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주 뉴욕시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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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대 뉴욕시장 에드워드 어빙 카치 Edward Irving Koch | |
<colbgcolor=#003585><colcolor=#FFF> 출생 | 1924년 12월 12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1] | |
사망 | 2013년 2월 1일 (향년 88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 | |
재임 기간 | 제105대 뉴욕시장 |
1978년 1월 1일 ~ 1989년 12월 31일 | |
부모 | 아버지 루이스 카치 어머니 예타 카치 |
성적 지향 | 게이 (추정)[2] |
학력 |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 (B.A.) 뉴욕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법학 / LL.B.) |
종교 | 유대교 |
혈통 | 폴란드계 미국인, 유대계 미국인 |
의원 선수 | 5 (하원) |
의원 대수 | 92, 93, 94, 95, 96 (하원) |
지역구 | 뉴욕주 제17구[3] → 제18구[4] (하원) |
소속 정당 | |
약력 | 뉴욕주의회 의원 (1967~1969) 연방 하원의원 (제17→18구 / 1969~1977) 제105대 뉴욕시장 (1978~1990)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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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iberal with Sanity (제정신 박힌 진보파)[5]
에드 카치가 평생 내걸었던 정치적 슬로건
미국의 정치인. 제105대 뉴욕 시장을 역임했다. 재정적자와 급증하는 범죄로 골치를 썩히던 뉴욕시의 실태를 크게 개선시킨 것으로 알려져있다. 흔히 범죄와 맞서 싸운 뉴욕시장이라 하면 루디 줄리아니를 떠올리지만 줄리아니의 성공적인 시장은 카치가 기반을 닦았기에 있을 수 있었다.에드 카치가 평생 내걸었던 정치적 슬로건
재임 기간 뉴요시 재건에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스스로는 진보주의자를 표방하였지만, '제정신 박힌 진보파'라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 기존의 전통적 진보주의자들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실제로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실용주의와 현실주의에 근거한 정책을 전개했다. 특히 범죄에 대해서 무관용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소수 계층과 골수 진보주의자, 원리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 반면 오히려 공화당 쪽에서 그의 정책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원어 발음을 살려 "에드 코흐"라고 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영어식 발음으로 "에드 카치"나 "에드 코치"에 가깝게 발음했다.
2. 생애
2.1. 청년기
1924년, 폴란드에서 이민을 온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범한 유년기를 보내고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뉴욕시립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개인 변호사로 일하면서 정계에도 진출해 계파 정치를 일삼던 태머니 홀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고,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선거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때 카치는 재치있는 입담으로 유명해졌다. 카치는 유진 매카시의 초기 지지자로 활약했는데, 매카시의 풀뿌리 선거운동의 영향으로 17선 공화당 하원의원의 은퇴로 빈자리가 된 뉴욕 17구 하원의원에 선출되며 수십년만에 해당 지역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2.2. 존 린지 시장과 맞서다
에드 카치가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뉴욕시장은 록펠러 공화당원이자 공화당 내 좌파였던 존 린지였다. 존 린지는 공화당원이었는데도 인종평등, 복지 확대, 베트남 전쟁 반대 등 좌파적인 의제를 지지하던 사람이었고, 아예 1971년 민주당으로 당을 옮겼다. 린지는 뉴욕시장으로서 경찰 축소, 공공주택 확장 같은 진보 정책을 펼쳤는데 에드 카치는 진보주의자를 자처했음에도 린지 시장의 행정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다. 카치는 맨해튼 부자에게 지지를 받고 리무진 타고 다니며 진보파 행세하는 린지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자에 불과하며, 자신이야말로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하는 진정한 진보파라는 의미에서 "상식적인 진보파"(Liberal with Sanity)를 자처하였다.린지 시장의 포레스트힐 공공주택 건설 사건은 에드 카치라는 이름을 전국구에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린지 시장은 유색인종과 빈곤층을 위한 공공 아파트를 적극적으로 확충하는 정책을 추구했는데, 퀸스 교외의 유대계/이탈리아계 중산층 거주지인 포레스트 힐에 다짜고짜 아파트를 짓겠다고 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에드 카치는 유대인들을 대표해 공개적으로 린지 시장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무명이었던 시민변호사 마리오 쿠오모는 이탈리아계를 대변하는 중개인으로 임명되어 린지에 맞섰다.[6] 주민과 지역 정치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린지는 공공주택 건설 확충 정책을 포기하고 말았다.
