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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영국 에드워드 7세의 왕비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sesse Alexandra til Danmark | ||
이름 | 덴마크어 | 알렉산드라 카롤리네 마리 샤를로테 루이세 율리아 (Alexandra Caroline Marie Charlotte Louise Julia) |
영어 | 알렉산드라 캐롤라인 마리 샬럿 루이즈 줄리아 (Alexandra Caroline Marie Charlotte Louise Julia) | |
출생 | 1844년 12월 1일 | |
덴마크 코펜하겐 옐로우 팰리스 | ||
사망 | 1925년 11월 20일 (향년 80세) | |
영국 노퍽주 샌드링엄 하우스 | ||
장례식 | 1925년 11월 28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
배우자 | 에드워드 7세 (1863년 결혼 / 1910년 사망) | |
자녀 | 장남 앨버트 빅터, 차남 조지 5세, 장녀 루이즈, 차녀 빅토리아, 3녀 모드, 3남 알렉산더 존[1] | |
아버지 | 크리스티안 9세 | |
어머니 | 헤센카셀의 루이제 | |
형제 | 오빠 프레데리크 8세, 첫째 남동생 요르요스 1세, 첫째 여동생 다우마, 둘째 여동생 티라, 막내 남동생 발데마르 | |
종교 |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2] | |
서명 |
공식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왕비. 크리스티안 9세와 헤센카셀의 루이제의 3남 3녀 중 둘째이자 장녀로 프레데리크 8세의 동생이다.2. 작위
문장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저하 Her Highness Princess Alexandra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1844년 12월 1일 – 1853년 7월 31일)
-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저하 Hendes Højhed Prinsesse Alexandra til Danmark (1853년 7월 31일 – 1858년 12월 21일)
-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전하 Hendes Kongelige Højhed Prinsesse Alexandra til Danmark (1858년 12월 21일 – 1863년 3월 10일)
- 웨일스 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1863년 3월 10일 – 1901년 1월 22일)
-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1901년 1월 22일 – 1910년 5월 6일)
- 알렉산드라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Queen Alexandra (1910년 5월 6일 - 1925년 11월 20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1844년 12월 1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크리스티안 공자와 헤센카셀의 루이제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태어나기 4개월 전 출산 중에 요절한 첫 외숙모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의 이름에서 따와 "알렉산드라"로 지어졌다.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가와는 먼 친척이었기 때문에[3] 어린 시절은 평범하게 자랐고, 때때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집에 방문해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다.
크리스티안 9세 일가, 1862년.
그러던 중 1848년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8세가 사망하고 프레데리크 7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프레데리크 7세가 아이를 낳지 못해 차기 왕위를 이을 사람이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아 알렉산드라의 가족은 가난
3.2. 결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공은 그들의 장남이자 차기 왕위 계승자인 앨버트 왕세자의 신붓감을 고르고 있었다.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추천으로 받은 후보 중 한 명이 바로 알렉산드라였는데, 맨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했으나 다른 후보들을 제외하고 나니 알렉산드라만 남았다고 한다.1861년 9월 24일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주선으로 앨버트 왕세자와 알렉산드라는 처음으로 만났다. 약 1년 뒤인 1862년 9월 9일 알렉산드라는 앨버트에게 청혼을 받고 영국의 왕세자비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1863년 3월 10일, 성 조지 성당에서 앨버트와 알렉산드라의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당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결혼식 행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앨버트 공의 애도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여성들은 모두 회색 계열의 옷을 입어야 했다. 결혼식을 올린 부부는 이튼 칼리지 학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이때 학생 중에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도 있었다고 한다.
3.3. 왕세자비
결혼한 바로 다음 해 아버지 크리스티안이 왕위에 오르고, 남동생 빌헬름은 그리스 왕국의 왕이 되었으며, 여동생 다우마는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황태자와 약혼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알렉산드라 본인 또한 첫 아이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앨버트 빅터 왕자를 출산하였는데, 본래 예정일보다 2달 일찍 나온 미숙아였다.[4] 이후 조지 왕자, 루이즈 공주, 빅토리아 공주, 모드 공주, 알렉산더 존 왕자를 낳았다. 아이들에게 냉담했던 빅토리아 여왕과는 달리 알렉산드라는 따뜻한 어머니였지만, 반복되는 출산으로 평생 류머티즘을 앓아야 했다.알렉산드라는 장남 부부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여왕에게 타고난 다정한 성격으로 다가갔다. 이 노력은 훗날 빅토리아가 조금이나마 마음을 여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알렉산드라의 결혼 생활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였지만 앨버트는 아내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고, 1871년에 장티푸스[5]에 걸릴 때까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특히 앨버트는 정부도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결국 정부 앨리스 케펠[6]이 남편의 곁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반면에 알렉산드라는 아내의 역할에 끝까지 충실했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유전성 귀 경화증으로 인해 귀가 점점 들리지 않아 사교계에서도 고립되었고, 아이들, 반려동물과 궁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게다가 마지막 아이 알렉산더 존 왕자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사망하여 슬픔은 더욱 컸다. 조용히 장례식을 치르고 싶어했던 알렉산드라와 달리, 빅토리아 여왕은 이 소식을 공식적으로 애도할 것으로 발표하였고, 이로 인해 언론에서는 동정심 없는 언론인들이 아기의 출생을 "비참한 낙태"로 묘사하고 장례 절차를 "역겨운 미라"라고 묘사했다.
