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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0 10:18:25

우토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ji-Utoro_district1.jpg
2009년 모습[A]

우토로 마을 위성사진. 아래로 이동하면 자위대가 보인다.(육상자위대 오쿠보 주둔지)

지구촌동포연대 우토로 디지털아카이브
우토로평화기념관 홈페이지

1. 개요2. 역사3. 기타4.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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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교토부 남부에 위치한 우지시의 마을이다.

행정구역은 일본 교토부 우지시 이세다정 51번지(일본어: 京都府宇治市伊勢田町51番地)이다. 본래 표기는 우토구치(일본어: 宇土口)였으나 잘못 읽혀 우토로(ウトロ)가 되었다.[2]

일제강점기에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이주한 재일교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2. 역사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2월에 교토 비행장과 병설 비행기 공장 건설 공사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일본국제항공공업[3]이 시공을 맡아 약 2천 명이 동원되었다. 이 중 약 1300명이 조선인으로 그들과 그 가족이 생활하던, 1943년에 건조한 합숙소(숙박시설)가 현재 우토로의 전신이다. 비행장이 있었다는 것은 전쟁 당시 이곳이 군사기지였다는 것으로 그 흔적으로 마을 바로 밑에 자위대 기지가 자리잡았다.

우토로 주민이 만드는 '우토로 국제 대책 회의'등에 따르면 "일본 국제 항공 공업의 1300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국민 징용령과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강제 징용된 것으로, 이들 중 대다수는 생계와 병역 등의 이유로 일본으로 이주해온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의 국무총리 산하 '일제 강점 하 강제 동원 피해자 진상 규명위원회'는 2006년 말 보고서에서 우토로 주민에 대해 강제 징용자가 아닌 원래부터 일본에 거주한 조선인이 대부분이라고 밝혔고 작가 미즈노 나오키는 강연에서 "전시에 광산에서의 가혹한 노동이 싫어 도망간 조선인 노동자들 중 여기서 일하면 더 이상의 징용은 없다는 군의 말을 믿고 우토로에 온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즉 우토로 마을은 강제 징용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한 조선인을 기반으로, 이에 1930년대 말 비행장 건설 노동자 모집에 응한 빈곤 계층의 조선인들이 더해져 형성된 것이다.[4]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공사가 중단되었고 연합군 점령하 일본 체제로 바뀐 상황 속에서 미국은 일본 내 조선인들에게 본국 귀환 명령을 내리지만 이에 따르지 않은 채 계속 거주하기 시작한 조선인들이 생겨나 기나긴 갈등이 시작된다. 토지 소유권을 가진 일본국제항공공업은 처음엔 주민들에게 토지 매각하는 제안했지만 주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일본 정부에 무상으로 토지를 달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신인 닛산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뒤 우토로는 사실상 방치되었다. 결국 주민들이 토지를 구입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꿔 시청의 중개하에 협상이 끝나 닛산으로부터 마을 부지 전체가 매각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조선인이 회사를 세운 뒤 은행에서 돈을 빌려 토지 소유권을 매입했지만 이후 자금을 상환하지 않고 도망가는 바람에 소유권이 다른 일본 회사로 넘어가게 된 것.

이로 인해 이곳에 살던 재일 조선인들은 계속 퇴거 위기에 시달려야 했다.[5] 이러한 문제로 당시 한국인 노무자 인원은 1300여 명이었지만 2015년에 거주민은 고령화되어 15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재일동포와 한국민들의 도움으로 17억원과, 참여정부의 30억 지원을 받아 일부 토지를 구입해[6] 거주권을 확보했다. 2017년에 재개발을 시작하여 완공은 약 6년 뒤에 될 예정이라고 한다. 재개발을 하는 것은 좋지만 역사와 추억이 담긴 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쉽다는 의견도 있다.

이 지역은 수도 시설이 없어 직접 우물을 판 적도 있었다고 한다. 사용한 더러운 물을 내려보내는 하수처리시설 역시 없어 주변 일본인이 사는 마을에 비해 시설이 열악했다.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다가와 아키코는 우토로에 사는 친구네 집에 상수도가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수도관 시설이 인정되어 물 문제가 해결되었고, 토지 문제가 해결된 2000년대 이후 인프라 정비가 시작되어 예전과는 많이 바뀌었다.