존 린지 시장이 사상 최악의 지지율로 뉴욕시장 자리에서 물러남에 따라 린지의 가장 공공연한 적이었던 에드 카치는 차기 뉴욕시장 후보군에 오르내리는 거물이 되었다. 물론 카치가 이런 것만으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에게 적극적으로 책임론을 제기하고, 남아메리카 우익 군부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다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 위협까지 받는 등 노빠꾸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이것이 뉴욕 정치가들의 귀족적 성격에 지쳐있던 많은 뉴욕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2.3. 뉴욕시장 선거 재수와 성공
린지에 대한 공격으로 명성을 얻은 카치는 1973년 뉴욕시장 선거 출마를 준비했다. 그는 저조한 지지율과 자금으로 인해 예비선거가 시작하기 전 사퇴했고, 1965년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린지에게 낙선한 에이브 빔(Abe Beame)이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는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1974년 1월 빔의 취임 이후 린지가 쌓아놓은 막대한 재정적자와 인종 불안, 치솟는 범죄율이 폭발하기 시작해 뉴욕시 전체를 재앙으로 끌고갔기 때문이다. 빔 시장은 1975년 뉴욕시의 파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며 연방정부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포드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며 궁지에 처했다. 1977년 뉴욕시 대규모 정전 사태 당시 린지 시장이 축소한 경찰 병력과 예산으로 인해 치안이 마비되며 25시간에 달하는 대규모 폭동과 약탈이 일어났고 이 시점에서 빔의 재선은 불가능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7]1977년 시장선거에서 빔 시장은 재선에 출마했지만 재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977년 시장 선거 때 주요 후보자는 여성계의 지지를 받던 페미니스트 운동가 벨라 압죽(Bella Abzug), 흑인 커뮤니티의 지지를 받던 퍼시 서튼(Percy Sutton), 에드 카치 그리고 공교롭게도 포레스트힐 사건 때 카치와 함께 린지에 맞서 싸웠던 마리오 쿠오모였다. 쿠오모는 초기에 지지율이 낮았지만, 재클린 케네디와 이탈리아계 커뮤니티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지지율이 상승했고, 1차 경선 결과 카치 19%, 쿠오모 18%, 빔 17%로 카치와 쿠오모의 결선 대결이 성사되었다. 최종 결과는 카치 55% 대 쿠오모 45%로 카치의 낙승이었다.
그러나 마리오 쿠오모는 경선을 불복하고 지역 군소정당인 뉴욕 자유당 (New York Liberal Party)의 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다시 선거는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었다. 마리오 쿠오모는 에드 카치가 독신에 아이도 없다는 점을 들어 그를 동성애자로 단정짓고 "호모가 아니라 쿠오모에 투표하세요!"(Vote for Cuomo, not the Homo)라는 구호를 내세웠다.[8] 양 후보 모두 상대가 존 린지의 수하라는 네거티브를 시전했으며[9], 상대 후보의 선거운동 차량에 계란이 날라드는 과격한 선거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사형제 논쟁에서 카치가 사형제에 찬성하며 사형제 반대의 소신을 내세운 쿠오모에 비해 우위를 점했고 셜리 치좀 등 흑인 민권운동 세력도 카치를 지지하면서 카치가 49% 대 41%로 쿠오모를 꺾고 뉴욕시장으로 당선된다.
2.4. 뉴욕시장 재임 당시
2.4.1. 성공적인 초재선 임기
1978년 1월 1일 에드 카치가 뉴욕시장으로 취임했을 때 뉴욕시는 사상 최악의 범죄와 재정난에 빠져있었으며, 에드 카치의 시정이 성공할 것이라고 본 사람은 적었다. 그러나 에드 카치는 재임 1기 동안 눈부신 업적을 쌓으면서 불법과 폭동의 소굴이었던 뉴욕의 위상을 되살려놓았다.카치는 진보파를 자처했지만 시장으로서는 뉴욕시를 되살리기 위해 좌파나 우파에 얽매인 정책을 추구하지 않았고, 초당파적인 실용주의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카치는 대담하게도 기존 뉴욕 민주당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수 인종, 노동조합, 언론사와의 연합을 피하고 시민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우선 존 린지의 과도한 귀족적 성격이 시민의 불신을 불러왔다고 생각한 그는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시민들과 일일히 악수하고 "저 잘하고 있죠?"라고 물어 뉴욕시민들에게 호감을 샀다. 1980년 지하철 노조의 파업 당시에는 "저랑 같이 걸어서 출근합시다! 저들에게 무릎 꿇을 수는 없잖아요!"라고 외치며 시민과 함께 허드슨 강 철교를 걸어서 시청으로 출근한 일화도 유명하다.[10]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같은 민주당 정치인도 거리낌 없이 비판하는 솔직한 성격도 사랑받았다.