설상가상으로 1892년 장남 앨버트 빅터 왕세손이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자녀들에게 애정이 많았던 알렉산드라는 막내에 이어 장남까지 사망한 것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아들 앨버트의 방과 소유물은 1861년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이 사망한 후 방을 보존해 뒀던 것처럼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때, 알렉산드라는 아이들과 나눴던 편지에서 "나는 나의 천사와 나의 행복을 그와 함께 묻었다."고 말했다고 하니, 그녀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3.4. 왕비
1908년, 왕비 시절의 알렉산드라.
1901년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여 남편 앨버트 왕세자가 에드워드 7세로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알렉산드라도 왕비가 되었다. 본래 대관식은 1902년 6월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에드워드 7세가 갑자기 아픈 바람에[7] 8월에 거행하였다. 하지만 이미 남편 에드워드 7세와의 관계는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에드워드 7세가 정부와 뜰을 산책하고 있는 모습을 본 알렉산드라가 "돼지 한 쌍이 뜰을 산책하고 있다."라며 경멸조로 말했을 정도다.
그리고 그녀는 독일인을 매우 불신했으며 독일의 확장이나 이익에 유리한 것은 무엇이든 항상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어린 시절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덴마크의 국운이 크게 기울었으며, 당시 독일이 호시탐탐 노리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자신의 친정인 덴마크 왕실의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예시로 1890년, 알렉산드라는 영국의 고위 장관들과 군인들에게 배포된 메모를 작성하여 독일의 헬골란트와 영국의 잔지바르[8]와 교환할 계획에 대해 경고하면서 전략적 중요성과 그것이 사용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교환을 진행하였다. 당시 독일의 언론은 알렉산드라와 여동생인 다우마를 비난하면서 두 사람이 "국제적 반독일 음모의 중심"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라는 남편 에드워드 7세의 조카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9]를 멸시하고 불신하며 1900년 그를 "내적으로는 우리의 적"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라는 토론 중에 영국 서민원을 방문한 최초의 왕비였다. 1910년, 알렉산드라는 전례에서 크게 벗어나 영국 귀족원에서 법안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10]를 제거하기 위한 의회 법안이 논의되는 동안 2시간 동안 방이 내려다보이는 여성회관에 앉아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알렉산드라는 이 법안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06년에 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가 사망하였고, 1910년 남동생 요르요스 1세를 만나기 위해 그리스 왕국을 방문하던 중 남편 에드워드 7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렉산드라는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기 하루 전에 영국에 도착하였고, 마지막 몇 시간 동안 그녀는 에드워드 7세가 숨을 쉴 수 있도록 가스 실린더에서 직접 산소를 공급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7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알렉산드라는 남편이 사망한 후 "돌이 된 듯 울 수도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3.5. 왕대비
차남 조지 5세가 즉위한 후 왕대비가 되었다. 선왕과 왕대비가 대관식에 참석하면 안 된다는 관례에 따라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거처도 버킹엄 궁전에서 말보로 하우스로 옮겼다.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조카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전원 총살 당하였다. 1919년 여동생 다우마는 언니의 설득으로 딸들과 함께 영국에 망명하여 알렉산드라와 같이 지냈지만 곧 덴마크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냈다.[11][12] 그리고 며느리 메리 왕비가 간질병으로 죽은 막내손자 존 왕자를 괴롭게 그리워하자 자신도 그런 며느리를 안타까워했는지 자신도 마찬가지로 48년 전인 1871년, 자신의 요절한 막내아들인 알렉산더 존 왕자가 태어나고 하루 만에 사망한 것을 회상하고 같이 슬퍼했다.[13]
말년 |
그렇지만 1923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손자인 요크 공작 앨버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매우 행복했다고 한다.
