되었으며, 스피놀라의 마지막 쿠데타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2.6. 용서와 귀환
1975년 11월 25일 군부 내 우익과 온건파가 공산당 지지 성향의 급진좌파의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면서 권력 균형이 크게 흔들렸고 급진파 군부 장교들이 체포되거나 숙청되면서 공산당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덕분에 사회당과 사회민주당 등 온건좌파가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되는데, 덕분에 스피놀라 역시 포르투갈로의 귀환을 꿈꿀 수 있게 됐다.귀환은 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 대통령과 사회당 소속 마리우 소아르스 총리와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스피놀라는 1976년 8월 협상 결과에 따라 MDLP를 해산하고 포르투갈에 귀국할 수 있었다.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공공안전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카시아스 요새(Forte de Caxias)로 이송되었다. 당시 MDLP와의 연관성을 조사하기 위한 심문을 받았으나, 48시간 후 "범죄 혐의 없음"으로 석방되었다.
이에 대해 여러 노동조합과 정치단체, 정당에서 반발해 시위를 벌였지만 힘겹게 안착시킨 민주정치 체제 안정을 위해 과거 혁명 세력과 보수 세력 간의 화해를 추진하는 기조에 힘입어[1] 이미 돌아온 전직 대통령은 추방되지 않았고 1978년, 예비역 신분으로 포르투갈군에 복귀했다.
이후에는 비교적 조용히 살았는데 1981년 12월, 구국군정위원회의 후신인 혁명위원회(Conselho da Revolução)의 결정에 따라 원수 계급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당시 원수의 상징인 지휘봉 수여를 거부했으며, 1991년에야 마리우 소아르스 대통령이 이를 다시 제안하자 지휘봉 수여를 받아들였다.
여생을 보내던 스피놀라는 1996년 8월 13일, 리스본 아주다 지역의 벨렝 군사병원에서 폐색전증으로 인하여 86세의 나이로 수개월간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리스본의 에스트렐라 대성당에서 군사적 예우 속에 거행되었으며, 포르투갈령 기니 총독을 지내던 시절의 명성 때문인지 기니비사우 대통령인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가 참석하기도 했다. 현재는 상조앙 국립묘지(Cemitério do Alto de São João)의 원수 묘소에 안장되어 있다.
[1] 실제로 MDLP 조직 및 활동에 대해서 처벌받은 사례는 없었고, 실제 테러행위를 일으켜 유죄를 받은 경우에도 1991년 소아르스 대통령이 사면까지 단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