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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18:41:18

얀 1세 올브라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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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국왕
얀 1세 올브라흐트
Jan I Olbracht
파일:Johann_Albrecht_von_Polen.jpg
출생 1459년 12월 27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 1501년 6월 17일 (향년 41세)
폴란드 왕국 토룬
재위 폴란드 왕국의 왕
1492년 9월 23일 ~ 1501년 6월 17일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형제 울라슬로 2세, 야드비가, 카지미에시,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조피아, 엘즈비에타, 지그문트 1세, 프리데리크, 엘즈비에타, 안나, 바르바라, 엘즈비에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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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4대 국왕.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했던 부왕 카지미에시 4세와 달리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동생 알렉산데르에게 넘어갔다.

2. 생애

1459년 12월 27일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공작,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교황 바오로 2세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폴란드로 망명한 뒤 카지미에시 4세에 의해 가정교사로 기용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필리포 부오나코르시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라틴어에 통달했고, 부오나코르시와 친분을 두텁게 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474년부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아버지와 함께 전국 순회와 세임에 참여했다. 1486~1490년에 루테니아의 왕실 총독으로 부임해 오스만 제국크림 칸국의 침략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남동쪽 전선을 사수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487년 코피스트르진 전투에서 타타르군 5,000명을 상대로 맞붙어 1,500명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둬 명성을 드높였다.

1490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가 사망했다. 헝가리 의회는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를 왕으로 받들어달라는 마차시 1세의 유언을 묵살하고,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를 새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옹립했다. 하지만 카지미에시 4세는 모든 아들들에게 독립된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미 보헤미아 국왕인 장남 대신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1490년 9월 18일, 울라슬로 2세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에 얀 올브라흐트는 실력 행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에게르를 점령한 뒤 커셔를 포위했다. 올라슬로 2세는 마차시 1세의 전 왕비였던 베아트리체와 비밀 결혼을 한 뒤, 그녀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자금을 활용해 대규모 병력을 편성해 커셔를 구원했다. 얀 올브라흐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1491년 2월 20일 흘로호프[1] 공국과 슬레스코 절반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헝가리 왕위 주장을 취소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491년 중반에 울라슬로 2세가 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접하자, 그는 휴전 협약을 깨고 전쟁을 재개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이제 그만하고 폴란드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나 1492년 1월 에페리에시 전투에서 서포여이 이슈트반이 이끄는 헝가리군에게 패배했고, 얀은 에페리에시로 피신했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울라슬로 2세에게 넘겨졌다. 올라슬로 2세는 그를 따뜻하게 대해준 뒤 폴란드로 돌려보냈다. 이후 울라슬로 2세는 흘로호프를 그에게 양도했고, 그는 이것을 형제인 지그문트에게 넘겼다.

1492년 6월 7일,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가 사망했다. 이에 얀은 형제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세우고, 본인은 폴란드 왕위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후보로는 그 외에도 그의 두 형제인 울라슬로 2세, 지그문트, 그리고 마조프셰 공작 야노시 2세가 있었다. 일부 귀족은 리투아니아 대공 알렉산데르를 지원하려 했지만, 알렉산데르는 카지미에시 4세의 막내 아들인 프레데리크 야기엘론치크와 함께 얀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8월 27일 투표 결과, 얀이 거의 만장일치로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9월 23일 크라쿠프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 즈비그니에프 올레스니키[2]의 주관으로 폴란드 국왕 대관식을 치렀다.

1493년 1월, 2개의 방으로 구성된 세임이 피오트르쿠프에서 소집되었다. 지금까지는 비정기적으로 열리던 세임은 이때부터 피오트르쿠프에서 정기적으로 열렸고, 귀족 위주의 의회 제도가 이를 통해 확립되었다. 1496년, 얀 1세는 아버지 키지미에시 4세가 니에스와 법령을 통해 귀족들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확대하는 피오트르쿠프 법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농민은 한 주 안에서만 이주할 수 있으며, 마을 주민이 토지를 사사로이 구입하거나 공직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다. 또한 귀족 출신이 아닌 성직자는 교회의 고위 직책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귀족이 아닌 사람의 학술 의장직 권리도 제한되었다. 이후 귀족들은 확고부동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며 토지, 특권, 직위를 그들의 손에 집중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를 통해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다.

1494년, 얀 1세는 크라쿠프오시비엥침 사이에 위치한 자토르 공국을 80,000 헝가리 줄러에 구입해 폴란드 왕국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1495년 일전에 폴란드 국왕 선거에 출마했던 마조프셰 공작 야노시 2세가 후손을 두지 못하고 사망하자, 즉시 그가 다스리던 영역을 폴란드 왕국에 편입시켰다. 야노시 2세의 형제인 콘라트 3세는 이에 대응해 소규모 병력을 모아서 프워츠크를 점거했지만, 곧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깨닫고 1496년 피오트르쿠프로 가서 얀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얀 1세는 불복종 혐의를 적용해 콘라트 3세의 재산 대부분과 영지를 몰수했다.

