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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트럼프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프레더릭 크라이스트 트럼프 시니어
Frederick Christ Trump Sr.
파일:Fred_Trump_in_the_1980s_(cropped).jpg
출생 1905년 10월 11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사망 1999년 6월 25일 (향년 93세)
미국 뉴욕주 뉴 하이드 파크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6cm
부모 아버지 프레더릭 트럼프
(1869년 ~ 1918년)
어머니 엘리자베스 크라이스트 트럼프
(1879년 ~ 1966년)
형제자매 누나 엘리자베스 트럼프
(1904년 ~ 1961년)
남동생 존 G. 트럼프
(1907년 ~ 1985년)
배우자 메리 앤 매클라우드 트럼프
(1912년 ~ 2000년)
자녀 장녀 마리안 트럼프
(1937년 ~ 2023년)
장남 프레드 트럼프 주니어
(1938년 ~ 1981년)
차녀 엘리자베스 트럼프
(1942년 ~,82세)
차남 도널드 트럼프
(1946년 ~, 78세)
3남 로버트 트럼프
(1948년 ~ 2020년)
학력 리치몬드 힐 고등학교
프랫 인스티튜트
직업 사업가, 자선가, 부동산 개발업자
종교 개신교 (루터교회)
1. 개요2. 생애3. 자녀 교육4. 논란5. 기타6. 가족관계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45대, 47대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아버지이자 트럼프 기업의 설립자이다.

부친(프리드리히 트룸프→프레더릭 트럼프)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프레드 트럼프라는 애칭을 주로 사용했다.

2. 생애

프레드 트럼프는 독일 출신 이민자 프레더릭 트럼프[1]와 엘리자베스 트럼프[2]의 2남 1녀 중 장남이자 둘째로 출생했다.

프레드의 부친인 프리드릭은 1869년 독일 칼슈타트(Kallstadt)[3]에서 작은 포도밭을 소유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8살 때 아버지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치료비로 빚을 지게 되어 어머니가 작은 포도밭에 의지하여 여섯 형제를 키우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4살 때부터 이웃 마을 이발소에서 주7일씩 일한 후 다시 마을로 돌아와 자신의 이발소를 차렸다. 하지만 동네에서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있던 이발소에 밀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릭은 16세 때인 1886년 고향을 떠나 이모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을 거쳐 1891년 시애틀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고 이발소, 식당, 숙박 사업으로 자수성가했다. 특히 1896년에 시작된 캐나다 유콘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때 캐나다에서 숙박업을 하여 어느정도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1899년~1900년경 유콘 골드러시가 완전히 끝나자 프리드릭은 미국과 캐나다 서부에서 숙박업을 완전히 정리했고 1901년 고향 칼슈타트로 귀향했다. 이때 이웃집에 살던 엘리자베스 크리스트와 만났고 그녀와 결혼하여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프리데릭 트럼프는 미국 뉴욕에서 이발소와 레스토랑, 숙박업을 시작했지만, 1904년 고향 칼슈타트에 재정착하기로 결심하고 갓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가족과 함께 칼슈타트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칼슈타트를 새로 관할하게 된 바이에른주 당국은 프리데릭이 독일제국의 병역 의무를 기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고 판단하여 독일 영주권 갱신을 불허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다.[4] 프리드릭은 탄원서를 내는 등 수개월간 법적 공방을 이어갔으나 결국 1905년 프리드릭 부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야 했다. 프리드릭은 뉴욕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프레드 트럼프는 부모가 칼슈타트에서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지 5개월 후에 출생했다. 아들인 도널드 트럼프가 현직 대통령인 시절 몇 차례 자신의 아버지인 프레드 트럼프가 독일 출신, 독일 태생이라고 말하여 미국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미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프레드 트럼프의 부모(즉 도널드 트럼프의 조부모)가 칼슈타트를 떠나 미국행 여객선에 탑승했을 때 프레드의 어머니는 임신 3개월째였고 프레드 트럼프는 뉴욕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며 도널드는 아버지의 고향도 틀리게 말한 XX 자식이라는 것이 당시 미국 언론들의 입장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아버지가 미국에서 태어난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독일인 가정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며 성장하였기에 그런 의미에서 독일 출신이라 말한 것으로 보인다.