1925년 11월 20일, 80살의 나이에 요양을 하던 노퍽의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후 장례식이 치러졌고 유해는 세인트 조지 성당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14]
4. 어마무시한 가족들
알렉산드라의 어머니인 루이세 왕비는 자녀들의 좋은 혼처를 맺어주려고 노력했다. 그중에서도 결정적으로 알렉산드라가 당시 최강대국이였던 대영제국의 왕비가 되면서, 남매들의 혼삿길에 도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명예를 드높였다. 알렉산드라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과 오빠 프레데리크는 대를 이어 덴마크의 국왕이 되었는데, 이중 오빠 프레데리크는 스웨덴의 칼 15세의 외동딸 로비사 공주와 결혼해 그의 후손들이 덴마크의 왕위 및 노르웨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남동생 빌헬름은 그리스 왕국의 국왕이 되어 러시아 니콜라이 1세의 손녀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과 결혼했다. 큰 여동생 다우마는 알렉산드르 3세와 결혼하여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고, 막내 여동생 티라는 하노버의 왕세자비가 되었다.알렉산드라의 차남 조지 5세는 영국의 국왕이 되었고, 막내딸 모드는 노르웨이의 왕비가 되었다. 오빠 프레데리크의 아들인 크리스티안[15]과 칼[16] 또한 각각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었다. 알렉산드라의 큰 남동생 빌헬름에게도 5남 3녀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중 장남 콘스탄티노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리스의 국왕이 되었고, 3남 니콜라오스의 막내딸은 영국의 왕자비[17]가 되었으며, 4남 안드레아스의 고명아들은 증손녀이자 영국 여왕의 국서(증손녀 사위)가 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알렉산드라의 시조카들 중 하나인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18]와 결혼해 3남 3녀를 낳았다.[19] 큰 여동생 다우마의 장남 니콜라이 2세는[20] 러시아의 차르로 즉위했지만 실정을 거듭한 끝에,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퇴위하여 유배를 떠난 뒤 볼셰비키에게 일가족 모두 총살당했다.
또 다른 조카들 중에 하나인 잉에보르 공주[21]는 스웨덴의 왕자비가 되어 딸 셋을 낳았는데 둘째딸은 노르웨이의 왕세자비[22], 막내딸은 벨기에의 왕비[23]가 되었다.
알렉산드라의 친손자들인 에드워드와 앨버트는 영국의 국왕이 되었고, 외손자 알렉산데르는 올라프로 개명한 뒤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었다. 그 중에서 알렉산드라의 둘째 손자 앨버트의 큰딸은 2022년까지 영국의 국왕으로 재위했으며, 알렉산데르의 외아들도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현재까지 재위하고 있다.
이런 어마무시한 가족관계 덕분에 알렉산드라 본인의 자식들과 조카들, 친손자, 외손자들이 유럽의 국왕과 왕비가 되었다.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ederick William,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베크 공작 프리드리히 카를 루트비히 (Frederick Charles Louis,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Beck) | |||
쇨리벤의 프리데리케 여백작 (Countess Friederike of Schlieben) | |||
헤센카셀의 루이제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Louise Caroline of Hesse-Kassel) | |||
헤센카셀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Kassel) | |||
덴마크의 루이세 공주 (Princess Louise of Denmark)[24] | |||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 |||
헤센카셀의 빌헬름 공자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 |||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공자 (Prince Frederick of Hesse-Kassel)[25] | |||
나사우우징엔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Nassau-Usingen) | |||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 | |||
덴마크의 왕세자 프레데리크 (Frederick, Hereditary Prince of Denmark)[26]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조피 프리데리케 여공작 (Duchess Sophie Frederica of Mecklenburg-Schwerin) |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Prince Albert Victor, Duke of Clarence and Avondale) | 1864년 1월 8일 | 1892년 1월 14일 | |
2남 | 조지 5세 (George V) | 1865년 6월 3일 | 1936년 1월 20일 | 테크의 메리 슬하 5남 1녀[27] |
1녀 |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 (Louise, Princess Royal) | 1867년 2월 20일 | 1931년 1월 4일 |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더프 슬하 1남 2녀 |
2녀 | 빅토리아 공주 (Princess Victoria) | 1868년 7월 6일 | 1935년 12월 3일 | |
3녀 | 노르웨이의 왕비 모드 (Maud, Queen of Norway) | 1869년 11월 26일 | 1938년 11월 20일 | 노르웨이의 호콘 7세 슬하 1남[28] |
3남 | 웨일스의 알렉산더 존 공자 (Prince Alexander John of Wales) | 1871년 4월 6일 | 1871년 4월 7일 |
6. 여담
- 평생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였고 신앙심이 깊었다.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너무 과로하지 않도록 일을 분담하며 옆에서 많이 도와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항상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대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깐깐한 빅토리아 여왕을 많이 도와주며 집안 일의 갈등을 중재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깐깐한 성격을 가진 빅토리아 여왕도 큰 며느리인 알렉산드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9]
-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이자 본인의 막내 시누이인 베아트리스 공주의 결혼을 허락하게 힘을 써준 인물이다. 결혼 문제로 인해 베아트리스 공주와 빅토리아 여왕과의 모녀 관계가 냉랭해졌는데, 이때 알렉산드라는 여왕에게 "아들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덕분에 빅토리아 여왕은 베아트리스 공주의 결혼을 허락했다.