물론 이런 소탈한 이미지 메이킹만으로 지지를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에드 카치는 존 린지가 내세운 진보좌파적인 의제도 일부 받아들였고 이를 계승, 확대해 더욱 효과적으로 뉴욕시에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갔다. 예를 들어 주택 정책이 있다. 린든 B. 존슨은 뉴욕을 포함한 미국 대도시 지역에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주택을 대거 확충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후속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은 거대한 슬럼처럼 변해갔다. 에드 카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6년 "10개년 도시재생 계획"을 구상해 중저소득층 주택 건설과 빈 건물 재활용에 50억 달러 이상을 지출하도록 예산을 편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슬럼화된 아파트를 저소득층에 재분배하고 시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되도록 해 15만채 이상의 주택을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에게 제공했다. 빈 주택의 수는 린지 시장 시절 1만채에 달했지만, 카치 시장 시절에는 800채로 줄었다. 이는 할렘과 브롱스 지역 도시재생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공원 재정비도 카치의 업적이다. 카치가 시장이 되기 전 뉴욕 센트럴파크는 치안 공백으로 밤이 되면 강도가 우글거리는 위험한 장소였는데, 카치는 공원만을 전담하는 경찰과 공무원을 배치해 공원에서 범죄자를 내쫓았다. 동시에 전임자들이 재정 적자로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공원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해 시민에게 개방하였다. 한편으로는 브로드웨이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독립영화 제작을 시 차원에서 지원하면서 뉴욕을 예술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넬슨 록펠러 주지사의 유산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7년 만들어진 슬로건인 "I♥NY"을 임기 도중 대대적으로 사용하면서 범죄의 온상이 된 뉴욕의 이미지를 세계 문화와 예술의 수도로 탈바꿈하는데도 성공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으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 1981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는 존 A. 에스포시토가 출마할 예정이었지만, 공화당 지지자들은 에드 카치의 이름을 선거 명부에 올려 경선을 통해 에드 카치와 후보 단일화를 해버렸다. 그렇게 카치는 뉴욕시 역사상 최초로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지지를 모두 받은 후보가 되었고 무려 74.6%라는 역사적인 득표율로 승리하였다.
재선에 성공한 카치는 더욱 적극적으로 뉴욕시 재생 정책을 밀어붙였다. 카치는 뉴욕의 재정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불필요한 지출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공무원 10%를 감축했고, 1892년 개원한 할렘 지역의 시든햄 병원(Sydenham Hospital)을 비롯해 4개의 공공 의료 시설을 폐쇄하였다. 이는 여러 흑인 민권운동가들에게 비판 받았지만, 카치는 이것이 질 낮은 공립 병원을 더 질 좋은 병원과 통합시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며, 흑인 밀집 지역 병원의 게토화도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적극적인 긴축 정책과 카치 시장의 성공적인 브랜딩으로 뉴욕시에 자본이 밀집되면서 그의 재선 임기 도중 4억 달러의 적자는 5억 달러에 달하는 흑자 예산으로 전환되었다. 존 린지의 방만한 재정 운영에서 완전히 탈피한 셈이었다.
카치는 기세를 이어 1982년 뉴욕주지사 출마까지 도전했다. 처음에는 아주 유력한 후보였지만, 뉴욕시에 대한 지나친 애향심이 문제가 되었다. 카치가 인터뷰에서 실수로 뉴욕시를 활력이 넘치는 매력적인 도시로, 업스테이트 뉴욕을 고리타분한 시골 촌동네로 묘사하는 발언을 하면서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카치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상대방은 바로 자신이 1977년에 낙선시킨 마리오 쿠오모였다. 쿠오모는 카치의 실용주의를 로널드 레이건식 신자유주의라고 비난하며 흑인, 여성, 가톨릭, 이탈리아계의 몰표를 쓸어갔고, 53% 대 47%로 카치를 근소하게 꺾고 경선에서 승리하였다. 카치는 뉴욕시정으로 돌아갔으며 쿠오모는 본선에서도 승리해 3선 주지사를 지내게 된다.
