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주 뉴욕시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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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585><colcolor=#fff> 제104대 뉴욕시장 에이브러햄 데이비드 빔 Abraham David Beame | |
출생 | 1906년 3월 20일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사망 | 2001년 2월 10일 (향년 94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재임기간 | 제104대 뉴욕시장 |
1974년 1월 1일 ~ 1977년 12월 31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유대교 |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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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민주당 소속으로, 제104대 뉴욕시장직을 역임하였다. 뉴욕시 최초의 유대인 시장이다.2. 생애
1906년 영국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주한 후 젊은 시절에는 뉴욕의 대표적인 계파정치 기구인 태머니 홀(Tammany Hall)에서 활약하며 뉴욕 민주당의 보스들을 모셨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1952년부터 1961년까지 뉴욕의 예산국장을 지냈다. 1961년, 시 감사원장으로 선출되면서 차기 뉴욕시장으로 주목받았다. 시감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그닥 청렴하지는 못했다고 하는데 도널드 트럼프의 아버지인 프레드 트럼프의 사업을 은밀히 도왔다고 한다.로버트 F. 와그너 주니어 시장이 불출마를 선언한 가운데, 1965년 뉴욕시장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상대 후보는 공화당 내 대표적 좌파인 존 린지와 빔을 비판하며 출마한 3지대 보수 후보 윌리엄 F. 버클리였다. 빔은 로버트 F. 케네디의 지지를 받고 저명한 선거 전략가 제임스 팔리[1]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린지에게 밀려 낙선한다. 이후 1969년, 다시 시 감사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존 린지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빔은 1973년 시장 선거에 재출마해 민주당 예비선거를 힘겹게 이기고 본선에서는 여유롭게 당선되었다. 빔은 린지의 무능한 시정을 타파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린지는 빔의 처사에 억울함을 느껴 퇴임날 눈물을 머금고 걸어서 퇴근했다.
정작 시장으로서는 존 린지보다도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본인이 9년동안이나 예산국장을 지냈음에도 존 린지가 던져놓은 폭탄 같은 예산안을 처리할 수 없어 뉴욕시 재정 상태를 그야말로 막장으로 몰고갔다. 물론 빔도 예산국장으로서 경력이 헛된건 아니라 민주당 시장답지 않게 엄청난 긴축 정책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1975년, 시장 취임 1년만에 5억 달러의 부채가 발생해 뉴욕시 당국은 시청 전기세도 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빔은 파산을 선언하고 연방정부에게 구제금융을 요청했지만 포드 행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뉴스위크는 이를 두고 "Ford to City: Drop Dead"(포드가 뉴욕시에게: 뒤져라)라고 표현했는데, 파장이 커서 1976년 대선 때 포드의 낙선에 어느정도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포드가 단호했던 것은 아니고 연방 예산에 어느정도 여유가 생기자 뉴욕시에게 입에 풀칠할만큼의 재정은 지원했다.
1977년 7월 13일에 발생한 뉴욕시 정전 사태와 이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폭동은 에이브러햄 빔의 경력을 사실상 끝장냈다. 하루 넘게 이틀간 지속된 정전에 대규모 폭동과 약탈이 발생했고,[2] 세계 최대 도시인 뉴욕은 하루동안 무법지대로 변했다. 빔 시장이 이에 무능하게 대응했다는 여론이 대두되며 빔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뉴욕은 한동안 "세계 최악의 범죄도시"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1977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범죄에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공약한 에드 카치와 마리오 쿠오모가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하고 빔이 3위로 떨어지며 빔은 1932년 이후 처음으로 재선하지 못한 뉴욕시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퇴임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0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평가
존 린지와 함께 뉴욕 역사상 최악의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93년 시카고 대학의 연구에서 미국 역사 200년간 최악의 시장에서 14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후임 에드 카치는 15위, 전임 존 린지는 16위라는 대단한 기록을 세웠다.[3] 하지만 린지에 비해서는 그나마 평이 좋은 편이긴 하다. 린지가 퇴임 할 때 뉴욕시 재정 적자는 15억 달러에 달했지만 빔은 긴축을 통해 이를 2억 달러 흑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린지에 비해서는 공도 비교적 있는 편이다.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1 | 뉴욕시 감사원장 선거 | 뉴욕시 | | - (-%) | 당선 (1위) | 초선 |
1965 | 뉴욕시장 선거 | 1,046,699 (40.98%) | 낙선 (2위) | |||
1969 | 뉴욕시 감사원장 선거 | - (-%) | 당선 (1위) | 재선 | ||
1973 | 뉴욕시장 선거 | 963,542 (56.49%) | 초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