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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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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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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
عمر
파일:800px-20131203_Istanbul_118.jpg
<colbgcolor=#008000><colcolor=#FFF,#FFF> 이름 아부 하프스 우마르 이븐 알하타브
أبو حفص عمر بن الخطاب
출생 582~583년
헤자즈 메카
사망 644년 11월 (향년 60~61세)
정통 칼리파 시대 헤자즈 메디나
재위 기간 정통 칼리파
634년 8월 23일 ~ 644년 11월 3일 (10년)
전임자 아부 바크르
후임자 우스만
부모 아버지 : 알 카타브 이븐 누파일
어머니 : 한타마 빈 히스함
종교 이슬람
1. 개요2. 이슬람으로의 개종3. 제2대 칼리파 취임과 변화4. 《꾸란》의 집대성과 울라마의 창설5. 칼리파로서의 대외활동
5.1. 정복전쟁5.2. 디완(회계 부서) 설치5.3. 성지 예루살렘 입성5.4. 팽창의 후유증
6. 여성 차별7. 암살과 분노8. 기타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세라피움 도서관 파괴 혐의

[clearfix]

1. 개요

자신이 아니면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는 생각은 오만과 거만에서 비롯된 그릇된 철학이요, 그 인물이 아니고서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없다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도 겸허한 생각에서 나온 그릇된 철학이다. 영웅과 바보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국민들이 만들어 주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제2대 정통 칼리파.

네 명의 정통 칼리파 중 가장 강력했던 인물이었다. 선대인 아부 바크르 시대에 시작된 시리아, 이라크 정복을 완수하고 이집트, 이란 등지로 라쉬둔(정통 칼리파) 제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 이슬람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반면에 시아파에서는 아부 바크르, 우스만과 함께 찬탈자로 간주되며, 심지어 예배중에 우마르를 저주하는 구절을 낭독하기도 하고, 순니파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우마르의 추종자"(아제르바이잔어로는 ömərçi, 외매르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2. 이슬람으로의 개종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건은 하나의 정복이며 승리였고 그의 통치는 하나의 자비였다.
연대기 작가 이븐 알 아씨르
만약 나 다음의 사도(라술)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우마르일 것이다.
무함마드
메카의 바누 아디 부족 태생이었다.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스만 이븐 아판이 그렇듯이 어렸을 때부터 시리아, 사산 조 페르시아, 동로마 제국을 오가며 무역상 일을 했다.

우마르는 아버지가 글을 알아서 부족내에서 지성인으로 통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1] 어린시절에 글자를 읽고 쓰는법을 터득하고, 시 쓰는 능력 또한 갖추었으며, 뛰어난 언변도 갖추었기 때문에 무역상을 하면서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여러 학자들을 만나서 동로마와 페르시아 사회가 어떻게 돌아다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무력도 뛰어나서, 여러 무술과 승마를 익혔으며,, 메카의 격투기 챔피언으로도 유명했다. 우마르는 이렇게 글자를 익힌 사람이 적었던 당대 아랍권에서 드문 문무겸비형 인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나운 인상에 술을 좋아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다혈질이고 싸움마저 잦아 타인들이 꺼리는 전형적인 오만한 인간이자 문제아였다. 하지만 능력과 카리스마는 뛰어났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족간 중재일을 맡을 정도로 출세할수있었다.