부산일보의 우토로 특집에 실린 우토로 마을이 걸어온 길
파일:1280px-Utoro_new_apartment.jpg
2018년 모습[A]
2018년 1월, 우토로 마을 1차 시영주택이 완공되어 40가구가 입주했다. 3월에는 2차 시영주택 공사를 위해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고 2차 시영주택은 2020년에 완공되어 20가구가 입주하게 된다고 한다. 이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은 시영주택 입주를 축하하는 편지를 보냈다. # 2차 시영주택을 건설하면서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보존하는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도 추진되었다. 이에 아름다운재단에서는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 기금을 마련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2020년 8월 13일, 지구촌동포연대는 한국서부발전·우토로민간기금재단과 우토로 마을을 지원하기 위해 MOU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 2021년에는 역사관 건립 추진에 나섰다. #

2021년 8월 31일, 2022년에 완공 예정인 '우토로 평화 전시관'에 전시할 50점의 사료들이 보관된 빈 집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 화재 발생 4개월 뒤인 12월 6일, 극우 성향의 22세 무직 남성 아리모토 쇼고가 체포되었으며[8], 이후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2021년 7월에 나고야시의 한국 민단(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아이치현 본부와 나고야 한국 학교의 배수관에 불을 붙여 파손한 혐의로 3개월 후인 2021년 10월에 체포된 전적이 있는 연쇄방화범으로 밝혀졌다. # 아리모토 쇼고는 2022년 8월 1심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주목할 점은 검찰이 구형한 징역 4년형을 법원에서 그대로 받아들였단 점이다. 우토로 마을 측 변호인단에서도 검찰의 구형을 그대로 받아들인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고 언급했을 정도. #

2022년 4월 30일에 우토로평화기념관이 개관했다.

3. 기타

킨키 일본 철도 교토선 이세다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다.

1990년 5월 25일 한겨레신문을 통해 처음 다뤄진 후, 1993년 4월 25일 MBC PD수첩 '일본 우토로 동포들의 수난(임채유 취재)' 편에서 본 마을에 거주한 재일동포들의 수난을 처음 영상에 담았다. 이후 MBC는 1997년 시사매거진 2580, 1999년 우토로 사람들, 2000년 생방송 화제집중 등을 통해 수차례 다루었다.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 패소로 인한 퇴거 위기를 거쳐 2005년 2월 지구촌동포연대(KIN) 활동가들이 나서 관련 사업을 시작하자, 그해 6월 7일자 한겨레21을 통해 첫 모금 기사를 내보내 13일 민중의소리도 모금에 같이 나섰다. MBC도 광복절에 방영한 광복 60주년 특별 생방송 함께 만드는 평화를 통해 ARS 모금을 진행했다. (미디어오늘 기사)

2015년 9월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특집에서도 다뤘으며, 지구촌동포연대의 사연 신청을 받아 하하유재석이 우토로 마을 1세대 강경남[9][10] 2세대 주민들에게 한식을 대접하는 모습을 방영했다. 유재석은 이전에 기부를 했다는데 본인은 이곳인지 몰랐다고 한다.

홋카이도 시레토코 근처에도 우토로 마을이 있다. 이곳은 겨울철 유빙 체험을 하려는 관광객들이 들리는 곳으로 2011년 무한도전 오호츠크 해 특집에서 유빙 체험을 하기 위해 방문했다.

4. 참고/관련 자료



[A] 출처 : 일본어 위키백과[2] 한자인지 카타카나 표기인지 구분하기 정말 어렵다.[3]닛산차체. 일본항공공업과 국제공업이 합병해 1941년에 세운 회사다.[4] 애초에 주민들이 강제로 징용됐다는 주장은 우토로의 조선인 노동자가 가족 단위로 거주했다는 사실과 상충된다.[5] 애초에 회사 소유의 땅을 조선인 노무자들이 불법점거를 한 것이고 사기 사건에 의해 거주민에게 소유권은 존재하지 않았다.[6] 6000평 중 2000평 가량으로 약 1/3에 해당하는 부지다. 마을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계획은 절반을 매입하는 것이었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서 예산 집행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엔화 가격이 올라 1/3밖에 구매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A] 출처 : 일본어 위키백과[8] 경찰 조사 중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 "한국이 싫었다"고 진술했다. #[9] 경상남도 사천시(당시에는 사천군) 용현면 출신으로, 우토로 마을 1세대 마지막 생존자였으나 2020년 11월 21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0] 경상도 사투리 이외엔 다른 한국어는 알아듣지 못하나 마을에서 몇 없는 한국어를 구사하던 인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