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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Yalu Fließt[1]
1. 개요
1946년 독일에서 발표된 한국 소설. 작가는 이미륵[2]이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 평화로웠던 어린시절부터, 신식 교육을 받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며 독일에 도착하게 되기까지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한국인이 한국의 모습과 정서를 그려낸 작품이지만 한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쓰였다는 것이 쟁점이 되어 과연 이것을 한국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국 문학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일단 분류상으로는 독문학에 해당한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작품 내용보다는 한국 문학의 범위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짤막하게 등장하곤 하기에 시험공부에서 중요도가 낮은 편인 것으로 취급된다.
2. 줄거리
주인공 '미륵'은 사촌형 '수암'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뒤 수암은 다른 동네에서 한학을 배우게 되지만 미륵은 아버지에게서 동양적 교양을 갖추며 자라난다.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만 해도 서당을 운영하는 전형적인 한학자였지만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어 아들 미륵을 신식 학교에 진학시킨다. 미륵은 그 낯선 학문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아버지를 위해 신식 학교에서의 수업을 꾸준히 이수하고 다양한 신문물을 접하며 개화의 필요성을 깨달아 간다.
그 즈음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미륵의 아버지는 사망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은 일본어로 새로 배워야 하게 되었고, 조선의 독립성은 교과서에서 부정되고 왜곡된다. 미륵은 신식 학문을 그만두고 시골로 들어가 쉬게 되지만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겠다고 가출을 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미륵에게 학교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고, 마침내 서울의 의학전문학교에 합격한다.[3]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낙향한 미륵은 어머니의 권유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향하고 선양, 난징, 상하이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된다. 배는 콜롬보, 지부티, 수에즈 운하를 거쳐 마르세유에 입항한다. 마침내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도착하여 서서히 독일에 적응해 가던 중, 어머니의 부고를 전해 들으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3. 작가와의 관련
작품에 실린 이야기는 대체로 작가 본인의 삶과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 이미륵(1899~1950)은 1899년생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다. 신식 중학교에 잠시 다니며 얻은 강의록으로 독학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3.1운동에서 그는 반일 전단을 인쇄하여 유포하는 일을 맡았다고 하며, 이로 인해 탄압이 심해지자 유럽으로 망명을 떠난 점까지 이 작품에서 언급된 내용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 이쯤 되면 자전적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서전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이후의 이야기는 후일담격인 속편에 이어진다. 이 속편은 1950년 작가가 사망한 후 유실되었다가[4] 일부가 나중에 발견되어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Vom Yalu bis zur Isar)[5]라는 이름으로 1974년 복간되었지만 별 내용은 없고 유럽에서 공부하고 요양하고 여행한 이야기다.
4. 문학적 가치
대체로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문명을 결합한 자연인을 추구한, 작가를 비롯한 당대 지식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많다. 한국인이 한국적 정서를 담아 쓴 소설이지만 독일에서 독일어로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 문학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논란의 대표격이 된 작품이다.결과적으로 교과서에서는 '한국인이 한국적 정서를 담아 쓴 소설이므로 한국문학으로 볼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학계에서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떡밥이기 때문에 수능이나 각종 시험에 나올 확률은 0에 수렴한다. 한 때 2018학년도 수능특강에 나온 적이 있었으나, 결국 수능에 출제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험 출제 가능성과 별개로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전후의 모습을 개인적 관점에서 섬세하게 그려내었고, 독일에 당시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아주 상세하게 소개한 작품이기도 하다.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대원 어머니'[6]와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풍습까지 담았거와 윤리관, 문화풍습, 소작제도의 일면까지 두루 담겨 역사적으로도 눈여겨볼 만하다. 번역본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독일어로는 문체가 아주 유려하기에 최우수 독문소설로 선정되어 초판이 매진되었고 독일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5. TV 드라마화
한-독 수교 125주년 및 SBS 창사 18주년을 맞아 창사특집 드라마 3부작으로 방영한 적이 있다. SBS와 ARD 계열 독일 방송국인 BR[7]이 공동 기획하여 스타맥스에 외주제작을 맡겼다. 주연은 우벽송, 극본 이혜선, 연출 이종한. 제작발표회 기사보기
한국에서는 2008년 11월 14일 SBS를 통해 방영되었으며, 주연배우들의 호연과 창사특집극다운 아름다운 영상미 덕분에 평단과 시청자들로부터 동시에 큰 호응을 받았던 작품이다. 특히 시청률 면에서 선전했는데, 단발성 특집드라마임에도 2부가 9.6%를 기록하였으며, 이는 당시 동일시간대 인기프로이던 있다?없다!(10.9%), 웃찾사(7.9%)나 절친노트(10.1%)와 같은 간판 예능의 시청률 수치에 근접한다.
