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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10-05 17:06:30

업성

업도에서 넘어옴
파일:동작대1.jpg
업성터(삼대)에 세워진 조조의 석상. 업성삼대는 동작대, 금봉대(금호대), 빙정대를 말한다.

1. 개요2. 역사
2.1. 초기2.2. 전성기2.3. 몰락
3. 복원4. 업성박물관

1. 개요

鄴, 邺 (위나라 수도 업[1])

업성(鄴城) 또는 그냥 업이라고도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로 업군(鄴郡)이라고 나온다. 오늘날 표준 중국어로는 邺城이라 쓰고 'yèchéng'(예청)이라고 읽는다. 현재 중국 허베이성 한단시[2] 린장현(临漳县)과 허난성 안양시[3] 안양현에 걸쳐 있다. 업의 가운데는 장수(漳水)강이 흐른다. 종종 육조고도(六朝古都)라 불리며, 중국 7대 고도에 안양시 대신 들어가기도 한다.

2. 역사

파일:조조삼대.png
원소와 조조가 세운 조위 대의 업성 (업 북성). 서북쪽 공터의 3대가 보인다.

2.1. 초기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이 처음 건립했다고 전해지며, 전국시대에는 위나라의 영토로, 서문표가 부임하여 치수를 위해 인신공양을 하는 무당을 처단하고 장수에 수리시설을 만들어 홍수를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전국 말 위나라가 대부분의 영토를 진나라에게 뜯기는 등 망해가면서 북방 지역인 업성은 조나라에 넘어갔으나, 3년 만에 다시 진나라가 왕전을 앞세워 탈취. 통일 진제국의 36군 편제에서는 조군에 속하였으며, 전한 초에 한단 일대가 제후왕의 봉지인 조국이 되면서 여기서 분리되어 위군의 치소가 된다.

후한 말부터 기주의 주도이며 전한-후한 시절에는 상산국에 속한 고읍현이 주도였다. 하북평야의 중심에 있어 후한 말 한복과 원소 등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2.2. 전성기

파일:업성 유적.jpg
6세기 중반 업성의 모습

업성은 위진남북조 시대 들어 중원의 중심 도시로 올라선다. 208년 조조가 원소 세력을 멸망시킨 뒤 위공 작위를 받은 이후 이곳을 본거지로 삼으면서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황제가 있는 허도는 원래부터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으나 조조 본인의 근거지인 연주와 가깝다는 이유로 수도로 삼았던 것이었고, 훨씬 번창한 업과 기주를 집어삼키게 됐으니 여기로 근거지를 옮긴 것.

조조 사후 아들인 조비가 허도로 잠시 옮겼다가 220년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동탁이 불태운 후 낙양은 한동안 쇠락했었지만 조비 시대쯤 되면 어느 정도 수습이 됐고, 고대 중국에서 중국 전체의 수도로 가장 좋은 곳은 누가 뭐래도 낙양과 장안 두 도시로 통했기 때문이다.

업성은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에 불바다가 되는 등 환란을 자주 겪었지만, 그래도 계속하여 중요도시 취급을 받았다. 화북 관동 지방과 관중 지방에 각자 독자적인 정권이 수립될 경우, 관동 지방의 입장에서는 업에 정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북위가 업으로 천도하려 했고, 동위와 그 실질적 후신인 북제도 업에 수도를 두었다. 동위의 실권자였던 고환이 업으로 천도를 결정하면서[4] 북위의 본래 수도인 낙양에서 궁성의 자재들까지 직접 옮겨와서 새로이 지었는데, 고환은 기존의 업성이 작고 협소하다고 생각해 기존의 업성에다가 남성(南城)을 덧붙여 크게 증축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성을 낙양보다도 크게 만들고 북위의 낙양 시절에 처음으로 생긴 방(坊)을 깔끔하게 기획하여 중국 도성사적 관점에서 도시구획의 방리제가 기본옵션이 되는 첫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새로운 성의 남문인 주명문(朱明門)은 중국의 역사국가들의 도성 가운데서 처음으로 거대한 쌍궐식 구조로 축조되기도 하였다.

