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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00:43:07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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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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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대월 원정
元越戰爭 | Chiến tranh Nguyên Mông-Đại Việ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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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1차 원정
2.1. 개전 이전의 상황2.2. 빈레응우엔 전투2.3. 전쟁 이후
3. 제2차 원정
3.1. 개전 이전의 상황3.2. 원나라의 참파(점성국) 정벌과 개전3.3. 선동 전투3.4. 반끼엡 전투3.5. 즈엉 강 전투3.6. 수도 탕롱 함락3.7. 투밧 전투3.8. 다막 전투와 하이티 전투3.9. 실패한 대월군의 반격3.10. 하이동 추격전3.11. 함뜨 전투3.12. 벤쯔엉드엉 전투3.13. 수도 탕롱 수복전3.14. 티엔막 강 전투
4. 제3차 원정
4.1. 다시 시작되는 전운4.2. 양측의 대치4.3. 국경에서의 충돌4.4. 번외전투: 까오랑 전투4.5. 탕롱 공방전4.6. 반돈 전투와 원나라 군대의 보급 상실4.7. 원나라군의 반끼엡 철수4.8. 바익당 강 전투4.9. 낭산 전투
5. 전쟁 이후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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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의 제1대 황제이자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이었던 쿠빌라이 칸1257년, 1284년, 1287년 3차례에 걸쳐 쩐 왕조 대월 제국을 침공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런 비슷한 사례가 일본에도 있었으나, 가마쿠라 막부는 2차례 모두 태풍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대월은 1차를 제외하고[1]는 명장 쩐흥다오와 그의 휘하에 있는 대월군의 실력이 승리를 견인했다.[2]

또한 남송도 3차에 걸쳐 일어난 몽골 제국의 침략에 맞서 40년 동안 버텼기에 이는 대월과 비슷하나, 남송의 경우는 주요 거점인 양양, 번성, 강주, 사천이 모두 점령당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애산 전투에서 멸망했다. 하지만 대월은 세 번에 걸친 전쟁 이후에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3]

대월 원정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그동안 몽골에서 수행했던 다른 대외 원정과는 달리 병력수에서 상대보다 우위였다는 것이다. 몽골은 남송과 대리국에 대한 정벌 와중에 찔러보기 형식이었던 제1차 원정을 제외하고 제2차, 제3차 원정에서는 각각 50만 명, 3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대월을 쳐들어갔는데 실패했다.[4][5]

참고로 이 전쟁으로 인해 몽골 제국세계정복은 멈췄다. 아인 잘루트 전투공세종말점이었다면 베트남 원정은 세계정복을 완료하는 전투였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멈추게 된 것이다.

2. 제1차 원정

몽골 제국의 1차 대월 원정
시기 1257년~1258년
장소 베트남 북쪽
원인 쿠빌라이 칸의 남방 평정, 쩐 태종의 몽골 사신 억류
교전국 몽골 제국 대월 (쩐 왕조)
지휘관 총사령관: 우량카다이
아주[6]
차크차크두
콰이두
총사령관: 쩐 태종
태자 쩐 호앙
쩐 꾸옥 뚜안
레 푸 쩐
쩐 투 어
쩐 투 도
소문왕 쩐 냣 히유
하 봉(정규군 X)[7]
병력 약 40,000명 - 45,000명 약 100,000명
(전투병 60,000명)
피해 2/3 규모 사망
잔여병 쿠빌라이의 남벌군에 귀속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대월의 승리
영향 몽골 제국이 당분간 남송 공략에 집중함.

2.1. 개전 이전의 상황

몽골 제국의 제4대 대칸 몽케는 아우 쿠빌라이를 보내 남송의 서남쪽 일대인 운남을 공격하도록 했다. 운남 일대의 약소국이었던 대리국은 금방 제압되었고 쿠발라이의 휘하 장수였던 우량카다이는 수하들 중 2명을 사신으로 삼아 쩐 왕조 대월로 보내 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쩐 태종은 이런 요구가 무례하다고 생각해 사신들을 대나무 밧줄로 묶어 가둬버렸다.

결국 우량카다이는 원정군 및 대리에서 차출해 온 20,000~25,000명 사이의 병력을 아들인 아주(阿朮), 제장인 차크차크두(徹徹都), 콰이두(恒都) 등에게 맡기고 대월을 침공했다. 이에 쩐 태종은 명장인 쩐 구옥뚜안(陳國峻)과 권신이었던 쩐트어의 3남 쩐 냣히유(陳 日皎), 옛 레 왕조(黎朝)의 후예였던 레 푸쩐(黎輔陳) 등의 제장들과 티엔투옥(天屬), 티엔쯔엉(天彰), 타인즉(聖翼), 쯔엉타인(彰聖), 탄사이(神冊), 꿍탄(鞏神)으로 불리는 6개의 금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2.2. 빈레응우엔 전투

쩐 구옥뚜안이 수군을 불러 국경을 봉쇄하자 우량카다이는 대월의 수도였던 탕롱(昇龍)를 향해 진격하기 위해 병력을 양익으로 나누어 한 쪽은 자신이 맡고, 다른 한 쪽은 차크차크두에게 맡겼으며 아들인 아유를 시켜 수시로 주변 지역을 정찰하도록 했다. 쩐 왕조의 병사들이 이를 눈치채고 필사적으로 방어하자 아유의 부대로 돌아갔고 이후 차크차크두가 이끄는 부대와 합류했다. 몽골군은 빈레(平厉)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쩐 태종이 군사를 직접 이끌고 이에 맞섰다. 쩐 왕조의 군대는 타오 강(红河)의 강변에서 코끼리병과 기병, 보병 등을 앞세워 전방에 횡렬로 늘어서게 한 뒤 후방에 있는 보병과 기병을 엄호하는 형태로 진지를 구축하며 몽골군을 기다렸다.

몽골군은 타오 강을 건너기 위해 병력을 세 부대로 나누어 전방은 차크차크두가 맡고, 중군은 우량카다이가 직접 맡았으며 후방은 콰이두와 아유가 맡았다. 우량카다이는 대월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기 위해 다리에서 차출해 온 병사들을 전방에 열지어 전진시켰다. 이 전법은 주효해서 몽골군은 대리국의 군대 뒤에 숨어서 움직이면서 대월군에게 타격을 입혔고, 협상을 하기 좋다고 판단한 우량카다이는 차크차크두를 보내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너희는 강을 건너려는 군대를 공격하지 마라! 우리와 싸우러 온다면 말을 타고 달려 그 뒤를 막을 것이다. 만일 너희가 속임수로 배를 빼앗아 남벌군이 무너지면 다시는 강에 배가 없을 것이고, 너희는 모두 사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포가 무색하게도 차크차크두의 군대는 강을 건너자마자 쩐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코끼리병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자 아유가 기마궁대를 이끌고 나와 코끼리의 눈과 피부에 사정없이 화살을 퍼부었고, 대월군은 주춤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쩐 태종 역시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로지 장수 레 푸쩐만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겁에 질려 쩐 태종에게 공격을 멈추어 달라 했고, 레 푸쩐은 그 말을 듣고는 곧바로 황제 앞으로 달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고귀한 것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어찌 사람의 말을 경솔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결국 쩐 태종은 노강(瀘江)에서 퇴각하기 시작했고, 레 푸쩐은 그런 쩐 태종을 몽골군이 퍼붓는 화살비 속에서 엄호하며 티엔막 강(拖幕江) 일대로 이동했다. 이때 쩐 구옥뚜안은 사람들에게 은밀히 지시해 음식을 숨기거나 파묻어 버리고, 깊은 곳으로 숨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티엔막 강으로 이동한 쩐 태종은 작은 배에 올라 레 푸쩐, 태위 쩐 투어의 3남 쩐 냣히유 등에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좋을지를 물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레 푸쩐과는 달리 쩐 냣히유는 뱃머리에 앉아서 별 말이 없다가 강물에 손가락을 담근 뒤 입송(入宋), 즉 '남송으로 망명해야 한다'는 의견을 배 옆구리에 몰래 쓰며 의견을 냈다. 쩐 태종은 쩐 냣히유에게
"네가 모은다던 군은 어디에 있느냐?"
고 물었으나 쩐 냣히유는
"군을 모을 수 없었습니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답을 했다.[8] 한편 태부직에 있었던 권신 쩐 투도(陳 守度)는 상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
"폐하, 아직 제 머리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걸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자못 당당하게 얘기했다. 쩐 태종은 그 말을 듣고는 아직 해볼만 하다고 여겨 계속 저항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 몽골군은 주변 지역을 정리하며 동보다우(東步頭) 성읍을 점거했다.

다음날 쩐 태종이 이끄는 대월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몽골 군과 대치했다. 몽골군은 꽤 깊을 것 같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물 위로 화살을 퍼부었고, 화살이 떠오르지 않는 지역을 피해 말을 타고 도하했다. 몽골군이 다시 진격해오자 대월의 병사들은 쩐 태종을 호위하면서 수도 탕롱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 한 번으로 몽골군은 탕롱을 차지할 수 있었고, 무능했던 쩐 냣히유는 근처의 섬으로 달아나 버렸다. 몽골군은 예전 쩐 태종에게 보냈던 사신들을 가둔 감옥을 찾아냈고, 이들을 옭아 맨 대나무 밧줄을 풀어주었으나 사신들 중 한 명이 그 와중에 숨을 거두었다. 우량카다이는 분노에 차 점령한 탕롱을 초토화시켰다.

몽골군은 단 두 번의 전투로 수도 탕롱까지 점거하고, 파괴해 복수를 하긴 했으나 아직 쩐 왕조의 주력군은 남아 있었고 강을 건너면서 적군을 쫓느라 전선이 길어진 바람에 가장 중요한 보급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쩐 구옥뚜안이 퇴각하면서 꾸준히 구축한 청야(淸野)작전이 제대로 먹힌 셈이었다. 우량카다이는 병사들을 시켜 주변 마을이라도 약탈해보려고 했으나 쩐 구옥뚜안이 이미 주변 지역에 손을 써 말끔하게 청소해 놓은 탓에 털어갈 것이 없었다.