얀 1세는 뒤이어 오스만 제국이 1484년에 공략한 흑해 항구 도시인 킬리아아케르만을 탈취해 폴란드 동부 무역을 활성화하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몰다비아 공국을 정복하여 동생 지그문트를 몰다비아 공작으로 세우고자 전쟁을 준비했다. 1497년, 얀 1세가 동원한 40,000명에 달하는 폴란드군이 몰다비아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인 수체아바를 포위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다 전염병마저 창궐하자 별 수 없이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러던 1497년 10월 26일, 슈테판 3세가 휴전을 깨고 철수 중이던 폴란드군을 부코비나 인근 코즈민 숲에서 급습했다. 18,000명의 몰도바인과 10,000명의 튀르크, 왈라키아, 타타르인들의 급습을 받은 폴란드군은 5,000명의 기사 및 민병대가 사살되고 6,000대 이상의 마차가 탈취당하는 큰 타격을 입고 패퇴했다.

몰다비아 원정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뒤, 주변 국가들이 이 기회를 노려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1498년, 오스만 제국 실리스트레 에얄레트의 파샤 발리 베이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몰다비아 군대의 지원을 받으며 드네스트르강을 건너 루테니아로 쳐들어가서 그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사노크, 프셰보르스크에 입성한 뒤 100,000명에 달하는 주민을 본국으로 끌고 가서 노예로 팔았다. 그 해 여름엔 크림 칸국 소속 타타르인들이 포돌레와 볼린을 공략해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챙기고 돌아갔다. 그해 가을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삼보르까지 쳐들어가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얀 1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1499년 4월 15일에 슈테판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한편,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이반 3세는 카지미에시 4세가 사망한 직후인 1492년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가 이끄는 모스크바군은 루부츠크, 므첸스크, 츨레피엔, 로하체프를 점령하고 뱌지마를 위협했다. 여기에 세르페이스크 공작과 메시초프스크 공작은 리투아니아 대공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자기들의 영지를 모스크바에 넘겼다. 그해 겨울 리투아니아군이 반격에 착수해 세르페이스크와 메시초프스크를 탈환했지만, 1493년 1월 모스크바 원정대가 뱌지마를 공략하고 스몰렌스크를 위협했다. 1494년 양자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수년간 잠잠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은 폴란드가 코즈민 전투에서 완패한 뒤 위축된 모습을 보이자 1500년 5월 병력을 세 부대로 나눈 뒤 토로페츠, 스몰렌스크, 브랸스크를 향해 진격했다.

야쿠브 자카리치가 이끄는 모스크바 별동대는 브랸스크를 점령하고 총독 스타니스와프 바르토스제비츠를 비롯한 포로들을 끌고 갔으며, 뒤이어 므첸스크, 트루브체프스크, 스타로두브,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푸티울, 릴스크, 호멜, 루베츠를 점령했다. 또한 다닐 바실리예비치 셰냐가 이끄는 모스크바군 20,000명은 도로고부즈를 점령하고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리투아니아의 대 헤트만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가 스몰렌스크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지만, 1500년 7월 14일 비드로자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모스크바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스몰렌스크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한편, 안드레이 표도로 비치 첼라드닌이 이끄는 세번째 모스크바 분견대는 토로페츠를 점령한 뒤 북부 리투아니아 국경지대를 유린한 뒤 리투아니아군이 반격에 착수하기 전에 물러났다. 여기에 멩글리 1세 가라이가 이끄는 크림 타타르군은 모스크바군과 협력해 키예프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리투아니아 대공 알렉산데르는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지에서 대규모 용병을 모집해 반격에 착수하려 했다. 그러면서 형 얀 1세에게도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코즈민에서 완패한 뒤 폴란드군 전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전쟁을 벌일 엄두가 안 났던 얀 1세는 올라슬로 2세와 함께 모스크바에 사절단을 보내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이반 3세가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리투아니아는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10년 동맹을 맺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동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이 무렵, 1466년 토룬 협약 이후 폴란드의 봉신이 되었던 튜튼 기사단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1498년 새로운 기사단장이 된 프리드리히 폰 작센[3]은 토룬 협약에 따라 폴란드 국왕에게 충성할 것을 거부했다. 1499년에는 세임에 참여해달라는 얀 1세의 요청에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막시밀리안 1세는 토룬 협약은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 모두 승인하지 않았으니 무효이며, 프리드리히가 폴란드를 돕는 건 용인할 수 있지만, 폴란드 왕에 대한 맹렬한 충성 맹세는 삼가고 대신 "우호적인 이웃"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튜튼 기사단의 복종 거부와 막시밀리안 1세의 선언에 분노한 얀 1세는 1501년 전국에 소집령을 내린 뒤 토룬으로 가서 프리드리히에게 당장 와서 충성하지 않는다면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보냈고, 얀 1세의 처남 작센 공작 게오르크와 여동생 바르바라 야기엘론카는 마이센 주교에게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간의 중재를 맡겼다. 그러던 1501년 6월 17일, 얀 1세는 토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인은 매독이었지만, 몰다비아 원정 때 입은 부상과 심리적 타격도 사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방부처리된 뒤 크라쿠프로 이송되어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토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기에 자녀를 두지 못했고, 리투아니아 대공을 맡던 동생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가 폴란드 국왕을 겸임했다.


[1] 현재 폴란드 그워구프(Głogów).[2] 크라쿠프 대주교로서 브와디스와프 3세의 섭정을 맡고 카지미에시 4세와 갈등을 벌이기도 하는 등 폴란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즈비그니에프 올레스니키의 조카다.[3] 나중에 작센 선제후가 되는 모리츠와 아우구스트 형제의 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