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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利休
(1522년 ~ 1591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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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인(茶人).와비차(わび茶) 사상 등 참선을 접목한 다도법을 확립시켰으며, 일본에서 다성(茶聖)[1]으로 추앙받고 있다. 보통 센노 리큐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와비(侘び)란 한가로우면서도 간소하고 검소한 아취를 말하는 것으로, 명기만을 쫓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 금욕주의를 설파하는데 있었다. 물레를 돌리지 않고 손으로 점토판을 붙여 만든 라쿠야키(楽焼)나 모즈야 가마(万代屋釜)[2] 등, 화려한 조형미나 장식을 부정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화병도 죽세공만을 이용해 제작했다.
본래 닛타 사토미 씨(新田里見氏)[3]로, 도시조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타나카 요시키요(田中義清)다. 그래서 부친 때까지 타나카 씨였으나 리큐가 센 씨로 바꿨다. 한국의 혹자는 센노 리큐가 한국에서 건너간 천씨가 아니겠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딱 잘라 아니다. 조부 이름이 센아미(千阿弥)여서 첫 글자를 땄다고. 센아미는 아시카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직속 연예인[4]이었다.
아명은 요시로(與四), 법명은 소에키(宗易), 호센사이(抛筌斎, ほうせんさい) 등이 있는데,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처음 연을 맺을 당시 그의 이름은 '센 소에키'였다.
리큐라는 이름은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오기마치 천황에게 차를 진상하는 킨츄 다도회(禁中献茶) 때 당시 일본 다도의 1인자로서 배석해야 했으나, 그의 원래 계급인 상인의 신분으로는 궁내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거사 칭호를 하사받은 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리큐를 붙일 때는 성씨 뒤에 존칭인 ~노를 붙여 센노 리큐라고 부른다.[5]
2. 생애
1522년 센노 리큐는 사카이에서 타나카 요효에(田中 与兵衛)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효에는 사카이에서 가장 큰 어물전과 창고를 운영했다고 한다. 사카이 상인조합이라 할 수 있는 에고슈(会合衆) 중에서도 손꼽히는 나야 10인방(納屋十人衆) 중 한 사람이었다. 리큐의 조부인 센아미는 앞서 기술했듯 막부 소속 연예인일 뿐으로 요효에는 자수성가한 대상인이었다.리큐는 키타무키 도친(北向道陳)과 타케노 조오(武野紹鷗) 등에게 다도를 사사하고, 다도의 새로운 개혁을 꿈꿨다. 다도를 가다듬기 위해 참선 수도에 들어가 난슈지(南宗寺)의 주지승 다이린 소토(大林宗套)에게 소에키라는 법명을 받았다. 다도를 가다듬고 공부하는 틈틈이 집안 어물전 경영도 도왔다고 한다. 40대 중반 때까지 일과 공부를 병행했는데, 현재 리큐를 다루는 극들 중 일부에서도 그를 토토야(漁屋)[6]라고 부르는 장면이 왕왕 있다.
1568년 오다 노부나가가 꼭두각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사카이 항구를 직할로 받을 때인 47세에 오다 가에 다두(茶頭)로 고용돼 이때부터 다도를 완성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혼노지의 변 후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으며(61세 때), 1585년 일본 황실에서 열린 긴추 다도회 때 리큐라는 거사호를 받는다. 리큐를 파자(破字)하면 '이익을 다투는 마음, 휴식케 하라(「利心、休せよ」)'로, 자기 재능을 믿고 허우적대지 않는 '로고추(老古錐)'[7]의 경지에 다다르도록 하라는 뜻이라고.