후일 재편집되어 영화로도 상영[8]되었고, 2010년에는 한국 드라마 최초로 ARD를 통해 독일 지상파 전파를 탔다. 이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최초로 한국 TV 드라마가 방영된 사례로 남았다. 기사
특이한 점으로는 주인공 이미륵 역의 배우를 유년기(정윤석), 소년기(노민우), 중년기(최성호), 노년기(우벽송)로 나누어 총 4명을 캐스팅했으며, 특히 장년~노년기의 이미륵을 맡은 우벽송의 연기가 주목받았다. 우벽송은 한국의 TV 배우가 아니라 독일에서 활동 중인 오페라 가수이며, 최성호 또한 사랑따윈 필요없어, 그놈 목소리 등에 출연했다가 독일에서 활동하는 배우. 이외에도 신구, 나문희 같은 중견 원로배우와 귀화 독일인 이한우(당시 이름) 등이 주조연으로 출연했으며, 정운택은 뜻깊은 작품임을 감안하여 노 개런티로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드라마 중반부에 개그맨 심현섭이 일본군 장교로 까메오 출연했는데, 개그맨으로 알려진 심현섭이 희극이 아닌 정극을 통해 진지한 연기로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2008년 당시 심현섭이 외주사인 스타맥스의 홍보이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홍보 차원에서 까메오 출연을 했다고 훗날 밝혔다.
6. 여담
- 작가 이미륵은 3.1운동 당시 탑골공원에서 반일 전단을 뿌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를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 표창(후에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변경)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이름이 본명인 이의경으로 되어 있어, 작가 이미륵과 동일인이라는 점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훈장 전달은 2007년에야 이루어졌다고 한다. 슬하 1남1녀를 두었으나 자녀들은 모두 6.25 전후 사망하였고, 전달은 큰누나의 손자이자 조카손자인 이영래에게 전달되었다.
- 이미륵은 독일 유학 시절, 헝가리인 친구의 건의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열리는 국제 학생 회의에 참여한 적이 있다. 뮌헨 대학교 외국인 학생 대표 자격으로 갔는데, 도나우 강을 따라 내려가던 도중에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에서 마자르족의 기원에 대해 논의하다 범투란주의에도 관심을 가진 모양. 당시 우랄 알타이어족 이론이 각광받고 있을 때였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한국인과 헝가리인은 같은 조상에서 갈라진 친척이다. 이미륵은 이 '친척' 민족에게 많은 호기심을 보였고, 이들과 헤어질 때는 헝가리의 번영을 기원했다고.
- 이미륵은 1928년 뮌헨 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땄고,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뮌헨 대학교에서 한국과 한국문학을 강연하면서 많은 동양학자를 길러 냈다. 1950년 3월 20일, 서독 뮌헨 근교 그레펠핑(Gräfelfing)에서 사망했으며 묘지 또한 그레펠핑에 있다.
- 독일에서 이미륵이 내거나 기고한 글은 이 '압록강은 흐른다'뿐만이 아니다. 1931년 그는 디어 다메(Die Dame) 지에 한국을 배경으로 한 미담인 '하늘의 천사[9]'를, 1933년에는 문예지 오스트아지아티셰 룬트샤우(Ostasiatische Rundschau)에 제사 문화를 소개한 '한국인의 조상숭배[10]'를, 동년 12월에는 미상의 신문에 한국의 종교문화에 대한 '한국의 종교[11]'를 기고했다. 1934년에는 일제의 한국 지배를 비판한 논평인 '한국과 한국인[12]'를 신문 함부르거 타게블라트(Hamburger Tageblatt)에 실었고, 1935년과 1942년에는 문예지 아틀란티스(Atlantis)에 압록강은 흐른다의 전반부와 거의 유사한 '수암과 미륵[13]', '한 한국인의 어린 시절[14]'을 각각 실었다. 다만 각주에 전술되어 있듯 더 많은 글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대부분은 이미륵이 죽기 전 태워버려서 남아있지 않다.