기존 업성(북성)을 재건하고 낙양의 제도를 본받아 더 크고 완벽하게 남성을 증축하고 방리제를 시행한 도시를 만들었던 시점이 동위 북제시기로서, 도시만 놓고본다면 이때가 업의 최전성기. 업성은 6개 왕조[5]가 수도를 둔 도시가 되었다.

2.3. 몰락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에 의해 화북이 통일되고, 이후 제위 찬탈을 준비하던 양견에게 대항하여 울지형이 업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된 후, 양견이 업성을 파괴하고 원래 업성에 있었던 주민과 상주, 위군, 업현의 치소를 남쪽의 안양현으로 옮기면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양견은 업을 수도로 삼을 것에 대해서도 고려하였는데 이 저항으로 인해서 더욱 철저하게 업을 파괴하였다.

양견이 황제에 등극한 후에는 일시적으로 업현이 폐지되어 안양현의 영역으로 들어가기까지 했고, 당나라 때 겨우 원래의 업성에 다시 현성을 축조해서 현 기능은 받아왔지만 이미 안양에 빼앗긴 행정 중심지 기능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6] 이후 북송 때 최종적으로 업현이 폐지되고, 임장현과 안양현으로 영역이 분리내속되면서 지명으로서 업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었다.

명나라 초기에 업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장수의 유역변경을 아무도 못 막아서 강줄기가 업성 중심부로 들어와 이전에 번화했던 곳이 완전히 습지대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업과 그 둘레는 초토화되었다. 덕분에 위진남북조 시대의 대도시 업은 완전히 사라졌고, 업성 변두리의 작은 마을만 남았다.

3. 복원

파일:업남성.png
동위 ~ 북제 시절 황궁이던 업 남성의 발굴 현장

관광객을 끌어모으려 조조의 동상을 세우고 위나라 유적을 복원하는 중이라 한다. 이미 업성 유적지가 나왔다. 그리고 장기적인 발전계획에 따르면 주변을 모두 발굴조사해서 과거의 업성을 모두 되살리려고 하는데, 해당 계획을 완성한다면 비록 유적지지만 다시 한번 업성이 부활할 가능성이 높다. 동작대는 이미 3개의 누각 중 남측 1개는 복구해 놓은 상태이다.

동작대의 복원 이후에는 업 남성에 대한 발굴조사도 시작하여 2019년에 들어 동위 북제 시기에 궁성이 있었던 니신좡촌(倪新庄村)의 북쪽에서 발굴이 진행중이다. 궁성의 차지문(車止門)을 비롯한 궐문이나 본궁 별궁 등의 시설로 추정되는 주요한 건물지들의 초석부분이 확인되었다.

4. 업성박물관

2009년 8월 11일 업성박물관이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2011년 1월 박물관 본관 건립이 완료되었다. 조위 시대의 업성과 동위 및 북제 시기의 업성 등 업성의 각 역사적 시기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1] 한국 상용한자는 아니다. 오른쪽 한자는 간체자다.[2]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3] 상나라의 도읍.[4] 업성이 자리하고 있는 안양과 한단의 남쪽인 임장현은 진양(지금의 타이위안)에서 그리 멀지 않다. 고환이 북위 말기에 정권을 좌지우지할 시절에 진양에 거점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보면 업군으로 천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동위·북제의 황제릉이 업성에서 진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고, 그 길목을 따라 선비족 특유의 석굴을 두는 것 등을 통해보면 타당성이 있다.[5] 후조의 폭군 석호가 천도, 염민의 염위, 동위와 북제의 수도.[6] 안사의 난 때 상주와 업군이 왔다갔다 한 것도 결국 행정 중심지인 안양현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고, 현 소재지에 불과한 업성은 그냥 딸려다니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