1587년(66세) 다이묘들은 물론 평민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키타노 대 다도회(北野大茶湯)를 주관하는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히데요시의 주라쿠 성 내에 저택이 내려지고 주라쿠다이(聚楽第, 히데요시의 궁전) 축조에 관여하거나 녹봉 3천석을 받는 등 다인으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히데요시의 대표 문화유산 중 하나인 황금다실의 설계도 그가 맡았고, 소안다실(草庵茶室)의 창설, 라쿠야키(楽茶碗)[8] 제작, 죽화병(竹の花入) 제작 등 와비차(わび茶) 사상의 완성에 매진한다. 일단 히데요시부터가 꼭 리큐를 끼고 다이묘들을 만났다. 리큐의 인맥은 당시 일본의 한다하는 인물들 모두를 아우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사치스런 빨간색이나 황금색 등의 화려한 작품에만 관심을 보이자 검은 도자기만을 강요하고 꾸짖는 등, 사사건건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리면서[9], 급기야 히데요시가 리큐를 증오하게 되었다. 이후 1591년에 교토의 사찰 다이토쿠지 삼문(사찰입구에 짓는 큰문)에 센노 리큐의 목상을 안치한 것[10]과 다기의 감정(센노 리큐는 도자기 진품 가품 감정도 했다)에 부정이 있다는 등에 트집이 잡혀 가택연금됐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가택연금으로 끝낼 생각이 없어 오대로(大老) 마에다 토시이에 등이 구명한 보람도 없이 리큐는 할복했다. 향년 70세. 제자들 중에 다테 마사무네 등 다이묘 제장들을 경계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시켜 리큐의 저택을 감시했다.
문제가 됐던 그의 목상도 참수된 후 효수됐다. 그래도 목상은 에도 막부 때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 삼문에 다시 안치돼 오늘날에 이른다.
그가 죽은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공을 감행한다.
3. 제자 및 후손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끝자락이었던 당시 그의 제자들은 신분 고하를 망라했는데 당시 전국 다이묘들은 물론, 일본 귀족인 쿠게(公卿, 공가)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7명을 '리큐 7철'이라 해서 후루타 오리베, 호소카와 타다오키, 가모 우지사토, 타카야마 우콘, 시바야마 겐모츠, 세타 마사타다, 마키무라 토시사다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구와야마 시게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다테 마사무네 등도 그의 제자였다.센노 리큐는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의 배다른 여동생인 전처와 사이에서 1남 4녀를 얻었으나 부부 금슬이 좋지는 않았다고. 딸들은 사무라이가 아닌 당대 문화인들에게 각기 시집을 갔다. 그 중에서도 차녀는 꽤 미모를 자랑했던 모양으로, 일설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음에 들어 "내 밤수청을 들이라"고 리큐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으나 리큐가 아비된 입장으로 거절하면서 모든 사단의 원인이 됐다고도 한다. 4녀 오긴(吟, ? ~ ?)은 1996년 NHK 대하드라마 <히데요시>에서는 하시바 히데나가의 부인으로 묘사되나, 실제로는 혼노지의 대처승 엔죠보 소엔(円乗坊宗円, ? ~ ?)의 부인이라고. 장남 도안(道庵, 1546 ~ 1607)은 리큐가 처형된 후에도 여러 다이묘들의 구명으로 살아남아 다도를 이었다.
리큐는 1577년 음력 7월 16일 전처를 잃었는데, 재혼 상대는 노(能)의 달인 미야오 산뉴(宮王三入)의 미망인으로서 다도에도 조예가 깊던 소온(宗恩)이었다. 그녀는 죽은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나[11]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두 부부가 중년에 만났음에도 금슬이 좋았는지 새로 아들 소린(宗林, ? ~ ?), 소겐(宗幻, ? ~ ?)을 얻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려서 모두 죽는다. 그녀를 사랑했던 리큐는 비록 자기 씨는 아닐지라도 산뉴의 아들인 소안을 자기 막내 친딸 오카메(亀, ? ~ 1606)와 결혼시키고 양자로 삼은 후, 장남 도안과 함께 자신의 대를 잇게 했다.
친아들 도안은 불행하게도 후사없이 1607년 자연 병사해 후계는 오직 소안만이 남았다. 바로 소안의 후손들이 소위 삼천가(三千家)인 오모테 센케(表千家), 우라 센케(裏千家), 무샤코지 센케(武者小路 千家)로서 현재도 센노 리큐의 다도를 계승하고 있다.[12] 센노 리큐를 모시는 대법회는 3천가 공동으로 매년 3월 교토 다이도쿠지에서 거행되고 있다.
