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Emil Maurice 에밀 마우리스 |
출생 | 1897년 1월 19일 |
독일 제국 베스터무르 | |
사망 | 1972년 2월 6일 (향년 75세) |
서독 뮌헨 | |
복무 | 슈츠슈타펠 (1932년 ~ 1945년) 루프트바페 (1940년 ~ 1942년) |
최종 계급 | 슈투름압타일룽 최상급지도자 슈츠슈타펠 상급대령 (상급지도자)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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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왼쪽부터 아돌프 히틀러, 에밀 마우리스, 헤르만 크리벨, 루돌프 헤스, 프리드리히 베버이다. |
2. 생애
2.1. 초기 행적
독일 제국의 베스터무르에서 태어난 마우리스는 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시계공으로 일하다가 횡령혐의로 전과기록을 남겼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바이에른 왕국육군으로 종군했다.2.2. 나치당 활동
전후 나치당에 입당해 히틀러의 운전수로 일하다가 1920년부터 1921년에 걸쳐 막 창설된 돌격대의 최초인 최고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23년에 나치당 당수인 히틀러의 개인경호부대인 <아돌프 히틀러 호위대>[1] 가 창설되자 첫 대원이 되기도 했던 마우리스는 1923년 11월 9일의 뮌헨 폭동에 참가했다가 봉기실패로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형무소 내에서 히틀러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그는 히틀러가 집필한 <나의 투쟁>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1924년 말에 히틀러의 석방 후 히틀러의 보디가드 겸 운전수로 일한 마우리스는 1927년에 히틀러가 귀여워하던 조카인 안겔라 라우발을 좋아하다가 히틀러의 불쾌감을 사서 좌천되었다.2.3. 친위대 입대
SS소령 마우리스 |
1932년에 친위대에 입대한 마우리스는 고참당원이었기에 친위대 국가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에 이어 2번의 대원번호를 받았지만 특별히 중요한 직무는 받지 못했다. 친위대 상급대령이던 마우리스는 1933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뮌헨 시의 시의원을 지냈다. 힘러는 1935년에 마우리스가 결혼할 당시 가계조사를 벌여 마우리스에게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주장하며 당과 친위대에서 그를 축출해야 한다고 히틀러에게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이 일로 히틀러와 마우리스는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다.
2.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과 전범 재판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공군에서 장교로 일한 마우리스는 전후 1948년에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72년에 뮌헨에서 사망했다.3. 대중매체에서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MOD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나치 독일의 식민지 마다가스카르의 총독으로 등장. 유대계의 피가 섞여 있으나 히틀러의 쉴드와 나치당 내에서도 무난했던 위치와 존재감 덕에 무탈하게 지냈던 역사와 다르게 여기선 유대계라는 이유로 마다가스카르로 좌천된 것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며, 언젠가 독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허수아비 기믹. 그러나 TNO의 설정 변경으로 마다가스카르가 독일령 식민지가 아닌 비시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그 역할은 축소되었으나,[2] 독일 내전 이후 신변의 위협을 받고 미국, 멕시코, 일본 등으로 망명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독일이 이를 알아채고 마우리스 암살을 기도하는데, 미국이 마우리스를 살려내 망명을 받아줄 수 있다. 마우리스 사망 시 미국은 냉전점수가 1점 깎인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히틀러가 근친에 관심이 없었던 덕분에 겔리 라우발과 결혼해 자식도 3명이나 낳고 친위대 국가지도자까지 진급했다. 계급상으론 힘러와 동급이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는 명예직으로 뮌헨에서 소일거리나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전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2대 총독으로 임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