610년경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포교하기 시작할 때 우마르는 이슬람이 쿠라이시 부족들 사이를 어지럽혀 놓을 것이라 생각했고, 전통 아랍 신화를 수호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으며 메카 제부족들을 반이슬람의 가치하에서 뭉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사고뭉치로 유명하던 인물인 우마르가 이 운동을 멈추기 위해 무함마드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을 극도로 혐오한 데다가 무슬림들을 포로로 잡으면 잔혹하게 죽이기까지 했으니 모두 두려워했다. 그리고 616년의 어느 날, 무함마드가 알 아르캄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집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은 우마르는 이 기회에 무함마드를 죽여 그로 인해 생겨난 혼란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알 아르캄의 집으로 가는 길에 역시 이슬람에 투신한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2]와 마주치게 되었다. 역시나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지겨워진 사드가
"이보시게 우마르, 자네의 여동생과 매제도 이미 이슬람으로 개종했는데 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
며 일침하자 깜짝 놀랐고, 황급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절하게도 그들이 무함마드의 제자 카아브와 함께 《꾸란》을 읽는 소리까지 들리자 눈이 뒤집혀 집으로 쳐들어갔고, 카아브는 다른 방으로 달아났지만 《꾸란》이 기록된 종이를 방에 놓아두었기에 여동생은 그것을 보고 분노한 우마르에 의해 머리를 다치게 되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배신하는 것이냐"
며 심하게 구타를 해도
"그러나 새 종교(이슬람)가 옳다"
며 반박하는 매제와
"이미 무슬림으로서 순교를 각오했으니 마음대로 하라"
고 버티는 여동생을 보자 대체 왜 저러는 것인지 궁금증이 생긴 우마르는 그들이 읽던 《꾸란》을 읽어 보았다[3]. 그가 펼친 부분은 '따하'라는 시구였었는데, 그 구절을 읽고 난 뒤에 마치 신이 직접 그에게 언명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은 우마르는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분명 이건 신의 말씀이 분명하다!. 나는 무함마드가 신의 사도임을 인정하겠다!"라고 외쳤고, 그 길로 알 아르캄의 집으로 뛰어가 무함마드 앞에 무릎을 꿇고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서약했다. 어쩐지 사도 파울로스가 떠오르는 일화이다.

우마르의 개종은 무슬림에게는 큰 힘이었으나 비무슬림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그 이전까지 무함마드 및 무슬림 탄압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우마르였으나 무슬림으로 개종한 후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이슬람을 포교하고 무함마드의 충실한 부하이자 동료로서 활동했다. 기도 시간이 되면 길거리에서라도 기도하는 규칙을 처음 주장한 것도 우마르였다고 하며, 이후 메카 세력과의 분쟁에서도 크게 활약했고, 무함마드의 사망 소식을 듣고서는
"누가 그런 거짓을 말하느냐"
며 분노하다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3. 제2대 칼리파 취임과 변화

아랍인들의 고집은 한 마리의 낙타와 같은 것이어서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에 따라 그 행방이 달려있습니다. 유일신 하나님께 맹세컨데 내가 여러분에게 가야 할 길로 안내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에게 사랑받던 겸손하고 자상한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를 이어 개종 이전이나 이후나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던 우마르가 칼리파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데 탐탁지 않아했고, 따라서 아부 바크르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우마르의 칼리파 즉위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또 다른 유력 후보자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우마르의 제2대 칼리파 즉위를 적극 추천함으로써 우마르의 칼리파 즉위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마르는
"움마(이슬람 공동체) 내부에서 내가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그것은 지금까지의 지도자인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가 자상한 사람이기에 그들의 검이자 도구로써 강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칼리파가 된다면 변화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런 우마르의 발언에 많은 사람이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지만, 실제로 칼리파의 지위에 오른 우마르는 자신이 말 한 바를 충실히 지켰다. 그 결과 과거 폭력적이고 다혈질이었으며, 두려움의 대상이자 거만하고 오만했던 우마르는 약자를 보호하고 지나친 팽창과 경제적 타락으로 인한 이슬람의 미래를 걱정하며 허세를 부리지 않는 현명한 통치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또한 초대 칼리파였던 아부 바크르의 행적을 본받아 절대적인 지도자의 명령이 아닌 평등한 공동체의 수장으로서 행동했으며,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직접 소젖을 짜기까지 했던 아부 바크르의 행동은 칼리파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거보다 높은 봉급을 받았지만 그것은 '평균적인 아랍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으로 관리되었다. 그렇기에 결코 풍족하지 못했던 우마르는 전임자들을 본받아 해진 옷을 꿰어 입고 다녔는데, 이 때문에 까디시야 전투에서의 승전 이후 우마르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자 했던 전령은 메카로 향하던 도중 만난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를 묻는 해진 옷을 입은 사람이 우마르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알려주겠다."
라며 무시했고, 나중에서야 그가 신생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칼리파 우마르인 것을 깨닫는 일도 있었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등의 고단한 일을 빼놓지 않고 행했으며, 누군가가
“칼리파가 굳이 이런 행동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여기서는 나 대신 이런 일을 행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신 앞에서는 나 대신 누가 이런 일을 해주겠는가?”
라고 대응할 정도로 남에게 봉사하고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또한 공명정대함을 중요시 여겼던 우마르는 여러 명쾌한 판결로 유명했다. 이슬람군에 정복된 후 개종하여 특권적 지위를 유지한 가산 왕국의 전 군주 자발라가 메카 순례 도중 '타와프'(카바를 도는 의식)를 행하다가 자신의 옷깃을 밟은 평민과 시비가 붙어 서로 한 대씩 뺨을 때렸다. 이후 자발라는 우마르에게 귀족을 때린 평민에 대해 처벌을 요구했는데, 우마르는 계급은 자힐리야의 산물이라며 거절했다.[4]