- 이미륵을 독일로 보내 준 사람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봉근이다. 당시 베를린 칸트슈트라세 122번지에 거주하며 두부공장을 운영하던 그는 같은 도로변 132번지에서 이미륵과 이극로[15]를 비롯한 독일 유학생들이 유덕고려학우회를 결성하는 것을 지원했다고 여겨진다. 이 학우회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거나, 벨기에에서 열리는 소민족압박반대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 당시 이미륵과 많은 교류를 했던 쿠르트 후버 뮌헨 대학교 교수는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반 나치 활동 혐의로 처형된다. 이게 가장 유명한 반나치 저항 활동 중 하나인 백장미단 사건이다. 후버 교수는 숄 남매를 비롯한 비롯한 백장미단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이었고, 결국 악명 높은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인민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미륵은 후버 교수의 깊은 이해자였으면서도 그의 활동을 상당히 우려스럽게 바라본 모양이다. 결국 그가 처형당하자 이미륵은 이 시대의 가장 고귀한 사람을 잃었다며 탄식했다고. 사건 이후 후버 교수의 가족들은 연좌제와 감시에 시달리며 전시 배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었고, 알던 지인들은 연루될까 두려워 이들과 연락을 끊었다.[16] 이때 이미륵은 자기가 배급받은 물건을 그들에게도 나눠 주며 전쟁 끝까지 별 탈이 없도록 돌봐 주었다. 그는 후버 교수 외에도 다른 반나치 지식인들과도 교류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유명한 반나치 운동가이자 언어학자인 프란츠 티어펠더 교수로, 셋은 자주 모여서 나치를 비판하곤 했다. 이렇듯 이미륵은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양쪽의 지배를 모두 겪으면서도 그에 모두 반대했던 몇 없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17]이로 인해 지난 2019년, 뮌헨에 후버 교수의 이름을 딴 쿠르트 후버 거리에 이미륵의 기념 동판이 새겨졌다. 바로 옆에는 후버 교수의 동판이 자리한다. 동판에는 이미록이 생전에 자주 하던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1] 인터넷에서 원어를 찾아보면 Der Yalu Fliesst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ß 문서 참조.[2] 본명은 이의경. 독일 현지에서는 Mirok Li라고 썼다.[3] 그 당시에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의 전신 중 하나로,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통합돼 지금의 서울대 의대가 되었다.)의 입학 경쟁률은 최대 30:1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경쟁률이다. 출처 위키백과[4] 이미륵이 죽기 전에 자신이 쓴 문학 작품 원고 대부분을 태워버렸다고 한다.[5] 직역하자면 압록강에서부터 이자르 강 까지. 참고로 이자르 강은 뮌헨 근처를 흐르는 강이다.[6]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야 할 정도로 아들이 급한 집에서 유교적 전통 때문에 절에 직접 갈 수 없는 경우 대신 빌어 아들을 얻게 해준 사람이다. 작중에서는 대원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했다고 언급되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명도엄마'라고 부르는데 현대 한국에서는 거의 잊힌 옛 풍속이다.[7] Bayerischer Rundfunk. 이름대로 바이에른 주를 기반으로 하는 방송국이며, ARD 네트워크 가맹이다. ARD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단일네트워크 체제인 ZDF와 다르게 ARD는 일종의 지방 연합방송국 체제이다. 바이에른 방송 항목 참조.[8] 2009년 6월 2주간 상영[9] 원제는 Nachts in einer koreanischen Gasse(한국 길거리의 밤에)[10] Ahnenkult in Korea[11] Religionen in Korea[12] Korea und Koreaner[13] Suam und Mirok[14] Jugendrrinnerungen eines Koreaners[15] 조선어학회 사건의 핵심 인사.[16] 대표적인 사람이 후버 교수의 친구였던 작곡가 칼 오르프. 그는 게슈타포가 들이닥치기 직전에 후버 교수에게 우연히 연락했다. 이때 후버 교수의 부인이 그에게 나치 쪽에 어떻게 손을 좀 써 달라고 빌었지만, 그는 엮이기 싫어서 이를 거절했다. 결국 후버 교수는 처형당했고, 후버 부인은 그 이후로 오르프를 두 번 다시는 보지 않았다.[17] 일본에는 저항하면서도 나치는 좋게 바라보던 독립운동가들이 몇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과 초대 교육부(문교부) 장관 안호상. 두 명 다 이미륵처럼 30년대에 독일에 있으면서 히틀러 정권을 몸소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