2.4.2. 미완으로 끝난 3선 임기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위의 얘기까지이며, 그의 3선 임기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5년 자신이 4년 전에 세운 기록을 다시 경신하고 득표율 78.0%[11]로 재선한 카치는 3선 임기 시작과 동시에 곤경에 처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측근인 도널드 R. 메인스(Donald R. Manes)가 부패 혐의를 받다가 자살하면서 그가 주장하던 청렴하고 소탈한 정치의 진정성이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뒤이어 카치의 여러 측근이 구속되었다. 그의 선거를 도운 스탠리 M. 프리드먼(Stanley M. Friedman)과 미드 H. 에스포시토(Meade H. Esposito)가 모두 구속 및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교통국장 앤서니 R. 애머루소(Anthony R. Ameruso)도 부패 혐의로 사임했다. 젊은 스타 검사 루디 줄리아니의 활약 속에 카치의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카치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에드 카치 본인은 시장 퇴임 이후 측근의 부패를 몰랐으며, 그들에게 너무 의존했던 것 같다며 후회한다고 밝힌 바 있다.그 다음으로는 재임 1, 2기 때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흑인 민권운동가 및 동성애 권리 운동가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재임 1~2기 동안 할렘가의 흑인 전용 병원을 폐쇄한 것은 흑인 커뮤니티에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치안을 위해 그가 취한 여러 조치도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크게 라디오를 틀지 못하게 한 것이 흑인의 문화를 무시했다고 비판받았다. 1985년 시장 선거 때 범죄 퇴치를 홍보하기 위한 광고가 흑인을 잠재적인 가해자로 묘사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런 살얼음판 걷는 것 같은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다가, 1988년 카치가 흑인 민권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제시 잭슨의 반유대주의 발언을 가리켜 "그는 미친게 분명하다"라는 망언을 하면서 폭발했다. 대다수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의 제자인 제시 잭슨을 모독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카치는 이후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이미지를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3기 임기 도중, 연방 보건부의 결정에 따라 에이즈 확산 방지를 위해 여러 동성애자 시설을 폐쇄한 조치도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게이 목욕탕 폐쇄였다. 카치는 에이즈 확산을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게이 전용 목욕탕을 폐쇄하는 연방 보건부의 조치를 지지했는데, 이것이 카치 시장의 공공의료시설 폐쇄 및 이성애자 성매매 업소 방치와 연결되어 이중잣대라고 비판받았다. 결국 카치는 이 논란을 피하기 위해 유례 없는 도색 잡지, 포르노, 성인업소, 매춘 추가 단속을 펼쳤는데, 자유주의적인 뉴욕시민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동성애자 사이에서 떨어진 인식은 말할 것도 없고.
범죄 문제도 처리도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 에드 카치는 강력범죄를 줄이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도중 몇몇 수치는 유의미하게 떨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범죄에 대응하는데에는 실패했다. 그의 마지막 임기 동안 강력범죄율은 가장 높은 수치로 치솟았고, 퇴임한 연도인 1990년 살인 건수는 2,251건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는 루디 줄리아니가 후임 시장으로 강하게 범죄에 대처함에 따라 뉴욕의 범죄율은 크게 떨어졌다. 뉴욕시의 범죄율이 크게 떨어진 것에 줄리아니가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긴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카치가 제대로 경찰 예산을 책정하고 범죄를 때려 잡기 위한 여러 정책을 세웠기에 줄리아니가 그것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많음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결국 1989년 시장 선거에서 카치는 4선에 실패했다. 유대인-백인 중산층에 구애하던 카치의 선거 전략은 가톨릭,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흑인, 아시아인 등 광범위한 마이너리티 그룹을 연결한 데이비드 딩킨스(David N. Dinkins) 후보에게 가로막혔다.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딩킨스는 50.7%를, 카치는 42.2%를 득표했다. 카치는 스태튼 아일랜드(63%)와 퀸스(50%) 같은 교외 지역에서는 이겼지만, 소수 인종이 다수 거주하는 맨해튼(36%)과 브롱스(37%)에서 크게 패했다. 카치는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1989년 12월 31일 뉴욕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2.5. 시장 퇴임 이후