- 세계에서 가장 큰 나비인 알렉산드라비단제비나비에 이름을 남겼다.
-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아 가족 식사시간에 늦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남편 에드워드 7세도 처음에는 알렉산드라에게 지각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그래도 지각을 하는 일이 반복되자 결국 "왕비를 위한 시간대를 만들어라"고 해버렸다. 그리하여 영국 표준시보다 30분 빠른 샌드링엄 시간대가 만들어졌으며, 왕실 거주지인 샌드링엄 하우스와 밸모럴 성은 30분 빠른 샌드링엄 시간대를 표준시로 사용했다.[30] 이러한 샌드링엄 시간대는 1936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가 손자 에드워드 8세가 즉위한 후 폐지되었다.
[1] 막내 아들 존이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2] 결혼하기 전 루터교회 신자였으나 결혼으로 인해 성공회로 교단을 옮겼다.[3] 크리스티안 9세와 헤센카셀의 루이세의 증조부가 프레데리크 5세였다.[4] 다만 아이들 6명 모두를 미숙아로 출산한 것을 보면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출산하는 것을 못 보게 하려고 일부러 날짜를 속였다는 이야기도 있다.[5] 아버지 앨버트 공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병이다.[6]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증조할머니이다. 조상과 후손이 쌍으로 웨일스 공과 불륜을(...)[7] 에드워드 7세는 담배를 워낙 좋아하는 골초였고 즉위하던 당시의 나이도 노년에 가까운 60세였기에 건강이 안 좋았다.[8] 영국의 보호령이었다.[9] 에드워드 7세의 누나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아들. 정작 알렉산드라는 빅토리아의 추천으로 에드워드 7세와 결혼할 수 있었지만 빌헬름 2세는 외삼촌인 에드워드 7세를 "사탄"이라 부르며 싫어했으니 알렉산드라가 빅토리아에게는 고마워할지 몰라도 시조카인 빌헬름 2세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10] 서민원이 귀족원의 법안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11] 영국에서는 알렉산드라가 왕비이다 보니 자신이 등한시되는 기분이 들어 덴마크로 갔다고 한다.[12] 이 때 마리아는 조카인 조지 5세를 보고서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두 사람이 워낙에 쌍둥이처럼 닮았다 보니 벌어진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13] 그리고 둘이 같이 묘지에 묻혔을 때 그들의 사랑하는 두 조니(존의 애칭)가 나란히 누워있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는 영국 왕실에서 존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방계라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존 왕 때문에 장자에게는 존이라는 이름을 안 쓰다가도 왕위와 거리가 먼 왕자들에게는 잘만 썼었다.[14] 6개월 정도 더 살아있었다면 친증손녀의 탄생을 볼 수 있었다.[15] 덴마크의 현 국왕 마르그레테 2세의 할아버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여공작와 결혼하여 슬하에 프레데리크 9세와 크누드 왕자를 두었다.[16] 자신의 친정 조카이자 막내 사위이다.[17] 손자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아내이다.[18] 큰 시누이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3녀.[19] 콘스탄티노스-조피 부부의 아들들인 요르요스, 알렉산드로스, 파블로스 모두 그리스 국왕이 되었고, 장녀인 엘레니는 루마니아의 왕대비가 되었다.[20] 조카 니콜라이 2세의 아내 또한 시조카인 헤센의 알릭스 공녀(둘째 시누이 앨리스 공주의 4녀)였다.[21] 오빠 프레데리크의 둘째딸이자 크리스티안과 칼의 둘째 여동생[22] 외손자인 올라프 5세의 아내이다. 덴마크 왕실 기준으로 4촌, 스웨덴 왕실 기준으로 7촌이다.[23] 레오폴드 3세의 왕비. 룩셈부르크의 앙리 대공의 외할머니이자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의 할머니다.[24] 프레데리크 5세와 영국의 루이자 공주의 3녀.[25] 조지 2세의 외손자(4녀 헤센카셀 방백비 메리의 아들)이다.[26] 프레데리크 5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율리아네 마리의 아들.[27]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프린세스 로열 메리,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켄트 공작 조지 왕자, 존 왕자 등.[28] 올라프 5세[29] 반면 알렉산드라의 아랫 동서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작은 며느리인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빅토리아 여왕과 알렉산드라하고 서로 사이가 별로였다. 마리야는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였지만 언니가 요절했기에 사실상 알렉산드르의 고명딸로 러시아 황제의 여대공이라는 신분에 큰 자부심을 느껴서, 엄연히 자신보다 영국 왕실 내 서열이 높은 알렉산드라를 덴마크의 공주라는 이유로 대놓고 무시했고 그 모습에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마저 마리야를 안좋게 보았다.[30] 덕분에 에드워드 7세는 30분 더 사냥을 할수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