9일 동안의 허기로 몽골군이 점점 지쳐갈 때쯤, 자정이 된 시간에 쩐 태종과 황태자였던 쩐 호앙(陳晃)이 병력을 몰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기습을 가했고, 이에 몽골군은 크게 패배했다. 훗날 몽골군은 쩐 왕조의 군사가 형편없고 약했다며 허풍을 늘어놨지만 이 전투 당시 몽골군은 기습에 크게 놀라 서로 손발이 안 맞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소리는 그저 허세에 불과했다. 우량카다이는 더 이상 남은 몽골군으로는 탕롱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빠르게 화잉산(橫山)을 지나 꾸이호아(歸化)를 통과해 운남 일대로 퇴각하려고 했다. 몽골군이 빠른 기동력으로 벗어나자 쩐 왕조의 군사들은 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꾸이호아의 추장이었던 하봉(河俸)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몽골군을 기습해 큰 피해를 입혔다.

2.3. 전쟁 이후

겨우 빠져나간 우량카다이의 몽골군은 남송을 공격하러 출발한 쿠빌라이와 합류했고, 이에 몽골 제국에서는 따로 2명의 사신을 보내 쩐 태종을 왕으로 봉했으나 침공 사실에 화가 난 쩐 태종은 사신을 모조리 결박한 뒤 내쫓아버렸다.

쩐 태종은 자신을 목숨 걸고 구해준 레 푸쩐에게 이혼한 아내이자 리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소성공주를 주어 결혼시켰다. 이렇게 제1차 전쟁은 대월을 다스리는 쩐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

3. 제2차 원정

원나라의 2차 대월 원정
시기 1285년
장소 지금의 베트남 북부 및 중부
원인 쿠빌라이의 남송 정벌, 쩐 왕조의 입조 거부
교전국 원나라 대월 (쩐 왕조)
지휘관 총사령관: 진남왕 토곤[9]
셔더르
바크지아노[10]
아리크 콰야
나시르 웃 딘
이항†
콘칵
볼콰다
사타르타이
망쿠다이
자오키
우마르
나콰이
이방헌
손덕
손덕림
유세영
유규
의윤
추경(의무대)
쩐 끼엔(쩐 왕조→원나라)
총사령관 쩐 인종
태상황 쩐 성종
쩐 꾸옥 뚜안
쩐 꽝하이
소문왕 쩐 냣 두앗
소성왕
쩐 꾸옥 니엔
팜 응우 라오
쩐 롱
마 빈
응우옌 카랍
응우옌 쩐통
부하이
팜 끄 디아
레 지엔
찐 롱
뚜에 중 뜨엉 시
하 닷†
쩐 빈쩡†
도 비†
도 후†
쩐 삼†
하 쯔엉†
쩐 꾸옥 또안†
응우옌 탓 텅†
딘 싸†
레 탁(항복)
쩐 칵충(항복)
장헌(원나라→쩐 왕조)
병력 약 300,000명 - 500,000명[11] 250,000명(호왈)[12]
피해 100,000명 - 200,000명 사망, 약 50,000명 포로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대월의 승리
영향 원나라의 점성국(참파) 점령, 원정 실패로 인한 한인들의 쿠빌라이 지지도 폭락

3.1. 개전 이전의 상황

1258년 대월에서는 쩐 태종이 황태자인 쩐 호앙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고, 쩐 호앙은 쩐 성종(陳 聖宗)이 되었다. 물론 쩐 태종은 태상황제(太上皇帝)로서 꽤 오래동안 정사에 관여했다. 몽골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쩐 태종이 1277년에 붕어한 후 1년 뒤인 1278년, 지독하게 버티던 남송이 드디어 멸망하고, 중원의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원나라가 군림하게 되었다. 몽케 칸의 동생이었던 쿠빌라이 칸은 이제 원세조(元世祖)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애산 전투에서 참패해 남송이 멸망했던 시기, 원나라에 공물을 보내는 척 하다가 결국 무시하며, 강경하게 대처했던 쩐 성종 역시 부황 태종처럼 아들인 쩐 캄(陳 昑)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뒤, 태상황제가 되었다. 즉위한 쩐 캄은 훗날 쩐 인종(陳 仁宗)으로 불리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남송만큼이나 지독하게 저항하던 고려(高麗)를 굴복시킨 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와 대월을 정복하기 위해 선박과 수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대월의 군주에게 입조(入朝)를 명령했지만 이래저래 핑계만 대며 나타나지 않자, 다시 한 번 대월에 사신을 보내
"친히 입조할 생각이 없으면 대신 학식이 있고, 솜씨가 좋으며 재주가 있는 이를 보내라"
며 압박했고, 태상황제였던 성종은 결국 대신들 중 쩐 지아이(陳 遺愛), 레 묵(黎 目), 레 투안(黎 荀) 등을 사신으로 보냈다. 쿠빌라이는 대월에서 대신들을 보내오자 한술 더 떠서 대월에 다루가치(達魯花赤)들을 더 파견해 감독하려고 했으나, 황제인 쩐 인종은 단번에 이를 거절해 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쿠빌라이는 입조 사신으로 왔던 쩐 지아이를 안남 국왕(安南國王)으로 삼고 레 묵은 한림학사(翰林學士), 레 투안은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한 뒤 1,000명의 병사를 쥐어주며 쩐 인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하지만 사태를 눈치 챈 쩐 왕조에서는 당장에 병력을 파견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사로잡아 버렸다. 이 배은망덕한 세 명의 사신들은 도망갈 기회를 엿봤지만 결국 죄를 받아 쩐 지아이는 군사를 붙여 티엔즈엉푸(天長府)로, 레 묵과 레 투안은 통빈(宋兵)으로 유배를 보냈다. 한편, 대월의 재상(宰相)이었던 쩐 꽝하이(陳光啓)가 다루가치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해당 다루가치는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해 대단히 분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3.2. 원나라의 참파(점성국) 정벌과 개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1284년 7월 21일, 자신의 9번째 아들인 토곤(脫歡)을 진남왕(鎭南王)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양양(襄陽) 전투 당시 우량카다이의 아들 아유 밑에서 활약했던 장수 셔더르(唆都)를 부장으로 삼아 2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통솔하게 했다. 그리고 이들을 광동(廣東)에서 출발시켜, 곧바로 점성(占城, 참파)를 침공하도록 했다. 대월은 남쪽의 참파를 돕기 위해 군대 중 일부와 함선을 보냈다.

셔더르는 참파의 수도인 도반(阇槃)의 인근 해안에 상륙했고, 도반을 둘러싸고 있는 목조 성채들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셋으로 쪼개 북, 남, 동쪽에서 한꺼번에 들이쳤다. 결국 성채는 점거되었고, 국왕이었던 인드라바르만 5세가 셔더르에게 항복을 위한 협상을 하자고 제안하자 협상에 응했으나 괜히 시간끌기만 당했다. 그 사이에 인드라바르만 5세와 참파의 병사들은 깊은 숲으로 들어가 저항을 이어나갔다. 이 참파 정벌은 사실 대월을 정복하기 위한 포석이었는데, 참파를 점거함으로서 원나라군은 대월의 북쪽과 남쪽을 포위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했다.

참파가 대략 정리되자, 진남왕 토곤은 위구르(회홀)족 출신의 아리크 콰야를 부사령관 겸 안남의 부왕(副王)으로 임명한 뒤 본격적으로 원정군을 대월로 이동시켰다. 원나라군 진영에는 서하(탕구트) 출신의 이항(李恒), 우즈벡 출신의 콘칵, 볼콰다, 사타르타이, 망쿠다이, 나콰이 등의 장수들과 한족 출신의 이방헌, 손우, 손덕림, 유세영, 유규, 의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이번 정벌을 위해 30,000석의 군량미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으며, 유능한 의원이었던 추경(鄒庚)이 통솔하는 의무부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워낙 큰 규모에 물자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대월 주변의 원나라 점령지들은 과도한 세금과 물자 부족, 병력 제공으로 인한 인원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각지의 지방관들이 남벌을 중지해 달라고 대도의 중앙정부에 애원하기까지 했다. 원나라의 상서(尙書)였던 유선이 대월과 잘 협상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다는 주청을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의 남벌 의지는 확고했고, 쩐 왕조의 조정을 향해
"우리 군을 지원하기 위해 특산물인 설탕과 식량을 바치라."
고까지 지시했다. 이 물자가 어디에 쓰일 건지를 뻔히 알고 있었던 쩐 조정에서는 당연히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한편 쩐 조정이라고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1282년 11월 말, 강을 수비하고 있었던 루엉 위(梁 蔚)가 급히 전한 소식에는 원나라의 우승상(右丞相)인 타차이르가 남쪽의 다른 곳을 정벌한다는 이유로 5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길을 빌리려고 하나 그것은 거짓말이고, 실제로는 대월을 침공하려는 속셈이라는 언급이 들어 있었다. 쩐 조정은 수도 탕롱의 건홍전(延紅殿)에서 원나라군의 침공에 대비한 회의를 열기로 했으나 각지의 제후왕과 귀족들이 참석을 거부했다. 이에 1285년 12월 태상황 쩐 성종이 탕롱의 건홍전에 각지를 대표하는 노인들을 모은 뒤
"우리가 응우옌(원)의 침공에 저항하겠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가 하나되어
"싸우자!"
를 외치면서 회의가 끝이 났다. 쩐 왕조 최초의 민주적인 회의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이 분위기에 이기지 못한 각 지역의 제후왕과 귀족들은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고 원나라군의 눈을 피해 몰래 승려로 변장한 뒤 탕롱으로 들어온 흥도왕(興道王) 쩐 구옥뚜안은 왕과 귀족들이 각지에서 보내온 병력들을 부지런히 훈련시켰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병사들의 몸에 '몽골인을 죽이자'는 의미의 살달(殺韃/삿탓)이라는 문신을 새기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군대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했다.
"외부의 적이 몰려오면 국내의 모든 군인과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적을 타격하며,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산 속에 숨은 뒤 절대 투항해서는 안 된다."
쩐 조정에서는 마침내 쩐 구옥뚜안을 국공(國公)에 임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칭호를 함께 하사했다.
「절제하여 천하의 여러 군을 통솔하며(節制統領天下諸軍), 군관을 택하고 장수를 통솔할 권리를 가진다(擇軍校有將才者分統部伍).」
쩐 구옥뚜안은 이로써 대월의 전군 통솔자가 되었다. 대월의 군대는 낭산(諒山) 일대로 이동했고, 쩐 구옥뚜안의 본영은 노이방(內龐)에 있었다. 쩐 구옥뚜안은 제1차 전쟁 때 효과를 봤던 작전, 즉 원나라 군대를 보면 후퇴하면서 식량을 파묻거나 불태운 뒤, 일대를 텅 비워 적을 지치게 만드는 청야작전을 또다시 채택했다.