한편으로는 꾸란》의 본격적인 집대성을 시작하고, 622년 헤지라를 이슬람 원년으로 삼는 등 여러 가지 의견으로 나뉜 이슬람의 종교생활을 하나로 집대성 하는 데도 큰 노력을 했다.

4. 《꾸란》의 집대성과 울라마의 창설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 시대부터 우마르의 주장으로 시작된 《꾸란》의 집대성은 우마르 자신이 칼리파 직위에 오른 이후 더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신의 계시를 양피지, 낙타 가죽, 나뭇잎, 뼈조각 등 그 당시 가장 가까이 있는 물건에 닥치는 대로 기록했는데,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반도 각지에서의 독립 운동으로 인해 가짜 물건이 다수 생겨난 탓에 진위를 가리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렇기에 우마르는 이런 자료들을 최대 한도로 수집해 무함마드와 함께 했던 인물들과 자신이 생각할 때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을 모아 수집한 물건에 적힌 구절을 하나 하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또한 우마르는 학자들이 무함마드의 일생과 계시를 집대성해 진위를 가려 낼 수 있도록 후원하는 한편,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에는 이렇게 양성된 전문 학자 집단의 도움을 요청하고, 이에 따라 결정된 결과물을 기록하게 하여 각지의 총독들에게 보내 지침으로 삼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관행이 훗날 이슬람 사회의 주요 학자 집단인 '울라마' 창설의 바탕이 되었다.

5. 칼리파로서의 대외활동

알라의 이름으로 자비와 은총이 있기를. '바이크 알 마크티스'(거룩한 집)의 거주자들에게 고한다. 진실로 당신들의 목숨과 재산, 그리고 교회에 대한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는 바이다. 저항하지 않는 한, 무슬림은 어떠한 희생과 파괴도 하지 않을 것이다.

-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가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5.1. 정복전쟁

무함마드의 사망과 이후 벌어진 아라비아 반도 내부 이슬람 세력의 분열(릿다 전쟁)을 세력 확장의 기회로 여긴 동로마 제국은 군대를 파견해 아라비아를 정벌하고자 했고, 아부 바크르는 악조건에서도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따라서 우마르의 치세 동안 이슬람 군대는 처음으로 방어전에서 벗어나[5]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령 시리아로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무슬림의 시리아 정복 전쟁) 이 과정에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636년에 동로마 제국과 벌인 야르무크 전투에서 승리해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했고,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는 동년에 까디시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완파하고, 637년에는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결국 642년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사산군의 최후의 항전을 니하완드 전투에서 분쇄시키고, 사산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서쪽으로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헬리오폴리스 전투(640. 6) 및 바빌론 요새 포위전(640. 5~641. 4)에서 동로마 제국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함으로써(641. 9) 이집트 정복을 완수했다.(무슬림의 이집트 정복 전쟁)

믿기 힘들 정도인 단기간의 군사적 성공에는 우마르 자신의 뛰어난 지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같은 명장들의 존재, 오랜 총력전을 겪은 이라클리오스 왕조 동로마 제국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약화, 초기 이슬람 전사들의 순수성과 용맹,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총력전 와중 양 제국에 의해 학살당했던 유대인[6]들이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환영하며 적극적인 내응을 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승기의 물결이 이어지면서 이슬람인들은 신이 우리를 가호하신다는 신념하에 사기가 충천한 반면, 적들에게는 신이 가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들의 성공에 질려 이슬람에게 저항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로 인식된 것도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승리가 승리를 부른 것이었다.

