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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07:29:56

오다 나가마스

오다 우라쿠사이에서 넘어옴
파일:1042px-Oda_Nagamasu.jp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혼노지의 변 이후2.3.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織田長益
(1547 ~ 1621)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승려, 다도가.

전국시대 격동의 중심이었던 오다 가문에서 천수를 누린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우라쿠사이 죠안(有楽斎如庵)이란 불교식 법호로도 알려져 있으며 설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센노 리큐의 수제자들인 리큐 십철의 일원으로 꼽히기도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오와리다이묘오다 노부히데의 11남으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와는 13살 터울 동생이자 그의 아들인 오다 노부타다에게는 숙부가 된다. 어렸을 때는 겐고로(源五郎)란 이름으로 불리다가 장성한 후에 나가마스로 개명하였다. 조카인 노부타다의 휘하에서 나가시노 전투에 종군했고, 이후 1581년에는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벌인 열병식에 참가했다.

2.2. 혼노지의 변 이후

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변이 발발했을 때도 노부타다와 함께 니죠 성에서 주둔하고 있던 중 아케치 미츠히데 군의 공격을 받아 그곳에서 농성하다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여 아즈치 성을 경유해 기후로 피신했다. 이후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 아래로 들어갔다.

이후 1584년에 미츠히데와 시바타 카츠이에를 연파한 하시바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코마키(小牧), 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대치하자 나가마스는 노부카츠를 따라 이에야스를 지원하며 사절로 활약했으나 히데요시 측의 우위가 굳어지자 이후 두 진영 사이의 화친을 중재하고, 히데요시의 대군세에 포위당한 삿사 나리마사를 항복시키는 데도 공을 세웠다.

오다와라 원정 후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 의해 개역을 당한 후 나가마스는 별도로 셋츠 국의 2천 석 다이묘가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며 '유라쿠사이(有楽斎)'라고 자칭하고 센노 리큐 아래에서 다도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후 나가마스의 다도는 '유라쿠류(有楽流)'라고 하는 일파를 이룬다.

2.3.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데요시 사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했고, 전투 중 이시다 미츠나리의 가신 가모 요리사토에게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전후 야마토국에 3만 2천 석 영지를 받았다. 하지만 조카인 요도도노의 후견인을 자처한 나가마스는 오사카 성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그녀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 측에 남아 있었다. 겨울 전투 때 이에야스 쪽에 인질을 보내면서 양측의 화의에 진력했지만,[1] 여름 전투를 앞두고 더 이상 오사카 성 안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히데요리의 허락을 받고 성에서 나왔다. 이후에는 영지를 자식들에게 나눠준 채 교토에서 은거하며 다도에만 전념하다 1621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동군에 가담했지만, 종손[2]오다 히데노부[3]는 서군에 가담했다. 물론 임진왜란까지 끝난 판국이라 오다 노부나가 가문은 이미 망한 지 한 참 되었으니 별 의미는 없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파일:織田長益.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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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1] 이에야스의 밀명을 받고 오사카 성 안에서 내부공작을 벌였다는 설도 있지만 확증은 없다.[2] 형이나 아우의 손자[3] 형인 오다 노부나가손자다.[4] 그러나 재밌는 것은 유라쿠, 에이라쿠 둘 다 오다와 연관이 있는 네이밍이라는 것. 유라쿠는 본인의 이름이니 말할 것도 없고, 에이라쿠는 오다 노부나가의 하타지루시였던 영락통보의 그 영락이다.[5] 나가마스의 통칭인 겐고로를 뜻한다.[6] 음력 날짜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