3.3. 선동 전투

원나라군은 병력을 나누어 진격을 개시했다. 제1로군은 총사령관인 토곤이 지휘했는데 규모가 컸기에 일부를 나눠서 이동했다. 토곤 자신은 아리크 콰야와 함께 닌민(宁明)에서 록처우(祿州)로 향했고, 볼콰다가 함선을 이끌고 이동하며 온처우(溫州)에서 낭산(諒山)으로 향했으며, 사타르타이와 이방헌이 나머지 군을 이끌고 록빈(縣祿)에서 선동(山洞)으로 진격했다. 쩐 구옥뚜안은 가장 중요한 토곤의 1로군을 막기로 했다.

제2로군은 나시르 웃 딘이 이끄는 병력으로서 운남(雲南) 일대에서 차이 강(齋江)을 따라 대월의 영토로 진입했다. 이에 대월에서는 원나라군의 제2로군을 쩐 태종의 6남이자 소문왕(昭文王)이었던 쩐 냣두앗(陳 日燏)에게 맡겼다.

제3로군은 참파 정벌의 1등 공신이었던 셔더르가 이끌었으며, 참파에서 대월을 향해 북진했다.

첫 번째 전투는 깔리(可里)의 계곡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대월군의 병사들은 패배했고, 장수 도비와 도후가 사로잡혔으며 이내 원나라군은 쩐 왕조의 지원군과 마주쳤으나 되려 그들을 격퇴하고 지원군을 지휘하던 장수 쩐삼까지 사살해버렸다. 깔리 전투 이후 5일 만에 총사령관 토곤이 지휘하는 제1로군이 록처우로 밀려왔고 빈처우(永州), 티엣르옥(鐵略), 치랑(支棱)을 한번에 공격했다.

1285년 2월 2일, 원나라 군대는 쩐 왕조의 군대가 모여 있는 노이방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 격전에서 대월군 장수들 중 도안타이가 전사했으며 쩐 구옥뚜안은 미리 준비해 둔 배를 타고 반끼엡(萬劫) 일대로 퇴각했다. 이즈음 쩐 왕조의 황족이었던 쩐 끼엔(陳 鍵)과 그의 부관이었던 레 탁(黎 崱)이 원나라군에 항복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매국노의 모습을 보였다.

3.4. 반끼엡 전투

노이방에서 패퇴해 달아난 대월군 병사들은 서둘러 반끼엡으로 향했다. 그런 대월군을 뒤쫓던 원나라 제1로군의 총사령관 토곤 역시 반끼엡 부근에 1,000척에 가까운 배가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집결을 막기 위해 추격할 배를 만들게 하고 수색할 별동대를 보냈다. 2월 11일에 원나라의 장수 우마르가 수군을 이끌고, 반끼엡과 치린(至靈)을 공격했다.

우마르가 이끄는 원나라 수군은 곧바로 대월 수군의 함선과 격돌했고, 이 해전에서 대월 수군이 일단 승리했으나 원나라 수군의 날카로운 예봉을 피하고자 퇴각했다. 2월 14일 우마르의 수군이 쩐 구옥뚜안의 대월군을 포위했다. 위기의 순간이었으나 그때 태상황이었던 쩐 성종이 서둘러 구원군을 보내 우마르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시선을 끌었다. 그 사이에 쩐 구옥뚜안은 대월군을 수습해 퇴각하여, 수도 탕롱 부근의 홍 강(瀧紅) 일대에 도달했다. 원나라의 군대 또한 육로를 따라 추격해 탕롱 일대로 진군했다.

3.5. 즈엉 강 전투

원나라의 군대는 반끼엡을 지나 부닌(宇宁), 동안(東岸)으로 나아갔고 즈엉 강에서 대월군과 다시 마주쳤다. 대월군은 허겁지겁 퇴각했던지라 원나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었고, 많은 선박들이 나포되고 말았다. 승리를 거둔 후 토곤은 즈엉 강을 건너기 위한 부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3.6. 수도 탕롱 함락

2월 17일, 원나라의 군대가 홍 강 근처에 숙영지를 설치하자, 쩐 구옥뚜안도 질 수 없다는 듯이 홍 강 북쪽에 목재 요새를 건축했다. 흥미롭게도 홍 강 하류에는 이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막강한 대월의 수군들이 있었다. 사실 이때부터 쩐 구옥뚜안이 입안한 작전에 따라 쩐 황실과 백성들을 성에서 내보내 피신시킨 뒤, 성 주변의 논과 밭을 전부 불태워 아무 것도 남기질 않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나라군이 강가에 도착하자 대월군은 투석기로 돌을 쏘아대며 저항하는 한편, 시간을 끌기 위해 고위급 인사였던 쩐 칵충(陳 克終)을 사신으로 삼아 부장이었던 아리크 콰야의 진영으로 보냈다. 하지만 아리크 콰야는 단호하게 쩐 조정의 요청을 거절해버렸고, 덤으로 사신으로 보낸 쩐 칵충이 배반하여 복귀하지 않은 탓에 이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결국 대월군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인해 좀 더 일찍 원나라 군대와 홍 강의 강변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고, 수도 탕롱이 텅텅 빈 것이 확인된 순간 바로 홍 강을 따라 퇴각해 버렸다. 하지만 원나라 군대와 접전이 벌어지면서 퇴각을 했던지라 꽤 많은 수의 대월군 병사들이 퇴각하지 못한채 사로잡히게 되었다.

원나라 군대는 홍 강 변에서 승리한 후 탕롱으로 입성했지만 그들이 본 것은 그저 텅 빈 폐허 뿐이었다. 총사령관 토곤은 탕롱의 황궁에 군대를 주둔하려다가 얼마 되지 않아 탕롱에서 군을 철수시켰고, 대신 홍 강 근처의 넓은 부지를 찾아 야영지를 세운 후 휘하 장수들인 콘칵, 망쿠다이, 볼콰다로 하여금 육로로 남진하게 하고 이항과 우마르 등은 함선을 이끌며 대월의 황제를 추격하도록 했다.

3.7. 투밧 전투

한편, 제2로를 담당한 나시르 웃 딘의 군대는 차이 강을 따라 투밧까지 나아갔으나 쩐 냣두앗의 부대에 의해 행군이 멈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 즈음에 선동 전투의 패배로 대월의 군대가 반끼엡으로 퇴각했기 때문에 쩐 냣두앗 역시 철수했다. 나시르 웃 딘은 두 개의 둑을 따라 진격하면서 1개 부대를 배치해 선봉으로 내세웠다. 쩐 냣두앗은 원나라 제2로군의 계획을 알아차리고는 포기할까 하다가 운좋게도 차이 강에 있었던 배가 무사히 상륙함으로써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타고 무사히 밧학(白鶴)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제3로를 이끄는 셔더르의 원나라 군대를 가로 막으며 남쪽 전선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3.8. 다막 전투와 하이티 전투

대월의 황제와 황실 및 조정은 홍 강을 따라 티엔즈엉(天長)으로 후퇴했고, 원나라 군대는 병력을 둘로 갈라 추격했다. 추격하는 자와 달아나는 자 사이에 전투가 없을 수는 없었고, 마침내 두 나라의 군대가 다막(沱幕)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대월군의 장수 쩐 빈쩡(陳 平仲)이 황제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그의 휘하 600명의 병사들과 함께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다막 강가에서 원나라의 군대를 저지하다가 마침내 사로잡혔다. 원나라 측에서는 쩐 빈쩡의 결사대를 뚫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며 무려 6번이나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원나라군의 장군은 붙잡힌 쩐 빈쩡이 황족임을 알고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자신들이 점령한 북쪽의 왕이 되지 않겠냐고 권유했으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북쪽보다 주군이 계신 남쪽에 있기를 바라고, 우리는 사로잡히면 죽을 뿐이다! 세삼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냐?"
결국 쩐 빈쩡은 그가 원하던대로 절개를 지킨 채, 향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훗날 대월에서는 쩐 빈쩡이 의를 지켰다고 해서 '보의왕'(保義王)으로 추대했다.

두 번째 싸움은 하이티(海市)에서 벌어졌는데 대월군은 강에 말뚝을 박아 막았으나 원나라군은 이러한 점을 예상해 간단히 통과해 버렸다. 이 때문에 대월군은 다시 패배하고 후퇴했다.[13]

3.9. 실패한 대월군의 반격

하이티에서의 전투 이후 대월군은 티엔즈엉과 쯔엉이엔(長安)에 주둔했다. 하지만 원나라의 군대가 곧 도착했고 비슷한 시각에 반끼엡에 있었던 쩐 구옥뚜안이 1,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도착했다. 한편 쩐 구옥뚜안의 부장들 중 한 명인 팜 응우라오(范 五老)는 낭산을 포함한 남방의 빈빈(永平) 일대에서 끊임없이 기습을 가해 원나라 군대에 피해를 주며 그들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원나라의 장수 아리크 콰야는 이런 뒤집혀가는 정황을 상세히 기록해 정찰병 편으로 쿠빌라이 칸에게 보냈다. 병력을 규합한 이후 쩐 인종은 1285년 3월 10일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리냔(里仁) 일대에서 원나라군과 격돌했으나 원나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1285년 2월 말에서 3월 초, 원나라의 장수 셔더르의 제3로군이 보찐(布正)을 공격한 뒤 응에안으로 진격했다. 쩐 냐두얏은 최선을 다해 막아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한채 퇴각해야 했다. 셔더르는 10,000명의 군대를 보내 타인호아(淸化)를 공격했다. 3월 9일, 예전에 원나라에 항복했던 쩐 끼엔이 원나라군을 이끌고 베보(衛布)를 급습하면서 대월군의 장수인 응우옌 탓텅(阮 悉統)과 딘싸(丁車)를 사살했다. 대월의 총리였던 쩐 꽝하이는 이에 분노했고 매국노인 쩐 끼엔을 죽이기 위해 병력을 몰아 원나라군을 공격했으나 되려 반격을 당해 추가로 2명의 장수를 더 잃는 피해를 보고 말았다. 항복한 쩐 끼엔이 원나라군을 이끌며 사납게 공격했기 때문에 결국 대월군은 응에안과 타인호아를 탈환하지 못한 채 물러나게 되었다. 셔더르는 타인호아로 진격했고, 그의 아들인 바크지아노와 한족 출신의 장수들을 모두 총사령관 토곤의 제1로군에 합류시키고, 배치시켰다. 이 시기 쩐 태종의 아들들 중 한 명이자 쩐 인종의 숙부이기도 했던 소국왕(昭國王) 쩐 익탁(陳 益稷)이 온 일가 친척들을 모은 뒤 원나라군에 투항했다. 이를 전해 들은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그를 안남 국왕(安南國王)으로 임명했다.

