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화재 이후 손상된 모습의 얀 헤벨리우시함.
1. 개요
1993년 1월 14일 새벽 5시경 시비노우이시치에-위스타드 노선을 담당하던 RORO(Roll on-Roll off)식 카 페리선인 얀 헤벨리우시(MS Jan Heweliusz)함이 약천후와 함체의 결함[1]으로 전복하여 침몰한 사고.이 사고로 승조원 29명과 승객 35명중 55명이 겨울 발트해의 차가운 수온[2]과 폭풍에 동사하거나 익사하고 승조원 9명만 이후 도착한 구조대에게 구출되어 독일로 후송되었다.
2. 사고 이전의 헤벨리우시함
얀 헤벨리우시함은 폴란드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헤벨리우스[3]의 이름을 따 1977년 건조된 RORO식 카 페리선으로 폴란드 대양 해운(Polish Ocean Lines)가 인수하여 유라프리카 해운(Eurafrica Shipping Lines)가 운영하던 정기 페리선이였다.1977년 진수된 이후로 총 30건의 사고[4]를 겪었지만 선사는 이를 신고하지 않고 은폐한 다음 배의 승조원들이 임시방편으로 수리하는 방식으로 땜빵을 하며 운영을 해왔다.
1986년에 발생한 화재 또한 신고되지 않은채로 화재로 불타버린 선체의 무게를 대신하기 위해 60톤의 콘크리트를 부어 수리했으며[5] 이로 인하여 배의 안정성이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무시당한채로 1993년 침몰 당시까지 정상적으로 운항을 이어나갔다.
3. 침몰
(침몰 당시 선장이였던 안제이 울라시에비치 (Andrzej Ułasiewicz), 최후까지 선교에 남아 구조방송을 방출하다 사망하였다.)
1993년 1월 13일 오후 10시 30분경에 시비노우이시치에에서 출항안 얀 헤벨리우시함은 29명의 승조원과 승객 35명[6]이 탑승하고 있었고 28대의 트럭과 10량의 철도차량을 운송하고 있었다.
당시 발트해에서는 강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7] 선장을 이예 배의 속도를 줄이고 좌현에서 몰아치던 강풍에 맞서기위해 좌현 밸러스트 탱크를 가득 채울것을 지시했다.
1월 14일 새벽 4시경 갑작스런 강풍이 좌현을 강타했고 이로인하여 헤벨리우시함은 좌현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울라시에비치 선장을 이예 뱃머리가 바람을 마주하도록 배을 조타할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한 배의 화물칸에 적재된 트럭들과 철도차량들의 고정이 풀려 좌현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침몰이 가속화 되었다.
4시 30분에는 함장이 퇴선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구명정을 내릴 준비를 시작했지만 강풍에 구명정이 날라가는등 악재가 겹처 비치된 수십개의 구명정중 단 몇개만 제대로 바다로 내릴수 있었다.
4시 40분이 되자 울라시에비치 함장은 메이데이 신호를 송출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근처에 있던 독일의 뤼겐 섬을 포함 폴란드, 덴마크 당국에서 수신하였으나 악천후로 인하여 구조대를 보내지 못하였다.
5시 12분경 헤벨리우시함은 완전히 전복하여 침몰하였다.
4. 구조작전
헤벨리우시함의 승조원들이 구조요청 당시에 정확한 위치를 전하지 않아[8]구조작업이 지연되었으며 첫 구조작업은 침몰 이후 1시간이 지나서야 게시되었다.거기에 더해 구조한답시고 도착한 헬기에서 내려온 로프가 끊어지는 바람에 어느 구명정을 뒤집혀 탑승 인원 전원이 사망[9], 독일 국적의 어선인 아르코나(Arcona)함은 탈출한 승객과 승조원들이 떠있던 바다에 무리하게 들어오다가 프로펠러로 갈아버리는등 구조작업이 상당부분 피해를 끼친 부분이 많았다.
