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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겐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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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gawa_kentaro.jpg
이름 오가와 겐타로(小川 健太郎)
생몰 1934년 1월 12일 ~ 1995년 10월 8일
출신지 일본 후쿠오카구루메
학력 후쿠오카 현립 메이젠 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소속팀 도에이 플라이어즈 (1954~1955)
주니치 드래곤즈(1964~1970)[1]
1967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가와 겐타로
(주니치 드래곤즈)
에나츠 유타카
(한신 타이거스)

1. 개요2. 현역 시절3. 검은 안개 사건4. 영구제명 이후5. 관련 문서

1. 개요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검은 안개 사건의 연루자 중 한 명.

2. 현역 시절

2.1. 사회인 야구 시절

후쿠오카 메이젠 고교를 졸업한 후 1954년 입단 테스트를 통하여 도에이 플라이어즈 유니폼을 입었지만 어깨 부상과 로케이션 문제로 1군 등판은 없었고, 거기다가 선배 선수와 주먹다짐을 벌인 것이 화근이 되어 2년만에 방출당했다. 이후 테루쿠니 해운, 릿카 등의 사회인 야구 팀에서 활동했으며, 1957년 도시대항 야구 남간토 대회에서 릿카 팀이 준우승 하는데 공헌하기도 했지만 한때 야구를 그만두고 출판사에서 일반 사원으로 근무하며 주말에 동호인 야구를 하는 정도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 뒤 친구의 권유로 야구를 다시 시작하여 덴카(화학회사)를 거쳐 종교단체인 입정교성회 소속으로 플레이 했고 1962년 도시대항 야구대회 때 니혼맥주의 보강 선수로 영입되어 전전 긴키와의 1회전 9회초부터 등판, 22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날 경기는 22회말 터진 오타 마코토의 끝내기 홈런으로 니혼맥주가 승리했는데, 상대팀 전전 긴키의 선발로 무려 21과 1/3이닝 동안 270개를 던지고 패전을 기록한 투수가 바로 나가야스 마사유키 였다. 그 뒤에 설명할 사건을 생각하면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싶다...

이후 사회인 야구의 에이스로 주목받게 된 오가와는 1964년 중간계투 요원 보강이 시급하던 주니치 드래곤즈의 입단 제의를 받고 다시 프로 세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고, 이미 슬하에 세 아들을 키우던 가장이었다.

2.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입단 당시 감독이던 스기우라 기요시와 사이가 좋지 못한 탓에 한동안 2군에 머물러 있었다. 1964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에 시달리던 주니치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스기우라를 휴양 명목으로 일선에서 퇴진시키고 수석 코치 니시자와 미치오[2]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는데, 니시자와의 뒤를 이어 수석 코치로 올라온 츠보우치 미치노리[3]가 오가와를 활용해 볼 것을 니시자와에게 건의했고[4], 니시자와는 이를 받아들여 오가와를 1군으로 콜업했다. 그렇게 기회를 잡은 오가와는 그 해 9경기에 중간계투로 등판하여 나름 활약을 보였다.

이듬해인 1965년,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하여 17승 9패, 평균자책 2.43의 호성적을 올리며 일약 주니치의 에이스로 자리잡았고 1969년 시즌까지 매년 두 자리 승수를 거두었으며, 특히 1967년에는 29승 12패, 평균자책 2.51로 다승왕 타이틀을 따내고 사와무라상까지 수상하며[5] 오가와로서는 생애 최고의 한 해를 구가했다.

이렇듯 늦은 나이에 프로에 입문하여 주니치의 에이스로 만개하던 오가와였지만...

3. 검은 안개 사건

평소 도박을 좋아하던 오가와는 야쿠자와 결탁하여 오토바이 레이스의 불법 베팅과 승부조작에 개입했다가 1970년 5월 6일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당했고, 같은 해 6월 3일 NPB 커미셔너 위원회로부터 야구 협약 상 통일 계약서의 불이행을 이유로 영구제명을 선고받으며 프로야구 계에서 쫓겨난 오가와는 그라운드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6]

오가와의 7시즌 통산 기록은 253경기 등판, 1254.1이닝, 95승 66패, 739탈삼진, 평균자책 2.62.

오가와는 평소 역기와 아령을 이용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온수 수영장에서의 수영 등, 당시로써는 선진적인 훈련 방법으로 자신을 단련하여 리그를 호령하던 에이스 투수로 성장했지만 도박의 유혹을 못 이기는 바람에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말하자면 일본 프로야구마레기 급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4. 영구제명 이후

야구계에서 추방당한 오가와는 스낵바를 운영하다가 나고야 시내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이후 도쿄로 올라와서 죽을 때까지 부동산 회사에 근무했다. 생애 말년에는 종종 아마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고 한다.

1995년 10월 8일, 향년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5. 관련 문서



[1] 1956~1963년 까지는 사회인 야구 선수로 뛰었다.[2] 불과 15세의 나이에 연습생으로 1937년 나고야군에 입단, 투수로서 1940년 시즌 20승을 거두었고 1942년에는 28이닝 311구 완투 무승부라는 기록을 세웠다. 어깨 부상 때문에 타자로 전향하여 1952년 타율 0.353, 98타점으로 타격, 타점 2관왕을 차지했던 입지전적의 야구인이며 핫토리 츠구히로와 더불어 주니치의 유이한 영구 결번 선수이다. 일본프로야구 연습생 신화로 니시자와와 노무라 카츠야를 주로 예시로 든다.[3] 坪内道典(1914~1997). 현역 시절 2번의 도루왕과 통산 344도루를 기록한 1번 타자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선구안이 뛰어나서 골드스타감독 겸 선수로 뛰던 1946년 시즌에 불과 6개의 삼진만 당하며 100경기 이상 출전, 규정타석 이상 선수들 중 시즌 최소삼진 타이 기록(최초 기록. 이후 1951년에 타격의 신 카와카미 테츠하루, 그리고 사카자와 마사오라는 선수가 타이 기록을 수립했다.)을 보유하고 있다.[4] 츠보우치는 오가와의 사회인 야구 시절 활약을 기억하고 있던 인물이었다.[5] 최고령 사와무라상 수상(수상 당시 33세)이며, 언더핸드 스로 투수 최초의 수상이기도 하다.[6] 오토바이 레이스 불법 베팅과 승부조작과는 별개로 야구 시합 중 조작행위에 관여했다는 의혹도 있었지만 오가와는 법정에서 이 사실을 부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