3.10. 하이동 추격전

응에안과 타인호아에서 패배함으로써 대월군의 전선은 무너졌고, 대월의 위와 아래에서 원나라군의 공격이 지속되자, 쩐 인종은 황망히 달아났다. 결국 오래 지속되는데다가 패배로 점철되는 전쟁에 너무 지친 나머지, 태상황이었던 쩐 성종은 아들인 인종과 상의한 뒤 원나라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춰보고자 자신의 남매 중 막내였던 안자공주(安姿公主)를 원나라의 총사령관인 토곤에게 바쳤다. 토곤은 안자공주를 받아들이며 쩐 인종과 태상황 쩐 성종도 오라고 불렀다. 하지만 쩐 구옥뚜안이 항복하기 전에 자신의 목부터 베라며 결사 반대했고 이른바 《격장사》(檄將士)라고 불리는 글을 쓰며 병사들의 전투 의지를 고취시켰다.
今余明告汝等. 當以措火積薪為危, 當以懲羹吹虀為戒. 訓練士卒習爾弓矢, 使人人逄蒙家家后羿. 購必烈之頭於闕下, 朽雲南之肉於杲街, 不唯余之采邑永為青氈, 而汝等之俸祿亦終身之受賜. 不唯余之家小安床褥, 而汝等之妻拏亦百年之佳老.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로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연습시켜서 모두가 봉몽(逢蒙)[14]이나 후예 같은 명사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렬(必烈)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운남왕(雲南王)[15]의 살점을 고가(藁街)에서 썩게 해야 한다.[16] (그렇게 된다면) 나의 채읍(식읍)이 길이 전해질 뿐 아니라 그대들의 봉록 또한 종신토록 주어질 것이다. 나의 권속(眷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의 처자식 또한 평생을 함께 할 것이다.
최귀묵, 《베트남문학의 이해》, 2010 에서 재인용.
결국 충신 쩐 구옥뚜안의 설득에 마음을 다시 굳게 먹은 황제와 태상황은 오히려 병력을 이끌고 더 남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결국 화가 난 토곤은 다시 군대를 내어 추격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쩐 구옥뚜안은 반끼엡을 떠나 인종을 구하고자 했다. 쩐 구옥뚜안은 우선 거대한 배를 구해 응옥산(玉山) 일대로 휘몰아 원나라군의 이목을 끌면서, 몰래 작은 배를 타고 나아가 두 황제를 구한 뒤 자오하이(交海)를 통과해 바다로 나아갔다가 북상해 치응우옌(雉完)으로 되돌아갔다. 자기 눈앞에서 쩐 왕조의 군주들을 놓친 토곤은 화가 났으나 셔더르가 보낸 장수들과 만난 뒤 셔더르의 제3로군이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급하게 추격군을 꾸리지 않는 대신, 천천히 티엔즈엉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쩐 왕조의 황제들이 하이동으로 달아난 것이 확인되자 토곤은 이항, 우마르, 자오키 등을 보내 추격하도록 했다.

1285년 4월 7일, 셔더르의 군대가 티엔즈엉으로 진격하는 것을 발견한 두 황제는 배를 버린 뒤 남쩌우 강(南兆江)에서 배를 다시 타고, 다이방(大旁)으로 돌아가면서 적의 추격을 피했다. 원나라 군대는 아직 수군 조달에 미숙했는지 자오키와 탕우타이의 수군은 4월 15일이 되어서야 땀지(三雉)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항도 수군을 몰고 두 황제를 수색했으나 마주치지도 못했다. 이후 원나라군은 대월군이 남겨둔 배 몇 척을 찾아냈고, 그제서야 쩐 인종과 쩐 성종이 이미 뭍에 배를 정박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나라군은 뒤늦게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3일 밤낮을 추격했으나 이미 두 황제는 황자들이었던 쩐 롱(陳 弄), 장수 팜 끄디아(范 巨地), 레 지엔(黎 演), 찐 롱(鄭 龍) 등의 귀족과 장수들이 흩어져 있었던 대월군을 휘몰아 오고 있었던 타인호아 일대로 사라진 뒤였다. 이 소식을 들은 토곤과 우마르는 1,300명의 수군을 데리고 타인호아로 진격해 황제를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쩐 구옥뚜안은 일단 최고 통치자들이 위기에서 벗어나자 타인호아에서 철수한 뒤 대월군의 병력을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북부에서 온 토곤의 원나라군은 맞지 않은 풍토와 더운 날씨, 폭우와 풍토병으로 인해 고생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셔더르가 우마르와 함께 쩐 황제들을 추격했지만 결국은 찾는데 실패한데다가 풍토로 인해 사기가 너무 떨어져 추격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직접 부딪히면서 원나라군이 풍토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쩐 구옥뚜안은 4월에 북쪽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병력을 모아 콰이쩌우(快州)를 지나는 홍 강 구간의 원나라군 진지를 공격했다. 이 지역을 점령하면 대월군은 그 곳을 기점으로 수도 탕롱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3.11. 함뜨 전투

타인호아에는 셔더르의 원나라 군대가 있었으나 쩐 황제들을 잡지도 못했고, 병사들이 너무 고생하는 탓에 우마르와 함께 군을 이끌고 북부로 이동했다. 4월부터 북부에서는 연이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쩐 구옥뚜안은 이미 주둔해 있었던 토곤의 제1로군과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셔더르의 제3로군이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데 집중했다.

쩐 인종은 이번에는 소문왕 쩐 냣두앗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쩐 구옥뚜안과 소성왕(昭城王)[17]을 부사령관으로 삼은 뒤 북쪽으로 진격, 함뜨(咸子)에 주둔해 있었던 원나라군을 공격했다. 쩐 냣두앗의 부대는 우선 올라오고 있었던 셔더르의 군대를 향해 돌진해 서로 맞붙게 되었다. 양국의 군대는 제법 비등하게 싸웠는데, 쩐 냣두앗은 자신의 부대 내에 옛 남송의 장수들이 제법된다는 것을 십분 활용해 남송의 깃발을 함께 펄럭이며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의외로 효과는 대단했는데 양양 전투에서 남송군의 저항에 시달렸던 셔더르는 그때의 트라우마가 되살아 났는지 질색을 했고, 남송 출신의 장수들은 옛 고국의 생각이 났는지 열과 성을 다해 원나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술 더떠 한족과 몽골족으로 혼합된 원나라 군대 사이의 유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는 오직 탓[18]놈들만 죽인다!"
고 외치면서 한족 출신의 장수들에게는 맞아도 전혀 무해한 종이로 만든 화살을 날렸다. 위의 남송 깃발과 종이 화살 작전은 의외로 잘 먹혀서 이미 전투에 지쳐 있었던 한족 출신의 장수 및 병사들은 더더욱 전투에 전력을 다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셔더르는 대패해 서쪽으로 달아났고, 살아남은 일부 셔더르 휘하의 병사들은 어찌어찌 티엔막 강 일대를 탈출한 뒤, 한참 후에야 겨우 토곤에게 도달해 셔더르가 크게 패배한 뒤 서쪽으로 달아났다는 참담한 소식을 전했다.

1285년 6월 24일, 쩐 구옥뚜안은 직접 지휘를 맡아 셔더르와 우마르가 이끄는 원나라군을 공격했다. 셔더르와 우마르는 서둘러 해안가를 끼고 달아났으나 결국 포위되었고 셔더르는 결국 대월의 장수 부하이(武海)에 의해 참수되었다. 기겁한 우마르는 부지런히 말을 달려 타인호아로 들어갔다. 한편, 쩐 인종은 셔더르의 잘린 머리를 받게 된 후,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이군!"
이라고 감탄하며 자신이 입고 있었던 외투를 벗어 셔더르의 머리를 감싼 뒤 정중히 매장해 주었다.

3.12. 벤쯔엉드엉 전투

쩐 냣두앗과 쩐 구옥뚜안은 타인호아에서의 승전을 보고했다. 쩐 구옥뚜안은 황제인 쩐 인종을 알현해 전군을 이끌고 수도 탕롱을 탈환할 것을 논의했다.

이번에는 응안(乂安) 출신의 쩐 꾸앙하이(陳 光啓)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팜 응우라오(范 五老)와 쩐 구옥뚜안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셔더르 격파에 큰 공을 세웠던 쩐 냣두앗에게는 별도로 죽은 셔더르의 병사들이 그들의 총사령관인 토곤과 합류하지 못하게 막는 임무가 맡겨졌다.

한편 탕롱 일대에 주둔해 있었던 토곤의 군대 역시 서서히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끈질기게도 요충지인 쯔엉드엉(章陽) 만에 함선을 정박시킨 채 버티고 있었다. 쩐 꾸앙하이는 대월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원나라군이 여기저기 지어놓은 소규모 기지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한족 출신의 병사들이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다. 셔더르 휘하 병사들의 합류를 막고 있었던 쩐 냣두앗은 병력의 일부를 빼어 쩐 꾸앙하이에게 지원군으로 보냈다. 원나라군을 피해 흩어져 있었던 대월군은 쩐 꾸앙하이의 진격을 보고는 속속 합류함으로서 군대의 규모가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고, 나루터에 거의 버려진 채 정박되어 있었던 많은 원나라 수군의 함선을 탈취했다.