5.2. 디완(회계 부서) 설치

헤지라 15년(서기 636년) 당시 칼리파인 우마르는 정복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페르시아 군주들의 재산들이 무슬림들의 창고에 쌓이자, 이를 어떻게 분배해야 공정한 분배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 '마르주반'이라는 이름의 한 페르시아인 관료가 그에게 간언했다.
"신앙인들의 지도자이시여. 페르시아 황제들에게는 '디완'이라는 회계 체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세입과 세출 내역이 빈 틈 없이 기록되고 봉급에 대한 내역과 명단이 계급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알 파크리(Al Fakhri)

5.3. 성지 예루살렘 입성

승리의 전진속에서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성지 예루살렘이 637년 항복을 요구해 오자 우마르는 손수 항복을 받고자 하인 한 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던 그는 당나귀 한 마리만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에 하인과 우마르가 번갈아 가며 당나귀를 탔는데 마침 예루살렘에 도착할 무렵에는 하인이 당나귀에 타고 있어 예루살렘의 주요 인물들은 하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일이 있었다.

이후 승자의 특권을 누리리라 지레 짐작한 기독교측 인물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당에서 이슬람의 예배가 행해지려 했으나, 우마르는
만일 내가 이곳에서 예배를 올린다면 이 장소는 조만간 무슬림들에 의해 모스크로 바뀔 것이다. 우리는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무슬림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너희는 지금까지처럼 살고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신을 숭배하라. 다만 이제부터 우리 무슬림들이 너희와 함께 살아갈 것이며 우리 방식대로 신을 숭배할 것이며 더 나은 모범을 보일 것이다. 너희가 보고 마음에 든다면 우리에게 합류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로도 괜찮다.”
라고 거절했으며 이는
“종교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
는 무함마드의 뜻과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또한 성지 예루살렘이 몹시 더러운 것을 보고 화를 내며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훗날 바위의 돔이 건설될 장소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이슬람 세계에 영구히 영향을 미칠 또 다른 규범인 지즈야를 성립시켰는데,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세력에게 특별 인두세를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새로운 세금이라는 부담이 더해진다는 의미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발생한 선페스트 이후 급증한 세금 부담과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총력전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데다가, 초기라 세율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후임인 우스만이 재정 안정화 정책을 위해 세율을 올리면서 점차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우마르는 이 외에도 몇몇 조치를 행하며 성지 예루살렘의 안정에 힘썼다.

5.4. 팽창의 후유증

이슬람 초기의 엄청난 팽창을 이끌어 낸 정복자라는 인상과는 다르게, 우마르 자신은 정복 전쟁에 대단히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는 지속적인 전쟁과 파병으로 일어난 인력과 물자의 손실을 경계했으며, 패배라는 군사적 재앙과 승리로 얻어낸 막대한 전리품이 일으킬 도덕적 해이를 두려워했다. 심지어 페르시아 정복을 반대하며 이슬람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경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설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잇다른 승전으로 창출해낸 거대한 정복지에서 엄청난 부가 도착해오자, 우마르는 눈물을 흘리며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는
"알라는 이런 커다란 보상을 주시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에 질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신다."
는 신념 때문이었다.근데 그런 신은 사악한 악신이 아닌가?

사실 우마르의 걱정은 이미 당대부터 '도시에 입성한 군사들이 게을러진다.' 혹은 '뚱뚱해진다'는 식의 보고가 들어오면서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고, 이를 막고자 우마르는 이슬람 정벌군에게 도심이 아닌 별개의 군영을 설치하고 머물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승전을 통해 막대한 전리품을 손아귀에 쥔 정벌군의 도덕적 해이가 심화되어 이슬람 초기의 순수한 열정은 점차 퇴색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정복지에 설립된 군영 중 하나를 방문한 우마르를 환영하고자 군사들이 도열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황금과 비단을 비롯한 각종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우마르는 "자네들은 그런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부끄럽지도 않은가?"라고 고함을 지르고 돌을 집어 던지며 그들의 인사를 무시하는 일이 있었다.[7].