본가인 오모테는 대대로 이에모토(당주 : 대체로 종손이 계승함)에게 센 소사(千宗左)라는 이름을 계승하게 하고 재단법인 후신안(不審菴)의 이사장을 겸해 리큐의 다실 후신안(不審菴)을 관리하게 한다. (이에모토의 후계자는 와카소쇼(若宗匠)라고 칭하고 센 소엔(千 宗員)이라는 이름을 받으며 가원이 되면 소사가 되고 생전에 은퇴하면 센 소탄(千宗旦)으로 바꾼다) 현재 가원은 15대 센 소사다. 방계 우라센케는 가원에게 센 소시츠(千宗室)라는 이름을 계승케 하며, 16대 소시츠가 현재 가원이다. (후계자는 센 소시(千 宗史)라는 이름을 받으며 가원이 은퇴하면 센 겐시츠(千 玄室)이라는 이름을 쓴다.) 리큐의 다실 중 소탄이 은거 후 머무른 콘니치안(今日庵)을 관리하며 역시 재단법인화시켜 소시츠가 이사장을 겸한다. 무샤코지는 리큐의 다실 칸큐안(官休庵)을 관리하며, 가원에게 센 소슈(千宗守)를 계승하게 한다. (후계자는 센 소오쿠(千 宗屋)라는 이름을 받으며 가원이 은퇴하면 센 소안(千 宗安)이라는 이름을 쓴다.) 14대 소슈가 현 가원이다.
본가 오모테센케는 무려 1642년부터 키슈 토쿠가와[13]의 다도 선생(茶頭)을 맡아왔으며, 키슈 도쿠가와의 용달역이었던 미츠이(三井) 집안과도 왕래가 많아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미쓰이 재벌로부터 큰 후원을 받기도 했다.
우라센케는 4대 소시츠인 1652년부터 카가 번주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 1594 ~ 1658)의 다도 스승으로서 영지 150석과 코마츠 성 외곽의 대저택을 하사받는다. 5대 소시츠는 히사마츠 집안인 이요 국 마츠시마 번[14]에 고용돼 옮겨가나 후손 중 일부는 마에다 집안에 남았다. 6대 소시츠는 도쿠시마 번 하치스카 집안에 고용되는 등 다도를 보급하기 위해 제일 폭넓게 활동했다. 15대 소시츠는 전쟁의 공포를 경험하고[15] 세계평화를 천명하여 다도의 세계 보급에 힘써 우라센케를 산센케 중 가장 큰 규모로 확장되도록 했다.
현재는 16대 소시츠에 이르렀다. 우라센케의 16대는(본명:센 마사유키(政之),1956년 생) 1983년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6]의 차녀 마사코 공주와 결혼했다. 교토 출신으로 재단법인 콘니치안(今日庵) 이사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도시샤대학을 졸업했고, 호는 사보사이(坐忘斎). 저서에는 <어머니가 사시던 곳(母の居た場所)>, <나의 24절기 일기(私の二十四節季日記)> 등이 있다. 마사코 공주는 1951년생으로, 남편 소시츠보다 5살 연상이다. 황족들이 다니는 가쿠슈인대학 법학과 재학 중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마사코 공주는 음탕한 생활로 스캔들이 있었지만[17], 결혼한 후에는 별탈없는 모양이다. 둘은 1984년 장남 아키후미(明史), 1987년 장녀 마키코(万紀子), 1990년 차남 타카후미(敬史)를 낳았다(2남 1녀). 아키후미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 타카후미가 와카소쇼로서 향후 당주가 되기 전까지 사용할 센 소우시(千宗史)라는 이름을 받았다.
무샤코지 집안은 1666년부터 사누키 국 타카마츠 번 마츠다이라 집안에 고용돼 다도 스승이 된다. 6대 소슈 때 대가 끊어져 사무라이 집안에서 양자를 들여 7대로 이어지게 되지만, 이후 삼천가가 정립돼 다도가 융성하며 무샤코지 집안은 다른 두 집안에 필적하는 세를 자랑하게 된다.