대월군은 마침내 홍 강을 거슬러 올라가 원나라군을 공격했는데, 쩐 꾸앙하이는 팜 응우라오의 군대와 함께 쯔엉드엉을 맹공했다. 원나라군은 늘 패배해서 도망만 다니던 대월군이 맹렬하게 돌격해오자 놀라서 달아나기 바빴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함들 대부분이 빼앗기거나 불타게 되었다.

3.13. 수도 탕롱 수복전

홍 강 일대에서 성공적인 반격이 이루어지자 이제는 수도 탕롱을 회복하고자 했다. 쩐 꾸앙하이가 정예병을, 응우옌 카라(阮 可拉), 응우옌 쩐퉁(阮 陳松) 등의 장수들이 민병대를 지휘하며 탕롱으로 진격했다. 장수 마 빈(馬 榮)이 이끄는 군대가 탕롱 밖의 원나라군을 격파하자 이내 모든 대월군이 탕롱을 포위한 뒤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월군의 매서운 공격을 피해 원나라군은 탕롱을 빠져나와 홍 강 북쪽 기슭에 주둔했으나 대월군은 곧바로 추격해 해당 주둔지까지 공격했다.

3.14. 티엔막 강 전투

한편, 원나라의 총사령관 토곤은 아직도 셔더르가 서쪽으로 달아났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대월군의 공격에서 겨우 도망쳐 온 셔더르의 병사들 중 일부가 도착해 셔더르가 서쪽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뒤늦게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토곤은 결국 통솔하는 병력 전체를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285년 6월 24일, 쩐 인종이 직접 장수들을 이끌고 토곤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대월군은 적장 장헌(張憲)을 사로잡은 뒤 길잡이로 삼아 서쪽의 원나라군을 공격했다. 원나라군은 패배해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우마르와 유규는 작은 배에 몸을 실은 채 바다로 달아났다. 적을 흩어버린 쩐 구옥뚜안은 다시 20,000명에 가까운 군대를 모은 뒤, 선종 불교의 대승이었던 뚜에중뜨엉시(慧中上士)와 함께 대월군을 이끌고 홍 강 북쪽의 원나라군을 공격했다. 이에 원나라군 장수 유세영이 병사를 이끌고 상대했으나 대패하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원나라군은 뉴응우옛 강(如月河)까지 퇴각했으나 대월군이 나타나 막아섰다. 배를 구하지 못한 원나라군은 결국 강을 건너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달려서 탈출해야 했는데 대월군의 장수 쩐 꾸옥또안(陳 國瓚)이 이 탈출을 저지하는 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북쪽의 원나라군은 삿 강(冊江)으로 이동해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쩐 구옥뚜안이 격파했다. 이항은 배후를 공격해 오는 대월군을 향해 화살을 퍼부어 쫓아내는데 성공했으나 또 다른 대월의 부대가 대형을 이루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원나라 군대는 우왕좌왕하다가 서로 부딪혔고 그로 인해 부교가 끊어지면서 무수한 병사들이 강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삿 강을 무사히 건넌 원나라군은 있는 힘껏 달려서 투민(思明)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항은 대월군의 추격을 맡기 위해 후위에 배치되었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빈빈 일대에 도착한 원나라군은 쩐 황실의 일원인 천서공주(天瑞公主)와 결혼한 사령관 쩐 꾸옥니엔(陳 國巘)이 이끄는 대월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나라군을 지휘하던 이항은 쩐 꾸옥니엔의 군대를 상대로 힘껏 싸웠고, 대월군이 쏘는 무수한 독화살을 맞으면서 겨우 토곤이 있었던 투민으로 퇴각했으나 결국 독을 이기질 못하여 향년 50세에 전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나시르 웃 딘이 이끄는 운남의 제2로군은 원래 위치해 있었던 운남을 향해 이동했고, 대월군의 장수 하 닷과 하 쯔엉이 별동대를 이끌고 기습을 감행했으나 강한 저항으로 인해 되려 하 닷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원나라의 원정군 병력이 대월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서 쩐 왕조 대월과 원나라 사이의 격렬했던 제2차 전쟁 역시 대월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4. 제3차 원정

원나라의 3차 대월 원정
시기 1287년~1288년
장소 베트남 북부
원인 쿠빌라이 칸의 남방 정벌 야욕
교전국 원나라 대월 (쩐 왕조)
지휘관 총사령관: 진남왕 토곤
이해†[19]
아이우루이치
반섭
아리크 콰야
나시르 웃 딘
예헤이메이실
콘칵
볼콰다
사타르타이
망쿠다이
자오키
우마르†
나콰이
이궤순
이방헌
손덕
손덕림
유세영
유규
의윤
아바키
알리
아타이
아이로
장옥†
시크투르
장문호
비공신
도대명
정붕비[20]
사우규
베도긱다이
쩐 정닷
석례기
서경
다라키
이천우
호겔줜
레 탁
레 안
안남국왕 쩐 익 탁
쩐 득[21]
총사령관: 쩐 꾸옥 뚜안
쩐 인종
태상황 쩐 성종
쩐 꽝 하이
레 푸 쩐
소문왕 쩐 냣 두앗
쩐 구옥 니엔
쩐 지아
인혜왕 쩐 하인 쯔
팜 응우 라오
응우옌 호아이
쩐 롱
마 빈
응우옌 화이
응우옌 카랍
응우옌 쩐통
부하이
팜 끄 디아
쩐 까오
응우옌 테 록
레 지엔
찐 롱
레 따익†
하 안†
쩐 냑†
병력 약 300,000명 - 500,000명[22] 250,000명(호왈)[23]
피해 약 200,000명 - 300,000명 사망
(전투보다 풍토병과 기아로 사망)
약 60,000명의 정예군 사망
결과 대월의 승리
영향 쿠빌라이의 의지 여부와 관련없이 원나라의 남방 정벌 실패

4.1. 다시 시작되는 전운

1285년 대월 정복에 실패한 후에도, 원나라의 황제인 쿠빌라이는 여전히 대월 정벌 계획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의 의지가 반영되었는지 거의 곧바로 재정복에 대한 계획이 실행되었다. 1285년 8월 21일, 추밀원에서 대월에 대한 재정복을 제안했고 1286년 2월 중순, 쿠빌라이는 제2차 침공 때 참전했던 명장 아리크 콰야에게 대월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이후 3월 초가 되자 참전 사령관들의 최종 명단이 승인되었고 3월 중순, 징병과 동시에 300여 척의 군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286년 6월, 남부에 널리 퍼져 있는 한족들이 봉기한 탓에 대월 정복은 미뤄졌다가 결국 1286년 말에야 재개되었다.

원나라 군대의 편성을 보면, 총사령관은 제2차 침공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토곤이 그대로 이어받았고, 부사령관은 이해(李海)가 맡게 되었다. 휘하 제장들을 보면 아이우루이치(奧魯赤), 우마르, 반섭(潘燮), 예헤이메이실(葉黑湄失), 이궤순(李櫃順) 등이었고 1286년 11월에 아바키(阿八尺), 알리, 아이로, 장옥(長玉), 유규, 시크투르(昔都二), 장문호(長文虎), 비공신(丕鞏辰), 도대명(陶大明), 쩐 쩡닷(陳 重達), 사우규(謝右閨), 보비성(菩比成) 등이 선정되었는데 대부분 제2차 침공 당시에 참전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원정 준비가 길어지면서 이해는 1286년 6월 18일에 사망했고, 그 자리를 이전에 총사령관이었던 토곤이 거두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우선 제2차 침공때 참전했던 병력수에는 장수들의 숫자가 나오진 않았으나, 제국 남부의 강소성(江蘇省), 강서성(江西省), 호광성(湖廣省)에서 몽골족과 한족 병사들 약 70,000명, 항복한 남송군 1,000명, 운남의 군대 6,000명, 해남(海南) 일대에서 15,000명, 그 밖에 광서족(廣西族) 군대를 포함해 92,000명의 병사를 추가 동원했다.[24]

수군의 경우, 이전의 침공때보다 병력은 더 적었으나 훨씬 정예로 모았다. 700여 척의 신형 함대와 120여 척의 해남 전함을 수군 대장 우마르에게 맡겼으며, 이번에는 확실한 보급선 구축을 목적으로 했는지 우마르와 장문호가 함께 170,000석에 달하는 식량을 실은 운송선 100척을 함께 지휘하기로 했다. 우마르와 장문호의 함대는 운송선의 호위 및 항구 점령 임무를 맡아 대월군의 해전에서의 우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진격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쿠빌라이는 제장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캬오지(交趾/교지)[25]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한편, 침공 소식을 들은 대월에서는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이번에도 황제인 쩐 인종이 직접 참전해 병사들을 독려하기로 했고 총사령관은 흥도왕(興道王) 쩐 구옥뚜안이 맡았으며 정군과 지방군, 그리고 민병대까지 싹싹 긁어모아 3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이 집결했다. 이전 두 차례에 걸친 침략으로 인해 원나라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는지, 감옥의 죄수들까지 자진해서 입대해 싸우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양차에 걸친 전쟁 모두를 승리했기 때문에 원나라군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여 있었던 쩐 구옥뚜안은 쩐 인종 앞에서 작전을 수립하며 자신있게
"올해 적들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라고 단언했다.

4.2. 양측의 대치

원나라군의 총사령관 토곤은 제2차 침공 당시 항복했던 쩐 익탁(陳 益稷)이야말로 안남(安南), 즉 대월의 통치자이며 그를 귀향시키고자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드디어 침공을 개시했다. 원나라 군대는 3갈래로 갈라져 진격했는데 제1로군은 아이로가 이끄는 병력으로서 운남에서 출발해 타오 강과 노 강을 따라 이동했고 제2로군은 토곤, 아이우루이치, 정붕비(程朋飛) 등이 흠주(钦州)와 염주(廉洲)에서 원나라의 꼭두각시이자 명분상 안남의 국왕이었던 쩐 익탁을 모시고, 대월의 북동쪽 국경으로 향했으며 제3로군은 수군으로서 우마르와 반섭(潘燮)이 500척의 배를 지휘하고, 장문호가 후위에 있었다.