뉴욕 브롱스의 독일계 이주민 타운에서 태어난 프레드 트럼프는 어린시절 가정에서 부모 형제들과 독일어를 쓰면서 자랐다. 3살 때 가족이 뉴욕 퀸스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유년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10살 때부터 푸줏간에서 배달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반독일 정서가 생기자 프리드릭은 아들 프레드에게 "우리는 더 이상 독일인으로서 미국에서 사업을 하기 힘들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스웨덴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드 트럼프는 한동안 스웨덴 칼스타드(Karlstad) 출신 행세를 했다. 이후에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트럼프 집안 사람들은 독일계 출신임을 숨겼다. 때문에 트럼프 가문은 1980년대 그의 아들 도널드 트럼프가 독일 이민자 출신임을 밝힐 때까지 스웨덴계 집안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팬데믹 때 아버지 프리드릭이 폐렴으로 사망했다. 어느날 아버지와 산책을 나갔는데 아버지가 몹시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빨리 돌아왔는데, 그날밤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집안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12살 이제 막 리치몬드홀 학교에 들어가 중학생이 된 프레드는 졸지에 소년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일구기 시작했던 부동산 사업을 이어가려고 생각했고, 12살 때 처음 이웃집 차고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청사진(블루프린트) 만드는 법을 배우며 건축업에 발을 들였다. 그는 10대 시절 건설 목수, 페인트공, 배달원, 캐디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또래 소년들과 달리 그는 10대를 빼았겼고 일만 했다고 한다.

프레드는 이미 10대 소년 시절 건축 사업을 하기 시작했지만 나이가 어려 은행 거래를 할 수 없어 어머니와 동업을 해야 했다. 프레드는 어머니와 함께 집을 보러 돌아다녔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1년전 처음으로 집을 짓고 그 집을 팔아 돈을 벌었다. 192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목공소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어머니와 부동산 사업을 했다. 동시에 Pratt Institute에 등록해서 블루프린트(청사진)도 공부하였다. 1924년 회사 이름을 Elizabeth Trump & Son으로 바꾸었다.[5]

1933년에는 당시 뉴욕 롱아일랜드에 생긴 셀프 슈퍼마켓을 벤치마킹하여 뉴욕 퀸스에 트럼프 마켓이라는 셀프 수퍼마켓을 창업했다.

1933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여 강력한 경기부양 정책(뉴딜 정책)이 시작되었다. 루즈벨트 정부는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1934년 국민주택법(National Housing Act of 1934)을 시행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한 연방주택청을 신설했다. 대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저소득자들에게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저소득 계층을 위한 주택사업을 위한 민간사업자에 대한 조건과 규제가 대폭 낮아졌고, 주택 담보 대출의 문턱이 낮아졌다. 이를 본 프레드 트럼프는 본격적으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모기지 사업에 투신했다. 그는 곧 루즈벨트 정부의 저소득 주택 사업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경제적으로(저렴하게) 집을 짓는 방법을 고안해 이를 실행에 옮겼고, 이를 본 루즈벨트 정부도 해당 정책의 성공을 위해 프레드 트럼프를 정책적으로 크게 지원해 주었다. 이렇게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으로 주택을 지은 그는 정부의 주택 담보 대출 정책을 이용하고, 아울러 재대출과 기상천외한 마케팅 방법으로 크게 성공하기 시작했다.

1936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모의 여성 매리 앤 매클라우드와 결혼했다.

1938년 미국의 언론들은 프레드 트럼프를 부동산 거부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전쟁 기간 동안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뉴욕 복지주택건설 사업에 참여하여 엄청나게 큰 재산을 모았다. 1944년에는 브루클린을 중심으로 대형 아파트 건물 개발을 계획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제대한 참전용사 및 그 가족들을 위한 중산층 주택 사업으로 또다시 큰 돈을 벌었다.

1950년대에 프레드 트럼프는 미국의 재벌 중 한 명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브루클린을 중심으로 저소득층 아파트와 연립 주택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

1950년대와 1960년 중반 그는 상원과 뉴욕 경찰에 의해 횡재 이익 및 정부 지원금 횡령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당시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의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수사 결과 혐의가 드러나지 않아 기소되지 않았다. 당시 프레드 트럼프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프레드 트럼프는 법을 대단히 잘 알고 법의 허점과 빈틈을 많이 활용하여 이익을 챙기긴 했지만 법을 위반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한다. 즉 프레드 트럼프는 편법을 많이 했지만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아들 가운데 차남인 도널드 트럼프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면서 사업을 도왔고 1968년부터 공식적으로 기업 활동에 참여했다. 프레드는 아들 중 부동산 사업에 가장 큰 재능을 보였던 차남 도널드에게 가업을 물려주기로 결심하였고, 1971년 아들에게 사장직(president)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프레드는 회장(chairman)과 같은 역할로서 최종 의사 결정에 관여했다. 1973년, 도널드는 기업 명칭을 트럼프 기업(The Trump Organization)으로 변경했다.