4. 여담
-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란 한 번의 만남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무사도 정신이 함축된 일본 정신의 정수로 표현되는 말로서, 센노 리큐가 처음 썼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의 제자 야마노우에 소지(山上宗二, 1544~1590)가 ‘일 평생 단 한 번의 만남[一期に一度の会]’이라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야마노우에 소지는 호조 집안에 다도 스승으로 가 있었는데, 오다와라 정벌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라 같이 진중에 와있던 스승 리큐를 만나러 왔다가 호조의 간첩으로 몰려 죽었다. 코와 귀가 잘려 효수됐다고 한다. 리큐와 히데요시의 사이가 벌어지는 데 이 사건이 일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 리큐의 소안 다실(草庵茶室)이란 다다미 2첩, 잘해야 3첩 정도(약 1평에서 1.5평)의 침실 넓이 밖에 확보할 수 없는 서민들의 사정에 맞춰 지어진 다실로서 와비차 사상의 모델하우스 역할도 겸하는 것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세도가들을 좁은 공간에 구겨 넣고 일반 서민의 생활 감각을 간접 체험하도록 했으며, 문 높이를 절반만 열어두어 어떤 누구라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는 다실에 들어올 수 없도록 했다. 특히 사방 창문을 최소화하고 황토벽 등을 이용해 아늑한 분위기를 내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서 필요한 광량은 사방 좁은 창문으로 들이는 방법으로 호스트와 게스트 간의 긴밀한 대화를 유도하도록 고안했다. 나중엔 천장 부근과 공조 장치 부근까지 광량 조절에 이용할 수 있도록 개량되기도 한다. 그의 소박하고도 치밀한 고안으로 만들어진 다실들은 일본인들의 미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 원래 자연풍광 등을 인테리어로 끌고 들어오는 조선의 미의식과 달리 공간의 목적 자체에 집중하는 일본의 인테리어에 로지(露地)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었다. 다실까지 이어지는 조경의 풍류 역시 다도의 한 부분으로 삼고, 다실 바깥까지 손님 대접의 한 부분으로서 적극적인 다도 공간으로 이용했다. 차를 마시러 오는 과정과 마시고 떠나는 과정까지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을 이식했다.
- 그의 전처가 죽은 것은 1577년이나 후처인 소온과 이미 내연 관계였다는 관측이 있다. 소온은 원래 이름이 오리키로 칸제류(觀世流) 코츠즈미의 명인이자 리큐의 노가쿠 스승 미야오 산뉴의 처였다. 다시 말해 리큐는 사모와 새 살림을 차린 셈. 미야오 산뉴는 1553년 타계했는데, 리큐는 졸지에 유복자가 된 소안(少庵)의 뒷바라지를 해 처음부터 내연 관계가 아니었을까 의심을 받는 중이다. 소온과 사이에서 낳았다가 잃은 두 아들의 생몰년대도 불분명하긴 하지만 리큐가 전처를 사별한 1577년 이전일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소온은 리큐의 다도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 큰아들 도안은 1546년 생으로 리큐와 사이가 나빠 집을 나갔다가 리큐가 환갑 넘어 성공한 후에야 화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도가 깊지 않아 히데요시에게 발탁되는 일은 없었지만 리큐 처형 때 리큐의 아들이라는 죄 하나로 가나모리 나가치카의 비젠 오쿠라야마 성[18]에 유배돼 근신에 들어갔다. 3년 후인 1594년 사면돼 교토로 돌아왔지만 없는 듯 살았고 자식은 없었다. 의붓동생 소안과는 원래도 사이가 안 좋았지만 다도에서 은근히 계속 비교를 당해서인지 다도회나 리큐 제사 때조차 서로 모른 척을 했다고.
- 양아들 소안 역시 1546년 생으로 도안과 동갑이긴 하지만 동생이다. 센씨 집안 문서에 따르면 소안은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고, 어디까지나 양아들이라 리큐를 계승하는데 있어 제약이 많았다고 한다. 리큐 처형 직후 가모 우지사토의 감시 아래 근신에 들어갔다. 역시 1594년에 사면됐지만 정치계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양아버지 리큐에게 직접 다도를 전수받긴 했으나 직접 계승은 자기 아들 소탄에게 사양해, 센씨 집안의 재흥은 3대 센 소탄(千 宗旦)이 이뤘다. 센 소탄의 어머니는 리큐의 막내딸 오카메이기 때문에 소탄은 리큐와 직접적으로 혈연 관계가 있다. 현대 센씨 3집안은 센 소탄의 아들들의 후예들이다.