한편, 대월에서도 대비하고 있었는데 쩐 구옥뚜안은 각지에서 모인 저항군을 나눠서 각 장수들에게 분할한 뒤 각지에 배치했다. 쩐 구옥뚜안의 심복 장수였던 응우옌 화이(阮蒯)는 30,0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낭 강 일대에 주둔했고, 제1차 전쟁 당시 활약했던 레 푸쩐(黎 輔陳)은 30,000명의 군사를 데리고 탄응헤(乂城)에, 쩐 하인쯔(陳 慶餘)는 반돈(雲屯)에, 그리고 쩐 구옥뚜안 자신은 꾸앙옌(廣安)에 주둔했다. 재밌는 부분은 쩐 구옥뚜안은 요충지에 군을 배치하는 행보와는 정반대로, 적 보병의 침공을 막기 위해 떠민처우(思明州)와 접해 있는 함사(陷砂)와 뜨쭉(徐竹) 기지를 폐쇄하고, 장수들은 빈탄(平炭)으로 보냈다.

4.3. 국경에서의 충돌

1287년 12월 18일, 토곤과 아이우루이치는 원정군을 몰아 떠민(思明)에 집결했다가 12월 25일 마침내 대월의 국경으로 진입했다. 4일 뒤인 12월 29일에 록처우(鹿州)에 도달한 토곤은 군을 둘로 나누었는데, 그 중 한 갈래는 정붕비와 베도긱다이(孛多急搭耳) 휘하 한족 군대 10,000명으로 빈빈(永平)에서 치랑(枝陵)으로 나아갔고, 또 하나는 록빈(祿平)에서 손동(山洞)으로 나아갔다. 이들 군대는 각각 2,500명의 병사로 무기와 식량 등을 호송했다.

한편, 운남 일대에서는 아이로, 아타이(阿太), 망쿠다이 등이 이끄는 군대가 총사령관 토곤의 군대보다 훨씬 먼저 대월 국경으로 진입해 12월 11일에는 박학(白鶴) 일대에 도착했으며 같은 시기, 우마르와 반섭이 이끄는 수군은 함처우(钦州)에서 출발해 대월의 동북쪽 해안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12월 17일 전투선과 수송선을 분리한 후, 전투선들은 반닌(萬寜) 하구로 이동시키고, 강을 따라 반끼엡(萬劫)으로 향했다.

원나라군이 대월에 진입하자마자 곧바로 쩐 왕조의 군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아이로가 이끄는 군대는 뚜옌꽝(宣光)에 주둔 중이었던 쩐 냣두앗 휘하 40,000명의 대월군을 상대로 박학에서 싸워 승리했으며,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대월군의 배 몇 척을 탈취한 뒤 그대로 공격을 감행하여, 장수인 레 따익(黎 石)과 하안(河 瑛)을 죽여버렸다. 아이로 등이 승전하는 동안 토곤의 군대는 국경의 강을 건너고 있었고, 정붕비가 이끄는 한족 군대는 낭 강과 투 강 방향으로 이동하며 대월군과 무려 17번의 교전을 치러 승리한 뒤(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었던) 함사(陷砂)와 뜨죽(徐竹) 기지를 점령하고, 연이어 푸산(浮山)의 대월군 기지를 공격했다. 대월군은 숲이 우거진 것을 이용해 숨었다가 기습하는 방법 및 밀림에 서식하는 독사를 여기저기 풀어놔 물게 하는 방법으로 원나라군에 피해를 주었으나 주춤하던 정붕비의 부대에 원나라의 증원군이 추가되자 결국은 퇴각했다.

아이로와 정붕비가 대월군과 좌충우돌하는 사이, 토곤의 군대는 다음 이동 예상 지점이었던 깔리(可里)까지 별 무리없이 이동했는데, 토곤은 대월군의 근거지인 반끼엡과 가깝고 방어를 공고히 다질 수 있는 찌린(至靈)과 파라이(普徠), 두 산을 점령해 단단한 기지를 세우고자 했다. 1288년 한족으로 구성된 군대는 마오라(毛羅) 운하에 도착해 주둔했다. 하지만 탄응애(乂城)를 공격하던 중 대월군이 반격을 가하게 되었고, 적군이 성내에 주둔하면서 저항한다는 것을 안 정붕비의 군대는 무리하게 공격하는 대신, 토곤과 합류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한편, 우마르가 이끄는 수군은 꾸앙옌(廣安)으로 진격하여, 다모(多某)에서 대월의 장군인 쩐 지아(陳 加)와 교전을 벌였다. 쩐 지아는 원나라 수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적의 함선 일부를 불태우거나 빼앗는 등의 공을 세웠으나 쩐 지아 측 병사들도 수백 명이 죽어나갔기에 결국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대월로 들어갈수록 소비되는 식량은 늘어만 갔고, 결국 보급이 반강제로 중단되는 일이 벌어지자 토곤은 휘하 장수들에게 대월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식량을 빼앗으라고 지시했다. 대월군은 이런 원나라군의 만행에 치를 떨었지만 어차피 털어 갈 것도 없었을 뿐더러 군대를 보존하기 위해 결국 음력 12월 초, 낭 강 일대의 모든 기지를 버린 채 반끼엡으로 철군했다. 쩐 지아 역시 해상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반섭이 이끄는 원나라 수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바익당 강(白藤江)을 건너 박장(北江)으로 올라갔다. 쩐 꾸옥뚜안은 이를 막기 위해 박장에 함대를 배치하긴 했지만 원나라 수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288년 1월 초, 토곤과 정붕비의 부대가 합쳐졌는데 두 강을 지나며 17번의 전투를 치르고, 푸산의 방어선을 뚫으며 도착한 정붕비와는 달리, 토곤은 큰 전투 없이 약한 저항군만을 만나며 꽤 순조롭게 내려온 상태였다. 원나라군은 곧바로 반끼엡으로 진격했으나 그 곳에 대월군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군대는 이미 수도 탕롱으로 후퇴한 직후였다. 토곤은 점거한 반끼엡을 수뇌부로 삼고, 그 곳에 20,000여 명의 병력을 주둔시킨 뒤, 계획대로 찌린과 파라이에 목책 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곧장 원나라군은 토곤이 이끄는 부대와 쩐 냣두앗을 격파한 아이로, 그리고 우마르가 이끄는 수군으로 나누어져 각각 수도 탕롱을 향해 나아갔다.

4.4. 번외전투: 까오랑 전투

토곤과 안남 국왕으로 임명되었던 쩐 익탁의 주력군이 수도 탕롱 근처에 도달했을 때, 조금 먼 후방에서는 대월 출신의 장군 레 탁(黎 唶)과 레 안(黎 安) 등이 5,000명의 병사로 쩐 익탁의 아들 쩐 득(陳 德)을 호위하고 있었다.[26] 뜻밖에도 레 탁의 군대는 탕롱 방향으로 이동하던 중에 노이방(內龐) 입새에서 매복하고 있었던 따이족(齊族) 출신의 장군인 응우옌 테록(阮 世鹿)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레 탁이 이끄는 병사들은 부상을 입었고, 응우옌 테록의 군대가 양쪽에 주둔하는 바람에 북쪽의 국경 일대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레 탁과 레 안은 얼마 안 되는 병력만으로 룩남 강(陸南江)을 끼고 달아나야만 했다.

응우예 테록은 곧바로 추격을 실시했고, 레 안은 어린 쩐 득을 안고 말을 탔으나 뜻밖에도 말의 체력이 너무 허약해 걸음이 느렸다. 결국 보다 못한 레 탁이 자신의 좋은 말을 쩐 득을 안고 있는 레 안에게 넘겨준 뒤 허약한 말을 자신이 타고 달렸다. 추격군에게 쫓겨 대다수의 병사들이 죽었고 결국 이들이 호위하던 쩐 득을 포함해 반 호닷(萬 戶達), 티엔 호티우(禪 戶小), 응우옌 린(阮 領), 레 옌(梨 燕) 등 약 60여 명의 기병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1288년 설 즈음에 야밤을 틈타 겨우 떠민(思明)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4.5. 탕롱 공방전

1월 말, 원나라군은 탕롱에 도착했다. 아루크가 이끌던 운남의 군대는 홍 강 근처에서 총사령관 토곤의 군대와 만났으며 1288년 2월 2일이 되자 원나라군이 본격적으로 탕롱을 공격했다. 이에 맞서 쩐 구옥뚜안은 상비군을 배치했고 탕롱성 안의 군대는 돌과 화살을 날리며 저항했다. 원나라군은 여러 번 파상공격을 퍼부었으나 딱히 결실을 얻진 못했다. 쩐 구옥뚜안은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을 십분 활용해 낮에는 쩐 까오(陳 暠) 등을 사신으로 삼아 토곤의 진영으로 보내 여러 번 화친을 요구했으며, 밤에는 몰래 별동대를 이끌고 진격해 원나라군의 식량과 물자를 전부 불태운 뒤 퇴각했다. 토곤은 군대를 보내 이들을 추격했으나 대월군은 은폐와 엄폐에 능해 찾아내질 못했다. 한편, 쩐 구옥뚜안이 적의 식량을 태우는 작전을 실행하는 동안 원나라군의 파상공격을 막고 있었던 종친 쩐 냑(陳 𩖃)이 적이 발사한 화살에 맞고, 죽는 일이 발생했다.