또한 페르시아에서는 그동안 야만인으로 멸시해오던 아랍인에게 정복당했다는 반감이 심했고, 내부적으로는 알리의 추종자들이 우마르의 칼리파직 승계를 찬탈로 의심해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후에 시아파가 성립되고 나서는 우마르가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를 괴롭혀서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들었다는 유언비어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시아파들의 주인인 알리 본인은 우마르의 칼리파 취임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마르는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제도를 도입하고 기존 관료들을 기용했으며 엄청나게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총독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지나치게 많은 정복지를 장악한 후유증 때문에 총독과 지방군에 대한 관리가 미진하여 지방의 독립성이 지나치게 강화되기 시작했다. 즉, 언제나 이슬람 공동체의 분열과 대립을 우려하던 우마르의 걱정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 시기부터 이슬람 세계는 미약하게나마 분열의 조짐을 보였고, 각지의 총독이나 사령관들이 칼리파의 지시를 무시한 채 정벌 활동을 벌이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중앙정부의 의사와는 별개로 진행된 정복 사업에서 나온 막대한 부는 차후 사령관 휘하의 군대가 사병으로 변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특히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쿠라이시 부족 우마이야 가문 출신의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이 두드러질 정도로 세력 확충에 열을 올렸다.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대항하던 수피얀 일족을 용서하고 중용하면서도 항상 그들을 가까이에 둔 것은 수피얀의 일족을 감시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마르의 시대부터 고삐가 풀린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친족 우대 성향을 지닌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 시기에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크게 확대했고,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치세에는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한편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통해 알리의 세력을 고립시켜(1차 피트나) 끝끝내 이슬람의 근본 체계를 무너트려 초창기 이슬람이 그토록 반대하던 통속적인 왕정 세습 국가인 쿠라이시 부족 우마이야 가문을 위한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무아위야의 도약이 가능했던 것에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역병이 영향을 미쳤다. 원래 우마르는 무함마드에게 끝까지 저항한 수피얀의 일족을 경계했다. 무함마드의 가장 부담스러운 반대파에서 가장 충실한 추종자가 된 우마르에게 있어 메카 정복 이후에서야 승복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수피얀 일족은 믿을 수가 없는 족속들이었다. 그래서 우마르는 수피얀 일족에 대한 사도의 조치를 유지하여 무아위야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기를 휩쓸고 있던 유스티니아누스의 역병으로 시리아 원정군 2만이 몰살당하고 핵심 지휘관들까지 떼죽음을 당하자, 사령관으로 삼을만한 인사가 무아위야 밖에 남지 않아 버린 것이다. 무아위야는 이런 행운을 놓치지 않고 원정을 성공시켰고 시리아를 안정화하여 자기 기반으로 삼았다. 만약 무아위야에게 원정군 사령관으로서의 군공과 시리아 총독으로서의 성과가 없었다면, 친족을 우대하던 우스만의 시대에도 두각을 못 드러내거나, 알리에 맞설만한 세력과 기반을 쌓지 못했을 것인데 이런 우연이 터져준 덕분에 무아위야는 알리의 맞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6. 여성 차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마르는 이슬람 세계의 여성관을 확립하는 데 일조했다. 무함마드는 여성을 보호한다며
'신은 여인들에게 재산을 가질 권리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여인들의 상속 재산을 신성한 것으로 인정한다.'
'상속이 많든 적든 그들은 일정한 몫을 가질 자격이 있다.'
'이혼은 상황에 따라서 남편과 아내의 합의 아래 가능하다. 왜냐하면 합의가 가장 좋은 것이다.'
'근거 없는 비방을 견제하기 위해 간통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증인 4명이 필요하다'
등을 종교적 명령으로 언명했다.