- 일본어 위키에는 현대 삼천가의 공동 조상인 2대 센 소안이 예능인 산뉴의 아들이 아니라 마츠나가 히사히데(1510년 생?)의 사생아라는 설이 부상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리큐의 재취인 소온이 마츠나가 단조의 첩 출신이라는 설이다. 원래 통설인 소온이 산뉴의 처라는 것은 산뉴가 타계한 1553년과 리큐 소온 커플의 1578년 재혼 사이의 장장 25년의 간극을 사모와 제자의 불륜 정도로 밖엔 설명하기 어렵다. 그에 반해 마츠나가 단조가 도자기를 껴안고 자폭한게 1577년이니 1578년의 재혼이 아귀가 딱 들어맞는 면도 있다. 게다가 리큐와 단조는 모두 다케노 조오(武野紹鷗)의 제자로 사형사숙 지간이다. 무사도를 중시하는 일본에서 삼천가의 다도에 마츠나가의 사무라이 정신이 깔려있다는 식의 설명도 보인다. 일본어 원문이라도 보고 싶은 사람은 아래 항목의 pdf파일을 참고하도록. 아니면 산뉴의 처가 맞는데 마츠나가 단조의 첩실을 거쳐 리큐한테 온 건지 어떤 건지도 확실한 게 하나도 없다.
- 수박과 관련된 일화가 둘 있다.[19] 히키 햐쿠오(飛喜百翁)라는 사람에게서 설탕을 뿌린 수박을 대접받았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설탕이 묻지 않은 부분만 먹고는 "수박에는 수박만의 맛이 있다" 며 제자들에게 설파한 것. 다른 하나는 다회에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의 일화인데, 여기서는 수박에 소금을 살짝 쳐서 내와 수박의 단맛을 한층 끌어올렸다고 한다. 당대의 설탕은 사치품이어서 소박함을 좋아하는 리큐로서는 취향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냥 지나친 단맛이 싫었을 뿐인 걸지도...
5. 참고
우라센케(裏 千家) 재단법인 콘니치안 영문 홈페이지'센 소탄의 뿌리를 두고 일어난 리큐 혈통 논쟁에 대해' pdf파일(일본어) - 마츠나가 단조와 센케의 연관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음.
6. 창작물에서
자세한 내용은 센 리큐/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차의 성인.[2] 소박한 화로 모양의 다기로 사위 모즈야 소안에게 주어져 모즈야 가마라 명명됨[3] 미나모토노 요시시게의 후손들[4] 도보슈(同朋衆): 막부 직속 연예인들. 무로마치 막부를 넘어 메이지 유신 직전인 1866년까지 존속.[5] 예: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타이라노 키요모리 등[6] 어물전의 중세 일본어.[7] "오래 써 뭉툭해진 송곳 같은 경지"란 뜻의 일본 참선 용어.[8] 발로 물레를 돌리지 않고 고령토 판대기를 손만을 이용해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9]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방 전체를 금박으로 도배한 다실을 만들고 센노 리큐를 초대했는데, 이 방을 본 리큐는 정색하며 "진정한 차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면서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있다.[10] 사실 센노 리큐가 다이토쿠지 삼문을 공사하는데 큰 돈을 기부 하였는데, 절에서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센노 리큐의 목상을 만들어 삼문(三門 사찰입구에 짓는 큰문) 2층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사실을 알고 리큐의 계속된 직언이 거슬리던 차에 "나의 칙사가 드나드는 삼문 2층에 리큐의 목상이 있는 것은, 나를 발 아래 놓겠다는 의미다!!"라고 해석, 불경죄의 누명을 씌워 죽이기로 했다.[11] 후일의 소안(少庵)[12] 오모테(表)가 본가, 우라(裏)와 무샤코지는 방계다. 3개 유파 중 우라센케가 가장 규모가 크다고. 근데 사실은 오모테 센케는 소안의 아들 소탄의 3남 소사, 무샤코지 센케는 소탄의 차남 소슈, 우라센케는 4남 소시츠의 후손인데 소슈가 다른 집안에 양자로 갔다가 소탄의 말년에 돌아오는 바람에 종가가 되지 못하고 3남 소사가 소탄의 후계자가 되어 오모테 센케가 종가가 되었다[13] 와카야마현을 다스리던 도쿠가와 막부의 방계[14]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의 무대. 아키야마 형제들의 고향.[15] 징집되어 조종사로 복무.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도 다도를 계속한 모습의 귀중한 자료사진이 남아 있다. #[16] 다이쇼 덴노의 4남[17] 근래 일본 황실에서는 나루히토 덴노의 6촌 동생 츠구코 공주가 비슷한 짓을 해 구설수에 올랐다.[18] 기후 현 휴양지 가루이자와 근처의 산골 중에 산골[19] 야사라고도 하는데, 일본에 수박이 본격적으로 널리 퍼진 때는 에도시대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