방어와 기습을 통해 원나라 군대의 발목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쩐 구옥뚜안은 서둘러 탕롱으로 철수한 뒤, 장수들로 하여금 태상황 쩐 성종과 황제 쩐 인종을 홍 강 하류로 호위하도록 하고, 자오투이 강(膠水江)을 따라 탑손(塔山) 일대의 해안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우마르가 이끄는 원나라 수군이 너무 빨리 다가오자 성종과 인종은 타인호아(淸化)로 이동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우마르는 수십 척의 배를 띄워 이들을 잡으려고 했으나 타인호아에는 명장 레 푸쩐(黎 輔陳)이 있었다. 그는 큰 규모의 선박과 수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 수군이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웠다. 결국 열받은 우마르는 롱흥(龍興)을 지나면서, 부하들을 시켜 쩐 왕조를 건립하고, 제1차 전쟁 당시 활약했던 쩐 태종의 황릉을 파괴하도록 했다. 이즈음 토곤 역시 쩐 왕조의 군주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우마르는 쩐 왕조의 군주들에게 다음과 같은 협박을 했다.
"너희가 하늘로 뛰어오르면 나도 하늘로 올라가고, 너희가 땅 속으로 뛰어 내려가면 나 역시 땅 속으로 갈 것이다. 너희가 산으로 올라 숨는다면 나도 산에 올라 너흴 찾아낼 것이며, 너희가 물로 뛰어든다면 나 역시 뛰어들 것이다."
쩐 성종과 쩐 인종은 타인호아로 함선을 보냈는데 함선의 수가 많고 움직임이 날랬기 때문에 대월군은 적을 교란할 수 있는 군대와 첩보를 할 수 있는 부대로 쉽게 나눌 수 있었다. 한편, 탕롱에서는 원나라군이 성 안으로 진입하기는 했으나 쩐 꾸옥뚜안이 이끄는 대월군의 강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 결국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인 후 철수하게 되었는데 그냥은 갈 수 없어서 황궁과 시가지에 불을 놓아 모두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4.6. 반돈 전투와 원나라 군대의 보급 상실

우마르와 반섭의 수군은 예전에 쩐 지아의 수군을 격파해 장문호와 비공신이 이끄는 보급선이 이동할 해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쩐 왕조의 군주들이 타인호아로 달아나고 쩐 지아가 이끌던 대월 수군을 격파한 일로 방심하게 되었는지 스스로 배에서 내려 육지로 이동한 후, 토곤의 군대에 합류해 쩐 군주 추격전에 동참했다. 한편, 인혜왕(仁惠王)이었던 쩐 하인쯔(陳 慶餘)는 항로를 지키는 일을 맡았지만 우마르의 수군을 막지 못해 통과시켰고, 그로 인해 쩐 태종의 황릉이 파괴되는 일이 벌어지자 태상황 쩐 성종은 격노해 그를 군법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황제인 인종에게 주장했다. 쩐 하인쯔는 전쟁 중이었지만 속죄하기 위해 몇 일 동안 간청해야 했고, 전시였던 탓에 겨우 목숨만은 건져 공을 세울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1288년 초, 장문호의 보급부대가 반돈에 도착했으나 쩐 하인쯔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보급부대를 보호해야 할 우마르의 수군이 어처구니없게도 토곤의 군대에 합류해 버린 탓에 장문호는 빠른 공격을 받고 220여 명 전사, 11척의 배 상실이라는 대패를 맛보게 되었다. 장문호는 서둘러 육지에 상륙하려고 했으나 눅투이(綠水)에 도착했을 즈음 대월군의 소형 선박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더 강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장문호의 부대는 다시 패배하게 되었고, 대월 수군에게 식량 14,300석을 빼앗길까봐 두려워 전부 바다에 던져버린 뒤 서둘러 뀐처우(瓊州)로 달아났다.

한편, 장문호가 탈탈 털리는 동안 비공신의 보급부대는 막 후에처우(惠州)에 들어왔으나 그 순간 만난 폭풍에 결국 표류해 뀐처우로 떠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서경(徐慶)이 이끄는 보급부대는 참파(점성, 占城)에서 이동했으나 초행이라 그런지 길을 잃는 바람에 한참 해매다가, 결국은 광동(廣東)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로써 장문호의 보급선은 사실상 전멸하고, 비공신의 보급선은 폭풍에 의해 좌초되었으며, 서경의 보급군은 길을 해매다가 복귀해 버림으로써 대월 전선의 원나라군 수송로가 전부 증발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 반돈 전투로 인해 원나라군 장병들이 안전하게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져 버림으로서 향후 있을 전투들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4.7. 원나라군의 반끼엡 철수

토곤이 탕롱을 포위하는 동안, 원나라의 장수들은 지시에 따라 점거된 반끼엡의 방비와 시설 등을 강화했으나 여러 군데에 지어놓은 기지들이 매번 대월군의 기습에 무너지거나 고립되는 일이 빈번했다. 초조해진 토곤은 1288년 2월 10일에 장문호가 이끄는 보급선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자신에게 합류한 우마르에게 장문호의 함선이 어디쯤 도착했는지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우마르의 별동대는 반욱 강(炆墺江)에서 습격을 당했다. 피해를 감수하고선 어찌어찌 탑손 일대까지 나아갔으나 이미 패배한 장문호의 함선을 당연히 볼 수 없었고, 결국 아무런 소득없이 반끼엡으로 복귀했다. 돌아가는 길에 우마르의 부대가 인근을 약탈해서 40,000석의 식량을 얻고, 또 다른 원나라의 장수 아바키 역시 탑손에서 대월군과 교전을 치른 뒤 10,000석~30,000석 정도의 식량을 약탈하는데 성공했으나 그것으로 많은 수의 원나라군 병사들을 먹이는 것은 택도 없었다.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하자 탈영병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기회를 잡은 대월군은 거센 반격을 가해 그 주변 지역의 도로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토곤의 군대와 반끼엡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고, 결국 토곤은 탕롱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뒤, 아바키를 앞장 세워 길을 연 후 반끼엡으로 퇴각했다. 원나라군이 대월의 영역에 진입한 지 약 4개월이 지나는 1288년 3월 말까지 식량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먹을 것이 부족해졌고, 날씨가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고 있었던 탓에 풍토병까지 발생했다. 그로 인해 기껏 점령한 지역을 전부 버리다보니 원나라군의 주둔지는 반끼엡과 그 주변지로 축소되었다.

이런 원나라군의 기운을 더 빼기 위해서 쩐 구옥뚜안은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이전에 사신으로 보냈던 쩐 까오를 다시 보내 '청항'(請降), 즉 항복을 청한다는 뜻을 보였다. 이미 지쳐 있었던 토곤은 그 말을 믿고는 병력을 요새 안에 주둔시키면서 망가진 시설을 수리하게 했고 쩐 구옥뚜안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27] 이렇게 원나라군이 지쳐서 방심하고 있었을 때 대월군이 다시금 야습을 감행하자 토곤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분노해, 장수 호겔줜(戶解震)에게 다시 한 번 병력을 모아 공격하도록 하고 대월군의 요새를 불태우며 보이는 족족 모두 죽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휘하의 장수들은 지금 돌격하면 전부 다 죽자는 것 밖에 안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분노로 이성의 끈을 반쯤 놓아버린 총사령관을 진정시키고, 지금 내린 명령을 취소하도록 설득했다.

한편, 반끼엡 역시 안전한 목책 뒤에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대월군의 야습에 수시로 시달려야만 했다. 게다가 탕롱을 공격하던 부대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원나라의 장수들은 모여서 작전을 논의했다. 이 당시 상황을 묘사한 《신원사》(新元史)에는
"군대가 돌아오더라도 버틸 수 없다."
"교지에는 지킬 수 있는 요새도 식량도 없었으며, 날씨가 더워 식량이 빠르게 상해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얼굴에 병색이 짙은 군대가 결국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원나라가 세 번째로 대월을 공격한 지 고작 3개월 밖에 안 된 1288년 3월 말, 토곤은 대월에서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패퇴하는 원나라군은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우마르와 반섭이 지휘했고, 나머지 한 갈래는 토곤이 직접 지휘했다.

4.8. 바익당 강 전투

원나라군을 지휘하던 정붕비와 타쿠는 총사령관 토곤을 호위하며 배를 타고 길을 뚫으려 했지만, 결국은 지속적으로 방해를 받아 반끼엡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호위함이 없는 우마르의 함대 역시 계속해서 대월 함대에 의해 요격당했고, 1288년 4월 8일이 되어서야 지아 강(價江)에 들어갈 수 있는 쭉동(竹洞)에 다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대월 함대는 원나라의 함대가 지아 강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버렸고, 우마르의 함대는 바익당 강(白藤江)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대월군이 말뚝을 잔뚝 박아둔 상태였다. 당시 대월의 육군은 장껜산(長涇山)에 주둔하고 있었고, 수군은 바익당 강과 연결된 다른 강에 매복하여 우마르의 함대가 진입해 들어오면, 곧바로 오른쪽 측면을 공격한 뒤, 연이어 다른 병력이 왼편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1288년 4월 9일 오전, 원나라의 함대는 바익당 강에 진입하여 대월 함대가 추격해오는 것을 봤지만 강 바닥에 박힌 말뚝에 걸려 멈춰서고 말았다. 곧바로 대월의 군대가 사방에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쩐 구옥뚜안은 물론이고, 황제인 쩐 인종까지 일군(軍)을 맡아 진격해 왔다. 특히 응우옌 호아이(阮 蒯)는 대월의 금군이었던 타인즉(聖翊)을 지휘하며 원나라의 함선들을 직접 공격했다. 거기다가 원나라 함대에 패배해 달아나는 척 했던 배들이 어느새 원나라 수군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대월의 군사들은 각 강의 지류에서 일렬로 정렬한 뒤 돌과 화살을 퍼부었고, 동시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선박들을 원나라 수군의 함선 사이로 내보냈다.

한편 원나라군 진영에서는 반섭, 유규, 우마르, 장옥, 석례기(昔例基) 등의 장수들이 휘하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반격을 명령했다. 반섭은 병사들을 서둘러 상륙시켜 장껜산을 점령하게 하고, 군대가 쉴 수 있는 높은 곳을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섭의 군대는 장껜산을 확보하기도 전에 대월군의 반격을 받아 다시 강으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물때가 썰물인 시점이라 이 무모한 작전으로 인해 더 많은 함선들이 파손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말뚝에 막힌 배들은 대월군의 기습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고, 말뚝의 범위 안에 없었던 배들 역시 도망가는 척하던 대월의 함선들이 길을 틀어막은 바람에 갇히고 말았다. 결국 원나라의 장수들은 대부분 퇴각하지 못하고, 사로잡히게 되었다.