그러나 그런 무함마드도 사실 7세기 아랍 기준으로 기존에 인정되던 관습을 종교적으로 재확인한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무함마드의 첫 번째 아내인 카디자는 무함마드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자기 몫으로 재산이 있었고, 전 남편과 이혼했다. 무함마드가 나서기 전에도 이미 여자는 재산을 가질 권리가 있었고,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하면서 여자의 권리를 상승시킨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아랍 부족 사이에서 (현대인의 생각보다 훨씬) 여자들의 권리가 관습으로 보증되었던 것이다. 메카에서는 쿠라이시 부족 사람이 이방인을 보호하겠다고 천명하면 누구도 그 이방인을 해치지 못했는데, 이런 권리 가 여자들에게도 보증되었다. 그래서 무함마드와 카디자 사이에서 태어난 딸 자이납은 아버지 무함마드가 (무슬림이 아니란 이유로) 남편을 자기와 이혼시키고 해를 끼치려고 하자, 이 관습으로 남편을 보호하겠다고 천명하여 무함마드가 뒷골을 잡았을 정도였다.

또한 간통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증인 4명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한 족장이
"나는 내 눈으로 불륜 현장을 목격했는데도 증인 4명을 찾겠다고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하자 이를 인정했다. 그리고 자유민 여자는 보호했으나 노예 여자에 대해선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샤가 간통 혐의를 받았을 때는《꾸란》으로 계시까지 내려와 죄가 없음을 보증했으나, 노예 출신 아내가 간통 혐의를 받았다가 억울함이 풀렸을 경우에도 아무런 명예 회복 조치가 없었다. 한편 약탈혼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등 무함마드의 여자관은 당시 아랍 기준으로도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마르 시대에 이르러 무함마드의 종교적 언명에 새로운 《하디스》가 추가되었다.
모든 일을 여자에게 맡기는 자는 번영하지 못한다
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신빙성이 있는《하디스》로 추앙받더니 남녀는 따로 예배를 올리고, 남편이 아내를 교육시킨다는 제도들이 확립되었다. 하지만《하디스》는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의혹이 있는데, 간통 혐의를 받았으나 무함마드가 알라께 계시를 받았다며 무혐의라고 천명한 그의 세 번째 부인 아이샤의 적극적인 지지와 '간통한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한다'라는 무함마드의 행적을 볼 때 도저히 믿기 힘든 주장을 남편이 했다는 발언으로 인해 더욱 강력하게 굳어지게 되었다.

공정을 기해 말하자면 우마르 자신이 여성을 차별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이 시기의 무슬림 공동체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전원이 의무 교육을 받았으며, 우마르의 치세엔 여성이 메디나의 상업 감독관에 임명되는 등 여성의 사회 활동도 유지되었다. 사실 여성 차별 현상은 굳이 우마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치세 동안 이슬람의 여성 차별 현상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마르가 완전히 여성을 억압한 자라고 볼 수는 없다. 예시로 하질 부족의 한 남자가 어느 소녀를 희롱하여 그녀에게 죽게 되었는데, 이후 재판에서 우마르는 여성의 명예가 훼손된 것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었다고 평가하며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그는 여성의 상속권과 이혼권을 재확인하는 조치를 취해 여성 인권과 관련된 사도 무함마드의 정책을 계승했다.