1971년 사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준 후 프레드는 기업 운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아들 도널드가 사업을 운영하도록 전권을 주고 자신은 조언을 하는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중반 아들 도널드가 그간 뉴욕 외곽 중산층을 대상으로 주택 임대 사업을 하던 회사 경영 방향을 바꾸어 맨하튼으로 진출하려할 때 프레드는 처음에 이에 매우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아들에 반대하지 않았다. 도널드의 맨하튼 진출은 결과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도널드가 추진한 주요 맨해튼 사업들의 경우 이는 기본적으로 도널드 트럼프가 계획한 것이었고, 프레드 트럼프는 이에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해당 사업에 참여했다. 아들 도널드는 아버지를 끊임없이 설득하였고, 프레드는 그런 아들의 계속되는 설득을 들으며 타당하거나 가능성이 있다고 싶은 부분은 아들을 믿고 아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도널드 입장에서는 본인이 회사의 경영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금력을 지닌 것이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버지를 설득해야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자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설득하면 은행 금리보다 훨씬 저렴하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프레드의 성격상 도널드가 젊었던 시절에는 아마도 장남처럼 도널드에게도 호통을 치거나 불호령을 내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프레드 트럼프와 도널드 트럼프 부자는 이처럼 가족 기업을 함께 이끌어 갔다. 특히 이들 부자는 다른 재벌 기업처럼 부자 승계를 위한 경영 수업이 아니라 사실상 공동 경영을 하면서 모든 사업에서 두 부자는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이렇게 수십년간 주요한 모든 일을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며 일을 해온 습관은 나중에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의 자녀들을 가업 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시키고 반영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파일:external/assets.nydailynews.com/racisttrump2n-13-web.jpg
아들 도널드와 함께한 사진(1988년)

1999년 6월 25일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프레드의 형제로는 누나와 남동생이 있다. 프레드의 남동생이자 도널드 트럼프의 삼촌인 존 G 트럼프는 어린 시절부터 사업에 투신한 형과 달리 학업에 재능을 보여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명문 MIT 교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레이더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슬하에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3. 자녀 교육

프레드 트럼프의 호전적인 성격은 둘째 아들인 도널드 트럼프에게도 계승되었다. 도널드 트럼프의 특유의 금수저 기질과 독불장군 성격 때문에 그를 유하게 키웠을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워커 홀릭인 프레드 트럼프는 당시 독일계 가정의 가장들이 흔히 그렇듯 자녀들에게 무척 엄격한 아버지였다.[6] 딸들에게는 성인이 될 때까지 립스틱 등 화장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아들이 말을 안들으면 군사학교까지 보낼정도고 ,간식도 금지했다. 또한 용돈이나 선물도 조건을 만족해야지 내줬다. 그리고 금주(禁酒)주의자라서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고 자녀들에게 술을 멀리하라고 충고했다.

둘째 아들 도널드 트럼프는 어릴 때부터 자가용으로 신문을 배달하면서 생활비를 모았다. 도널드는 13세 무렵 군사학교에 입학했는데 사실 프레드가 도널드를 강제로 넣은 것이었다. 알고 보니까 도널드는 주머니칼을 소지한 채로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훈육 차원에서 내려진 조치였다. 그러나 도널드는 훈육은 커녕 군사학교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프레드는 장남 프레드 트럼프 주니어를 자기 회사 신입으로 발탁했지만 여러모로 시원치가 않았다.[7] 큰아들이 기록하는 실적, 그리고 업무에 임하는 태도를 비롯한 여럿이 그랬다는 얘기다. 도널드는 칭찬에 인색했던 아버지를 극복하려고 사업에 매진했다고 밝혔다.

4. 논란

5. 기타

6.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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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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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정착 전 프리드리히 트럼프(Friedrich Trump, 생몰년도는 1869년 ~ 1918년[2] 결혼 전 엘리자베스 크리스트, 생몰년도는 1879년~1966년[3] 당시에는 바이에른 왕국 팔츠 지역. 지금의 라인란트팔츠 주에 속하는 지역이다.[4] 당시 이런 사례가 적지 않았고, 실제 프리드릭이 16세 때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 중에 병역 문제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 이전에는 미성년자인 프레드의 이름을 쓸 수 없어 엘리자베스 트럼프의 이름만 사용했다.[6] 이러한 경향은 독일계 뿐 아니라 북구계(스웨덴계, 노르웨이계, 핀란드계) 이민자 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건 20세기 중반의 이야기고 현대에는 독일계 가정들도 그리 엄격하지는 않다.[7] 한 번은 입주민들이 창문을 갈아달라는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거금을 들여 모두 교체해주었는데, 이것이 프레드릭의 눈에는 나약함과 돈낭비로 보여 분노를 샀다고 한다.[8] 때문에 프레드 트럼프는 당대 최고의 부동산 재벌 중 한 사람이었음에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상당히 드물었고, 오늘날 그의 영상 자료는 아들 도널드 트럼프에 비해 상당히 드물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