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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0:43:16

다카야마 우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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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 7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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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akayamaUkon.jpg

高山右近
Blessed Justo Takayama Ukon
(1552년 ~ 1615년 2월 5일)
파일:타카야마 우콘.jpg
나가사키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 전시된 다카야마 우콘

1. 개요2. 생애3. 여담4. 시복시성5. 기타 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에도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복자이기도 하다. 정식 이름은 여럿 있으나, 후대에는 우콘으로 통칭하며 흔히 히코고로(彦五郞)라고도 부른다. 기리시탄으로 유명하며, 세례명은 유스토(Justo)이고[1] 2017년에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다인(茶人)으로도 유명하여, 리큐 칠철(利休七哲) 중 한 사람이다.

2. 생애

다카야마 가문은 셋쓰(摂津)국[2] 미시마(三島)군[3]의 지방영주이다. 아버지 다카야마 도모테루(友照)가 당주를 하던 무렵, 다카야마 가문은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 휘하의 무장으로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를 따르고 있었다.
1552년 우콘이 태어났으며, 12세 무렵에 기리시탄으로서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부모 대에 이미 예수회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1564년 미요시 나가요시의 사망으로 미요시 가문은 몰락일로를 걷고,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쇼군위를 물려받으면서 셋쓰의 정세는 급변한다. 요시아키는 셋쓰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다카야마 가문은 세 다이묘 중 하나인 와다 고레마사(和田惟政)에 종사한다. 하지만 좁은 셋쓰 땅이 셋으로 나누어지면서 영토를 놓고 서로 다투는 혼란상이 벌어진다.

1571년, 다카무라 가문의 주군인 와다 고레마사가 또다른 셋쓰 지역 다이묘인 이케다(池田) 씨 휘하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등에 패배한다. 승기를 탄 아라키 무라시게는 이케다를 배신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결탁, 셋쓰 땅따먹기에 돌입하고 결국 다이묘 지위에 오른다.

한편 다카야마 도모테루(우콘의 아버지)와 우콘은 와다 고레마사를 계승한 고레나가(惟長)와 사이가 틀어져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다카야마 부자는 아라키 무라시게의 조언을 얻어 주군을 칠 계획을 세운다.[4]

1573년 고레나가가 화해를 청하는 척하며 살해하려는 계략으로 다카야마 부자를 소환하자, 다카야마 부자는 가신들을 이끌고 고레나가를 야습하였다. 고레나가는 황급히 고향으로 도망치고, 다카야마 가문은 승리했다. 하지만 우콘은 야습 중 아군의 실수로 거의 목이 베이기 직전의 중상을 입고 겨우 목숨만 건졌다.

이후, 다카야마 부자는 와다 가문의 2만석 영지를 흡수하여 다카쓰키(高槻)[5] 성주가 되었다. 그리고 도모테루는 50세가 되자 우콘에게 성주의 지위를 양위했다.

1578년 아라키 무라시게가 갑작스레 오다 노부나가에 반란을 일으켰다. 우콘은 은인인 아라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반란을 진압하러 온 노부나가는 선교사와 기리시탄들의 목숨으로 다카야마를 위협하였다. 고민에 빠진 우콘은 성을 무라시게에게 돌려주고, 가족들을 성에 남겨둔 채 단독으로 노부나가에 투항했다. 다카야마 우콘과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淸秀) 등의 이반으로 아라키는 결국 패하여 모리(毛利) 가문에게 도망치고 만다. 이 공으로 우콘은 성을 돌려받고 4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게 된다.

1582년 노부나가의 사망 이후, 우콘은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세력에 들어가길 거부하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막하에 들어가 분전했다. 다카야마는 전쟁 중에 아즈치(安土) 성에 있던 세미나리오(seminário: 신학교)를 자신의 본거지인 다카쓰키 성으로 옮기기기도 했다. 이후에도 히데요시 휘하에서 다양한 공훈을 세웠으며, 우콘의 영지도 착착 넓어져갔다.

그 와중에도 포교활동은 계속 되었으며, 그의 인덕에 이끌려 기리시탄 영주들은 크게 늘어났다. 유명한 인물로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 곧 구로다 간베에)는 세례를 받았으며,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등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동시에 영지 내의 절과 신사를 허무는 정책을 실시했고, 신도나 불교 측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컸음은 당연지사.

1585년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이에 기리시탄 무장들까지 압박을 받게 되었고, 구로다 간베에 등 종교를 포기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우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지와 가산을 포기할 것을 천명했고, 스스로 추방자가 되었다. 이후 기리시탄 영주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로 들어가 은거했다.