7. 암살과 분노

우마르의 치세기에 행해진 엄청난 정복 사업은 자연히 대규모의 원한을 가진 이와 적을 생성시켰고, 그 결과 우마르는 예배 도중 644년, 페르시아계 기독교도 노예인 피루즈 나하반디(فیروز نهاوندی‎)의 칼에 찔렸다. 사산 제국의 대장군 루스탐의 부장이었던 피루즈(아랍어로는 '아부 룰라'. أَبُو لُؤْلُؤَة‎)는 포로가 되어 쿠파 총독인 알 무기라의 노예가 되었는데, 뛰어난 장인이었던 그는 주인의 추천을 받아 이슬람 제국의 수도 메디나에 살 수 있었다. 당시 메디나에는 무슬림만 거주할 수 있었지만 무기라의 편지를 받은 우마르가 특별히 허가하여 성사된 것이었다. 우마르를 암살한 피루즈의 최후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우마르를 칼로 찌른 뒤 그를 제압하려던 사람들에게도 칼을 휘둘러 몇 명을 더 죽인 뒤 자살했다는 설이 있고, 우마르 암살 후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가 일으킨 기적과 알리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이란 중부 카샨 지방까지 무사히 탈출한 뒤 그곳에서 안전하게 여생을 마쳤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카샨에는 피루즈의 무덤[8]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우마르는 6차례나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으로 3일이나 버티며 후계자 선출안 마련에 나섰다. 그러던 때 움마의 유력 인사들이 우마르에게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할 것을 제안하자, 우마르는
“내가 나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이 일을 했다고 생각하나!”
라고 응수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일화는 우마르가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걱정하던 이슬람의 세속화가 이미 상당히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신이 점지한 계승자 자리는 혈연 따위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유로 최고 유력 후보였던 알리가 밀려나던 과거와 달리, 우마르 시대 말미에는 움마의 지도자들조차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한 후계자 지명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우마르는 최후에 와서 변질된 이슬람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노력한 인생 전반이 부정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며, 이러니 다 죽어가는 마당에도 불구하고, 불같이 화를 낸 것은 당연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마르는 임종시까지 칼리파의 직위를 수행하며 마지막 선례를 창설했는데, 여섯 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인 슈라를 지명해서 그들이 새로운 칼리파를 선택하고 움마의 동의를 얻어 임명되게 한 것이다. 슈라의 구성원으로 우마르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우스만 이븐 아판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압둘 라흐만 아우프
앗 주바이르 이븐 알 아왐
탈하 이븐 우바이둘라

를 선정했고, 투표 결과 3:3 동률이 나왔을 시에는 자신의 아들 압둘라에게 판결을 맡기도록 정했다.
내가 보기엔 여러분이야말로 움마의 우두머리가 되는 분들이고 지도자들입니다. 여러분을 제외하곤 이 문제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의 사도께선 여러분 모두에게 만족하며 돌아가셨습니다. (중략) 나는 오직 여러분 사이에서 반목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그리 된다면 사람들은 갈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중히 협의하여 당신들 중 한 사람을 뽑으십시오...

ㅡ 우마르, 유언 중에서[9]

이는 이슬람의 세속화를 우려하던 칼리파 우마르 최후의 노력이라 할 수 있으나, 이미 세속화된 이슬람 상층부는 차기 후계자로 초창기 이슬람의 순수성과 변혁의 기치를 내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보다 전형적인 상류층인 우마이야 가문 출신의 우스만 이븐 아판을 선택했고, 제3대 정통 칼리파로 선출된 우스만은 우마이야 혈족을 우대하며 세속화를 한층 더 강화시킨 결과, 이슬람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이라는 최종적인 분열 국면에 돌입하게 되었다.[10][11]

8. 기타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세라피움 도서관 파괴 혐의

642년에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에 함락되고 정벌군 사령관 암르 이븐 알 아스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한 처분을 물었을 때, 우마르는 이렇게 답했다고 전한다.
그 책들이 《쿠란》의 가르침에 합치된다면, 우리는 이미 무슬림이니 그런 책 굳이 더 가지고 있어봐야 필요가 없다. 그 책들이 《쿠란》의 가르침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그 책들은 이교이고 우상숭배이니 없애버려야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도 유사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더 책임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파괴했다는 주장에선 이미 몰락할 때로 몰락하여 이집트 정벌군 사령관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그의 장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해 아는 바 없었으며, 심지어 그에 관련된 소문을 들은 적조차 없었고, 따라서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4세기 말에 파괴했을거라고 본다. 우마르가 그랬다는 주장으로는 비록 기독교 시대에 쇠퇴하긴 했지만 이 도서관을 결국 불태워서 상당한 그리스 고전을 소실시킨 건, 642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칼리파 우마르였으며 초기 선출 칼리파 시대의 칼리파들은 전원 호학에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뛰어난 군주였지만, 우마르만은 예외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마르에 의한 파괴설은 13세기가 돼서야 양지로 떠오른 의견인 반면, 기독교도에 의한 파괴는 4세기 중엽부터 당시 사람들에게
"세라피움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라는 식의 한탄을 샀던 걸 보면 아무래도 기독교도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됐을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당대인들에게 부들부들, 기독교 놈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 박살낸다. 소리를 듣는 것과 600년 후에야 설득력을 갖기 시작한 우마르 놈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 박살냈다! 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긴 어렵다. 특히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은 그 결정타가 됐으리라고 여겨지며, 그런 의미에서 얼마 후 일어난 히파티아의 사망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황혼기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12] 이 시기에서 최소 200년 후에야 알렉산드리아에 당도했을 칼리파 우마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나마 남아있던 최후의 요소를 끝장내는 정도였을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슬람에 대하여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기독교가 저지른 세라피움 도서관 파괴라는 죄악을 칼리파 우마르에게 덮어씌웠다면서 비난한 바 있다.