위에 언급한 아르코나함은 이후에도 바다에 위에 떠있던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에서도 소극적으로 임했으며 구조작업을 펼친것이라곤 바다 위에 배 위로 끌어올릴수 있도록 밧줄만 내렸으며 당연히 거의 1시간동안 차가운 바다 위에 떠있던 생존자 대다수가 구명정 위에서 무리하게 밧줄을 잡고 올라가다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는등 극히 소수만 무사히 구조될수 있었다.
이외에도 동일한 노선을 운행하던 얀 스니아데키(MS Jan Śniadecki)함 포함 다수의 함정들이 도착했지만 구조된 9명을 제외 전원이 사망하였다.
결국 총 56명이 사망하였으며 9명만이 구조되어 독일을 거쳐 폴란드로 귀환할수 있었다.
구조 작업에 참가한 독일인들과 노르웨이인들 선원들에게는 폴란드 대통령 명의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5. 사고 수습과 조사
얀 헤벨리우시함은 이후 27m 해저에 침몰한 채로 남아있으며 울라시에비치 함장을 포함한 37구의 시체만 인양되었다.사고 이후 조사위원회는 처음에는 선장의 무리한 선박 운용으로 인한 침몰로 몰아갔지만 이에 반발한 유족들과 생존 승조원들의 노력으로 수년의 법적공방과 유럽인권재판소까지 간 재판 끝에 악천후에도 출항을 지시한 유라프리카 해운, 폭풍에도 불구하고 출항 허가를 내린 시비노우이시치에 해운관리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항을 지시한 울라시에비치 함장 셋에게 개별적인 책임소재가 있다고 판결했으며 유럽인권재판소에선 이전 재판들에서 선장에게만 책임을 문 폴란드 법원에게 패소판정을 내리며 유족과 생존자들에게 각 4,500 유로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6. 이후
얀 헤벨리우시함 침몰하고는 2차 대전 전후 평시에 일어난 폴란드의 해운사고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고로 기억되었으며 27m의 수심의 얕은 해역에 침몰한 관계로 에스토니아함과는 달리 수많은 다이버들이 침몰 지점을 방문중이다.침몰한 배에서 건저낸 일부 유실물들은 그단스크의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소장중이며 2013년에는 슈체친에 피해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7. 매체
폴란드에서 일어난 해운사고중 규모가 큰 사고이니 폴란드 내부에서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며 2025년에는 넷플릭스 드라마로 사고를 다룬 "헤벨리우스"가 공개되었다.[1] 아래 문단을 보면 알 수 있듯 지난 몇십년간 수십번의 충돌사고와 결함이 발견되었지만 선사에서 이를 은폐하고 제대로된 수리를 실시하지 않았다.[2] 당시 해역 수온은 영상 2도에 불과했다.[3] 폴란드어로는 얀 헤벨리우시.[4] 충각, 화재, 엔진 결함, 침수등 다양한 사고가 발생했다, 특히 1982년에는 거의 침몰할뻔 했으며 1986년에는 화재가 발생해서 상체 구조물이 전부 타버리는등 큰 사고가 여럿 발생했다.[5] 당연히 그때에도, 현재에도 정상적인 수리방법이 아니며 침몰 이후 조사에 이러한 편법적인 수리 방식이 침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명시했다.[6] 승조원은 전원 폴란드인였고 승객들 대다수는 스웨덴, 헝가리, 체코, 폴란드,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출신 트럭 운전사들이였지만 일부 가족단위 승객들도 탑승하고 있었다.[7] 보퍼트 풍력 계급으로는 12계급의 태풍급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당시 기록상으로는 초속 160km/h와 최대 5m의 파도가 기록되었다.[8] 유력한 이유로는 기울기가 너무 심해짐에 따라 자이로스코프를 포함한 함내의 항해기기들이 고장나는 바람에 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9] 당시 승조원들은 대부분 건식 잠수복의 일종인 일체형 구명복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구명정이 뒤집히자 안에 남아있던 인원들은 부력으로 인하여 탈출하지 못하고 익사하였으며 튕겨져 나온 일부는 수온에 동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