시장직에서 은퇴한 카치는 정치 평론가이자 영화 비평가로 여생을 보냈으며, 맨해튼에서 평생을 살았다. 카치는 민주당을 탈당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에는 뉴욕 주 민주당에 앙금을 품었는지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을 더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93년 뉴욕시장 선거를 앞두고 딩킨스 민주당 후보 대신 루디 줄리아니 공화당 후보 지지 선언을 했고, 1994년 뉴욕주지사 선거 때도 마리오 쿠오모가 아닌 조지 퍼타키 후보를 지지했다. 9.11 테러 이후, 카치는 조지 W. 부시의 테러 대응 방식을 칭찬하며 부시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공화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자로 참석하기까지 했다.하지만 조지 W. 부시의 실책이 드러나자 카치는 다시 지지정당을 옮겨, 2008년에는 힐러리 클린턴을 대선 후보로 지지했다. 이후 버락 오바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2012년에도 마음이 변함이 없다며 오바마를 지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쿠오모 가문에 대한 적개심도 풀렸는지, 2010년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앤드루 쿠오모를 칭찬했다. 생애 마지막 선거였던 2012년 하원의원 선거 때는 후일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가 되는 하킴 제프리스를 "지적이고 멋지며 잘생긴 뉴욕의 오바마"라고 추켜세우며 의원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정치적 활동 이외에는 영화 평론으로도 유명해졌다. 영화 평론 책이 아주 많이 팔리면서 "영화관의 시장"이라는 별명도 얻었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2013년 2월 1일,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의 아파트에서 심장병으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조기 게양을 지시하며 그를 "뉴욕이 어려운 시기에 빠졌을 때 제자리로 돌려놓은 시장"이었다고 평가했다.
3. 성적 지향성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여자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노총각 시장"이라는 별명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동성애자라는 의혹도 있었다. 이는 마리오 쿠오모 같은 정치적 경쟁자에게 비난받기도 했다. 그의 성 지향성이 정말로 동성애자인지, 무성애자인지, 혹은 성격이 자발적 아싸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카치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성 지향성에 대해 함구하였으며, "대다수 뉴욕 시민들은 내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에 대해 관심 없어한다"며 성지향성과 무관한 행정을 보여주면 그만이라고 논란을 일축했다. 그는 뉴욕시장으로서 성소수자 친화 정책을 일부 펴기도 했지만, 임기 말에는 게이 목욕탕 폐쇄 건으로 동성애자 권리 단체와 크게 충돌하기도 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을 "이성애자"(Heterosexual)이라고 정의하고 여성 파트너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였기에 말년에는 그가 이성애자에 가깝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기도 했다.그런데 2022년 뉴욕타임스의 심층보도에 의하면 에드 카치는 정말로 동성애자가 맞았다고 한다.# 에드 카치는 10명도 안되는 동성애자 친구들에게만 자신의 성 지향성을 공개했으며, 가족에게까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동성애자 연인을 아파트로 초대하는 식으로 비밀리에 연애 관계를 이어나갔고, 시장이 된 후에도 종종 가정주부를 제외한 모두를 공관에서 내보내며 철저하게 자신의 성적 사생활을 비밀로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성이 공개되면 정치적 행보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공개할만한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 평생 묻어간듯 하다.
또한 그의 남자친구 중 한명이 에이즈로 사망한 것도 알려지면서 사후 10년이 지난 오늘날 성소수자들로부터 재평가받고 있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8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뉴욕 17구 | | 74,627 (48.54%) | 당선 (1위) | 초선 |
1970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98,300 (62.01%) | 재선 | |||
1972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뉴욕 18구 | 125,117 (69.94%) | 3선 | ||
1974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91,985 (76.72%) | 4선 | |||
1976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112,187 (75.68%) | 5선[12] | |||
1977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717,376 (49.99%) | 초선 | ||
1981 | 뉴욕시장 선거 | 1,222,644 (74.64%) | 재선[13] | |||
1985 | 뉴욕시장 선거 | 868,260 (78.03%) | 3선[14] |
5. 여담
내 공약 12개 중에 9개 정도 지지하면 날 뽑으시오. 12개 중에 12개 모두 지지하면 그땐 집 근처 정신병원을 알아보시오.