[1] 다만 우마르의 회고에 의하면 어린시절의 우마르가 일하지 않고 쉬면, 수시로 때리는 등 폭력가장이었다.[2] 공교롭게도 훗날 우마르의 명령을 받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는 명장이다.[3] 그 와중에도 여동생은 피가 묻은 불경한 상태로는 《꾸란》을 만지면 안 된다며 버텼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씻은 이후 《꾸란》을 읽어야 했다[4] 이후 분노한 자발라는 배교한 후,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로 망명했다[5] 이 일은 이슬람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전까지 자기 내부의 '투쟁' 혹은 침공하는 적을 격퇴하는 '방어전'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던 지하드가 적에 대한 공격의 범위로 확장되는 지금까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실로 세계구급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확장된 지하드의 의미는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 확장 시기 정책적인 의미로 이용당하게 된다.[6] 호스로 2세의 총공세 시기, 동로마 제국에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이 대거 사산조 페르시아를 도왔는데, 헤라클리우스의 대반격 이후 이들은 끔찍한 보복 학살을 당했다. 그런 와중에 이슬람 세력이 팽창을 시작하자 유대인들은 이슬람 세력에게 각종 도움을 아끼지 않으며 동로마 제국 붕괴 및 이슬람 세력 확장에 힘썼다.[7] 그러자, 군사들은 "이 비단옷 안에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라고 해명해서 겨우 위기를 넘겼다고 전해진다.[8] 정확히 말하자면 피루즈의 무덤이라고 전승되는 곳.[9] 외지에 있던 탈하를 제외한 슈라 위원들이 곁에서 경청했다고 한다.[10] 사실 우마르 입장에서는 어떤 수를 골라도 가망이 없는 것이 알리는 우스만과는 달리 확실한 칼리파감이었지만 무함마드와 같은 혈족이기에 고르기가 쉽지 않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이슬람의 순수성과 기치를 내건 사람이 알리라서 사상적으로는 우마르와 잘 맞았다는 얘기이다. 즉 기치를 위해선 알리를 선택해야 하나 알리가 태생적으로 무함마드와 같은 혈통이라는 점이 명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11] 다만, 선지자 무함마드는 성격이 검소했던 점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군주가 아니라 종교의 창시자라는 특수한 케이스였다. 당시 이슬람은 비교적 신흥 종교였고 주민들을 이슬람의 기치 아래 하나로 단합시키기 위해서 선지자부터가 일반 서민들과 비슷할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나 페르시아같은 세속 군주들은 통치의 정당성이 신의 사도같은 종교적 권위가 아니라 왕가의 혈통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선덕제홍치제, 에드워드 1세, 우마르 2세같이 전제군주치고는 성격이 꽤나 검소한 편이었던 군주들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베르사유 궁전이나 자금성같은 화려한 궁전을 지어서 백성들에게 왕실의 위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즉 초기 이슬람 제국의 독실한 종교성은 어디까지나 선지자 무함마드와 그 직후 시대이니까 가능했다는 이야기이고, 우마이야 왕조를 쫓아 내고 들어선 아바스 왕조도 비아랍인 차별주의만 철폐했을 뿐이지 역시 세습 왕조라는 점에서 증명하듯이, 어쩌면 우마이야 왕조 시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슬람 제국의 세속화도 결국 어느 정도는 선지자 무함마드 시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팽창된 이슬람 제국의 정교한 관료제 속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12] 다만 히파티아의 사망은 순전히 이성 VS 종교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정치적 문제가 섞인 복잡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