1588년부터는 기리시탄에 호의적이던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의탁했는데, 1590년 오다와라의 싸움에는 추방자의 몸으로 마에다군에 종군하여 가네자와(金澤) 성을 쌓을 때 뛰어난 건축술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마에다 가문의 상담역으로 활동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리시탄 추방령을 내리자, 우콘은 마에다의 영지를 떠나 가족과 함께 선교사들을 따라 필리핀마닐라로 떠난다. 마닐라에 도착해 신앙의 수호자로 대환영을 받기는 했지만, 노령의 몸으로 장거리 여행은 무리였는지 병을 얻어 1615년 향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귀국을 허락받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3. 여담

수만석의 영지와 권력, 부, 지위, 명예를 모두 포기하고 신앙을 택한 인물. 최종적으로 성공한 무장은 되지 못했을지언정 성공한 신앙인이 된 셈이다. 일본 가톨릭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도록 신청하기도 했다. 평등사상을 가져서 솔선하여 천민들에 대한 차별을 반대했다고 한다. 영민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한편으로 사원을 훼손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인으로서도 유명했으며, 센노 리큐(千利休)의 제자로 오다 우라쿠사이(織田有樂齋) 등과 친분을 쌓았다. 우라쿠사이는 그의 다풍에 대해 ‘다 좋은데 결벽증이 있는 듯하다’고 평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전쟁포로와의 인연도 있다. 승려 출신으로 일본에 전쟁노예로 끌려간 카이요라고 하는 사람은 사제들과의 교류로 감명을 받아 가톨릭으로 신앙을 바꾸고 예수회에 입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입회 허가가 되지 않자 카이요는 키리시탄 다이묘인 다카야마 우콘의 부하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키리시탄 추방령이 내려지고 주군이 필리핀 마닐라로 쫓겨나자 같이 동행하였다. 카이요는 우콘 사후에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잡혀 1624년 화형당하였다. 그는 사형당하기 며칠 전에 예수회 입회허가가 떨어져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가 되었고 예수회에 입회하겠다는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위의 사진처럼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 다카야마 우콘의 조각상이 있듯이 카이요에 대한 비석도 다른 층에 있다.

성 근처의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관을 직접 들어 영민들을 감동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에 천민들이나 관을 들었기 때문이다.

4. 시복시성

일본 가톨릭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타국에서 객사한 그를 순교자로서 시복시성을 추진하였다. 일본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1867년 시복된 '205 순교자'이외에 '베드로 키베[6]와 187순교자'라는 이름으로 시복시성을 추진하였는데(2008년 시복), 그는 '순교자 다카야마 우콘'라는 이름으로 단독으로 시복시성이 추진되었다. 그만큼 일본 가톨릭에서 다카야마 우콘은 위대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

2017년 2월 10일, 일본 오사카 성 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리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그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여기사 복자로 시복되었다. 축일은 2월 3일이다.

다카야마 우콘이 20여년간 종군했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본거지, 가나자와성의 바로 근처에 천주교 나고야교구 가나자와 예수성심성당이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동상 및 초상화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또한 그의 행적과 관련 있는 곳을 순례지로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시복 이후인 2017년 10월, 복자 다카야마 우콘의 성유물[7]이 가나자와 성당에 안치되어 많은 신자들의 공경을 받고 있다.

천주교 오사카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인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가라샤와 함께 동상이 세워졌다{출처).

5. 기타 매체에서

파일:高山ジュスト .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세례명인 타카야마 쥬스트로 등장하며, 합전과 내정모두 70대인 B급 무장이다.

태합입지전5에서도 등장. 여기서의 이름은 다카야마 시게토모(高山重友)이다. 능력치 자체는 통솔 53, 무력 48, 정무 70, 지모 65, 매력 72(+3 다도칭호)로 고만고만한 편이지만 건축, 개간, 광산등 내정쪽 능력치가 좋은 편. 산술, 변설 기능이 구려서 직위가 낮을때는 마땅히 맡길만한 임무가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그의 삶을 다룬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이 있다.

만화 효게모노에선 주인공 후루타 시게나리(후루타 오리베)의 제부(여동생의 남편) 관계이며, 둘이 뭉쳐 여러 기행을 저지르고 다니곤 한다. 다테 마사무네가 도요토미에게 투항하러 가는게 두려워 둘에게 조언을 구하자, 마사무네에게 백의(심지어 하이그레에 가까운)를 입혀 투항시키게 했는데, 이 것이 도요토미의 배꼽을 잡게 만들어 화해무드를 조성, 의외로 일을 성공시키기도 한다.

2014년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에도 등장. 대표적인 기리시탄 무장으로 묘사된다.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에서도 등장한다. 정사에 기록된 대로 신앙을 지키고자 영지와 가산을 포기하고 추방된 이후에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고니시와의 대화에서 고니시에게 '당신은 지금 현혹되고 있다. 히데요시를 따라선 안 된다.'라며 히데요시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루시퍼)라고 칭한다.



[1] 쥬스토라고도 읽는다.[2] 현재의 오사카시를 포함한 오사카부의 북부와 고베시 일부를 포함한 효고현 남동부에 해당.[3] 지금의 오사카부의 미시마군[4] 참고로 아라키 무라시게는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위인이다.[5] 지금의 오사카부 다카쓰키시[6] 일본 출신의 예수회 소속 가톨릭 신부. 최초의 일본인 신부이기도 하다. 1587년 지금의 오이타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이묘였던 오토모 소린의 중신이었으나 키리시탄 추방령이 선포되자, 가족을 이끌고 마카오로 떠났다. 키베는 사제가 되기 위해 로마유학을 하였으며, 일본인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마르코 폴로라고도 불린다. 1620년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인도에서 사목을 하다가 일본의 천주교 박해가 매우 심하다는 전갈을 받고 선교를 위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1630년 일본에 돌아온다. 9년간 박해의 눈을 피해서 선교활동에 전념하다가 센다이에서 체포되어 에도에서 순교한다. 2008년 187위 순교자와 함께 시복되었다.[7] 그가 생전에 입었던 조끼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