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기준 현직은 20대 총장인 윤동섭(의과대학) 총장이며 임기는 2028년 1월 31일까지이다.
의학자를 제외하고 보면, 연희전문은 물론 연세대학교 창설 이후에도 한동안 신학과 기초학문(철학, 교육학, 자연과학 등) 전공자가 주류였으나 90년대 중반 송자 총장 이후로 현대로 올수록 상경계열과 공학계열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2016년 사회학과에서 총장이 선출되면서 분위기가 바뀔 지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총장이 바뀔 때마다 학교의 슬로건이 바뀌는데, 이 슬로건은 학교 홈페이지 메인 페이지나 정문 들어와서 바로 보이는 제1공학관 외벽 그리고 학교에서 파는 기념품 등에 표기된다. 학생증에 찍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1860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난 뒤 캐나다로 이주하여 1876년 캐나다 온타리오 올만테 고교를 졸업했다. 1884년 토론토 대학 약학대학에 입학했다. 1890년에 토론대 의대를 졸업했고 1892년 조선에 왔다. 제중원에 의사로 들어왔고 고종의 시의를 겸했다. 1892년부터 1934년까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을 맡았고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다. 1916년부터는 연희전문학교장도 겸직했다. 1935년 캐나다로 돌아갔고 1956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숨을 거뒀다. 연세대에 에비슨관이란 건물이 있다.
1901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광주와 목포 등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1912년부터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되었다. 1921년 세브란스 학감, 1929년 부교장을 거쳐 1934년에 에비슨 교장이 퇴임하면서 직을 이어 받았다. 공창제 금지 운동에 나섰고 미군정 시기에도 청소년의 음주, 흡연을 금지해야 한다는 서한을 보냈다.[1] 정작 본인은 장로교 신자임에도 자유주의적 입장이라 술과 담배를 즐겼다. 그가 주장한 것도 어디까지나 청소년이었다. 그의 며느리 윤의경의 오빠가 윤보선이다. 첫 한국인 교장이어서 그랬는진 몰라도 외국인 선교사에 부정적이었다고. 1963년에 사망했다.
1896년생.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다. 세브란스 출신 첫 교장. 광복 후에 정계입문하여 동대문을 지역구로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2공화국 시절에 국회부의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68년에 사망하였다.
4대 최동(崔棟) 1945-1948
1896년생. 아버지가 순천군수였다. 본관은 해주. 출생은 서울. 일본에서 공부했다. 아버지는 도산 안창호랑 활동했다. 미국에 가 버클리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귀국 후에 세브란스의전에 들어가 조교로 근무하다가 중국과 캐나다 등에서 공부를 했다. 1929년엔 세브란스 의전 교수가 되었고 도호쿠대학(당시는 제국대학)에서 법의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세브란스의전 교수 자격으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의 모임에 참석해 황인 입장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올랐고 연세대에서는 교장 소개난에 최동의 경력을 사진과 재직 기간 외엔 공백으로 남겨 놓았다. 1947년에 세브란스를 6년제로 전환했다. 1973년 사망.
1895년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전과 노스웨스턴대학교 의대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엔 3.1 운동에 참여하느라 세브란스의전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 하는 등 항일운동을 했으나 1940년 치안유지법 위반 이후에 위의 최동처럼 동양지광의 모임에 참석해 "우리는 곧 신의 뜻으로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 신의 사도로서 타락한 미국인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대동아 전쟁의 의의가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하고, 우리들은 다만 최후까지 승리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은 발언을 했다. 무소속으로 1950년에 인천시 갑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1993년에 세상을 떠났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고 그 때문에 연세대 홈페이지 약력란이 삭제되었다.
6대 김명선(金鳴善) 1952-1957
1897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연희전문학교 수물학과를 공부한 뒤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2] 노스웨스턴대학 의과대학, 교토부립대학 의과대학을 나왔다. 1952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이 되었다. 1957년에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합쳐지면서 의무부총장이 되었다. 1982년 사망.
1859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다. 연세대 창설에 가장 메이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언더우드관이나 언더우드국제대학(UIC) 등이 그의 성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1872년에 미국으로 이민했고 1885년에 한국에 처음 와서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1915년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자 초대 교장이 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1999년에 묘를 양화진 외국인 묘지로 이전했다. 한국 이름은 원두우이다. 언더우드의 음차.
1대 교장 원두우의 아들이다. 1890년 서울에서 호레이쇼 언더우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뉴욕대학교를 나왔고 연희전문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폭로한 인물이기도 하다. 1928년에 연희전문 부교장에 올랐고 1934년에 에비슨이 퇴임하면서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1년에 일본에 의해 체포되면서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외국인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42년에 추방되었다. 그러자 미국 육군부 전략국에 들어가 특수임무를 맡았다. 한국어도 유창해 영한사전을 펴낸 적이 있을 정도라 한국어 통역도 맡았다. 그후 미군정 장관인 아놀드 중장과 하지 중장의 고문을 지냈다. 1947년에 연희대학교로 돌아왔고 6.25 전쟁 중인 1951년에 부산에서 사망했다.
189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을 졸업했고 1922년 서울로 돌아와 변호사 등록을 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3] 사건으로 일본에 체포된 뒤 전향서를 제출하였다. 그후 친일활동을 한 탓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갔다. 아버지가 유길준이다. 1947년에 사망했다.