뉴욕시장 선거 유세 中[15]
뉴욕시장 선거 유세 中[15]
나는 위 궤양 따위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전 다른 사람이 궤양을 앓게끔 속 썩이는 성격의 사람이죠.
- 재치있는 입담과 유머로 사랑받았다. 그의 발언 중 많은 것이 아직도 회자된다.
- 유대인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묘비에 적힌 문구도 "내 아빠도 유대인, 내 엄마도 유대인. 나도 유대인!"일 정도이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이스라엘을 옹호하였으며 제시 잭슨 등 민주당 내 좌파의 친팔레스타인 성향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 2010년 맨해튼에서 퀸스를 잇는 퀸스버러 철교가 그의 이름을 따 "에드 카치 퀸스버러 다리"로 명명되었다. 카치는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내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2020년대 그의 에이즈, 인종 접근법 때문에 다리에서 카치의 이름을 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2022년 NYT의 사후 아웃팅 기사가 나간 후에는 잠잠해진듯하다.
- 전전임자 존 린지와 여러 면에서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존 린지는 뉴 암스테르담 시절부터 맨해튼에 살았던 네덜란드-잉글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부유하고 진보적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카치는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가난하고 보수적인 유대인 이민자의 2세로 자랐다. 린지는 종종 귀족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인 성격으로 비판 받았는데, 반대로 카치는 서민적인 위트와 유머를 즐겨 해 시장으로서 너무 경박하고 품위 없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린지는 재임 기간 4억 달러의 예산 적자를 창출했다면 카치는 5억 달러의 예산 흑자를 창출했고 노동조합, 흑인, 예술가를 대하는 태도도 모두 상반되었다.
[1] 성장지는 뉴저지주 뉴어크.[2] 생전에 이성애자라고 했지만 2022년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3] 제92, 93대 의회[4] 제94~96대 의회[5] 미국 정치에서 자유주의가 가지는 특성을 고려했을 때 자유주의자나 좌파로도 번역할 수 있다.[6] 쿠오모를 중개인 임명한 사람이 린지였지만, 쿠오모는 퀸스 지역 주민들의 말을 듣고 린지의 정책이 실현 불가능함을 깨닫고 린지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7] 이 사건은 인간의 무자비함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성악설의 근거로 초등학교,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자주 언급되기에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사건이다. 다만 본질적인 원인은 경찰의 과잉 진압을 막겠다며 경찰 예산을 대책없이 삭감한 존 린지와 에이브 빔 시장의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8] 해당 구호는 보수적인 퀸스 지역에서 사용되었는데, 논란이 일자 쿠오모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며 선거운동원들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말이라고 주장하고 카치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카치는 이에 대해 쿠오모를 용서할 수 없다고 화를 냈다.[9] 카치는 쿠오모가 린지 아래에서 공무원을 지냈다고 공격했고 쿠오모는 카치가 린지 같이 진보주의자 행세하는 보수파라고 공격했다.[10] 카치의 완강한 태도 때문에 노동조합이 어쩔 수 없이 타협에 나서면서 파업은 11일만에 종결되었다. 이는 1966년 존 린지의 환경미화원 파업 대처와 대비되는 것인데, 린지는 노동조합의 요구 사항을 그대로 들어주면서 전임자 로버트 F. 와그너에 비해 무려 2배에 달하는 예산을 환경미화원을 위해 지출하게 되었다.[11] 이는 현재도 깨지지 않은 뉴욕시장 선거 역대 최고 득표율 당선 기록이다. 브롱스에서는 무려 84%나 득표했다.[12] 1977.12.31. 뉴욕시장 취임을 위해 사임[13]
지지[14] 역대 뉴욕시장 선거 최고 득표율 당선[15] 유권자가 정치인의 모든 것에 공감할 수는 없으며 선거는 자신과 입장이 일치하는게 아니라 비슷한 후보를 뽑아야한다는 것을 압축한 말로, 대의민주제의 특성과 엮여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다.
지지[14] 역대 뉴욕시장 선거 최고 득표율 당선[15] 유권자가 정치인의 모든 것에 공감할 수는 없으며 선거는 자신과 입장이 일치하는게 아니라 비슷한 후보를 뽑아야한다는 것을 압축한 말로, 대의민주제의 특성과 엮여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