오후가 되자, 원나라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장수들 중 장옥은 결국 혼잡한 상황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사망했고, 우마르, 석례기, 반섭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잡히지 않으려고 물에 뛰어 들었으며 이천우(李千右)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원나라의 수군은 거의 궤멸되어 60,000명의 병사가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수많은 배가 침몰했으며 무려 400척 이상의 전함이 대월군의 손에 넘어갔다. 우마르는 결국 부상이 심해졌는지 붙들리긴 했으나 쩐 성종의 배로 옮겨졌고, 직급이 높은 대장이라 그런지 나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4.9. 낭산 전투

1288년 4월 8일, 아바키가 기병을 이끌고, 나머지는 토곤이 이끄는 군대가 낭산 방향으로 탈출하기 위해 출발했다. 장수 시크투르가 한 갈래 군대를 맡아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뚫어놓을 계획이었으나 함네(陷泥)에서 대월군에 의해 요격되고 말았고, 결국 아무런 소득없이 토곤에게 되돌아 갔다. 4월 11일, 원나라의 군대는 노이방으로 진격했으나 그곳에도 이미 대월군의 매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원나라의 장수 다라키와 유세영이 목숨을 걸고 맞서며 길을 열었고, 토곤은 겨우 노이방을 탈출했으나 곧 30,000명의 대월군이 길목을 막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8]

원나라군은 던키(單紀)를 거쳐 록처우로 향했으나 곧바로 대월군의 습격을 받았다. 결국 원나라군은 지독스럽게 시달리다가 1288년 4월 19일이 되어서야 탈출해 투민으로 빠져나갔다. 아이로는 끌고 간 군대를 운남으로 돌려보냈고, 아이우루이치는 남은 병력을 북쪽으로 데려갔다. 이렇게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야심찬 제3차 대월 침공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전쟁 이후

대월에 대한 세 차례의 공격이 모두 실패하자 격노한 쿠빌라이는 토곤이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면서 남방의 양주(扬州)로 쫓아낸 뒤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한편 아이로는 전우인 정붕비와 함께 쿠빌라이의 분노를 피해 도망쳐 먼 시골로 갔으나 제3차 원정 당시 걸린 풍토병으로 인한 심한 기침 증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잡혀갔던 원나라군은 석방되었으나 일부 장수나 장병들은 그냥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정착해 살기도 했다. 쩐 조정 역시, 승자이기는 했으나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끊었던 원나라 조정에 대한 공물을 다시 바치며 쿠빌라이를 달랬다.

한편, 살아남은 우마르는 대월에 있었는데 명장이었던 덕인지 좋은 대접을 받았고, 원나라와의 화친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려보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쩐 구옥뚜안은 그가 용맹하면서도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원나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죽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귀국할 날짜가 되자 우마르에게 배를 돌려주었으나 '약간의 하자'를 낸 채로 돌려주었고, 결국 그 배는 밤새 침몰하여 우마르는 바닷속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당연히 쩐 구옥뚜안은 철수 중이던 토곤에게 서신을 보내
오마니(우마르)를 배에 태워 돌려보냈으나, 배가 침몰해 사망했다.
는 소식을 전했다. 토곤의 입장에서는 이미 싸움에서 진 입장인데다가 우마르의 배가 이미 바닷속에 가라앉은터라 확인할 수도 없어 화도 못내고 그냥 넘겼다.

쿠빌라이는 이때의 패배가 너무 치욕스러웠는지 여전히 대월 정복을 포기하지 못했다. 1289년 3월 10일에 성도(成都)의 군대를 통솔하는 유덕록(劉德祿)이 사천(四川) 지역에서 곧바로 대월을 공격할 수 있도록 원나라 남서부의 여러 부족들로부터 5,000명의 병력을 징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쿠빌라이는 기뻐하며 윤허하고 유덕록을 사령관에 임명한 뒤 사천의 병력 10,000명을 주었다. 제3차 원정 당시 해전에서 무참히 깨진 기억 때문이었는지 쿠빌라이는 사천에서 대월의 북서부 방향으로 진격해 기병의 우수함을 살리고, 최대한 해전을 피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던데다가 북방이 안정되지 않았고, 특히 원나라와 본격적인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카이두(海都)가 중앙아시아에서 급부상함으로서 더 이상 남쪽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 쿠빌라이는 참패의 충격이 너무나도 컸는지 1293년에 제4차 대월 원정을 계획했다. 당시 '바가투르'(拔都), 즉 영웅으로 불리던 유국걸(劉國杰)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56,570명의 군대와 350,000섬에 달하는 식량, 그리고 700,000개의 무기를 포함한 1,000여 척의 수송선을 동원하고, 대월의 군대가 다시 집결하지 못하도록 트엉뜨(上思)의 부족장이었던 호앙 탄 흐어(皇 聖許)가 반란을 일으켜 응처우(雍州)를 공격하도록 하는 밑밥작업까지 세웠다. 하지만 결국 그 계획은 쿠빌라이 본인이 붕어함으로써 이뤄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방 원정 자체가 제국의 재정을 뒤흔들 정도의 일이었던데다가 후계자인 성종 올제이투 칸 테무르는 할아버지가 3번이나 실패한 남방 정벌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6. 관련 문서


[1] 질병 때문에 원나라군이 후퇴했다는 제1차 원정마저도 대월의 게릴라전이 한 건 했다.[2] 다만 일본 침공도 1차에만 몽골군에 털렸지, 2차에서는 잘 싸우다가 태풍이 결정타를 먹인 것이었다.[3] 물론 이는 남송보다 대월이 몽골에서 먼 덕도 컸다. 남송의 중심지는 지금의 항저우, 즉 임안으로 당시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베이징)로부터 직선거리로 1,120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반해 대월의 중심지였던 탕롱(하노이)은 2,327km로 2배나 되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기후대가 같은 동•서 방향이었다면 모를까(실제로 카라코룸에서 3,000km나 떨어진 사마르칸트는 정복했는데, 위도상 베이징과 비슷했다.) 남•북으로 저 정도였으니 몽골 초원에서 놀던 몽골족의 입장에선 도저히 성공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4] 그 전까지 몽골은 상대보다 더 적은 수로 싸웠으면 싸웠지, 상대보다 많은 수로 대외 원정을 시도한 적이 거의 없었다. 또한 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두 차례나 동원한 것도 대월이 유일했다.[5] 사실 이때부터 몽골군의 편제는 주로 한족 등 점령지의 주민들로 이루어진 혼성군으로 이루어지면서 군사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애초에 몽골인들의 수가 적어서 어쩔 수 없이 점령지에서 징집을 해야했기 때문이다.[6] 우량카다이의 아들[7] 꾸이호아의 추장.[8] 이런 무능력한 모습에 대해 후대의 후 레 왕조(黎朝)의 역사가였던 응오 씨리엔(吳 士連)은 "적들이 왔는데 무서워하고, 비겁해하며, 방어책도 없었고, 다른 나라의 왕에게 부탁이나 하며, 거기에 황제로 하여금 다른 나라로 망명하도록 강요까지 했으니 그게 무슨 장군이란 말인가?"라고 시원하게 까버렸다.[9] 쿠빌라이 칸의 9남.[10] 셔더르의 아들.[11] 역사서에 따라 차이가 있다.[12] (원문 출처 및 명확한 검증 요망) 역사적으로 베트남이 빈번하게 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병력을 운용했던 병영국가도 아니었을 뿐더러, 당시 베트남의 인구와 국력·경제력을 생각해 봤을 때 250,000명이나 되는 대군이 사용할 수 있는 병장기를 단기간에 뚝딱 만들어내서 무장을 시킨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주로 습지대를 이용한 게릴라전 위주로 적을 제압했던 쩐 왕조의 병력이 전략상 250,000명까지 필요했는지도 의문이고, 설령 필요했다 한들 병장기 수량의 문제와 더불어 전군의 게릴라화라는 엄청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을 훈련시킬 시간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격장사》의 25만 대군 운운은 쩐흥다오의 격문에 고무되어 "250,000명이나 입대를 지원했다"라는 정도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며, 따라서 실제 동원 병력에 대한 보다 정밀한 교차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13] 훗날 원나라의 침공에 쐐기를 박아버린 바익당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것이 말뚝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묘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14]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명사수.[15] 당시 베트남 원정군의 총대장이 쿠빌라이 칸의 9남 토곤(脫歡)이었기 때문에 그를 말한 것인데, 정작 토곤의 작위는 진남왕(鎭男王)이었다. 운남왕에 봉해진 것은 토곤의 동복 형인 우게치(忽哥赤)였다. 여담으로 토곤의 손자인 바이바이(佰伯)나 우게치의 현손자인 바자르오르미(把匝剌瓦爾密)는 명나라에 항복한 뒤 태조 홍무제 주원장에 의해 가족들 모두 제주도로 옮겨졌다.[16] 고가는 한나라의 수도 장안의 남문에 있었던 거리인데 죄인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토곤을 썰어죽이자'는 뜻이었다.[17]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18] 韃/타타르[19] 원정 직전 사망[20] 남송 출신의 항장으로, 양라보가 원나라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자 악주에서 바얀의 군대에 투항했다. 그의 아버지인 정총이 부주에서 포로로 잡혔을 때, 정총은 정붕비가 항복했다는 이유로 정붕비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21] 괴뢰국왕 쩐 익탁의 아들.[22] 역사서에 따라 차이가 있다.[23] (원문 출처 및 명확한 검증 요망) 역사적으로 베트남이 빈번하게 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운용했던 병영국가가 아니었을 뿐더러, 당시 베트남의 인구와 국력·경제력을 생각해 봤을 때 250,000명이나 되는 대군이 사용할 수 있는 병장기를 단기간에 뚝딱 만들어내서 무장을 시킨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주로 습지대를 이용한 게릴라전 위주로 적을 제압했던 쩐 왕조의 병력이 전략상 250,000명까지 필요했는지도 의문이고, 설령 필요했다 한들 병장기 수량의 문제와 더불어 그들을 훈련시킬 시간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격장사》의 25만 대군 운운은 쩐흥다오의 격문에 고무되어 "250,000명이나 입대를 지원했다"라는 정도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며, 따라서 실제 동원 병력에 대한 보다 정밀한 교차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24] 사서에 따라 100,000명, 500,000명 등 차이가 있다.[25] 캬오지, 즉 교지는 예전 중화제국이 베트남 북부에 설치한 교주의 중심지로서, 흔히 중국에서 베트남을 부르는 말이었다.[26] 쩐 득은 고작 9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원나라 군대에 항복하는 바람에 원나라 진영으로 끌려갔던 적이 있었다.[27] 평소라면 이런 계책에 넘어가지도 않았겠지만 그만큼 토곤과 원나라군 병사들은 굶주림과 풍토병, 그리고 피로에 지쳐있었다.[28] 물론 당시 대월군의 대부분은 해안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는 퇴각하는 원나라군을 속이려고 퍼뜨린 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