1896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용재이며 연세대에 용재관이 있다. 유억겸의 도움으로 1927년에 연희전문의 교수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용 비행기 헌납 지원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를 지내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한 탓에 친일인명사전 예비수록자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공화국 시절에 문교부장관을 지냈고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 반박정희 운동을 참여했다. 1966년에 대통령 후보 단일화 추진 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했다.[4] 1969년에 국토통일원 고문이 되었으나 1972년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사퇴하였다. 최규하 정부에서 국정자문을 했고 전두환 정부에서 다시 국정자문에 추대되었다가 1985년에 사망했다.
1946년에 연전은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백낙준 교장이 그대로 유임되어 1957년까지 연희대학교장으로 재직했다. 1957년에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합쳐져 연세대가 개교했다.
189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1년 6개월 복역했다. 세브란스의전에서 외과를 수련했고 교토대학에서 외과로 석박사를 땄다. 세브란스의전 외과교수로 재직하다가 1945년 대구대학교 의과대학장이 되었다. 해당 대학은 뒤의 경북대학교 의대. 1951년 문교부 차관을 거쳐 1952년에 경북대 총장이 되었다. 1960년에는 연세대 총장이 되었고 1961년에는 세브란스병원장으로 이동했다. 총장을 하다가 부총장급으로 이동한 사례. 다만 병합 초기라서 아직 의전이 뒤섞였을 때였다. 1964년에는 숭실대학 학장으로 이동했다. 1966년에 사망했다.
190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대학을 나왔고 1946년 국립부산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가 국립부산대학교로 승격된 후 초대 총장으로 재직했다. 1961년에 연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기독교계의 인물이긴 하지만 연세대에서 교육을 받거나 교수로 재직한 적은 없었다. 1986년 사망했다.
1928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했다. 연희대학교 물리학과에 들어와 졸업했다. 1951년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하여 1955년까지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그후 연대로 돌아와 전임강사로 시작해 부교수, 정교수를 거쳐 이학부장, 기획실장, 대학원장, 교학부총장을 거쳐 연세대 총장에 올랐다. 전후에 학부를 나온 뒤에 연세대에서 교수로 커리어를 쌓아 올라간 첫 총장이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의 사촌동생이다. 2016년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연임한 총장이다.
1934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철학과 54학번으로 입학해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은 뒤 에모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연세춘추주간, 교무처장, 학생처장, 원주대학장(원주부총장) 등을 거쳐 총장에 올랐다. 퇴임 이후 광운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2013년 사망했다.
1936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1955년 연세대 상과대학에 진학했다. 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박사를 땄고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재무처장, 상경대학장을 거쳐 기획실장을 지낸 뒤에 박영식 총장에 이어 총장에 올랐다. 총장 퇴임 이후 명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이중국적 문제 등으로 며칠 만에 물러났다. 그래도 대교 회장, 명지학원 이사장 같은 일을 계속하며 잘나가긴 했다. 1977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 국적을 상실했으나 1984년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무국적자 상태로 한국에서 있다가 1993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13대 김병수(金炳洙) 1996-2000
1936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55년 연세대 의대에 진학했다. 시카고의대에서 인턴을 수료했다. 그후 하버드대 암센터에서 근무했고 1974년에 연세대로 돌아와 의대 교수가 되었다.
1940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957년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진학했다. 동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하고 1968년부터 교수로 재직했다. 공과대학 교학과장, 화학공학과 학과장, 연세춘추 주간, 학생처장, 총무처장, 공과대학장, 대외부총장 등을 거쳐 총장에 올랐다. 퇴임 후 참여정부의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과학기술부 장관(부총리)도 지냈다. 2008년부터 카이스트 초빙 교수로 재직했다.
1943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를 졸업한 뒤 연세대 경제학과 61학번으로 진학했다. 1971년부터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재무처장, 기획실장, 경영대학원장, 행정대외부총장을 거쳐 총장에 올랐다. 아내가 편입 청탁으로 돈을 받은 게 문제가 돼서 사임했다. 정총장의 발언에 따르면 아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빌렸으나 돈을 빌린 사람이 편입학 지원 대상자의 부모인 걸 알고 반환했다고 한다.
1948년생. 서울 출신으로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1982년부터 의대 교수로 재직했고 체육부의 하나인 농구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사회교육원장, 보건대학원장을 거쳐 행정대외부총장에 올랐다. 농구부장을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지냈는데 이때 활약한 선수가 서장훈, 우지원이다.
슬로건은 'Yonsei, leading the way to the future(존중하고 존경받는 대학)'
1953년생. 1973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1980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86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부터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여 왔다. 역대 총장 중 첫 사회과학대학 출신이다. (사실 교수 커리어의 절반 가량은 문과대 소속이었고, 교수 연구실도 위당관에 있긴 하지만...)
[1] 지금이야 미성년자의 음주, 흡연이 금기시되지만 과거에는 뱃속에 벌레 잡는다고 애들도 담배를 피웠고 술도 거리낌없이 마셨다.[2] 연세대학교를 모두 경험해 본 사람이다.[3] 기독교 계열의 인물들이 모인 단체.[4] 1967년 대선은 4년만에 이루어진 박정희와 윤보선의 재대결이었고 박정희가 압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